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치 중 하나가 효()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이 사상을 꼭 배워야 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쇼셜시큐러티(사회보장제도)를 통해서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은 사회보장제도로 노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은퇴 한 노인들을 먹여 살리는데 국가가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날로 늘어가서 머지않아 노인 인구가 젊은이 인구보다 많아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미국이라고 할지라도 늘어난 노인 인구에 발맞추어 재원을 확보해 노인들을 사회보장제도로 돌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가정으로 돌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쉽게 이야기해서,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사회형태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어릴 적에 부모가 자식을 책임졌으니, 이제 거꾸로 자식이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미 아시아 문화권에 형성되어 있는 사고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점점 쇠퇴해져 가고 서구식 사회보장제도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지만, 이는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람이 돌보는 것이지, 어떠한 제도가 돌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 돌봐야지, 어떻게 사회보장제도가 사람을 돌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정을 주신 이유는, 가족끼리 서로를 잘 돌보라는 의미에서 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회보장제도가 가정을 돌봅니다. 자녀들도 부모가 돌보는 부분보다 사회보장제도가 돌보는 부분이 많습니다. 실례로 의료부분이나 교육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서 부모의 역할은 미진합니다. 가장이 실직을 해도 가정이 돌보기 보다는 사회보장제도가 돌봅니다. 실직수당을 줌으로써 먹고 사는데 있어서의 불편함을 최대한 덜어주려고 합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사회보장제도가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 노인문제 입니다. 노인을 돌보는 비율은 압도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높습니다. 젊은 자녀들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늙은 부모는 사회보장제도에 의지해서 스스로 살아가거나, 기관 같은데(병원이나, 실버타운 등) 맡겨지고 맙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대한 돈이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는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이상 사회보장제도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이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님, 그리고 자녀, 손자가 함께 보여 사는 단란한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미래 사회는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늙은 부모님이 가정에서 환영 받는 방법은 어디 있을까요? 돈이 많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돈을 가지고 그 가정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 같은 기도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은 어디에서나 환영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어느 자식이든 서로 모셔 가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가정을 제가 봤습니다.

 

그렇다면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자녀들에게 주님의 형통한 복을 가져다 주는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노후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으로 노후 준비를 하지 마시고, 기도로 노후를 준비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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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파울로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옛날부터 연금술은 일종의 마술로 여겨져 왔습니다. 값싼 철이나 납 같은 금속을 잘 정련해서 값비싼 금으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고대인의 눈에 이러한 기술은 마술로 보였겠죠. 현대 기술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정 원소들에게 특정 에너지의 방사선을 투사시키면 원자의 핵이 변형되면서 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공률과 비용입니다.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률도 낮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금을 만드는 것 자체가 경제적 효용성이 없다는 것이죠. 성공률이 가장 높은 광물이 백금인데, 백금은 금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비싼 백금으로 그보다 더 싼 금을 만드는 일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어서 시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연금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철학적입니다. 납과 같이 무지몽매한 인간을 금과 같이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연금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죠. 다른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려 한다든지, 사람을 금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데에는 금이라는 금속이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입니다. 금은 다른 금속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개 대부분의 광물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성분을 지닌 다른 광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은 변화라는 것을 모르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있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중에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사실 최고의 연금술사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과 같은 나를 단련하셔서, 정금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십니다. 정금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는, 변함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금보다도 더 귀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정금같이, 정금보다 더 귀한 존재로 은총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이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먼지 티끌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정금보다 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연금술사,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인생을 복되게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III

2.2.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소명이 먼저일까? 자질이 먼저일까? 우리는 흔히 소명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소명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의 소명의식이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꽂히는 순간, 더 이상 아무 것도 귀에 안 들리고 눈에 안 보인다. 그때부터 소명의식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것은 불신앙이 되어 버리고,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모두 사탄의 농락으로 여긴다. 정말 소명이 전부일까?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다. 그리고 소명에 대한 검증 절차 또한 부실하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부재의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일단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소명에 대한 성찰을 신학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명을 무당 신내리듯한 그 무엇쯤으로 생각한다. 신학교를 다닐 때 수업 시간에 한국 샤머니즘의 대표적인 의식인 굿에 대한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영적 존재에게 점지를 받은 예비 무당은 그때부터 무당수업을 받는데, 자신이 평생 모시고 살 영적 존재에게서 신 내림을 받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신 내림을 받고 무당으로 안수받는 마지막 의식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두타기이다. 신내림을 받은 처녀 무당(무당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무당이라는 뜻)은 맨발로 작두 위를 걷고, 날 선 칼을 깔아놓은 그네를 타는데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당의 본업을 수행한다. 신기한 것은 예비 무당이 영적 존재로부터 점지받는 과정이 예비 목회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비 무당이 점지받고 나서 고민하는 모습이 소명받고 고민하는 예비 목회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점지 받은 예배 무당은 결국 영적 존재의 점지(부르심)순종한다. 예비 목회자가 그러하듯.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무당의 신내림과 목회자가 소명 받는 것이 같을 수 있어?” 물론 본직적인 차원에서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구별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신학적이고 방법적인 잣대를 구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잠재의식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정신에 오랫동안 깃들어온 샤머니즘적인 정서를 어떻게 걸러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목회자가 무당 신내리듯이받은 소명은 아예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검증을 무색하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께 소명 받았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소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을 보면 한 사람이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기나긴 성찰과 검증을 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했다는 뜻이다.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라, 신앙적인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 경향이 강한 한국 교회에서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꼼꼼하게 한 신학자이다. 그는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성직세속직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는 한국교회의 관행과는 완전 딴 판이다. 칼빈은 소명을 직업과 연관시킨다. 칼빈은 직업(calling)’소명(calling)’과 같은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직업이란 소명과 같은 것이다. 우리 말로는 칼빈의 직업 개념을 천직이라고 번역한다. 소명을 직업(천직)의식으로 확장시킨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이를 목회직에 적용해 보면, 목회직을 수행할 때 중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것이 있다. 소명 없이도 자질만 있으면 목회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칼빈의 소명 개념은 일차적으로 신앙을 전제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성직과 세속직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성서의 한 구절을 들어 주석적으로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요한복음 1 4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다나엘이 예수께 소명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1:51). 이것을 꼼꼼히 주석하기 위해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지면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핵심만 짚고 넘어가자면, 소명(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소명의 개념이다. 우리는 자꾸 소명의 개념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정작 복음서에서는 소명을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들(, , 죽음)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둘째,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이것을 토대로 삶을 사는 것, 이것에 모든 인생을 거는 것이 소명(부르심)’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주석작업을 바탕으로 좀 더 자세히 씌어진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여기 블로그에서 "부르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문을 읽어보시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의 소명 설화를 토대로 소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나면 칼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소명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지, 우리가 언뜻 이해하고 있듯이 어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르심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을 받았다면,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나의 천직(calling, 소명)’이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은 목회직을 수행하는 사람만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의사를 하든, 변호사를 하든, 택시기사를 하든, 식당 아줌마로 일하든, 환경미화원이든, 무엇을 하든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이 발생한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목회직은 목회의 소명 받은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직이든, 판사직이든, 그에 대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어떠한 직이든 그 일을 수행하는 데는 갖추어야만 하는 자질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의 교권이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는 자가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고, 목회직에 대한 자질이 없는 자가 소명이라는 자의적인 착각에 빠져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야흐로 21세기이다. 아직까지도 잘못된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목회적 자질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면서 목회직을 수행하려 드는 어리석은 목회자의 영성은 분명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를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21세기에서 목회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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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대림절은 하나님 아버지께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강림절을 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을 이룹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기 위해서이지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정통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잣대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우선적으로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아닌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생겨난 이단 중 가장 끈질긴 이단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입니다. 현재 유니테리언이라는 교단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모세나 마호메트 같은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통 기독교와 이단 또는 타종교와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교파는 일단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크게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이 세 교파는 정통 기독교라고 말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교리 이외의 것들은 소소한 논쟁에 불과할 뿐, 삼위일체 교리를 건들지 않는 이상,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많은 공부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탈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 교리는 벌집과도 같다는 겁니다. 어설프게 손댔다가 이단으로 몰려 출교(excommunication)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그 신비로운 하나님을 이해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신비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려고 노력하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Posted by 장준식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감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지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적당히 다루어주지 않으면 어떠한 병을 유발해서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 말에 한()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독특한 정신의학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Han)’이라는 말을 그대로 표기해서 쓰고 있습니다. 대개 한은 한국의 여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마음의 병입니다.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어주지 못해서 그냥 마음에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곪아 터진 형태의 병입니다. 한이 잘 삭으면 예술적으로 승화하지만, 잘못 삭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스트레스를 잘 극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 왕과 다윗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적의와 살의에 사로잡혀 평생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니다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서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은 태평성대 때 지은 것들이 아닙니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달해 있을 때 지은 것들입니다.

 

실례로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블레셋 가드 왕 아비멜렉에게로 도망갔다가 그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스트레스가 올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며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서 거기에서 오는 기운을 돌려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스트레스가 올 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다윗에게 창을 던지고 무당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느냐에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인생이 갈렸다는 것에서 우리는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십니까?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다윗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주변 사람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은 내 스트레스를 받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죄 짓는 길에 들어서지 마십시오. 그 죄의 대가를 꼭 치르게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시고, 하나님 앞에서 소리지르시고,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쌓아둘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스트레스를 쌓아 둘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꼭 풀어야 합니다. 다윗처럼, 건전하게 푸십시오. 스트레스를 잘 풀어야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2.
교권 회복의 길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한창 이러한 논쟁이 있었다. “교사는 개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이 질문을 교회로 가져와 보자.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만큼 교권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목회자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썩을 때로 썩었다는 뜻이다.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개혁의 주체는 많은데 개혁의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썩었다고, 목회자가 타락했다고 외치는 아우성은 많은데, 정작 썩은 교회, 타락한 목회자는 없다. 개혁적인 교회나 보수적인 교회나, 심지어 사이비 이단 교회까지 한국교회는 이대로 안 된다는 외침을 높이고 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기이한 현상이다. 이제 남 탓 그만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다. 그러나 목회자는 다른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할 주체다. 즉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뜻이다. 신학적으로도 너무나 자명한 논리가 아니던가! 우리 믿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 아니던가!

 

이제부터 논하게 될 교권 회복의 길은 다른 사람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비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자꾸 다른 사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감한 사항이므로 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보다 어느 한 석학의 연구를 토대로 글을 개진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쓴 <종교개혁사상>의 한 부분이다.

 

15세기 독일의 신앙에서 중요한 한 측면은 반교황주의와 반성직자주의 현상이다. 반성직자주의를 일으킨 한 요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교구사제들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것은 보통으로 있었던 일이었다. 그들은 옛 동료들을 (반드시 더 지혜로울 필요는 없었다) 보고 돕고 모방하면서 수집했던 것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교의 교구 방문기록은 사제들이 무식하거나 일과기도서를 명백히 지속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매번 드러내고 있었다. 교구 성직자의 낮은 자질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은 것을 반영했다. 16세기 초에 밀란의 지도신부들은 비숙련 노동자들보다도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말과 가축 무역에 종사했다. 프랑스의 시골에서는 같은 기간에 하급 성직자들이, 거칠게 표현해서, 부랑자들과 동일한 사회적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과세와 민사법원 소추 그리고 별도의 징병을 면제받는다고 하여도 그들은 사실상 다른 걸식 순회사제와 구별되지 않았다.(61)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권 회복의 길을 논하면서 첫 번째로 목회자의 자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의 자질을 논할 때 기도를 제 일 순위로 꼽는다. 다른 것(설교, 리더십, 배움)이 좀 모자라도 매일 새벽에 무릎 꿇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목사라면 목사직을 감당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집단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미국 교회 목사들은 하루 평균 20분 정도 기도한다고 나온 반면에 한국 교회 목사들은 하루 평균 40분 이상 기도한다고 나와 있다. 한국 목사들은 미국 목사들보다 2배 이상 기도를 많이 한다. 기도 많이 안 해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힘들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기도가 목회자의 자질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도 아니다. 종교인(기독교인이든 아니든)이라면 누구든지 다 하는 기도를 목회자 만의 고유 자질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기도는 양보다 질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믿는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자질은 무엇으로 판가름 나는가?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마다 다양한 대답이 나올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목회자의 자질은 인문학적 상상력(‘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불러도 좋다)”으로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슨 뚱딴지 같은 대답인가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거나, 도덕적으로 무흠해야 한다거나, 인격이 고매해야 한다거나, 등 나올 법한 대답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순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목회자의 최대 과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풀이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대한 과업이다. 그렇다면 설교와 인문학적 상상력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여러분은 성경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 너무 진부한 대답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대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다간 믿음의 선조들이 이 땅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해석해 놓은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 경험을 직접적으로 진술한 책이 아니라, 해석해 놓은 책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두고 해석이 무엇인지 잠깐 설명해 보자. 복음서는 신문기자의 기록이 아니다(복음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다). 해석된 기록이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구원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냥 한 젊은 유대 청년의 죽음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예수의 부활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또한 만약 예수의 부활이 신문기자가 기록할 수 있는 것처럼 일어났다면 그 당시 성경 외에 다른 문헌에도 예수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 외에는 그 어디에도 예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지금 해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은 아마도 기독교 진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해석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을 것이다.

 

사실 해석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어떠한 성도가 중병에 걸렸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병원에 입원해서 병치료를 받아서 그 병이 나았다. 그 사람은 그냥 병에서 나았을 뿐인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어요!”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유대 땅에서 한 젊은 유대인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구원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해석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이라고 하는 것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냥 믿으면 되지, 왜 그것을 해석이라고 부르는지, 불경스러운 마음까지 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해 보자. “지구는 둥글다는 해석인가 사실인가? 이것은 사실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나 믿는다. 그러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해석인가 사실인가? 이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진술이 지구는 둥글다와 같이 사실적 진술이었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가? 왜 세상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진술을 고백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목회자의 중대한 과제가 생겨난다. 목회자의 과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이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진리인가를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이 자질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목회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성경을 고정된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서설교하기 보다 문자적으로설교한다는 것이다. 해석되어야 할 진리가 아니라 고정된 진리의 형태로 말씀이 전해지면 설교는 선동적인 구호로만 가득 차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믿습니까? 아멘!”이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고, 우격다짐 격인 구호만 난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선동적인 설교가 더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일시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토대는 주관성에 있지 않고 보편성에 있다. 말씀이 보편성에 근거해 있지 않고, 주관적인 선동에만 머문다면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다.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발전한 한국교회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선동적으로, 주관적으로 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 것을 무슨 성령의 능력으로 성장한 것 인양 오도해 왔다. 성령에 의해 성장한 교회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것은 흡사 요즘 건설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있는 현상과 같다. 경제가 무한 성장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건설사가 아무리 생겨나도 문닫는 경우는 없었다.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쟁력 없는 건설사들은 모조리 문을 닫고 있는 형국이 됐다. 진검 승부를 해야 할 시점이 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에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풀려져서 말해지는 부분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해석된 진리인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이다. 이것은 성경을 수 백 번 읽는다고 저절로 갖게 되는 자질이 아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몸에 배지 않으면 갖추기 힘든 자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좋은 글이 한 편이 있어 아래에 옮겨 본다.

 

그러면, 인문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흔히 인문학의 대표 분야가 문학, 역사, 철학이라 말하는데, 문학/역사/철학 공부를 많이 하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함양될까? 나는 문학/역사/철학 공부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수많은 공부 중에 일부일 뿐이라 믿는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동을 통해 저절로 생긴다. 중고교 시절, 클래식 음악에 빠져 베토벤 교향곡을 분석하고, 관련된 뒷얘기를 추적하며, 음악을 통해 소름이 돋는 감동을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또래 친구들보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커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TV 드라마를 보면서, 인간의 본성과 선악의 문제, 사회 조직의 아이러니 등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면, 이 역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멀리 여행을 떠나,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진한 감흥을 받았어도, 이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유난히 맛 좋은 만두를 먹으면서, 그 만두 재료에 대한 분석을 넘어, 그 만두를 빚어낸 장인의 땀방울에 감동을 받고, 이 만두 하나가 사회 경제 구조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깊이 사색하기 시작했다면, 이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원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동이다. 독서를 통해 분석/비판/감동의 기회가 많아질 수 있으니, 당연히 독서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간이지만, 아무리 독서를 해도 분석/비판/감동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 속된 말로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있을 수 없다. (제이 에스의 영어, 언어학 이야기 사이트에서 퍼옴)

 

해석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석한다는 것은 앵무새처럼 그대로 외워대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자질을 꼭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자질 없이는 해석된 하나님 경험인 성경을 온전히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고정된진리로 착각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성경에만 가두어 놓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성경과 이 세계는 계속해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첫 번째 사명이고 자질이다.

 

반성직자주의는 요즘에 개독교또는 먹사로 대변된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다.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부르는 대중들만 탓하고 있을 수 있을까? 기독교와 목사를 그렇게 인신공격조로 욕하는 대중들을 세상 것들또는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몰아 부치며 신경 안 쓴다는 듯이 태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반성직자주의가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에서 왔듯이, 현재 한국교회가 외면 당하고 있는 이유가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분명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자질 부족 때문에 먹는 욕을 복음을 전하면서 겪게 되는 핍박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한자성어도 있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기 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예수의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목회자는 남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개혁하는 개혁의 주체이자 개혁의 대상이 스스로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돈세탁이라는 말이 있다. 더러운 옷을 세탁해서 깨끗한 옷으로 만들듯이 더러운 돈을 깨끗한 돈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더러운 옷을 세탁하면 깨끗한 옷이 되지만 돈은 세탁한들 깨끗해질 수 없다는데 있다. 돈을 더럽게 번 사람들은 이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그 돈을 세탁시켜 쓰려한다. 한 마디로 도덕 불감증에 걸린 것이요 머리에 숯불을 곱빼기로 얹는 격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속담의 오용이다. ‘돈세탁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써 먹는 방법이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이다. 본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하여 돈을 세탁하는 방법이다. 자신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뒤가 구리다는 뜻이다.

 

요즘 김태근 씨의 죽음과 함께 떠오른 인물이 이근안이라는 사람이다. 김근태 씨는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을 한 혐의로 당국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당국의 지시를 받아 김근태 씨를 모질게 고문한 사람이 바로 이근안 이다. 이 사람은 아직도 군사독재시절 가장 악랄했던 고문기술자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사람은 군사독재가 끝나고 대한민국에 민주화 바람이 불었을 때 지난 날의 죄 때문에 7년 동안 철창 신세를 졌다. 그 때 김근태 씨가 장관의 신분으로 감옥에 찾아가 이 사람을 역사적으로 용서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 때 이근안은 장관 김근태에게 싹싹 빌면서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했단다.

 

7년 동안 철창 신세를 지면서 이근안은 자신의 과거를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고문 기술자라는 신분을 씻어낼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출옥과 함께 모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신분세탁이다. ‘고문 기술자이근안에서 목사이근안으로 신분이 바뀌었으니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신분세탁이 어디에 있으랴! 이후 이근안은 목사의 신분으로 세상에 나와 간증을 하고 돌아다녔다. 분명 지난 날을 회개한다는 명분하에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며 간증했을 것이다.

 

우리는 감옥에 갔던 사람이 출소 후에 목사가 된 일화를 종종 들어왔다. 그러나 감옥에 갔던 사람이 출소 후에 법관이 되었다거나 의사가 되었다는 일화는 들어본 적이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 법관과 의사는 마음 먹는다고 될 수 있는 직종이 아니다. 범죄 경력이 있는 자에게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지만 법대나 의대를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사실상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는 어떠한가? ‘마음만 먹으면다 될 수 있다. 범죄 경력이 있어도 상관 없을뿐더러, 신학대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신과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중등교육 이하의 노력을 기울여도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목사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감옥까지 갔다 온 역사적 죄인이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이렇게 극악무도한 자에게 목사가 되는 길을 열어준 신학교와 교단도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이나 이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다!” 나름대로 은혜로운 말을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목사는 어느 한 실증적 죄인의 신분세탁을 위해 존재하는 신분이 아니다. 성서에서 우리 인간을 일컬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실증적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목사가 될 수 있으며, 신학교와 교단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근안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목사의 직분을 더럽히지 말라. 목사직을 통해서 신분세탁한 이근안은 방법만 달랐을 뿐 이 땅에서 성실하게 목사직을 감당하고 있는 목사들을 고문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교회들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1. 성직자 권력, 평신도 권력에 무릎 꿇다

 

연말이 되면 방송사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떠한 스타에게 상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연말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을 먹어왔다. 시청자들에게 먹는 이 부담스러웠는지 언제부턴가 방송사들은 가수들에게 주던 상을 없앴다. 그리고 이름도 가요제전등으로 바꾸어 몇몇 가수에게 시상을 하기보다 가수들이 만드는 축제 형식으로 연말 시상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연예계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시상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지만 상을 퍼주는방식으로 연말 시상식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분석한 어느 기자는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는 사실상 방송 권력의 몰락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방송권력이 몰락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 비해서 방송사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위치로 내려 앉은 것뿐이다. 이는 스타권력이 방송권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옛날에는 스타들이 방송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지 못해도 방송사의 요청이 있으면 시상식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권력의 위치가 바뀌다 보니, 방송사가 스타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지 않으면 방송사가 주최하는 연말 시상식에 스타들은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스타의 권력이 방송사의 권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사는 스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상을 퍼주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청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방송사로서는 이러한 궁여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송계의 권력 이동 현상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의 이동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연말이 되면 교회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떠한 성도에게 직분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연말에 열리는 당회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시험에 드는 성도가 생기고 한동안 교회가 시끄러워 진다.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겪는 목회자의 고통은 참으로 가혹하다. 연말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위장병에 걸릴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직분을 퍼주기시작했다. 직분을 주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두 가지 현상을 말해 준다. 첫째, 평신도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섰다는 것이다. 둘째, 더 이상 직분은 충성된 주님의 일꾼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목회에 대해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자. “왜 목회가 이렇게 힘 드는가?” 목회의 업무가 너무 고되어서? 일하는 것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어서? 설교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결국 이것 아니겠는가? 목회가 힘든 근본적인 이유는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에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교회의 권력 구조에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고 있는 구조에서의 목회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병폐를 낳는다. 첫째, 복음이 정직하게 선포되지 못한다. 기독교의 성경은 근본적으로 부활신앙을 증거한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부활신앙보다는 눈에 잘 보이고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 바알신앙을 원한다. 이것은 평신도를 폄하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바알신앙의 위험성을 알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주문하셨으나 결국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 좇다가 패망하고 말았다. 백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고관들이나 제사장 그룹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주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알신앙을 주고 말았다. 이것이 예언서에서 그토록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고관들과 제사장 그룹을 비판하는 이유다.

목회자가 일반 평신도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 이와 똑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부활신앙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힘들고 어려운, 그래서 현실의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는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바알신앙을 전파하게 된다. 이것은 이미 교회성장번영신학이라는 현대 교회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증명된 사실이다. ‘교회성장은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집단이라는 증거이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삶도 번영하게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갖게 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 교회성장에 매달린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첫 번째로 갖추어야 할 요소가 멋진 예배당을 짓는 일이 된다. 성전 건축은 그 옛날 다윗 왕조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교회는 수십억, 또는 수백억, 수천억 원의 은행 빚을 떠안고서라도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성건 건축이 교회성장의 기초요 번영하는 삶의 보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둘째,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게 되면 목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 운동이 되지 못하고 사교 모임이 되고 만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례 요한이 그랬듯이, 예수께서 그랬듯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회개를 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세례 요한이 그리고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이것 아닌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불의와 맞서 회개를 외치다 그것을 듣기 싫어하는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게 되면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기 보다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권력을 쥐고 있는 평신도에게 잘 보이고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과 귀를 거스르는 행동과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못하게 되고, 그들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결과다. 권력을 쥐고 있는 평신도가 교회를 나가게 되면 목회자는 당장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니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그래서 목회자는 권력자인 평신도를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 연말에 있는 당회에서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분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가 평신도 권력에 협상할 수 있는 카드가 직분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은 더 이상 섬김의 자리, 충성의 자리,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평신도 권력에 부응해 주는 당근밖에는 되질 않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평신도 그룹을 너무 폄하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밝히 건데,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평신도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는 글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에 대해서 분석하는 글이다.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설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설지라도 평신도가 성령 안에서 깨어 있다면 오히려 성직자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게 되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 볼 때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을 앞서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중세 교회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성직자의 권력과 평신도의 권력이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어 대등하게 평화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직자의 권력과 평신도의 권력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권력의 평등은 나중 문제이다. 현 시점에서 시급한 것은 이것에 대한 반성이다: “왜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에 무릎 꿇게 되었는가? 어떻게 교권(성직자의 권력)을 회복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목회자들의 목회는 영영 힘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쓸데 없는 데다 에너지를 소비하다 결국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먹고 사는 데 급급한 삯꾼 목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교권의 회복 없이 목회는 자부심과 영광의 일이 아니라 영영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대림절에 대한 오해부터 짚어야겠다. 우선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이니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닌가하고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것 또한 성탄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의문일 뿐이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가 아니다. ‘초림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으로 오신 것을 뜻한다.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해보자. 예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셨는가? 물론 단순하게 대답하면 성탄절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예수께서는 정말 성탄절에 오셨는가? 이는 단순히 날짜를 따지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오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 유대땅에 오셨다. 그러나 이 오셨다는 깨달음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예수께서 여느 사람들처럼 이 땅에 태어난 그 사실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절기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다시 말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증거하기 위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성탄절과 짝을 이루는 절기는 대림절이 아니라 주현절이다. 성탄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 인간이시고 완전 신이시다 vere homo vere deus”라는 신학적 교리를 표명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오셨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날이 아니다. 12 25일이 예수의 생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지에 불과하다. 부활의 빛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생일은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복음서보다 훨씬 먼저 씌어진 바울 서신에서는 예수의 부활만 증거될 뿐 예수의 육신적 출생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대림절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계속 해 보자. 대림절이 성탄절과 관계가 없다면, 그렇다면 대림절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대림절은 오히려 창조절과 관련이 깊다.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절기인데 이는 아직 한국교회에 생소한 절기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 사건이다. 그러므로 창조절은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돌아보는 절기이다. 이 절기에는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절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 들여다 보아야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정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려는 방식은 우리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한계이면서 아픔이고 뚫고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미국의 근본주의 사상을 지닌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전수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미국의 종교사,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의 미국 대부흥 운동을 살펴보면 된다. 이는 몰트만의 저서 <오시는 하나님>역사적 종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언급되는 문제이니, 그 책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될 거라 생각한다.

 

구원은 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즉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구원을 설명하면 구원이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구원은 바로 생명의 완성인 셈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은 생명의 완성 사건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초림에서 일어난 구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생명 사건이, 이 생명을 완성시킨 구원 사건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구원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생명의 완성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의 완성이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신비라는 뜻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길들여 진 세상은 아직 눈에 보이도록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구원(생명의 완성)이 손에 잡히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묘연한 것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해 진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설명하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한다.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은 우리에게 희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1). 믿음이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구원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초림이 은폐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 땅 위에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의 재림은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완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알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궁극적 생명의 완성이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때이다. 대림절은 바로 이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절기이다.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는가? 부활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 생명의 완성이 일어나는 때,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 그 날이 오고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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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종말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주제다.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 없이 신앙의 말썽꾸러기로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해 둘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노릇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뼈 속부터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소망은 현세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 여기 말하는 이 미래가 바로 종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종말또는 미래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정리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채 기독교인들에게 전달되는 데 있다.

 

종말이란 무엇인가?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우리와 이 세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성도가 이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할 때, 이것을 정확하게 또는 건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을까?

 

사실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종말을 묻는 성도도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세에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목회자들도 종말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없다. 묻지도 않는데, 뭣 하러 대답하겠는가? 서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듯이 묻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고, 그저 이 땅에서의 번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를 기독교로 머물지 못하게 하고, 여느 종교나 특히 한국 역사와 한민족의 정서에 면면히 흘러온 샤머니즘으로 통합시키는 영적 간음이다.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되었는가?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그 이유를 분명하게우상숭배로 드러내고 있다. 우상숭배라고 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좇아갔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지 못하고, 이방신과 더불어붙들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지적하는 우상숭배, 종교적 혼합주의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가 종말에 대해서 질문도 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근슬쩍 기독교를 혼합주의로 밀어 넣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 기독교의 존재 근거를 허무는 죄요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하는 죄요,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걷어 차 버리겠다는 것을 말한다. ‘종말을 묻지 않겠다는 것은 곧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다.

 

종말이 무엇인지, 그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에 대한 건전한 대화는 오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성도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순종케 만드는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기독교의 토대인 신학적 주제로서 종말에 대한 건전한 대화가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하다. 그래야 더 이상 종말론이 신앙의 말썽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종말론을 가지고 장난치는 이단이 이 땅 위에서 더 이상 발 딛고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야 기독교가 기독교의 면모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남아공 월드컵 경기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경기는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였습니다. 두 팀 모두 8강 전에서 꼭 이겨야 하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우루과이는 과거 두 차례나 월드컵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지만, 그야말로 ~ 옛날이여~’의 추억에 불과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4강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는 아프리카 대륙의 첫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첫 4강 진출이라는 역사 만들기를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나가 이기기를 바랬습니다. 의미 면에서 가나의 4강 진출이 더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의 월드컵은 너무 유럽과 남미의 독식으로 채워졌습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아프리카에서의 월드컵이 처음이라는 것도 매우 불공평한 일이었습니다. 축구라는 스포츠조차도 힘 있는 자들의 안방에서만 즐기는 축제였으니까요. 가나의 승리로 끝나기를 바랐던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는 우루과이의 공격수 수아레스의 터무니 없는 핸들링 반칙으로 우루과이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 1로 본 경기를 끝내고 연장전을 치르고 있었을 때 가나의 공격수가 헤딩으로 골문을 향해 질러 넣은 공을 수비하던 우루과이의 공격수 수아레스가 손으로 그것을 막아냈습니다. 이로 인해 수아레스 선수는 퇴장을 당하고 가나는 페널티킥을 얻었지만 가나 선수의 실축으로 인해 결국 승부차기까지 갔고 승리의 여신은 우루과이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경기였습니다. 새로운 아프리카의 역사가 한 사람의 반칙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반칙하는 사람 때문에 올바른 또는 더 의미 있는 길로 들어서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역사도 가룟 유다라는 한 제자의 반칙 때문에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에 들어 쓰셨지요. 눈 앞에 있는 당장의 이익 때문에 저지른 반칙이 얼마나 크게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지, 우루과이의 공격수 수아레즈의 핸들링 반칙을 통해서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루과이에서는 수아레즈가 영웅이 되었다고 하지만, 반칙으로 영웅이 되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아레즈가 반칙하지 않고 골문으로 들어가는 골을 그냥 놓아두었더라면 그는 새로운 아프리카 역사에 동참한 보이지 않는 더 큰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반칙으로 인생을 살지 말고, 좀 손해 보더라도 예수님처럼 그 길을 정정당당하게 걸어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욕심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욕심은 다산의 여왕입니다. 욕심은 끝장을 봅니다. 한국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가졌던 욕심은 16강이었습니다. 막상 16강에 진출하고 보니, 8강을 넘어 4강까지의 욕심이 났습니다. 온 국민이 갑자기 욕심꾸러기가 된 것이지요. 우루과이와의 16강 전에서 패했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졌을 때, 감독과 선수들, 그리고 졸린 눈 비벼가며 응원했던 모든 국민들이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욕심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눈물은 욕심의 눈물이지, 아픔의 눈물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슬픈 눈물은 아닌 것이죠.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54년도 스위스 월드컵 때였습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그 때, 한국 선수들은 고생고생해서 스위스에 도착했는데 처음 경기를 앞두고 불과 12시간 전에 도착했습니다. 심신이 총체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헝가리와의 처음 경기에서 9 0으로 대패하고, 터키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7 0으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아직도 이 경기들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후 한국은 32년 동안 월드컵과는 상관 없이 지내다가 1986년이 되어서야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다시 진출합니다. 한국의 펠레 차범근 선수와 진돗개 허정무 선수가 이 대회에 출전합니다. 그러나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습니다. 예선 탈락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한국 축구는 새로운 역사를 써가기 시작합니다. 그 대회 이후 2010년 남아공 월드컵까지 7회 연속 월드컵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웁니다.

 

2002년에는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개최까지 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4강의 신화를 일구긴 했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16강에 진출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한국 축구 역사 상 한 획을 긋는 소중한 대회였던 것이죠. 타국에서 처음 맺은 16강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 대표팀이 쓴 새로운 역사는 1954년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을 때 겪었던 굴욕을 말끔하게 씻어준 아름다운 도전이었습니다. 8강 행이 좌절되었다고 좌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건 애초부터 욕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축구가 그 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온 세계에 당당하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기대해 봅니다.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도전입니다. 믿는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벌써 포기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도전 중이십니까? 성령의 도우심이.


Posted by 장준식

비극.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극이 아니면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의 희곡 중에서도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유명하고 재미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 같은 비극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면 비극은 왜 연출될까요? 대부분의 경우가 욕심 때문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이런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르헨티나에게 4 1로 패배한 사건입니다. 축구 전문가들은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을 감독의 전술 실패로 꼽지만, 인간의 심리 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목사인 제가 보기에는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은 분명 욕심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축구 실력은 차이가 납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적인 선수가 즐비합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메시를 비롯해 이과인, 테베스, 베론 등, 이름만 들어도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 즐비합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이런 점을 겸허하게 수용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변을 일으켜 보겠다고 하는 욕심이 이러한 점을 간과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24년 전, 한국 팀의 허정무 감독과 아르헨티나 팀의 마라도나 감독의 악연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방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24년 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허정무 선수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여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로 나왔던,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던 마라도나 선수를 전담 마크했었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마라도나 감독은 한국 선수가 태권도 축구를 했다고 비아냥댔고, 허정무 감독은 그건 태권도가 아니라 축구였다고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허정무 감독에게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첫 번째 경기였던 그리스 전에서 상당히 좋은 경기를 펼쳐 그리스를 이긴 선수들도 한 번 해 볼만하다고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기가 과했고, 자신감이 과했던 것이죠. 박지성 선수도 아르헨티나에게 패배라는 충격을 안겨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죠.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이겨보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욕심이 앞서면 상황 판단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한국 팀의 욕심의 결과는 4 1, 대패였습니다. 비극입니다. 한국 팀은 아르헨티나 팀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승패와 상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겠다는 지나친 욕심은 대패의 비극만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상황 파악에 혼선을 주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극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비극만 낳는 욕심, 십자가에 못박읍시다.
Posted by 장준식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 축구사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때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입니다. 그 이후 한국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기록을 세우며 지금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선수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몇 없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가장 유명했고, 지금 현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허정무 선수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때만해도 우리 나라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며 월드컵에 출선했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의 벽은 너무도 높았었죠. 예선에서 모두 패하며 예선탈락하고 맙니다. 차범근 선수 같은 특출한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지만, 그 선수 한 명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축구는 협동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만 잘해서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골고루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 한국 축구팀의 전체적인 실력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간 덕분에 한국은 4강 신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2002 월드컵 때 한국 선주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출한 선수는 없었지만 모든 선수가 골고루 기량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적이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장면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한국 축구가 발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선수도 다수 보유하고 있고, 전체적인 기량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16강 이상)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죠. 단순한 몽상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짜릿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누구 하나의 특출한 믿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영성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사 시대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와 같은 놀라운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번성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없어도,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이 한 마음을 이루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협동정신을 키워야 합니다.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은혜 받고, 나 혼자 하늘의 복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몸이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영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이 일정 수준의 영성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름이 되어 주고 힘이 돼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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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5:12).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의 초보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히브리서 공동체(교회)를 향한 질타입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5:13), 아직도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는 존재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기능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존재 자체가 아직도 어린 아이의 인격 수준에 머문 사람은 몸이 커도 여전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뒤치다꺼리 하게 만듭니다. 기능의 차원에서도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뭔가 창조적인 일, 남에게 힘이 되어 주고 아름다움을 생산해 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께 받은 약속, 기업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그 땅은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약속, 기업)을 이룬 것이죠. 신앙 생활에서 믿음의 성장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기업(구원)을 지켜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오해를 합니다. ‘한 번 믿고 나면 구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절대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지만, 배교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밖으로 애써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는 구원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가 시간이 지나 대놓고 그 은총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즉 배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6:6)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곳곳에서 믿는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도(말씀)를 배워야 하며, 구원을 기업으로 받은 자답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에 긴장하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교회가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