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욕심은 다산의 여왕입니다. 욕심은 끝장을 봅니다. 한국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가졌던 욕심은 16강이었습니다. 막상 16강에 진출하고 보니, 8강을 넘어 4강까지의 욕심이 났습니다. 온 국민이 갑자기 욕심꾸러기가 된 것이지요. 우루과이와의 16강 전에서 패했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졌을 때, 감독과 선수들, 그리고 졸린 눈 비벼가며 응원했던 모든 국민들이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욕심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눈물은 욕심의 눈물이지, 아픔의 눈물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슬픈 눈물은 아닌 것이죠.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54년도 스위스 월드컵 때였습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그 때, 한국 선수들은 고생고생해서 스위스에 도착했는데 처음 경기를 앞두고 불과 12시간 전에 도착했습니다. 심신이 총체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헝가리와의 처음 경기에서 9 0으로 대패하고, 터키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7 0으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아직도 이 경기들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후 한국은 32년 동안 월드컵과는 상관 없이 지내다가 1986년이 되어서야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다시 진출합니다. 한국의 펠레 차범근 선수와 진돗개 허정무 선수가 이 대회에 출전합니다. 그러나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습니다. 예선 탈락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한국 축구는 새로운 역사를 써가기 시작합니다. 그 대회 이후 2010년 남아공 월드컵까지 7회 연속 월드컵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웁니다.

 

2002년에는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개최까지 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4강의 신화를 일구긴 했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16강에 진출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한국 축구 역사 상 한 획을 긋는 소중한 대회였던 것이죠. 타국에서 처음 맺은 16강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 대표팀이 쓴 새로운 역사는 1954년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을 때 겪었던 굴욕을 말끔하게 씻어준 아름다운 도전이었습니다. 8강 행이 좌절되었다고 좌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건 애초부터 욕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축구가 그 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온 세계에 당당하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기대해 봅니다.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도전입니다. 믿는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벌써 포기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도전 중이십니까? 성령의 도우심이.


Posted by 장준식

비극.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극이 아니면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의 희곡 중에서도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유명하고 재미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 같은 비극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면 비극은 왜 연출될까요? 대부분의 경우가 욕심 때문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이런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르헨티나에게 4 1로 패배한 사건입니다. 축구 전문가들은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을 감독의 전술 실패로 꼽지만, 인간의 심리 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목사인 제가 보기에는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은 분명 욕심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축구 실력은 차이가 납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적인 선수가 즐비합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메시를 비롯해 이과인, 테베스, 베론 등, 이름만 들어도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 즐비합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이런 점을 겸허하게 수용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변을 일으켜 보겠다고 하는 욕심이 이러한 점을 간과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24년 전, 한국 팀의 허정무 감독과 아르헨티나 팀의 마라도나 감독의 악연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방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24년 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허정무 선수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여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로 나왔던,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던 마라도나 선수를 전담 마크했었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마라도나 감독은 한국 선수가 태권도 축구를 했다고 비아냥댔고, 허정무 감독은 그건 태권도가 아니라 축구였다고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허정무 감독에게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첫 번째 경기였던 그리스 전에서 상당히 좋은 경기를 펼쳐 그리스를 이긴 선수들도 한 번 해 볼만하다고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기가 과했고, 자신감이 과했던 것이죠. 박지성 선수도 아르헨티나에게 패배라는 충격을 안겨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죠.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이겨보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욕심이 앞서면 상황 판단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한국 팀의 욕심의 결과는 4 1, 대패였습니다. 비극입니다. 한국 팀은 아르헨티나 팀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승패와 상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겠다는 지나친 욕심은 대패의 비극만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상황 파악에 혼선을 주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극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비극만 낳는 욕심, 십자가에 못박읍시다.
Posted by 장준식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 축구사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때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입니다. 그 이후 한국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기록을 세우며 지금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선수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몇 없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가장 유명했고, 지금 현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허정무 선수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때만해도 우리 나라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며 월드컵에 출선했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의 벽은 너무도 높았었죠. 예선에서 모두 패하며 예선탈락하고 맙니다. 차범근 선수 같은 특출한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지만, 그 선수 한 명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축구는 협동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만 잘해서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골고루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 한국 축구팀의 전체적인 실력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간 덕분에 한국은 4강 신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2002 월드컵 때 한국 선주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출한 선수는 없었지만 모든 선수가 골고루 기량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적이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장면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한국 축구가 발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선수도 다수 보유하고 있고, 전체적인 기량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16강 이상)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죠. 단순한 몽상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짜릿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누구 하나의 특출한 믿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영성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사 시대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와 같은 놀라운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번성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없어도,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이 한 마음을 이루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협동정신을 키워야 합니다.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은혜 받고, 나 혼자 하늘의 복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몸이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영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이 일정 수준의 영성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름이 되어 주고 힘이 돼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입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도전  (0) 2011.11.19
욕심은 비극을 낳는다  (0) 2011.11.05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교회  (1) 2011.10.03
분별의 은혜  (0) 2011.09.05
국화처럼 피어나라  (0) 2011.09.01
Posted by 장준식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5:12).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의 초보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히브리서 공동체(교회)를 향한 질타입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5:13), 아직도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는 존재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기능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존재 자체가 아직도 어린 아이의 인격 수준에 머문 사람은 몸이 커도 여전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뒤치다꺼리 하게 만듭니다. 기능의 차원에서도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뭔가 창조적인 일, 남에게 힘이 되어 주고 아름다움을 생산해 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께 받은 약속, 기업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그 땅은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약속, 기업)을 이룬 것이죠. 신앙 생활에서 믿음의 성장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기업(구원)을 지켜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오해를 합니다. ‘한 번 믿고 나면 구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절대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지만, 배교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밖으로 애써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는 구원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가 시간이 지나 대놓고 그 은총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즉 배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6:6)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곳곳에서 믿는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도(말씀)를 배워야 하며, 구원을 기업으로 받은 자답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에 긴장하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교회가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린양처럼 천사 같은 어머니를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아들은 평소 종교에 심취해서 사건 발생일 얼마 전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언을 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도(방언)를 통해서 신접(하나님을 만남)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고 있는 딸을 달래는 도중 이러한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조사 도중 횡설수설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존속살해(자기나 배우자의 직계가족을 죽이는 일)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어머니를 죽인 아들의 진술을 보건 데, 아마도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진술로 살인에 대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이야기라고 은혜로 읽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 행위도 존속살해 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는 데에서 그쳤지만, 그 사건은 아들을 죽이려 했던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그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살인을 명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서 지어진 소설이 있는데,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김동인의 소설 <명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전 주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노망이 난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독살합니다. 이 일로 전 주사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습니다.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간 전 주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법정에 또 다시 서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 받을 거라고 확신했던 전 주사는 하나님 앞에서 의기양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죽인 것은 살인죄라며 그의 지옥행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칭 거룩한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데나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생각해 놓고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을 거라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지요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하나님의 은혜인 양 에두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당황스럽고 곤혹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분별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 분별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데나 하나님 운운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갖다 붙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은혜를 꼭 간구하십시오. 그래야 엉뚱한 신앙 생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자녀들과 함께 동반 자살하거나, 기르기 힘들다고 자녀들을 죽이는 일들이 요즘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숙하지 못하니까 성숙하지 못한 일들이 자행되는 것이겠죠.

 

이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라기보다 훨씬 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이 사회가 성숙하지 못함, 즉 미성숙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마음의 성숙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외모, 외양, 겉모습에만 관심을 두게 만듭니다. 얼짱, 몸짱이 되는 것이 미덕입니다. 얼굴이 예쁘게 생기고 몸매가 좋은 사람을 착하다고까지 표현합니다. 겉모양의 반듯함이 선함으로 연결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외모가 잘난 사람이 착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온통 스펙을 쌓는 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야 만족해 합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것도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최상의 가치입니다. , 외모, 외양, 겉모습에만 나의 모든 존재를 걸게 끔, 그것만이 나의 존재 이유가 되고, 그것만이 나를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환상과 믿음을 심어 줍니다.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투자하면서 살다 보니까 내적인 것(인격적인 성숙, 마음의 성숙)에는 관심을 둘 시간이 없고 투자할 여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 인생이 그렇습니까? 건물을 하나 세우려 해도, 땅을 잘 다져야 하고 기둥을 튼튼하게 세워야 외양을 잘 꾸밀 수 있습니다. 터만 튼튼하고 기둥만 튼튼하면 외양은 좀 낡고 볼품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양이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도 터전이 흔들리고 기둥이 부실하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국화를 내 누님 같은 꽃이라고 했습니다. 된서리 맞으면서 피는 꽃이 국화입니다. 된서리 맞았지만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는 꽃이 국화입니다. 국화는 누님처럼 성숙한, 어떠한 어려움도 잘 견디어 내고 아름답게 피는 꽃입니다. 그래서 국화는 누님을 닮은 꽃입니다.

 

요즘 시대는 누님 같은 국화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숙하지 못한 세상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길러내기 때문입니다. 너무 외모, 외양, 겉모습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람은 내면이, 마음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화처럼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습니다. 국화처럼 피어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탤런트 김혜자씨가 낸 책의 제목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월드비전을 통해 자원봉사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놓은 에세이집 입니다.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 무엇이든 폭력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힘 차이가 발생하는 곳, 대등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려는 모든 행위를 폭력이라고 합니다.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외적 폭력과 내적 폭력입니다. 외적 폭력은 드러나 있는 폭력, 저항할 수 있는 폭력을 가리킵니다. 내적 폭력은 합법적인 폭력, 그래서 저항하기 힘든 폭력을 가리킵니다. 둘 중 어느 폭력이 더 나쁠까요? 물론, 합법적인 폭력이 더 나쁩니다. 이 폭력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또는 드러나더라도 모든 사람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어디다가 하소연 하기도 힘듭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폭력이지만 합법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개인이 손 쓸 수 없습니다. 일단 전쟁이라는 폭력이 가해지면 모든 사람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됩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육의 폭력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적응해서 가해지는 폭력을 참고 이겨내든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던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청소년들을 우리는 함부로 나약한 이들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함부로 손가락질 했던 일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폭력이었습니다. 굉장히 합법적인 폭력이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을 국가반란죄라는 합법적인 죄목을 씌워 폭력을 가했고,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죄라는 합법적인 죄목을 씌워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합법적인 상태로 폭력을 당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합법적인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제 좀 손에 잡히십니까?

 

불법적이든, 합법적이든, 모든 종류의 폭력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폭력에 희생되신 이유는 이 땅에 편만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십자가에 처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서 정죄 받고 처형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폭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우리는 함부로 폭력을 저지르지 못할 겁니다. 폭력이라는 말과 행동이 우리 삶에 발 들여놓을 틈이 없어질 겁니다. 폭력을 저지르는 순간 우리는 심판 받는 것이 되니까요.

 

폭언, 폭행 등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폭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죽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덕분에 모든 폭력()에서 구원 받은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꽃으로도 때리지 마십시오. 제발.


Posted by 장준식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엘 고어가 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룬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an inconvenient truth>입니다. 여기에서 ‘truth’를 꾸미고 있는 형용사 ‘inconvenient’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inconvenient’불편한이라고 옮기고 있지만 그 속뜻을 알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 때도 불편한이라는 단어를 쓰고, 몸이 불편할 때도 불편한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 때는 ‘uncomfortable’을 쓰고, 몸이 불편할 때는 ‘inconvenient’를 씁니다. 그러니까 엘 고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마음의 불편이 아니라 몸의 불편이었다는 것이죠.

 

지구 온난화의 문제는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편하기 위해서 이산화탄소를 마구 대기 속으로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동차 매연이 가장 큰 주범입니다. 몸의 편리함을 위해서 고안해 낸 자동차는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속으로 뿜어냅니다. 한 마디로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재 인간이 대기 속으로 품어 내고 있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는 것인데,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려면 인간의 몸이 불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은 한 사람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단연 자동차 때문입니다. 자동차 왕국인 미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뿐 아니라, 엄청나게 먹어대는 육류의 생산과 요리 과정에서도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됩니다. 소가 뿜어내는 트림과 방귀도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증가율에 큰 기여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육류를 익혀 먹으려면 필요한 석탄 연료에서 뿜어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빨래하고 옷을 말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빨래 건조기도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 배출합니다.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죠.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를 살리려면 인간의 몸이 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미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동참하기를 꺼려 합니다. 일례로, 미국은 세계기후협약인 도쿄의정서에 아직도 가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가입을 하면 한 사람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데, 현재 미국인들의 생활 습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구를 망가뜨리는 행위는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해 소소한 일부터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육식을 좀 줄여 본다든지, 빨래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좀 수고스럽지만 빨래줄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든지, 이런 것부터 말입니다. 아무튼,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바로 때문입니다. 나의 편리함만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참으로 마음까지도 불편해지는 진실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주일 아침에 조깅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몸에서는 땀과 함께 독소가 빠져나가고 마음에 스며 있는 못된 생각조차 그 땀과 함께 제거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뜀뛰면서 하는 생각이 가장 맑은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맑아져서 그럴까요? 오늘따라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달라 보입니다. 여름 내 온 천지를 가득 메우던 일상적인 소리가 오늘은 다르게 들려옵니다. 다르게 들려온 매미 소리를 시()로 옮겨 봤습니다. 제목은 매미 소리입니다.

 

매미 소리를 시끄럽다 하지 말라 / 그대는 매미의 심정을 아는가? / 매미 소리는 매미의 정열이다 / 그대도 매미처럼 인생이 짧다고 생각해 보라 / 그대 안에 정열이 움틀 댈 것이다 / 그대의 목소리는 그 정열을 담아낼 것이다 / 그대의 목소리에는 온 우주가 담길 것이다

 

하루 종일 틈만 나면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듣고 우리는 별 신경 안 쓰든지 아니면 시끄러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이는 매미 소리가 하찮아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하찮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살기 바빠서 매미 소리를 들을 여유조차 없다거나, 나 살기 바빠서 매미 소리 듣는 것조차도 부담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에 스며 있는 못된 생각의 독소가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어서 여름의 푸르름을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없어서 새들의 재잘거림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삶이 바빠서 매미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거나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헛된 것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끝나갑니다.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초록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갑니다.” 곧 있으면 낙엽이 허공을 나뒹굴 것입니다. 하늘은 더 높고 푸르러지겠죠. 그야말로 하늘이 높아지고 말()조차 살이 붙는 풍요의 계절이 올 것입니다. 여름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가고, 가을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올라옵니다. 내려가는 여름을 배웅 나가고 올라오는 가을을 마중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것에 빼앗겨 있으면 배웅도 마중도 모두 못 나가겠지요. 오늘 저녁, 시간 내서 석양을 바라보며 뜀뛰기라도 한 번 해보시지요. 마음이 환해질지 누가 압니까? 마음이 맑아야 보는 것이 보이고 듣는 것이 들리는 법입니다. 문득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0) 2011.08.25
불편한 진실  (0) 2011.08.24
물과 생명의 상관관계  (0) 2011.08.18
TSL 프로그램  (0) 2011.08.11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  (0) 2011.08.09
Posted by 장준식

20여 년 전 선친께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 다녀오시면서 유럽 쪽도 몇 나라 거쳐 오셨는데, 그 때 매우 낯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페트병에 물을 넣어 파는데 1불 정도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만해도 한국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것이 매우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천지에 깔린 게 물인데 물을 왜 사먹어야 하는지,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물을 사먹는 것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물을 사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입니다. 먹을 만할 물, 식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들로 산으로 강으로 다니면서 뛰놀던 시절에 물이라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언제나 철철 넘치며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물 속에는 분명 물고기가 살았고, 가재도 살았고, 민물 새우도 살았습니다. 모래무지, 방게도 빼놓을 수 없죠. 소금쟁이도요. 그런데 지금은 시냇물이나 계곡물이나 모두 말라버려서 어릴 적 잡으면서 놀았던 생명체들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르고 사라져가는 동시에 생명도 물과 함께 마르고 사라진 것입니다.

 

이처럼 물과 생명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넘치는 곳에는 생명도 넘치지만,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습니다. 지금은 지구 전체가 부족한 물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생명이 위태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물쓰듯 돈을 쓴다’는 표현은 돈을 펑펑 낭비한다는 뜻을 가리켰지만, 이제 ‘물쓰듯 돈을 쓴다’는 말은 쫄쫄 아껴 쓴다는 뜻으로 바뀌어야 할 지경입니다. 생명과 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의 물, 생수"라고 합니다(요한복음 4). 예수님을 물에 비유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 그렇지, 생각하면 할수록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만큼 생명이란 깊은 묵상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생명이라는 것을 손에 좀 잡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체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물에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지, 예수님은 물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우리의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물이십니다. 내 안에 예수가 부족하면 내 생명은 위태로운 것이고, 내 안에 예수가 충만하면 내 생명은 온전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좀 깨달아지시는지요?


Posted by 장준식

부부 사이에 주고 받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이 암예방과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TSL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개발해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Thank you, Sorry, Love’의 약어입니다.

 

노인 남성 3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TSL’의 표현을 자주 하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혈액을 분석한 결과, 산화성 스트레스 지표는 감소하고 항산화 능력 지표는 늘었다고 합니다. 혈액내 산화성 스트레스 지표가 높게 나올수록 암, 고혈압, 당뇨 등 각종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데, 그 수치가 줄었다고 하니 발병확률이 낮아진 것입니다. 그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혈액내 항산화 능력 지표는 노화와 관련이 있는데 항산화 능력 지표가 낮으면 빨리 늙고, 그 지표가 높으면 노화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TSL’의 표현 통해서 항산화 능력 지표가 높게 나왔다는 것은 늙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Well-Being(웰빙)이 최고의 가치가 된 요즘, 웰빙을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음식도 가려 먹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 음식도 가려 먹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위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된 건강은, 참된 웰빙은 관계의 회복에서 온다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도 관계가 멀어지면 땀 흘리는 운동도 가려 먹는 음식도 웰빙에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가족끼리도 관계가 멀어지면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다는 것 다해보고 다 먹어보아도 결국 웰빙은 먼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아무리 부와 건강을 이 땅에서 누린다 하여도 결국 웰빙은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의 표현은 좋은 관계가 아니면, 회복된 관계가 아니면 쓰기 힘든 표현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고맙습니다는 은혜이고, ‘미안합니다는 회개이고, ‘사랑합니다는 용서입니다. 은혜와 회개와 용서 없이 웰빙은 없다는 뜻입니다.

 

가볍게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무겁게는 우리의 내면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 없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힘들고, ‘내 탓입니다라는 회개 없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입에서만 맴돌 뿐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 없이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입술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정말 잘 살고(Well-Being) 싶으십니까? ‘TSL’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몇 주 동안 사무실에 들어온 쥐 때문에 변치 않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어릴 적 아침마다 했던 일들 중 하나가 광 속에 들어가서 쥐덫에 걸려든 쥐를 개울가에 가져가 익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살던 동네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근 30년 동안 쥐와 대면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면서, 그것도 미국에서 쥐를 대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쥐는 상당히 신출귀몰합니다.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금새 꼬리를 감추고 사라집니다. 바깥으로 나오게 하려고 두드려 보아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귀신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으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끈끈이 쥐덫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쥐덫 위에 빵 한 조각을 놓아 두었습니다. 다음 날 생쥐 한 마리가 끈끈이 쥐덫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며 찍찍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잡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쥐를 쓰레기 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분명 어제 책상에 있던 쥐똥을 치우고 쥐도 잡았는데 쥐똥이 또 발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끈끈이 쥐덫을 하나 더 설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비워두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생쥐 한 마리가 또 잡혔습니다.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던 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론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이가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 허덕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본인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덫에 걸리기 전 그것이 덫인 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덫으로 걸어 들어 갑니다. ‘나는 덫에 걸려도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내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있어!’ 하지만 이건 큰 착각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런 마음조차도 사탄이 주는 헛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바깥에서 와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바깥에 계신 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죄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깥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에겐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은총에 손 내미십시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전에 빌려 쓰던 미국교회의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이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보니, 게다가 창문도 없었고.. 애 좀 먹었습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과 생명의 상관관계  (0) 2011.08.18
TSL 프로그램  (0) 2011.08.11
기도에 대한 명상  (0) 2011.06.24
절대 권력은 없다  (0) 2011.06.17
엄마 마음  (0) 2011.03.18
Posted by 장준식

기도는 운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의 근육이 튼튼하지 못하면 운동하기 힘든 것처럼, 기도의 근육이 튼튼하지 못하면 기도하기 힘듭니다. 육신의 근육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 조금 숨가쁘게, 내가 해 낼 수 있는 운동량보다 조금 더 해야 근육의 힘이 조금씩 늘어나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기도의 양보다 조금 더 기도해야 기도의 근육도 조금씩 튼튼해져 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근육이 튼튼해지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겠지만, 육신의 근육이 아무리 튼튼해도 일정 양 이상 운동을 하면 오히려 몸에 해롭듯이, 기도도 마찬가지로 일정 양 이상 기도하면 영혼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어긋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쉬지 말고 운동하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기도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의 맥락에서 보아야지 기도의 양적인 면에서 접근하면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필요 이상 오래하면 부작용이 생기는데, 교만이라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행위인데, 에덴동산에서 하루 종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면서 살았던 아담은 그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했던 천사장 루시퍼도 그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하나님을 대적한 타락한 천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필요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하다 보면 마음이 교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기도를 필요 이상으로 오래하면 쫓겨났던 귀신이 친구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삼일 금식 기도니, 사십일 금식 기도니 하는 기도들이 있는데 그러한 기도에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능력 주실 때 해야 하는 것이지, 호기심과 영웅 심리로 괜히 감당도 못할 것을 행했다가 영혼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기도는 호기심도 아니고 애들 장난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를 너무 많이 하게 되어서 영혼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언제 필요 이상으로 기도한 적이 있었던가요? 하루에 한 시간, 아니 삼십 분이라도 기도해 보고 그런 걱정합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TSL 프로그램  (0) 2011.08.11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  (0) 2011.08.09
절대 권력은 없다  (0) 2011.06.17
엄마 마음  (0) 2011.03.18
이의 있습니다!  (0) 2011.03.04
Posted by 장준식

요즘 시대를 일컬어 포트스 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절대 권력이 모두 부정된다는 겁니다. 일례로 예전에는 대통령의 권위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도 여론에 밀려 탄핵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역이라고 하는 성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승려라고 해서 그 성직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권위를 인정 받지 못합니다. 어느 분야든지 어느 자리든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권위가 허물어졌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말세다라고 혀를 쯧쯧 차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건 말세의 징조가 아니라 그만큼 세상이 더 평등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다른 무엇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하고 달라”, “나는 저런 것들(things)하고 달라”, 하는 마음은 이미 나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밟고 다니는 흙하고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은 후에 어디로 돌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는 누구든지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우리 인간은 흙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흙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는 함부로, ‘나는 달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대 권력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기꺼이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절대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그리고 죽으면서까지도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신 사랑의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우리는 절대 권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오는 권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절대 권력을 바라면서 살까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절대 권력은 없습니다. 그건 속임수이고 헛된 꿈입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  (0) 2011.08.09
기도에 대한 명상  (0) 2011.06.24
엄마 마음  (0) 2011.03.18
이의 있습니다!  (0) 2011.03.04
소속이 어디인가?  (0) 2011.01.01
Posted by 장준식

엄마 마음
 

세상 물정 모르는 세 살배기 아들이 학교 다닌다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힘쓰는 것을 보면 엄마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학교 가기 전에 집에서 푸푸(대변)를 보고 가면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학교 가서 푸푸를 보게 되면 선생님을 번거롭게 할까 봐 걱정이고, 학교에서 혼자 푸푸 보면서 괜한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답니다. 이것이 엄마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세 살배기 아들은 몰라주겠지만 엄마는 늘 세심하게 걱정합니다.

 

이런 엄마 마음이 목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히브리서 13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자신들에게 복 주는 말씀을 하면 아멘하다가도 이런 말씀 앞에서는 입을 삐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라 복종하라라는 말이 거슬리기도 하고, ‘목사의 마음이 정말 저랄까하는 의심도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 중에도 삯꾼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는 법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이 영성이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삽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 목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에게 또는 교회의 지도자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겁니다. 신뢰가 없으니까 말씀을 들어도 본인에게 익숙한 말씀, 본인이 들어 납득할 수 있는 말씀에만 아멘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말씀이 본인의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다 싶으면 목사를 대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목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에게 또는 교회 지도자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권위 앞에 순종하고 복종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권위 앞에 순종하고 복종해 보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참 권위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고, 부모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권위 앞에서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됩니다. 일종의 열등감이고 피해의식입니다. 권위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면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순간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이건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결국 신앙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결국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밖에는 없다는 것이죠. 교만이라는 것, 별거 아닙니다. 자기 집중, 자기 방어를 통해서 상대방(타자)을 밀어내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성령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그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길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추악한 썩은 냄새만 날뿐입니다. 이 냄새로 인해 주변 사람들만 괴로울 뿐입니다.

 

엄마 마음을 상상해 보고 그 마음을 목사의 마음과 오버랩 시켜 보십시오.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이 삶의 무게로 버거워 할 때, 당신이 사는 것 때문에 바쁠 때, 목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을 위해서 경성하기를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기도합니다. 본인도 본인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일을 목사가 대신 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영성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유익합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에 대한 명상  (0) 2011.06.24
절대 권력은 없다  (0) 2011.06.17
이의 있습니다!  (0) 2011.03.04
소속이 어디인가?  (0) 2011.01.01
생로병사(生老病死) – 쿼터 라이프(Quarter Life)  (0) 2010.12.15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