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구원론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  (1) 2014.11.06
사랑의 공식  (1) 2014.11.02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1) 2014.06.14
확실한 약속과 불안한 믿음  (0) 2014.01.1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2014.01.11
Posted by 장준식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저는 이 문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교회라는 것을 빼면 그 무게가 2그램도 안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팔할이나 키워준 교회가 바로 벌떼교회입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제 인생은 온통 벌떼교회와 뒹굴었으니까요. 그래서 벌떼교회는 제게 참 특별합니다.

 

제 인생과 연관된 벌떼교회뿐만이 아니라, 벌떼교회는 그 역사 자체가 참 특별합니다. 벌떼교회를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 특별함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특별함은 1930년 정초, 덕적도에서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외갓집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 서인 계열의 정부 고위관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덕적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외갓집은 덕적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1930년도 정초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국의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가 1930년 정초에 덕적도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온 겁니다. 외할아버지(오지섭목사님)께서 청소년 시기에 그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셨다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려진 신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씨앗은 담쟁이넝쿨이었나 봅니다. 담쟁이넝쿨이 온 담에 퍼지는 것처럼, 외할아버지를 통해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금방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을 넘어 외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중에 벌떼교회로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1954년 여름,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원으로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벌떼교회(당시 과천하리교회)를 세웠던 학생들 중 송인호, 김광현 두 사람입니다. 송인호(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역임)는 저희 어머니(오세숙 사모)의 당숙이시고, 김광현(정신여고 역사교사 역임)은 저희 어머니의 4촌 오빠입니다. 결국 벌떼교회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집안 분들이셨던 것이죠.

 

저희 집안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이어 받아 성장한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유명한 부흥사셨고, 그 자녀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감리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로서 목원대학교를 세운 도익서(찰스 스톡스) 박사 그리고 목원대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내신 목원이호운 학장(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작사가)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저희 아버지 모두 도익서 장학금으로 신학공부를 하셔서 목회자가 된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용도 목사와 한국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재봉 목사는 저희 집안의 사돈이십니다. 박재봉 목사의 집안도 그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집안인데, 그 중에서 박재봉 목사의 동생인 박재훈 목사는 한국 찬송가 사()에 길이 남을 분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찬송가로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등이 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중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짜기 다람쥐”, 그리고 어머님 은혜등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박재봉 목사의 야사 중 유명한 것은 한국 주먹계를 주름 잡던 시라소니를 전도한 사건입니다. 시라소니 아들도 목회자가 되었는데 현재 저희 집안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교류 중에 있습니다.

 

벌떼교회는 태생부터가 참 특별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희망의 촛불을 밝히기 위한 청년들의 선교사업을 통해서 생겨난 교회로서, 그 태생이 선교적입니다. 20세기 신학의 교부로 추앙받고 있는 칼 바르트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떼교회는 그 증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태생된 벌떼교회에 그 증언의 역할을 특별하게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담쟁이넝쿨과도 같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장윤식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역사적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벌떼교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저희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 자손이 우연하게 목회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신앙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우로서 곁에서 지켜본 형님 장윤식 목사는 우리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가장 닮은 목회자입니다. 강직한 성품도 그렇고, 불 같은 메시지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라고 하지만, 형님 장윤식 목사를 들여다보면 나를 키운 건 십할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에서 교회를 빼고 나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남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이토록 한 몸, 한 뜻, 한 역사를 지니기는 정말 힘듭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특별한역사하심이 없으면 이토록 절묘한 조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지구와 달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오묘한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간의 삶 측면에서 60년은 이제 황혼으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가운데 놓여진 벌떼교회는 이제 청춘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벌떼교회는 이제 막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지닌 교회, 목회자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만들어 가는 벌떼교회에 몸담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분들입니다.

 

R. M. 크리소스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 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으로 탄생한 벌떼교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집니다. 특별한 역사와 사명을 가진 벌떼교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를 부지런히 지켜내는 꿀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떼교회 출신이며

장윤식 목사의 아우이며

컬럼버스감리교회 담임인

喜樂堂 장준식 목사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공식  (1) 2014.11.02
참여 구원론  (2) 2014.10.29
확실한 약속과 불안한 믿음  (0) 2014.01.1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2014.01.11
설교자  (1) 2014.01.05
Posted by 장준식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의 세계가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언어 자체의 유희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아니, 언어의 장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가령, ‘종말이라는 언어를 생각해 보자. 종말이 담고 있는 언어의 뜻은 세상의 마지막 날정도다. 그런데 세상의 마지막 날이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종말이라는 언어에만 빠져 있으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언어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래야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신학적으로 종말은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은 심판의 때로도 불린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줄세워 놓고 정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만물이 벌거벗겨진 채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빛을 감당할 자 누구랴! 종말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인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종말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하니, 좀 허무하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긍정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수단(증거)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단은 믿음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허공을 치는 것 같이 공허하고 불안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믿음은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기도뿐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인간의 불안한 믿음이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인간의 불안한 믿음을 붙들어 주신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은혜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여 구원론  (2) 2014.10.29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1) 2014.06.14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2014.01.11
설교자  (1) 2014.01.05
독립기념일과 세례  (0) 2013.10.22
Posted by 장준식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안셀름 그륀의 <축복>이라는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아침이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이라는 네 개의 단어로 된 문장이지만, 이 단어들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는 참으로 크고 깊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문화는 새벽기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해 뜨기 전 교회당에 모여 저마다의 소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신학적으로 살피지 않는다. 그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깊이에 대한 잣대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자주 빛이라는 그림언어를 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말씀과 빛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말씀으로, 어두운 이 땅에 임한 빛으로 소개한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것으로 세상 너머에 있는 실재를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보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연관시킨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크리스마스다. 로마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날, 1225일이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정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다는 믿음이 각인되어 있다.

 

떠오르는 태양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이유는 공적을 쌓거나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그분의 제자로서 세상의 빛으로 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으로 칠흙 같은 어둠에 떨어지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사망이라는 어둠을 이기시고, 빛으로 부활하셨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 가운데 임하는 어떠한 어둠도 그들을 덮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어둠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믿음 가운데 하루를 희망차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아침마다 이불 속에서 잠과 씨름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대의 삶에 이 비추일 것이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1) 2014.06.14
확실한 약속과 불안한 믿음  (0) 2014.01.18
설교자  (1) 2014.01.05
독립기념일과 세례  (0) 2013.10.22
하나님 아버지!  (0) 2013.07.31
Posted by 장준식

텍스트 너머에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며, 알아차린 그 세계를 어떻게 지금이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 이것은 설교자의 과제이다. 나는 텍스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세계를 확실히 본 것 처럼 자신하며,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확실한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자가 가장 무섭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텍스트 너머의 세계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는 종말의 때이다.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야만 하는 설교자의 직무는 참으로 고단하고 미련하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로 부르신 그분의 뜻 가운데 설교자에게 그 직무가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설 수 밖에 없다. 나는 무서운 설교자가 아닌, 부족해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설교자로, 강단에 겨우 선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확실한 약속과 불안한 믿음  (0) 2014.01.1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2014.01.11
독립기념일과 세례  (0) 2013.10.22
하나님 아버지!  (0) 2013.07.31
마중물 기도의자  (1) 2013.06.14
Posted by 장준식

독립기념일과 세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기념일은 1776 7 4,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에서 대륙의회가 독립선언문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독립 선언문은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한 미국 식민지의 확고한 의지를 담은 강력한 성명서입니다. 독립기념일에는 1941년 법정 공휴일로 선언된 이후 해마다 축하행사가 전국적으로 벌어집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다시 되새겨보는 이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서 피크닉, 가두 행진 및 연주회, 화려한 불꽃놀이 행사 등의 기념축제로 뜻 깊은 하루를 보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독립기념일을 갖는 의미 있는 날이 어떤 날일까요? 아마도 세례 받은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례는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이 변하고, 죄의 권세에서 죄 가운데 살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그야말로, 독립(Independence)하는 날이지요. 미국이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만세를 불렀듯이,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만세를 불렀듯이, 세례 받은 날은 사탄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그리스도인의 만세인 할렐루야 아멘을 외쳐 부르는 귀한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내가 언제 세례 받았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세례 받은 날짜를 한 번 기억해 보고, 나름대로 그날을 '독립기념일'처럼 기념하기 위해서 의미 있는 이벤트를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2014.01.11
설교자  (1) 2014.01.05
하나님 아버지!  (0) 2013.07.31
마중물 기도의자  (1) 2013.06.14
아무것도 얕보지 말라  (1) 2013.06.08
Posted by 장준식

하나님 아버지!

 

미국 달력에는 Father’s day(아버지 날)라는 날이 있습니다. 미국에 오래 사신 분들에게는 낯설지 않지만,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은 낯선 풍경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Mother’s day Father’s day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Parent’s day(어버이 날)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더 편만한 미국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죠. 한국은 아무래도 아직까지 가족의 개념이 개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을 따도 구분하지 않고, 어버이 날의 형태로 가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 전직 경찰이 지은 ‘아버지’라는 소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권위와 힘이 축소되고 자꾸 나약해지면서 소외되어 가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을 아주 실감나게 그려내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셨던 소설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를 흔히 ‘고개 숙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가장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잃고 직장인으로서의 정당한 자기 역할을 상실한 중년 이상 된 아버지들의 자화상인데,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왠지 가슴 찡한 정감과 서글픔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아버지’라는 호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먼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 ‘아빠’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상당히 깊습니다. 15세기 문헌에는 ‘아바’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흔히 사극에서 등장하는 ‘아바마마’의 ‘아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바’의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엄마’의 전 단계인 ‘어마’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아바’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어로 쓰여 왔는데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압바’ 또는 ‘아빠’로 그 어형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빠에 비해 아버지는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아바지’로 나옵니다. 평범한 호칭어인 ‘아바’에 접미사 ‘지’가 붙어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여기에 붙은 접미사 ‘지’는 고대의 관직명인 ‘막리지’, ‘세리지’ 등에 붙은 ‘지’와 비슷한데 이때의 ‘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아바지’라는 말이 ‘아버지’로 변한 것은 19세기 말입니다. 지금의 아빠와 아버지는 같은 호칭어이면서도 하나는 유아어 다른 하나는 성인어로 그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아빠라는 말은 1960년대만 해도 그렇게 자유롭게 쓰이던 호칭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구조가 핵가족화되고 생활양식이 서구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에 대한 호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지만,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마중물 기도의자

 

요즘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지만, 옛날에는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펐습니다. 요즘과 옛날 중간에는 펌프질을 해서 물을 펐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물을 한 바가지 부은 다음 손잡이를 잡고 아래위로 펌프질을 하면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던 펌프를. 그 물을 받아서 생활용수로 사용을 했지요. 펌프에서 물을 얻으려면 물 한 바가지를 꼭 부어야만 했습니다. 그 물 한 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콜링 워터(Calling Water)라고 하고, 경제학 용어로 쓸 때는 죽어 있는 투자욕구, 성취욕구를 유발해 주는 정책을 일컫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을 퍼낼 때 마중 나가서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도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자를 마중물 기도의자라고 이름 붙여 봤습니다. 기도의자를 사용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샘이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본 이름입니다. 이 기도의자는 특별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도움을 줍니다. 기도할 때 여러 가지 자세를 잡고 기도할 수 있으나, 뭐니뭐니해도 기도는 무릎 꿇고 할 때 가장 겸손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접힌 다리가 저리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무릎이 상해서 건강에 치명타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바로 기도의자입니다.

 

기도의자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무릎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릎 꿇고 기도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무리 없이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기도가 1시간 이상 길어지면 기도의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만, 어찌되었든 기도의자는 기도의 샘에서 거룩하고 참된 기도가 콸콸 쏟아져 나오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마중물 기도의자를 가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기도가 나오는 것이죠.

 

아무쪼록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마중물 기도의자가 기도의 샘이 터지는데 조그만 힘이 될 수 있다면,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톱밥을 먹어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의 샘아, 터져라!

 

Posted by 장준식

아무것도 얕보지 말라

 

곳곳마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들꽃의 정체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꽃을 피우는 절기 이외에는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를 잡초로 위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평소 우리는 그것이 잡초라고 생각하기에 뽑고 또 뽑아 그 씨를 말려버리려고 합니다. 잔디 깎는 기계로 깎아대고, 잡초를 죽이는 화학약품도 뿌려봅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봄이 오면 고개를 쑥쑥 들어대는 들꽃을 보면 차라리 신비롭습니다.

 

 

요즘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보게 되는 들꽃 때문에 오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즐겁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갖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안 하다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만 관심을 가져주니 말입니다. 올 해부터는 들꽃에 관심을 좀 가져야겠습니다. 관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내년 봄에도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들꽃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푸른 하늘만큼, 시원한 바람만큼, 따스한 햇살만큼 요즘 저에게 기쁨을 주는 들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얕보지 말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얕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솔로몬의 영화도 저 들에 핀 꽃들보다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들꽃처럼 소소한 것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숨어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일 것입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서 눈에 들어노는 들꽃을 물끄러미 바라 보십시오. 제가 들꽃으로부터 들은 목소리가 들리나 안 들리나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아무 것도 얕보지 말라."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신비로운 일이 여러분의 귓가에 펼쳐지기를 두손 모아 빕니다.

Posted by 장준식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미주연회의 파행을 돌아보며

 

전쟁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미주연회의 파행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는 푸르른 5, 그리고 천사의 도시(Los Angeles)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일이 연출되었다. 차라리 연회 전날 있었던 엘에이 다저스의 경기에서 류현진이 완봉승 하는 것을 구경했다면 비행기 값이 아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이전투구를 보려고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던가!

 

1936,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을 때,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씌어진 유명한 두 개의 소설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그것이다. 언론기관에 몸담았던 이력이 같은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생생하게 목도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특별히 헤밍웨이의 소설은 1943년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나 오웰이나 그들의 소설에서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영화로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눈이 가겠지만, 헤밍웨이는 실제로 그 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정치에 대해서 영화가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든 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울리는 종은 조종(弔鐘)’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는 남을 위한 종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종소리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나의 일부를 소멸시키니, 그것은 나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하지 말지어다.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나는 제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 인간성의 파괴를 보았다. 그리고 파시즘을 보았다. 헤밍웨이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서 본 바로 그것들이다. 솔직히 목사로서의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연회는 계급장 내려 놓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합법적인 장소 아니던가! 그러나 어떠한 게임이든지, 그것이 파워게임이라고 할지라도 법칙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깨지면 이미 인간성은 허물어진 것이다. 논리와 명분이 없는 고성방가욕설과 비난은 이미 상대방을 악으로 환원시킨 인간성의 상실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게다가 고성이 오가는 사이에 번져 나온 파시즘을 보았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찬양하는 사상이다. 욕설이 오가는 사이에 어떤 이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감리교는 연급이야! 너 이 XX 몇 학번이야!”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했을 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 저도 모르게 입이나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명분이 부족한 탄핵이나, 서로 욕설을 해대며 멱살을 잡는 것이나, ‘감리교는 연급이야!’를 외치는 말과 행동은 감리교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의 사상이 얼마나 파시즘적인가를 알려주는 지표다. 국가, 민족, 인종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개인(인간)의 자유를 철저하게 짓밟았던 파시즘의 병폐가 감리교 목회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회의는 전반적으로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여성 목회자에게, 그리고 소위 연급이 안 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발언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파시즘이 판을 치는 회의장에서 여성 목회자나 연급안 되는 젊은 목회자가 입을 열었다가는 생매장 당할 분위기였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21회 미주특별연회는 이번 10월에 열리는 입법총회에 두 개의 미주 선교연회 존립에 대한 입법안을 상정할 것을 결의하고 끝이 났다. 무엇을 위해 미주연회는 둘로 나누어져야 하는가? 차라리 이념싸움이나 교리논쟁 때문이라면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하는 첫 번째 방법을 택하는 일과 같다. 미주연회에 존재하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결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처럼 살면 지옥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연회가 끝난 다음 날 후배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부터 줄 똑 바로 서라는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다. 어느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어쩌면 내년부터 못 만나게 될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글이 남겨져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헤밍웨이와 오웰이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스페인 내전의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스페인이 겪은 상처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파의 승리로 일단락 지어졌지만, 이미 5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 자행된 독재와 대대적 숙청은 인간성 상실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 그러나 그 내전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국제사회에서의 스페인의 국력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끝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 멸망하는 지름길에 불과하다.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목회자라면, 또한 우리가 감리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 순간 잠시 멈춰 서서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미주연회는 분단의 아픔을 봉합하지 못하고 '합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적어도 법을 만드는 힘을 지니신 분들은 입법총회에서 어떤 종소리를 울리게 할 것인지 심사숙고해 주시기를 부탁 드린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우리 미주연회에 울리는 종소리가 '조종(弔鐘)'이 아니라, 그 옛날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생명의 종소리, 교회 종소리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중물 기도의자  (1) 2013.06.14
아무것도 얕보지 말라  (1) 2013.06.08
희망이 절망에게  (1) 2013.04.24
그리스도인의 삶 – 역설적인 삶  (0) 2013.04.08
예기치 못한 기쁨  (0) 2012.12.15
Posted by 장준식

희망이 절망에게

 

절망아 잘 있었니? 나 희망이야. 오늘 내가 이렇게 펜을 든 이유는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야. 옛날에 키에르케고르 아저씨가 너에게 심한 말을 했었지? 너를 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잖아. 나도 그 말을 듣고 너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었어. 병도 아주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했었어. 사실 그렇잖아? 절망이 너를 만나는 사람마다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으니까.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그 모습을 보았어. 특히,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그랬지. 그는 자신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절망에 싸여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아. 그리고 다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처형당하자 절망해서 뿔뿔이 흩어졌잖아. 그 중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가 원래 직업인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했었지. 그 때 그는 고기 잡으러 나가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밤을 지새고 말았어. 3년 예수님을 따라 떠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그물질을 해서 그랬을까? 그래서 감각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이유는 바로 너, 절망을 품었기 때문이야. 절망 속에 있었기에 아무것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내 생각에는 그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됐다면, 아마도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도 그만 두고, 세상을 떠돌다 절망 속에서 삶을 짧게 마감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절망아!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니? 너를 품고 있으면 꼭 이르게 되는 죽음,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셨기 때문이야.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불러. 그 부활이 바로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인 거야. 너 절망이를 품고 죽음에 이르는 아무리 깊은 병에 걸렸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그래서 부활은 희망 중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거야. 내 친구 절망아!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기를 바래. 너의 그 깊은 절망도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부활절에 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절망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너는 더 이상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나와 같은 희망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는 희망 밖에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희망이니까. 우리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자!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삶 역설적인 삶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처음 부분입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매우 유명한 시인이지요. 이 사람의 이 “황무지”라는 시 때문에 4월은 잔인한 달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는지를 곰곰이 들여다 본다면, 그 잔인함은 어떠한 잔인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방에서는 보통 3,4,5월을 봄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3월은 겨울과 봄이 교차되는 달이고, 5월은 봄과 여름이 교차되는 달입니다. 오직, 4월만이 순수한 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봄은 잠자고 있던 모든 생명을 깨워냅니다. 시인의 말대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뒤흔들어” 깨웁니다. 요 며칠 비가 많이 왔던 상황과 같습니다. 게다가 4월은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인 “부활절”이 들어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는 우리들에게 4월이 잔인한 달인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멜 깁슨이 만든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잔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함은 부정적인 잔인함만을 말하는 것일 뿐, 위에서 시인이 말하는 잔인함은 이러한 잔인함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잔인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잔인하게 죽기도 하셨지만, 영광 중에 부활하기도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죽음” 또는 “악”의 세력 입장에서 보면 잔인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또는 “악”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영혼을 깨워 라일락보다 더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게 하고, 잠자는 영혼을 깨워 그 뿌리를 소생시키고, 향기로운 삶과 힘찬 발걸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으로 뒤집힌 것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망권세"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예기치 못한 기쁨

 

마가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람’이 전체적인 흐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생활하는 동안 놀람의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놀람이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기치 못한 일을 겪었을 때 놀랍니다. 예기치 못한 일은 두 가지를 결과로 가져다 줍니다. 하나는 아픔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을 때마다 놀랐고, 그 놀라움은 기쁨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놀람과, 그 놀람에서 생겨나는 기쁨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자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람 중의 놀람이었고, 기쁨 중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놀람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놀라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못하는 신앙은 긴장감이 없는 신앙이요, 마음이 곤고한 자, 굳은 자는 놀람을 놀람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에게는 기쁨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기쁨 가운데 살아갑니까? 혹시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놀람이 없다는 것이고, 놀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마음이 곤고하고 굳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대가 갖고 있지 않은 기쁨을 얻으려면 즐겁지 않은 길도 기꺼이 걸어야 한다.

 

예수님은 즐겁지 않은 길, 골고다 언덕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기쁨 중의 기쁨인 부활의 기쁨을 맛보셨고, 그리고 그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즐겁지 않은 길도 기꺼이 걸으려는 그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요, 그 마음에 놀람의 경험이 있을 것이요,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보지 못했던 기쁨을 날마다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의 삶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언제나 주시는 우리 주님을 늘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이 절망에게  (1) 2013.04.24
그리스도인의 삶 – 역설적인 삶  (0) 2013.04.08
아가페 사랑 묵상  (0) 2012.12.15
그리스도인의 희망  (0) 2012.12.13
긍정의 밥  (0) 2012.12.08
Posted by 장준식

아가페 사랑 묵상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에 대한 언어가 별로 다양하지 못하지만,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에 대한 언어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C. S. 루이스(Lewis) 의 책 네 가지 사랑을 보면 그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구분하고 있는 네 가지의 사랑은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 입니다. 우리나라 말 번역본은 그것을 각각 애정, 우정, 에로스, 그리고 자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톨게(애정)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반대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나타낼 때도 씁니다. 두 번째로 필리아는 흔히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C. S루이스는 스톨게(애정)와 에로스와 관련해서 필리아(우정)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에로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스톨게(애정)이 없었다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양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아(우정) 없이도 우리는 살고 번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리아(우정)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진리를 공유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에로스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에로스에 대한 얇은 이해에 불과합니다. 에로스의 깊은 뜻은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 교리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자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과 이 아가페 사랑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것, 나와 비슷한 것, 그래도 사랑할 만 한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아가페의 사랑은 나와 전혀 다른 것,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사랑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네 가지의 사랑을 모두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부모 자식 간의 스톨게 사랑도, 친구 간의 필리아 사랑도, 어딘가에 빠져드는 에로스 사랑도, 그리고 원수까지도 받아들이게 하는 아가페 사랑도 그 순수함과 진실성을 모두 잃어버린 듯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묵상은 아가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죄로 인해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온갖 사랑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삶 – 역설적인 삶  (0) 2013.04.08
예기치 못한 기쁨  (0) 2012.12.15
그리스도인의 희망  (0) 2012.12.13
긍정의 밥  (0) 2012.12.08
사회법정과 천국법정  (0) 2012.11.30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희망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흐르고 있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물론 우리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발을 담갔던 강물과 두 번째 담갔던 강물은 같을 수 없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시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번 살았던 시간에 또 한 번의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강물처럼 시간도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반복이 아니라, 매 순간 특별하고 새롭습니다. 요한계시록 215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때를 향해 우주 만물은 매 순간의 새로움을 통해 그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통해서 그 새로운 창조를 경험합니다. 일 년 단위로 돌아오는 교회력은 시간의 반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새로움을 경험하게 합니다. 새로운 창조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교회력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에 교회력은 새로운 창조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과 같습니다.

 

교회력의 시작이 대림절(Advent)부터인 이유는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의 초림(2천년 전 유대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First Coming)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아의 재림(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Second Coming)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4주 동안의 절기(Season)로 지키는데, 그 첫 번째 주일에는 “희망”이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한 것도 아니요 두려운 것도 아니요, 희망찬 일이기 때문입니다. 금방 다시 오신다고 하면서 승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자 초대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실망하고 절망한 나머지 신앙을 저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과 절망이 깊어지면 인간은 그 일에 무감각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지 2천 년이 흐른 21세기를 사는 요즘 기독교인들은 “재림”이라는 사건에 무감각해졌습니다. 더군다나 그릇된 재림신앙이 판을 치는 바람에 이제는 “재림”이 무감각을 넘어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기독교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희망 없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바로 재림신앙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림절기를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묵상을 통해 재림신앙과 신앙의 존재 근거인 희망을 되찾아야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희망의 근거는 바로 이 한 마디의 외침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기치 못한 기쁨  (0) 2012.12.15
아가페 사랑 묵상  (0) 2012.12.15
긍정의 밥  (0) 2012.12.08
사회법정과 천국법정  (0) 2012.11.30
사색(기도)하기 좋은 계절  (0) 2012.11.1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