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2. 교권 회복의 길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한창 이러한 논쟁이 있었다. “교사는 개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이 질문을 교회로 가져와 보자.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만큼 교권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목회자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썩을 때로 썩었다는 뜻이다.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개혁의 주체는 많은데 개혁의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썩었다고, 목회자가 타락했다고 외치는 아우성은 많은데, 정작 썩은 교회, 타락한 목회자는 없다. 개혁적인 교회나 보수적인 교회나, 심지어 사이비 이단 교회까지 ‘한국교회는 이대로 안 된다’는 외침을 높이고 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기이한 현상이다. 이제 남 탓 그만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다. 그러나 목회자는 다른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할 주체다. 즉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뜻이다. 신학적으로도 너무나 자명한 논리가 아니던가! 우리 믿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 아니던가!
이제부터 논하게 될 “교권 회복의 길”은 다른 사람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비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자꾸 다른 사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감한 사항이므로 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보다 어느 한 석학의 연구를 토대로 글을 개진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쓴 <종교개혁사상>의 한 부분이다.
15세기 독일의 신앙에서 중요한 한 측면은 반교황주의와 반성직자주의 현상이다. 반성직자주의를 일으킨 한 요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교구사제들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것은 보통으로 있었던 일이었다. 그들은 옛 동료들을 (반드시 더 지혜로울 필요는 없었다) 보고 돕고 모방하면서 수집했던 것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교의 교구 방문기록은 사제들이 무식하거나 일과기도서를 명백히 지속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매번 드러내고 있었다. 교구 성직자의 낮은 자질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은 것을 반영했다. 16세기 초에 밀란의 지도신부들은 비숙련 노동자들보다도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말과 가축 무역에 종사했다. 프랑스의 시골에서는 같은 기간에 하급 성직자들이, 거칠게 표현해서, 부랑자들과 동일한 사회적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과세와 민사법원 소추 그리고 별도의 징병을 면제받는다고 하여도 그들은 사실상 다른 걸식 순회사제와 구별되지 않았다.(61쪽)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권 회복의 길을 논하면서 첫 번째로 목회자의 자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의 자질을 논할 때 ‘기도’를 제 일 순위로 꼽는다. 다른 것(설교, 리더십, 배움)이 좀 모자라도 매일 새벽에 무릎 꿇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목사라면 목사직을 감당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집단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미국 교회 목사들은 하루 평균 20분 정도 기도한다고 나온 반면에 한국 교회 목사들은 하루 평균 40분 이상 기도한다고 나와 있다. 한국 목사들은 미국 목사들보다 2배 이상 기도를 많이 한다. 기도 많이 안 해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힘들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기도가 목회자의 자질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도 아니다. 종교인(기독교인이든 아니든)이라면 누구든지 다 하는 기도를 목회자 만의 고유 자질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기도는 양보다 질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믿는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자질은 무엇으로 판가름 나는가?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마다 다양한 대답이 나올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목회자의 자질은 “인문학적 상상력(‘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불러도 좋다)”으로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슨 뚱딴지 같은 대답인가’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거나, 도덕적으로 무흠해야 한다거나, 인격이 고매해야 한다거나, 등 나올 법한 대답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순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목회자의 최대 과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풀이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대한 과업이다. 그렇다면 설교와 인문학적 상상력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여러분은 성경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 너무 진부한 대답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대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다간 믿음의 선조들이 이 땅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해석’해 놓은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 경험을 직접적으로 진술한 책이 아니라, 해석해 놓은 책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두고 ‘해석’이 무엇인지 잠깐 설명해 보자. 복음서는 신문기자의 기록이 아니다(복음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다). 해석된 기록이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구원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냥 한 젊은 유대 청년의 죽음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예수의 부활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또한 만약 예수의 부활이 신문기자가 기록할 수 있는 것처럼 일어났다면 그 당시 성경 외에 다른 문헌에도 예수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 외에는 그 어디에도 예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지금 해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은 아마도 기독교 진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해석’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을 것이다.
사실 해석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어떠한 성도가 중병에 걸렸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병원에 입원해서 병치료를 받아서 그 병이 나았다. 그 사람은 그냥 병에서 나았을 뿐인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어요!”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유대 땅에서 한 젊은 유대인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구원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해석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이라고 하는 것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냥 믿으면 되지, 왜 그것을 해석이라고 부르는지, 불경스러운 마음까지 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해 보자. “지구는 둥글다”는 해석인가 사실인가? 이것은 사실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나 믿는다. 그러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해석인가 사실인가? 이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진술이 “지구는 둥글다”와 같이 사실적 진술이었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가? 왜 세상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진술을 고백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목회자의 중대한 과제가 생겨난다. 목회자의 과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이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진리인가를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이 자질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목회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성경을 ‘고정된’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서’ 설교하기 보다 ‘문자적으로’ 설교한다는 것이다. 해석되어야 할 진리가 아니라 고정된 진리의 형태로 말씀이 전해지면 설교는 선동적인 구호로만 가득 차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믿습니까? 아멘!”이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고, 우격다짐 격인 구호만 난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선동적인 설교가 더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일시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토대는 주관성에 있지 않고 보편성에 있다. 말씀이 보편성에 근거해 있지 않고, 주관적인 선동에만 머문다면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다.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발전한 한국교회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선동적으로, 주관적으로 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 것을 무슨 성령의 능력으로 성장한 것 인양 오도해 왔다. 성령에 의해 성장한 교회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것은 흡사 요즘 건설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있는 현상과 같다. 경제가 무한 성장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건설사가 아무리 생겨나도 문닫는 경우는 없었다.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쟁력 없는 건설사들은 모조리 문을 닫고 있는 형국이 됐다. 진검 승부를 해야 할 시점이 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에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풀려져서 말해지는 부분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해석된 진리인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이다. 이것은 성경을 수 백 번 읽는다고 저절로 갖게 되는 자질이 아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몸에 배지 않으면 갖추기 힘든 자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좋은 글이 한 편이 있어 아래에 옮겨 본다.
그러면, 인문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흔히 인문학의 대표 분야가 문학, 역사, 철학이라 말하는데, 문학/역사/철학 공부를 많이 하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함양될까? 나는 문학/역사/철학 공부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수많은 공부 중에 일부일 뿐이라 믿는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동을 통해 저절로 생긴다. 중고교 시절, 클래식 음악에 빠져 베토벤 교향곡을 분석하고, 관련된 뒷얘기를 추적하며, 음악을 통해 소름이 돋는 감동을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또래 친구들보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커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TV 드라마를 보면서, 인간의 본성과 선악의 문제, 사회 조직의 아이러니 등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면, 이 역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멀리 여행을 떠나,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진한 감흥을 받았어도, 이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유난히 맛 좋은 만두를 먹으면서, 그 만두 재료에 대한 분석을 넘어, 그 만두를 빚어낸 장인의 땀방울에 감동을 받고, 이 만두 하나가 사회 경제 구조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깊이 사색하기 시작했다면, 이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원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동이다. 독서를 통해 분석/비판/감동의 기회가 많아질 수 있으니, 당연히 독서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간이지만, 아무리 독서를 해도 분석/비판/감동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 속된 말로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있을 수 없다. (제이 에스의 영어, 언어학 이야기 사이트에서 퍼옴)
해석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석한다는 것은 앵무새처럼 그대로 외워대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자질을 꼭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자질 없이는 해석된 하나님 경험인 성경을 온전히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고정된’ 진리로 착각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성경에만 가두어 놓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성경과 이 세계는 계속해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첫 번째 사명이고 자질이다.
“반성직자주의”는 요즘에 “개독교” 또는 “먹사”로 대변된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다.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부르는 대중들만 탓하고 있을 수 있을까? 기독교와 목사를 그렇게 인신공격조로 욕하는 대중들을 ‘세상 것들’ 또는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몰아 부치며 신경 안 쓴다는 듯이 태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반성직자주의”가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에서 왔듯이, 현재 한국교회가 외면 당하고 있는 이유가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분명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자질 부족 때문에 먹는 욕을 복음을 전하면서 겪게 되는 핍박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한자성어도 있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기 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예수의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목회자는 남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개혁하는 개혁의 주체이자 개혁의 대상이 스스로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