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기도)하기 좋은 계절

 

테베를 정복한 오이디푸스 왕은 뒤늦게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 왕이 자기 아버지요 아내로 삼은 여인은 자기 어머니임을 알게 됩니다. 친부모도 알아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오이디푸스 왕이 본 빛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가 눈을 뽑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눈을 감기만 하면 됩니다. 눈을 감되, 내 안에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바람이 시원하고 낙엽 지는 계절이라 사색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색이란, 당연히 기도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겠죠. 여러분은 기도할 때 왜 눈을 감으십니까? 세상의 이꼴저꼴 다 보기 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감아버리는 것입니까? 습관처럼 눈을 감으십니까? 아니면, 눈을 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어느 것이든 기도할 때 우리가 갖는 마음 자세일 것입니다.

 

가을을 맞아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기도할 때, 눈을 감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서 기도해 보십시오. 오디이푸스 왕이 보았던 빛과 같은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빛과 같은 것일까요? 그 빛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 빛을 볼 수 있는 영성에 한 발짝 더 가가가는 가을, 사색의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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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꽃의 화용(花容)만 봅니다. 꽃의 겉모습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을 보면서 예쁘네 안 예쁘네 라는 평가만 내립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만을 본다면 그것은 꽃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화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품(花品)을 봐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컬어 사군자(四君子)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꽃나무들의 화품 때문이지 화용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외모만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서 잘 생겼네 못생겼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인품(人品)을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성인군자는 인품이 매화처럼 매서운 세파에도 굽히지 않는 고매함을 지니고 있고, 난초처럼 기세와 자태가 곧고, 국화처럼 굳은 지조를 지니고 있고, 대나무처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생긴 것은 다를지라도 ()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서로 통하는 것들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선비정신으로 통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인품이 중요합니다.

 

인품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지, 외모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기품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신품으로 판단 받습니다. 기품 있는 믿음,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죠. 믿음이 매화처럼 고매하고, 난초처럼 곧고, 국화처럼 지조 있고, 대나무처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면, 기품 있는,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시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바로 "신품"입니다. 기품 있고, 품위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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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인어공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동화들입니다. 이 동화를 지은 작가의 이름이 안데르센입니다. 위에 열거된 동화들은 모두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들 입니다. 덴마크 출생인 안데르센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안데르센은 어머니에게서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아버지에게서는 상상력과 교양을 배웠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시절 너무도 가난해서 구걸까지 해야 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소재 삼아 쓴 이야기로 유명하고, <미운 오리 새끼>는 안데르센이 작가로 데뷔한 이후에도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 받은 것을 소재 삼아 쓴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가난과 홀대에 시달렸던 그가, 그토록 인류 역사에 남을 동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가난과 홀대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권태로움이 그를 세계적인 동화작가로 만든 것입니다. 가난과 홀대 속에서 그가 그냥 가난과 홀대만 보았다면 그는 결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동화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데르센은 가난과 홀대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의 동화는 그 속에서 그가 본 것을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동화는 꾸며낸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가 경험하고 인식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근거로 삼고 있는 성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권태로운 이 세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고 인식한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하나님 나라 이야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창조,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경험하고 인식하려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성령의 영감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성경은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세상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권태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성령 받아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성경은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 속에서, 그리고 권태로운 삶 속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가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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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시이며, 기도문입니다. 시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언어는 탄식의 언어입니다. “탄식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한탄하여 한숨을 쉼. 또는 그 한숨”. 그리고 국어사전이 제시하는 예문은 이렇습니다. “그는 밤이 너무나 긴 것을 탄식하며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었다.” “그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탄식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시면 탄식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8:26). 그것이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연약한 우리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숨 쉽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바로 그 탄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탄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뻐하거나, 감사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하면 됩니다.

 

탄식하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살아 있는 자가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때 탄식의 언어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 마음이 이미 죽어 있는 자이거나, 성령 받지 못한 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고, 내 이웃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는 사람은 탄식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걷히길 바라지 않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어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지금 내 삶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이 물러가길 탄식할 것입니다. 빛의 자녀는 어둠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탄식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탄식의 언어는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며 가슴을 두드리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어떠한 언어와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하시는지요? 성령이 함께 하시는 탄식의 언어로, 탄식의 형상으로 기도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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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는 양보다 질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지요. 그래서 분 바람이 웰빙(Well-Being)입니다. 웰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육체의 건강입니다. 사실 육체의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너무 외모지상주의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을 중요시하는 기독교인들은 육체의 건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희랍적 사고인 이분법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을 자꾸 구분하려 들지만, 사실 육체와 영혼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육신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 없는 귀신으로 살게 하실 일이지 왜 육신 속에 영혼(루아흐)을 불어 넣어 주셨겠습니까? 육신을 가진 우리는 천사보다 높은 존재라고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하는 날, 우리의 육신도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물론 어떤 형태의 육신으로 부활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요. 하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육신은 우리 인간이 영원히 간직하게 될 하나님의 선물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을 잘 돌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의 육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이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이상한 이단 교리가 퍼지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이니 육신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좋다는 사상이었습니다. 이를 니골라당의 교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철저하게 대립하는 이단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우리의 육신)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선하게 창조되고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니, 우리의 육신도 선하고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몸을 선하고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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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서 생각이 트일 시절, 중학교에 갓 들어간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제 마음을 사로 잡았던 시()입니다. 이 시의 제목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고사성어가 관포지교(管鮑之交)입니다. 관중과 포숙이라는 사람들의 우정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에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후에 관중은 명재상(名宰相)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명재상이 되기까지는 친구였던 포숙의 공이 지대했습니다. 관중이 말년에 포숙에 대한 칭송의 말을 남겼는데, 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어릴 적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의 분배를 내가 포숙보다 더 많이 가져갔는데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고, 벼슬 길에 올라 많은 실수로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주었다. 또한 내가 포숙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내가 세 번이나 도망을 치자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다고 질책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집에 연로한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알아 주었고, 또 나와 포숙아가 제나라의 두 공자인 규()와 소백(小伯)의 사부가 되었다가 내란에서 공자 규를 모시던 내가 공자 소백에게 패하여 참수형의 위기에서 포숙아의 설득으로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재상의 자리까지 나에게 물려주어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나를 알아주었다. 결국 나를 나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것 많이 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친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이런 친구를 찾지 못하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런지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도록, “관포지교”, “지란지교를 꿈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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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사람은 행복을 꿈꿉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에리히 프롬 같은 사람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서 소유 양식에서 비롯되는 파괴적인 결과들을 지적하고, 그런 소유욕에서 벗어나 존재자로서 나눔과 향유의 삶을 살아갈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자연과 더불어 소유에서 벗어나 존재자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선각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있고, <조화로운 삶 The Good Life>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니어링(Nearing)”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자연과 더불어 행복을 가꾸면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니어링 부부는 소유를 부추기는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살면서 소유를 거부하고 존재자로서 살아간 선각자입니다. 그들이 북쪽의 버몬트 주와 메인 주에 살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쓴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죠. 우리가 살고 있는소비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고,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세상을 소유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만족을 주지 못하고, 소유는 오히려 우리를 가난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들에게 그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그것을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만물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소유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향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향유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한 묵상과 실천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소유욕에 물들어 있고 소유를 위해서 살아온 인류 역사는 망가지고 타락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유만이 행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소유한 자는 행복하고, 적게 가진 자는 불행합니다. 제한된 재화(goods)를 놓아두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싸움과 경쟁이 불가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행복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경구는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가진 부는 무한하다. 왜냐하면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니라 향유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신독(愼獨)”이라는 한자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는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를 가리킵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 즉 상제(上帝)와 귀신(鬼神)은 형상도 소리도 없는 존재이나 또한 강림하여 항상 인간들을 낱낱이 굽어보고 있으니,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아 암실(暗室)이나 혼자 있을 때에도 계신공구(恐懼)하는 것이 바로 ‘신독’인 것이다.”라고 신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신공구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여 하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신독이라는 한자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뿌리 내리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빌 하이벨스 목사님(시카고 윌로크릭 교회 담임 목사)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도 신독의 정신이 드러나 있습니다.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이 가득하거나 내가 주목 받고 있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고상하고 멋지고 훌륭한 모습을 애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는 가까운 관계,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일상에서는 우리 성품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때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 외에 나를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그 때에 드러나는 것이겠죠.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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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Thessalonians 5:18).” 이 말씀 속에 나타난 감사는 범상치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이는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단서가 따라 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결국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인 감사의 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떻게 모든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게 될까요? 이것을 주문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예수님을 지칭할 때,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먼저고, 예수가 나중입니다. 이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인식할 때 부활의 관점에서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이 따라 붙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부활은 이 세상의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종말론이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관한 일을 진술하는 것인데,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현재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의 이유보다 불평의 이유가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 끝 날의 관점(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지금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 심지어 죽음까지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그리스도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넘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게 되고, 최후 승리는 우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뜻이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보이기 때문에 저절로 되는 것이 감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므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필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욕심은 평화를 깨뜨립니다. 내 마음의 평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깃든 평화도 빼앗아 갑니다. 하박국서에 보면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표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2:5).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욕심이 그들의 삶을 스올(지옥)로 만든다는 것이죠. 욕심은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빼앗아 가고, 잠도 빼앗아 가고, 식욕도 빼앗아 갑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욕심 때문에 망한 인생이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입니다. 자신의 궁전 가까이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이 탐났던 아합 왕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은 욕심에 안달이 나서 삶의 평안이 깨지고 맙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왕상 21:4). 이 모습을 본 왕비 이세벨은 남편 아합 왕의 욕심을 채워주고자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이 사실을 안 엘리야 선지자는 욕심쟁이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19). 이 예언대로 아합 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욕심이 낳은 비극입니다. 이처럼 욕심은 남을 망칠 뿐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삶도 망치고 맙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삶이 힘들어지고 삶의 평안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망가진 인생, 빼앗긴 평안, 기도로 다시 회복시키고 찾아보십시오. 기도는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지니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만능 해결사는 아닙니다만, 기도는 적어도 내 마음 속에 가득한 욕심을 버리게 해 줄 것입니다. 내 마음에 가득한 욕심만 비워내도, 웬만한 삶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꽃인 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욕심을 스올(지옥)로 보내십시오. 그러면 내 삶이 스올(지옥)로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평화롭게 살려면 욕심을 버리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서양 음악가 중 종교적인 색채를 가장 짙게 띤 선율을 빚어낸 사람이 바흐입니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천군 천사들에 둘러싸인 천국에 와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 중에서, “예수, 우리의 참된 소망(Jesus, Joy of Man’s Desiring)”이라는 곡은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표현하고 있는 명곡입니다. 지면에서 곡을 들려 드릴 수는 없고, 다만 여기에는 노랫말을 적어 봅니다.

 

참 기쁨과 지혜의 왕 사랑의 왕 구주 예수 / 빛의 근원이신 예수 우리 인도하소 / 육신 입은 주의 말씀 우리 삶에 참된 소망 / 주여 우릴 도우사 주 보좌로 이끄소서 / 들으라 평화의 찬미 우리 앞에 울린다 / 예수 안에 사는 사람 / 기쁨 충만하리라 / 순결함과 아름다움 거룩됨과 하늘 지혜 / 영원한 기쁨 예수 길이 우릴 이끄소서.”

 

선율이 아름다운 만큼 노랫말도 아름답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면이라 선율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만, 선율과 노랫말이 이렇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은 흔치 않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바로크 음악의 진수를 볼 수 있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의 위대함을 볼 수 있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그의 영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위대한 음악가 바흐가 표현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영어 표현을 우리 말로 풀어 다시 설명하면, 예수님은 인간이 몹시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 주시는 기쁨의 존재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바람은 물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쓸 그런 바람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그것을 깨닫고 있든지 못 깨닫고 있든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인간의 내면 세계는 이것을 바라고 있지만, 인간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 소망을 이루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담을 허물고,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십자가의 보혈로 다리를 놓아주신 분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우리 인간의 아버지로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화해와 교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바흐의 아름다운 선율이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하는 참된 기쁨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 기쁨 충만하리라!

 

 

Celtic Women이 부르는 예수,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PeVIuRjUi4&feature=related

Posted by 장준식

그대는 단 한 가지 /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 용서 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 하십시오. /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이 한 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마음을 울리는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마음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욕심이고 교만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기 전에,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늙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 말도 바로 이겁니다.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요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성경(요한복음, 요한 1,2,3서 등)을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도 요한이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라고 외치고 다닌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예수님께 배운 것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보다 후대의 인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랐던 어거스틴도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일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타락한 마음이겠지요. 타락한 우리 마음은 사랑하는 일을 잊고 자신의 욕심을 먼저 채우려고 하고, 사랑하기보다 남을 흠집 내고 헐뜯고 말 만들어 내기에 바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기에 바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모두 사랑에 근거한 선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말과 행동입니까? 그렇다면 소신을 갖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그것이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힘써 지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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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은 양의 실수입니다. 우리가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교만해서, 버릇이 없어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해서 우리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잘못 때문에 구원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유보하시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인 가운데는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죄인이 있습니다. 탕자가 되었어도, 하나님을 등뒤로 하고 세상에 가서 인간적으로 살고 죄에 빠져 괴로워하다가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고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죄인은, 스스로는 절대로 죄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죄인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목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도, 길을 잃은 양도, 하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구원 받기 힘듭니다. 내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내가 영특하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내 덕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랍 속담에 "태양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태양만을 원하지만 태양만 계속되면 우리 인생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촉촉하고 푸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좋아합니다.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원한다면 소낙비를 각오해야 합니다. 소낙비가 없이는 결코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은 인생을 원한다면 때로는 아픔과 고통의 소낙비를 맞아야 하고 견디어야 합니다.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무지개를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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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호랑이를 죽일 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 때는 사람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 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요즘 국제사회의 화두는 인권이다. 국제사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이 내세우는 최대의 명분은 인권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명분 또한 인권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의 대학교(Columbus State University) 교수 한 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2012 4 15)을 맞아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북한 관련 비디오 상영이 학교에서 있으니 와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모임은 김일성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는 아니고, 반대로 북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비디오를 상영하는 행사였다. 비디오 상영은 1시간 20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15명 남짓한 학생들이 심각하게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비디오를 시청했다.

 

물론 비디오의 내용은 심각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인물들이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자료 화면을 통해서 증언되는 북한의 인권은 참으로 참담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탈북했으니 그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분노가 가득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이다. 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분명 정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의 인권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미국 영화를 보면 대부분 정의의 사도가 악당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것들이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선과 악의 구조가 편만한 영화를 보면서 자신들 미국인을 선의 축에, 나머지를 악의 축에 감정 이입시킨다. 얼마 전에 본 미국 영화 <Act of Valor>도 그런 류의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세계 각국에서 테러와 싸우는 미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인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한 군인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그 영화 속에서 미군은 인권과 평화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수 없는 악당들을 최신식 무기로 괴멸한다.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자기 편을 살려내기 위해서 악당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 그려진다. 악당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범죄이고, 인권을 위해, 평화를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정의이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인권보호평화유지를 보면서, 무엇이 인권보호이고 무엇이 평화유지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미국인들은 위의 영화를 보면서 미군이 아슬아슬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게 할 정도로 스릴 있게 자기 편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자기 편을 구해내면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던 악당들의 인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힘겨루기에서 단연 화두는 인권이지만, 나는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그저 그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힘 센 나라가 힘이 약한 나라를 억누르기 위한 조작된 핑계일 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 갖는 것은 인권, 즉 사람답게 살기가 아니라 기득권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더라도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이 만일 민중들의 눈에 보기에 부당했다면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민중들은 봉기했을 것이다. 민중들의 눈이 아무리 어두워도 정당과 부당의 최소한의 차이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민중들을 로마 당국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긍정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을 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이것은 그들 민중이 예수의 죽음을 정당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로마는 평화를 원했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원했다. 표면적으로만 그 표방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지, 그 심층적인 욕망은 모두 한결 같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유지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하다.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수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나게 될 것이다!”라는 무서운 속담이 무색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는 자신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자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안아 주셨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세상으로 모두를 이끌어 주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권이 화두인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정의의 축에 놓고 타자는 악의 축에 넣은 뒤, 자신이 하는 일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마음에 젖어 사는 우리들. 내가 남을 죽이는 일은 정당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헤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으면 좋겠다. 무엇이 진정한 인권인지. 무엇이 진정한 평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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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김길태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귀가하던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물탱크에 유기한, 차마 떠올리기 싫은 사건입니다. 범인의 이름이 흥미롭습니다. 김길태인가 했더니, ‘길에서 태어났다해서 길태라고 합니다. 이름처럼 갓난 아기 때 교회 앞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32년 전 그 어느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 비극입니다. 버려진 그를 교회의 지인을 통하여 현재 양부모가 입양하여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시절 입양 사실을 안 그는 그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친구도 거의 없고, 양부모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범인 김길태를 나무랄 수 있고, 그를 길에 버린 친부모를 나무랄 수 있고, 맡았으면서도 잘 키워내지 못한 양부모를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일입니다.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아서 어느 한쪽이 잘못되면 어느 한쪽에서는 그 대가를 꼭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32년 전 한 아기가 길에 버려진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인 것입니다. 그냥 안타까워하고 말 일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이 어느 누구에게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혀를 쯧쯧 차면서 안타까워하지만 그 일은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무심하게 넘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회는, 우리 인간관계는 서로가 모두 얽혀 있습니다. 마치 한 몸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비극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아픔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선한 일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기쁨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있는 자리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 되고 선한 일을 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 땅 위에 천국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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