탤런트 김혜자씨가 낸 책의 제목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월드비전을 통해 자원봉사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놓은 에세이집 입니다.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 무엇이든 폭력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힘 차이가 발생하는 곳, 대등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려는 모든 행위를 폭력이라고 합니다.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외적 폭력과 내적 폭력입니다. 외적 폭력은 드러나 있는 폭력, 저항할 수 있는 폭력을 가리킵니다. 내적 폭력은 합법적인 폭력, 그래서 저항하기 힘든 폭력을 가리킵니다. 둘 중 어느 폭력이 더 나쁠까요? 물론, 합법적인 폭력이 더 나쁩니다. 이 폭력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또는 드러나더라도 모든 사람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어디다가 하소연 하기도 힘듭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폭력이지만 합법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개인이 손 쓸 수 없습니다. 일단 전쟁이라는 폭력이 가해지면 모든 사람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됩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육의 폭력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적응해서 가해지는 폭력을 참고 이겨내든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던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청소년들을 우리는 함부로 나약한 이들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함부로 손가락질 했던 일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폭력이었습니다. 굉장히 합법적인 폭력이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을 국가반란죄라는 합법적인 죄목을 씌워 폭력을 가했고,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죄라는 합법적인 죄목을 씌워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합법적인 상태로 폭력을 당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합법적인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제 좀 손에 잡히십니까?

 

불법적이든, 합법적이든, 모든 종류의 폭력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폭력에 희생되신 이유는 이 땅에 편만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십자가에 처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서 정죄 받고 처형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폭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우리는 함부로 폭력을 저지르지 못할 겁니다. 폭력이라는 말과 행동이 우리 삶에 발 들여놓을 틈이 없어질 겁니다. 폭력을 저지르는 순간 우리는 심판 받는 것이 되니까요.

 

폭언, 폭행 등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폭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죽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덕분에 모든 폭력()에서 구원 받은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꽃으로도 때리지 마십시오. 제발.


Posted by 장준식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엘 고어가 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룬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an inconvenient truth>입니다. 여기에서 ‘truth’를 꾸미고 있는 형용사 ‘inconvenient’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inconvenient’불편한이라고 옮기고 있지만 그 속뜻을 알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 때도 불편한이라는 단어를 쓰고, 몸이 불편할 때도 불편한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 때는 ‘uncomfortable’을 쓰고, 몸이 불편할 때는 ‘inconvenient’를 씁니다. 그러니까 엘 고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마음의 불편이 아니라 몸의 불편이었다는 것이죠.

 

지구 온난화의 문제는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편하기 위해서 이산화탄소를 마구 대기 속으로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동차 매연이 가장 큰 주범입니다. 몸의 편리함을 위해서 고안해 낸 자동차는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속으로 뿜어냅니다. 한 마디로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재 인간이 대기 속으로 품어 내고 있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는 것인데,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려면 인간의 몸이 불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은 한 사람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단연 자동차 때문입니다. 자동차 왕국인 미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뿐 아니라, 엄청나게 먹어대는 육류의 생산과 요리 과정에서도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됩니다. 소가 뿜어내는 트림과 방귀도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증가율에 큰 기여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육류를 익혀 먹으려면 필요한 석탄 연료에서 뿜어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빨래하고 옷을 말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빨래 건조기도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 배출합니다.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죠.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를 살리려면 인간의 몸이 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미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동참하기를 꺼려 합니다. 일례로, 미국은 세계기후협약인 도쿄의정서에 아직도 가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가입을 하면 한 사람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데, 현재 미국인들의 생활 습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구를 망가뜨리는 행위는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해 소소한 일부터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육식을 좀 줄여 본다든지, 빨래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좀 수고스럽지만 빨래줄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든지, 이런 것부터 말입니다. 아무튼,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바로 때문입니다. 나의 편리함만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참으로 마음까지도 불편해지는 진실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주일 아침에 조깅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몸에서는 땀과 함께 독소가 빠져나가고 마음에 스며 있는 못된 생각조차 그 땀과 함께 제거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뜀뛰면서 하는 생각이 가장 맑은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맑아져서 그럴까요? 오늘따라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달라 보입니다. 여름 내 온 천지를 가득 메우던 일상적인 소리가 오늘은 다르게 들려옵니다. 다르게 들려온 매미 소리를 시()로 옮겨 봤습니다. 제목은 매미 소리입니다.

 

매미 소리를 시끄럽다 하지 말라 / 그대는 매미의 심정을 아는가? / 매미 소리는 매미의 정열이다 / 그대도 매미처럼 인생이 짧다고 생각해 보라 / 그대 안에 정열이 움틀 댈 것이다 / 그대의 목소리는 그 정열을 담아낼 것이다 / 그대의 목소리에는 온 우주가 담길 것이다

 

하루 종일 틈만 나면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듣고 우리는 별 신경 안 쓰든지 아니면 시끄러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이는 매미 소리가 하찮아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하찮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살기 바빠서 매미 소리를 들을 여유조차 없다거나, 나 살기 바빠서 매미 소리 듣는 것조차도 부담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에 스며 있는 못된 생각의 독소가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어서 여름의 푸르름을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없어서 새들의 재잘거림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삶이 바빠서 매미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거나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헛된 것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끝나갑니다.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초록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갑니다.” 곧 있으면 낙엽이 허공을 나뒹굴 것입니다. 하늘은 더 높고 푸르러지겠죠. 그야말로 하늘이 높아지고 말()조차 살이 붙는 풍요의 계절이 올 것입니다. 여름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가고, 가을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올라옵니다. 내려가는 여름을 배웅 나가고 올라오는 가을을 마중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것에 빼앗겨 있으면 배웅도 마중도 모두 못 나가겠지요. 오늘 저녁, 시간 내서 석양을 바라보며 뜀뛰기라도 한 번 해보시지요. 마음이 환해질지 누가 압니까? 마음이 맑아야 보는 것이 보이고 듣는 것이 들리는 법입니다. 문득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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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20여 년 전 선친께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 다녀오시면서 유럽 쪽도 몇 나라 거쳐 오셨는데, 그 때 매우 낯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페트병에 물을 넣어 파는데 1불 정도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만해도 한국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것이 매우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천지에 깔린 게 물인데 물을 왜 사먹어야 하는지,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물을 사먹는 것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물을 사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입니다. 먹을 만할 물, 식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들로 산으로 강으로 다니면서 뛰놀던 시절에 물이라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언제나 철철 넘치며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물 속에는 분명 물고기가 살았고, 가재도 살았고, 민물 새우도 살았습니다. 모래무지, 방게도 빼놓을 수 없죠. 소금쟁이도요. 그런데 지금은 시냇물이나 계곡물이나 모두 말라버려서 어릴 적 잡으면서 놀았던 생명체들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르고 사라져가는 동시에 생명도 물과 함께 마르고 사라진 것입니다.

 

이처럼 물과 생명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넘치는 곳에는 생명도 넘치지만,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습니다. 지금은 지구 전체가 부족한 물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생명이 위태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물쓰듯 돈을 쓴다’는 표현은 돈을 펑펑 낭비한다는 뜻을 가리켰지만, 이제 ‘물쓰듯 돈을 쓴다’는 말은 쫄쫄 아껴 쓴다는 뜻으로 바뀌어야 할 지경입니다. 생명과 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의 물, 생수"라고 합니다(요한복음 4). 예수님을 물에 비유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 그렇지, 생각하면 할수록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만큼 생명이란 깊은 묵상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생명이라는 것을 손에 좀 잡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체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물에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지, 예수님은 물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우리의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물이십니다. 내 안에 예수가 부족하면 내 생명은 위태로운 것이고, 내 안에 예수가 충만하면 내 생명은 온전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좀 깨달아지시는지요?


Posted by 장준식

부부 사이에 주고 받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이 암예방과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TSL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개발해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Thank you, Sorry, Love’의 약어입니다.

 

노인 남성 3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TSL’의 표현을 자주 하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혈액을 분석한 결과, 산화성 스트레스 지표는 감소하고 항산화 능력 지표는 늘었다고 합니다. 혈액내 산화성 스트레스 지표가 높게 나올수록 암, 고혈압, 당뇨 등 각종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데, 그 수치가 줄었다고 하니 발병확률이 낮아진 것입니다. 그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혈액내 항산화 능력 지표는 노화와 관련이 있는데 항산화 능력 지표가 낮으면 빨리 늙고, 그 지표가 높으면 노화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TSL’의 표현 통해서 항산화 능력 지표가 높게 나왔다는 것은 늙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Well-Being(웰빙)이 최고의 가치가 된 요즘, 웰빙을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음식도 가려 먹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 음식도 가려 먹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위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된 건강은, 참된 웰빙은 관계의 회복에서 온다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도 관계가 멀어지면 땀 흘리는 운동도 가려 먹는 음식도 웰빙에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가족끼리도 관계가 멀어지면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다는 것 다해보고 다 먹어보아도 결국 웰빙은 먼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아무리 부와 건강을 이 땅에서 누린다 하여도 결국 웰빙은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의 표현은 좋은 관계가 아니면, 회복된 관계가 아니면 쓰기 힘든 표현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고맙습니다는 은혜이고, ‘미안합니다는 회개이고, ‘사랑합니다는 용서입니다. 은혜와 회개와 용서 없이 웰빙은 없다는 뜻입니다.

 

가볍게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무겁게는 우리의 내면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 없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힘들고, ‘내 탓입니다라는 회개 없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입에서만 맴돌 뿐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 없이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입술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정말 잘 살고(Well-Being) 싶으십니까? ‘TSL’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몇 주 동안 사무실에 들어온 쥐 때문에 변치 않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어릴 적 아침마다 했던 일들 중 하나가 광 속에 들어가서 쥐덫에 걸려든 쥐를 개울가에 가져가 익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살던 동네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근 30년 동안 쥐와 대면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면서, 그것도 미국에서 쥐를 대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쥐는 상당히 신출귀몰합니다.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금새 꼬리를 감추고 사라집니다. 바깥으로 나오게 하려고 두드려 보아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귀신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으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끈끈이 쥐덫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쥐덫 위에 빵 한 조각을 놓아 두었습니다. 다음 날 생쥐 한 마리가 끈끈이 쥐덫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며 찍찍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잡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쥐를 쓰레기 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분명 어제 책상에 있던 쥐똥을 치우고 쥐도 잡았는데 쥐똥이 또 발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끈끈이 쥐덫을 하나 더 설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비워두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생쥐 한 마리가 또 잡혔습니다.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던 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론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이가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 허덕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본인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덫에 걸리기 전 그것이 덫인 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덫으로 걸어 들어 갑니다. ‘나는 덫에 걸려도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내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있어!’ 하지만 이건 큰 착각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런 마음조차도 사탄이 주는 헛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바깥에서 와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바깥에 계신 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죄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깥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에겐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은총에 손 내미십시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전에 빌려 쓰던 미국교회의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이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보니, 게다가 창문도 없었고.. 애 좀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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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는 운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의 근육이 튼튼하지 못하면 운동하기 힘든 것처럼, 기도의 근육이 튼튼하지 못하면 기도하기 힘듭니다. 육신의 근육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 조금 숨가쁘게, 내가 해 낼 수 있는 운동량보다 조금 더 해야 근육의 힘이 조금씩 늘어나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기도의 양보다 조금 더 기도해야 기도의 근육도 조금씩 튼튼해져 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근육이 튼튼해지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겠지만, 육신의 근육이 아무리 튼튼해도 일정 양 이상 운동을 하면 오히려 몸에 해롭듯이, 기도도 마찬가지로 일정 양 이상 기도하면 영혼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어긋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쉬지 말고 운동하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기도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의 맥락에서 보아야지 기도의 양적인 면에서 접근하면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필요 이상 오래하면 부작용이 생기는데, 교만이라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행위인데, 에덴동산에서 하루 종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면서 살았던 아담은 그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했던 천사장 루시퍼도 그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하나님을 대적한 타락한 천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필요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하다 보면 마음이 교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기도를 필요 이상으로 오래하면 쫓겨났던 귀신이 친구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삼일 금식 기도니, 사십일 금식 기도니 하는 기도들이 있는데 그러한 기도에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능력 주실 때 해야 하는 것이지, 호기심과 영웅 심리로 괜히 감당도 못할 것을 행했다가 영혼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기도는 호기심도 아니고 애들 장난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를 너무 많이 하게 되어서 영혼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언제 필요 이상으로 기도한 적이 있었던가요? 하루에 한 시간, 아니 삼십 분이라도 기도해 보고 그런 걱정합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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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요즘 시대를 일컬어 포트스 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절대 권력이 모두 부정된다는 겁니다. 일례로 예전에는 대통령의 권위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도 여론에 밀려 탄핵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역이라고 하는 성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승려라고 해서 그 성직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권위를 인정 받지 못합니다. 어느 분야든지 어느 자리든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권위가 허물어졌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말세다라고 혀를 쯧쯧 차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건 말세의 징조가 아니라 그만큼 세상이 더 평등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다른 무엇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하고 달라”, “나는 저런 것들(things)하고 달라”, 하는 마음은 이미 나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밟고 다니는 흙하고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은 후에 어디로 돌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는 누구든지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우리 인간은 흙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흙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는 함부로, ‘나는 달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대 권력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기꺼이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절대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그리고 죽으면서까지도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신 사랑의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우리는 절대 권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오는 권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절대 권력을 바라면서 살까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절대 권력은 없습니다. 그건 속임수이고 헛된 꿈입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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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엄마 마음
 

세상 물정 모르는 세 살배기 아들이 학교 다닌다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힘쓰는 것을 보면 엄마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학교 가기 전에 집에서 푸푸(대변)를 보고 가면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학교 가서 푸푸를 보게 되면 선생님을 번거롭게 할까 봐 걱정이고, 학교에서 혼자 푸푸 보면서 괜한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답니다. 이것이 엄마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세 살배기 아들은 몰라주겠지만 엄마는 늘 세심하게 걱정합니다.

 

이런 엄마 마음이 목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히브리서 13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자신들에게 복 주는 말씀을 하면 아멘하다가도 이런 말씀 앞에서는 입을 삐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라 복종하라라는 말이 거슬리기도 하고, ‘목사의 마음이 정말 저랄까하는 의심도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 중에도 삯꾼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는 법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이 영성이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삽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 목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에게 또는 교회의 지도자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겁니다. 신뢰가 없으니까 말씀을 들어도 본인에게 익숙한 말씀, 본인이 들어 납득할 수 있는 말씀에만 아멘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말씀이 본인의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다 싶으면 목사를 대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목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에게 또는 교회 지도자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권위 앞에 순종하고 복종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권위 앞에 순종하고 복종해 보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참 권위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고, 부모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권위 앞에서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됩니다. 일종의 열등감이고 피해의식입니다. 권위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면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순간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이건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결국 신앙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결국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밖에는 없다는 것이죠. 교만이라는 것, 별거 아닙니다. 자기 집중, 자기 방어를 통해서 상대방(타자)을 밀어내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성령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그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길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추악한 썩은 냄새만 날뿐입니다. 이 냄새로 인해 주변 사람들만 괴로울 뿐입니다.

 

엄마 마음을 상상해 보고 그 마음을 목사의 마음과 오버랩 시켜 보십시오.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이 삶의 무게로 버거워 할 때, 당신이 사는 것 때문에 바쁠 때, 목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을 위해서 경성하기를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기도합니다. 본인도 본인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일을 목사가 대신 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영성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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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세상 불의에 대한 항쟁의 시작이다.” 칼 바르트가 한 말입니다. 기도의 동작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몸 동작 중 가장 보잘것없는 축에 속합니다. 두 손을 모으는 것만큼 간단한 동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담고 있는 능력은 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늘 이렇게 발휘됩니다. 십자가 죽음도 세상 만물 중 가장 보잘것없고 추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일어난 일은 우주적 구원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매일 겪는 일이 세상의 불의입니다. 의롭지 못한 세상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습니다. 세상 불의는 골리앗처럼 너무나 힘 세보이고 커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앞에서 그저 한숨과 한탄만 흘러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위해 세상 불의와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 불의에 대한 심판이요 최후 승리입니다.

가수 송창식씨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삶의 규칙들이 이상하게 맘에 안 든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과 다르게 살 뿐이다.” 참 기인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의를 가지고 살아가는지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속편 하다고 생각해서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조건을 모두 갖추려고 밤낮으로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의 있습니다!”를 당당하게 외치면서 부당하고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불편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의한 세상을 등지고 온갖 불편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향해 등지고 살아간다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과 발맞추어 살아가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세상의 불의를 감지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양심과 행동은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의 있는 삶, 부당한 삶, 불의한 세상을 향해 항쟁하는 첫 걸음은 두 손을 모으는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 불의에 대한 항쟁입니다. 기도는 세상 불의를 바로 잡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세상 불의에 이의 있습니까? 두 손 모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세상 불의를 바로잡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겁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는 두 손 모으는 일을 끊임 없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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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자들의 어머니였던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혈통과 태생상 나는 알바니아인이다. 국적으로 나는 인도인이다. 나는 가톨릭 수녀이다. 나의 소명으로 말하면 나는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말하면 나는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졌습니다
.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기업을 함께 누릴 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국적을 따졌습니다. 로마 시민이 아니면 열등한 시민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노예 삼았습니다.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나라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돈 거래를 했습니다(22:27-29).

요즘 기독교인들은 교파 또는 교단을 따집니다
. 개신교 입장에서 자신들은 ‘좋은 놈’이고, 가톨릭은 ‘나쁜 놈’이고, 정교회는 ‘이상한 놈’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교단의 입장에 따라 위치가 달라집니다. 극보수, 보수, 정통, 개혁, 진보, 그리고 이단 등을 나뉩니다. 자기 교단만이 진리를 간직한 것처럼 우겨댑니다.
세상은 온통 줄 세우고 담을 쌓는 일에 바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이와
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2:1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구분이 없게 하셨습니다(3:28).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막힌 담을 허물고 계시는데, 우리는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혈통도, 국적도, 교파∙교단도 아닙니다. 소명과 소속이 중요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소명은 전세계에 속하고, 마음은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에게 속해서 세상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이민교회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통과 태생상 나는 한국인이다. 국적으로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개신교 신자다. 나의 소명으로 말하면 나는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말하면 나는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

누구에게 속하여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 예수님에게 속하여 세상을 품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속을 따져 가며 줄 세우고 담을 쌓은 일은 복음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소속이 어디입니까? 나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이 말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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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생로병사입니다. 삶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삶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한 묵상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모른 채 합니다. 그것들을 삶과 분리시켜 놓는데 혈안입니다. 웰빙(Well-Being)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옛날에는 늙은이와 병든이 그리고 죽은이가 한 구역 안에 또는 한 집안에 함께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요양시설과 의료시설이 없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차원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생로병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언 31:16)이는 말이 있습니다. 장수가 복이었고 백발의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발의 노인은 존경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늙음이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집니다. 늙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늙은이를 짐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늙어야 합니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병든이는 병원으로 또는 요양시설로 옮겨집니다. 물론 분주한 사회구조 속에서 병든이를 돌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병든이를 돌보는 일이 남의 일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은 치료의 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병원은 병을 우리의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병듦과 분리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병듦에 서툽니다. 병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고 병을 다루는 방법에도 서툴고, 특별히 병든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일에 서툽니다. 병든이를 위한 위로의 말이 겉돌 뿐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염도하고 매장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삶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죽음은 전문가가 대신 처리해 줍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물 몇 방울만 찔끔 흘리기만 해도 어느새 내 앞에서 죽음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져 버립니다. 죽음에 대해서 묵상해 볼 겨를도 없이 일상으로 다시 내던져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로병사에서 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나머지 세 가지, ‘로병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반쪽 짜리 삶도 못 되는 사분의 일 쪽 짜리(Quarter Life) 삶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빈곤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대인의 빈곤한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을 충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은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생로병사를 철저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그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고 당당 하십시오. 이 세상의 생로병사를 잠깐 지나 우리는 곧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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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청나라(중국)는 영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발달한 옷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대해 아편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해 보려고 했습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 사이에 아편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국 상인들을 홍콩으로 내쫓았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의 여러 가지 요구들을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일명 아편 전쟁입니다.


19
세기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아편은 마약입니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이 아편을 찾았던 이유는 육체적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약을 찾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에,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마약을 합니다. 고통에서 탈출한다는 측면에서 마약은 종교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마약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감사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내 삶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 안에는 여전히 기쁨이 없는데 자꾸 감사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를 강요합니다. 신앙이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의 형태가 이쯤 되면 신앙이 아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조작된 감사요, 거짓된 감사입니다. 뒤돌아 서면 금방 사라져버릴 감사입니다.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내 삶은 여전히 공허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지칩니다. 그러다가도 교회 와서 박수 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눈물 흘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마음이 시원해 지는 것 같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은 또 먹먹해 집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아편 맞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앙생활인지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적 환각생활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체험했을 때 나오는 것이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억지로 감사를 만들어 내는 종교적 아편에 손대지 마십시오. 정말로 내 삶을 변화시켜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신앙은 아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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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시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날이 세상의 , 종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새창조의 시간입니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참된 안식의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파루시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오늘로 앞당겨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물을 훔쳐내고,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한자로 구속(拘束) 구속(救贖) 매우 차이를 지닙니다. 구속(拘束)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을 의미하고, 구속(救贖)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옮기면 그리스도가 삶을 구속(拘束)하는 역할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면 안에서 구속(救贖) 역사, 자유의 삶이 발생합니다. 신앙은 구속(拘束) 아니라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拘束)하기 위해서 못박히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못박히셨습니다.

사실을 알고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속에서 하나의 율법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나를 구속(拘束)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속(救贖)하는 것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바로 은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으로 들어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救贖) 은혜를 입은 자는 필연적으로 파루시아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참담해도 희망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시는 것을 보고, 믿음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루시아를 사십시오. 신앙인의 삶은 파루시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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