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다( 12:38-39). 도대체 음란한 세대는 어떤 세대일까? 일단 음란이라는 단어는 포르노 등 섹스와 관련된 행위를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들이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았다. 그들의 속마음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겉으로 그들은 음란을 멀리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핀잔을 듣는 대상으로 이들이 자주 거론되긴 하지만, 그 당시 이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대상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예수께로부터 핀잔을 들었으며,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았을까?

 

음란한 세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세대, 누구든 음란한 세대가 될 수 있다. 이 음란한 세대는 사랑과 관련이 있는데, 사랑이 참된 가치를 상실할 때 형성된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부활을 살라>에서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음행은 섹스로 환원된 사랑, 관계가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사랑이다”(321). 결국 음란한 세대란 사랑의 행위를 소비적으로 만드는 세대를 말한다. 사랑이 소비에 머무른 사회, 이런 사회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오직 자기의 욕정이나 자신의 욕심, 또는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해서만 사랑의 행위를 한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에 근거해서 사랑의 행위를 최대한 이행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렸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행위 때문에 음란한 세대로 책망 받았다. 왜 그런가? 그들이 행했던 사랑의 행위에는 참된 사랑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 그들의 행위는 사랑 없는 사랑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사랑 없는 사랑의 행위가 가능한 일인가?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 기원이며 예수님이 그 내용이고 성령이 그 동력이다”(부활을 살라, 319). 우리는 대개 사랑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세대에 살고 있다.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 사랑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둔다.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 사랑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 사랑은 오직 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나에게 집중된 사랑의 행위는 그 어떠한 것이든 결국 나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하고 합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컬럼니스트 정석희는 KBS2에서 새로 시작한 드라마 <넝쿨 째 굴러온 당신>을 분석하면서 어느 한 장면의 이러한 대사에 주목한다. “원래 이 기집애 꿈이 능력 있는 고아랑 결혼하는 거였잖니!” 이 대사는 명절 때 시집에서 죽어라 일만해야 하는 어떤 주부들과 가족이 없어서 명절 때 여행 다녀온 그들의 친구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일부이다. 여성의 가사 노동, 시부모와의 갈등, 이러한 것은 제쳐두고 능력 있는 고아랑 결혼하고 싶은세대가 바로 음란한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여성의 가사 노동이나 시부모와의 갈등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소모적이면 이렇게까지 생각할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능력 있는 고아랑 결혼하고 싶은마음은 사랑의 숭고함을 퇴색시키는 것 같다. 적어도 이러한 사랑, 이러한 결혼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고 자기 자신의 욕망만 채우면 그뿐이라는 자기 집중 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부활을 살라, 319).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이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격적인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인격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것처럼 자기 비하의 사랑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사랑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도록 강요하고 세뇌시킨다. 삼위일체의 사랑을 닮은 인격적인 사랑 대신, 성으로 환원된 사랑, 그저 소비를 위해 상대를 비인격화하는 사랑을 부추긴다. 이처럼 사랑 없는 사랑이 전염병처럼 퍼진 세대가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음란한 세대이다. 그런 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이 들리는 것 같다. 사랑다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더 잠겨 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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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