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지역은 많이 무덥고 약간 습한 지역이라 곤충들 천국이다. 개미, 거미, 터마이트, (호넷, 범블비), 실버피쉬, 바퀴벌레 등 수 없이 많은 곤충들이 각자 좋아하는 처소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뽑내며 산다.

 

그 중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감을 주는 것은 단연 바퀴벌레다. 평소에 나를 별로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 집사람도 내가 바퀴벌레를 잡아줄 때는 멋있단다. 어느 아티클에서 보았는데, 바퀴벌레는 컨트롤만 할 수 있을 뿐 완전 박멸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 중 하나인 바퀴벌레의 위엄이 담긴 보고다.

 

많이 무덥고 약간 습한 환경에서는 곤충 뿐만 아니라 그들의 포식자인 도마뱀도 기승을 부린다. 그런데 도마뱀은 곤충들과는 달리 눈에 잘 띄지 않을 뿐더러 인간 생활에 특별한 위해를 가하지도 않는다.

 

우리 교회는 바퀴벌레가 득실될 수 있는 환경을 지녔다. 건물도 오래됐고, 주변엔 숲이고, 예비시간이나 모임이 없는 동안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타지 않는 환경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바퀴벌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 동역하고 있는 도마뱀 때문이다. 교회를 처소 삼아 살고 있는 도마뱀은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움찔할 정도로 꽤나 크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둘이 나누는 겸연적은 인사이다. 도마뱀도 나를 신경 안 쓰고, 나도 도마뱀을 신경 안 쓴다.

 

사실, 덫을 놓아 도마뱀을 잡을 수도 있으나, 나는 몇 년 전부터 도마뱀을 그냥 살려두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도마뱀 덕분에 교회에 바퀴벌레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마뱀은 사람들 앞에 자기의 존재를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쓸모가 있으면 살아남는 법인 것 같다. 만약 도마뱀이 바퀴벌레를 잡는 데 쓸모가 없었다면 이미 도마뱀은 제거당했을 것이다. 도마뱀은 사람들에게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그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도마뱀은 나의 신실한 동역자이다. 만약 도마뱀이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나는 바퀴벌레를 잡느라 노동력을 써야했을 것이고, 교회의 예산을 거기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뱀 덕분에 나는 나의 사역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몇 년 동안 자기의 일을 묵묵히 잘 감당하고 있는 도마뱀에게 올 연말 '집사 직분'을 내릴까 한다. 그는 그냥 도마뱀이 아니라, 도마뱀 집사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Posted by 장준식

곡성(谷城)의 곡소리(哭聲)

ㅡ 영화 곡성을 보고

* 주의: 핵심 내용이 스포일러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영화를 본 뒤 읽어보세요.

 

영화 제목은 곡성(哭聲)이지만, 촬영지는 곡성(谷城)이다. 곡성의 곡소리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들려오는 곡소리이다. 원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는 곡성이 아니라 함성(야호~)’이 들려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곡성에서 곡소리가 난다

 

영화는 성경 말씀을 띄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누가복음 2438-39). 실제 영화에서는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의 구절이 빠져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37절부터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 누가복음 37절의 말씀은 없다. 빠진 그 부분은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이다.

 

곡성은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누가복음의 말씀이 모티브를 이룬다. 영화가 모티브로 사용하는 말씀은 예수가 부활한 뒤 열 한 제자(원래는 열 두 제자이지만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은 상태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평안을 빌며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산 자의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이 여전히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이 고난당하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무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 눈 앞에 나타난 예수가 인 줄로 알았다.

 

사실 누가복음에서 콕 짚어서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24:37)고 명시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그 당시 예수의 부활을 놓고 논쟁을 벌이던 이단사설에 대한 반박 때문이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제자들이 본 것은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환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름으로 초대 기독교 사이에 널리 퍼진 이단사설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의심믿음의 적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의심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이다. 인류의 역사는 의심과 배신의 역사라 불러도 될 정도로 의심과 배신에 의해서 생명을 망치고 그르쳐 왔다. 영화는 바로 그 의심과 배신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있는 다른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10:23).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복된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산 좋고 물 좋은곡성(谷城)에서 곡소리가 난다. 평온하던 마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살인 사건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슴 아픈 존속살인사건이 줄을 잇는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과 점차 얽혀 드는 한 경찰(곽도원 분)의 의심과 의심이 드는 일본인(준 쿠리무라 분)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건의 전말은 밝혀진다. 그 사이에 전혀 의심이 안 가는 미친사람, 무명(천우희 분)이 있다.

 

절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의심 없이따라간다. 종구(경찰관, 곽도원 분)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리자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의 의심을 물리치는 그 무당의 이름은 일광’(황정민 분). 사람들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을 귀신에게서 구하고자, 마을에 감도는 액운을 떼어내고자 종구는 일광의 말 대로 큰 굿 판을 벌인다. 일광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엄청 기가 센 귀신이 붙었다.

 

영화를 보면 그 귀신이 바로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광이 바로 그 일본사람 귀신을 내쫓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중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편집의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신명 나게 굿판을 벌이는 일광과 교차되는 장면은 자신의 은신처에서 자기의 방식대로 굿판을 벌이는 일본사람 귀신의 모습이다. 일광의 굿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맞춰 일본사람 귀신은 일광의 굿판에 일격을 당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감독의 명백한 트릭이다. 편집이 가능한 영화(영상)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사실, 일광과 일본사람 귀신은 한통속이다. 감독은 일광의 환복(換服) 장면을 통해 그 복선을 깐다. 일본사람 귀신이 입고 있는 팬티와 일광이 입고 있는 팬티는 같다. 그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굿판을 벌인 것은 그들이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무명(미친사람, 천우희 분)이다.

 

지금은 모든 불결한 것을 분리시켜 가두어 놓는 시대(미셸 푸코)이기에 정신병원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미친사람이 영화에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끌어다 쓴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미친사람은 거라사 광인을 생각나게 한다.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8:28).

 

무명(천우희 분)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인물이다. 사건 현장에 나타나 돌을 던지며 주목을 끌어보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녀가 사건 전담 경찰인 종구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말해주지만 결국 그 말을 믿은 종구조차도 동료 경찰과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는다. 사람들 모두가 외면하고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무명은 그저 미친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복된 사람이다.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의 적()의심 많은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꿰뚫고 있는 무명이었다. 일본사람 귀신은 자신을 섬기고 있는 일광을 불러들여 무명을 향해 협공을 날리지만 결국 의심 많은 종구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그것 때문에 분노를 품은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은 종구의 가족에게 비극을 안겨주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것을 막을 수 있은 존재는 오직 무명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두 장면이 오버랩 된다. 하나는 가족을 필사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종구와 무명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사람 귀신을 물리치고자 그의 은신처를 한 방 중에 홀로 찾아간 가톨릭 부제(신부가 되기 전 단계에 있는 성직자)와 귀신의 만남이다. 이 두 장면에서 의심의 모티브는 극적으로 작용한다.

 

종구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어느 골목에서 무명을 만난다. 무명은 종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가족을 구하려면 이웃집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절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말한다. 종구는 의심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명을 대면한 탓에 기겁을 해서 도망치던 일광은 종구의 갈등을 깨는 역할을 한다. 무명은 종구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무명은 종구에게 의심을 품지 말고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을 주문한다.

 

부제는 귀신에게 속은 것에 분해 귀신을 물리치고자 용감하게도 귀신의 은신처를 찾아 간다. 부제는 은신처에서 좌정하고 있는 일본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귀신이라는 것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꾸짖는다. 그런 부제에게 귀신은 메시지를 전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이 말에 부제는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귀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확신에 의심을 갖는다.

 

종구는 무명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을 의심했어야 한다. 종구는 무명의 말을 믿었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없었다. 종구는 결국 의심하지 말아야 할 무명을 의심해서 그녀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의심은 결국 그의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다. 부제는 결국 의심해야 할 일본사람을 의심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확신을 의심한 탓에 귀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귀신의 또다른 희생자가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곡성(谷城)에서 나는 곡소리(哭聲)는 연약한 인간이 자처한 곡소리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인간은 믿어야 할 것에 의심을 두고 의심을 가져야 할 것에 믿음을 두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산 좋고 물 좋은 곡성에서 곡소리가 아니라 함성소리(야호~)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종구는 의심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부제는 믿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의심은 이토록 생사를 가르고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살인마(귀신)’와 같은 것이다. 예수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우리는 어떠한가. 종구와 부제처럼,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파멸과 구원을 오락가락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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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초월적 질서에서의 해방

 

"초월적 질서에서의 해방, 즉 종교적 기초 위에 세워진 모든 전제에서의 해방이 근대 정치의 본질적 특징을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자본이 새로운 초월성으로,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하는 순간 버려진다. 정치는 이로써 다시 노예 상태에 빠지고 만다. 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 된다"(심리정치, 18).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종교의 본질은 '해방'인데, 역사를 보면 종교가 '억압'으로 작용해 왔다. 그래서 근대의 혁명은 억압적인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꿈꿨고 이루어냈다. 그런데 역사는 '자유'로 귀착하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억압'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이다.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종교가 초월적인 질서를 제공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했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자본이 초월적인 질서를 제공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 시대는 종교조차도 자본의 초월적인 질서안으로 재편된 것 같다. 다시 말해, 종교는 자본과 싸움이 안 된다.

 

지금 시대는 한 편의 <메트릭스>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자본이라는 메트릭스에 종속된 모든 인류와 모든 사회 시스템, 그 안에서 세상은 꿈꾸듯돌아간다. <메트릭스> 영화에서 보듯, 개인(인류)은 자신이 착취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착취 당한다. 자본이 절대권력인 세상에서 개인(인류)는 자기 자신이 착취 당하는 것조차 모르며 꿈을 꾸듯하다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

 

종교는 이제 오랜 세월 동안 초월적인 질서를 아래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인류와 역사에 말할 수 없는 해악을 끼쳐왔던 것을 반성하며 그것에 대한 죄값으로 자본에 억눌림 당하고 있는 인류와 역사의 해방을 위한 전사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묘연해 보인다. 자본에 잠식된 종교가 이미 그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형편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갈팡질팡 마음만 바쁘다.


Posted by 장준식

할 수 있을 수 없음

 

시인이 따로 없다. 철학자는 곧 시인이다. 시인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끔, 보이는 세계 뒤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난 한병철은 철학자이라기 보다 시인이다. 그는 철학의 언어로 정확하게 시인의 임무를 해내고 있다. 놀랍다.

 

그가 폭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해야 한다의 타자 착취 사회가 아니라 할 수 있어야 한다의 자기 착취 사회이다. 에고는 타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강요를 당하면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일차적으로 에고는 거기에 대해 저항한다. 그러나 한병철은 신자유주의체제 내에서는 해야 한다의 형태로 타자에 의한 강요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의한 강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일에 대한 동기가 타자에 의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생기기 때문에, 에고는 이것을 타자에 의한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내적동기에 의한 자발적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의 내적 동기에 사로잡힌 에고는 주어진 일에 대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 착취가 일어나고 결국 자기탈진(소진)을 필연적으로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할 수 있어야 한다에 대하여 만약 에고가 할 수 없다고 곧바로 대항하면 이는 타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 낙오의 의미가 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자기 모멸감이 발생하여 결국 에고는 우울증이나 신경증환자로 전락하여 종국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한병철은 할 수 있어야 한다에 대한 저항은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할 수 있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데, 그것에 대한 부정은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타자에 의한 착취는 저항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의한 착취는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해야 한다는 구호를 감추고, ‘할 수 있다는 구호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자발성을 이끌어 내며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조성하여 스스로 자발적인 착취가 일어나도록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착취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자기를 착취하느라 자기를 소진하고 있다. 성과가 없으면 다른 이를 탓하지 못하고 부족한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할 수 있다의 구호 아래 자기 착취를 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내의 사람들은 자기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면 무능력한 낙오자가 될까 봐 밤낮으로 자기를 달달 볶아 댄다. 탓하거나 저항할 상대(타자)가 없기에, 그는 그저 자기 자신만 탓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참으로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적이 없기 때문에 저항할 수도 없고, 공공의 적을 향해 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우울하고 외롭다. 더 끔찍한 현실은 자신이 지금 그러한 사회 체제 내에서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 아래 내일을 향해 희망을 품고 열심히달려가지만, 결국 인생의 끝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런 비극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소멸되어 가는지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끝장나버리는허무한 삶에서 탈출하여 인생을 의미 있게 마루리지을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어떠한 체제 내에서 살고 있는지를 충분히 숙지하는 일부터 필요한 것 같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니오(Neo)’가 결국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오듯이, 그러한 깨어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신실한 동지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나는 그 길을 간다.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교회

 

198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데모'였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취업'이었다. 현재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생존'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낭만'이 있었고,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이 있었다.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린다.

 

1997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왕은 '금융자본'이다.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이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대항해야 할 ''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심리정치 13).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서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해야 한다'는 외적 강제 대신 '할 수 있다'는 내적 강제를 통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착취를 하게 끔 유도한다. '할 수 없다'며 내적 강제인 '할 수 있다'에 저항하는 자는 무능력한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데모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넘어야 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따로 각자 알아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자기계발에 힘을 쏟을 뿐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동기,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 신자유주의 체제에 묶여 있는 주체이다. 한병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심리정치 11). 여기서 존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한한 자유 경쟁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 당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다”(같은 책 12). 결국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인은 우울할 뿐이다.

 

고립에 의한 우울증과 자기 착취에 의한 소진증후군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안정제역할을 하는 데서만 머문다면 마르크스가 했던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종교는 아편이다.”

 

해방과 자유는 기독교의 존재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현재 당하고 있는 억압과 죽음의 상태에서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이지 현재의 불의한 체제를 견뎌내게 하는 안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은 사회 전복 사건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한 마음의 안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개인의 그 어떠한 고립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십자가는 자기 해방이지 자기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누리는 참된 자아의 실현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 있는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경험하는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위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를 돌려주도록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를 해체시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한다. 자칫 하면 복음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할 수 있다를 더 강화시키는 데 오용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위험성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복음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해방시키는 데 올바로 사용되도록 선지자적 목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역사는 소통이다

- 걸그룹 AOA '안중근 사건'을 보고

 

역사는 해석이다. 해석은 소통의 핵심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해석된다. 안중근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겠으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영웅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에서 보듯이, 영웅은 한 집단을 규합하는 윤리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 집단에서 영웅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규범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안중근은 단순한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웅이다. 그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걸그룹 AOA의 지민과 설현이 예능프로그램에서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뭇매'를 맞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문제를 못 맞힌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윤리'의 범주를 벗어났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들과 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역사는 소통의 핵심인데, 그 핵심을 잃어버렸으니 비난의 화살이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안중근에 대한 역사의 해석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갈등은 해석의 불일치에서 온다. 아직까지도 5 18일만 되면 '광주민주화투쟁'을 놓아두고 정치적 갈등이 불거지는 이유는 그 사건을 애써 다르게 해석하려는 불온한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역사 공부를 하며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나라의 소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장사를 해서 돈벌이를 하더라도 '소통'에 실패하면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한다. 아이돌 그룹을 통해 장사하는 연예 기획사나, 아이돌 그룹의 당자자들도 이 점을 꼭 숙지해야 한다. 노래하고 춤추는 '예쁨' 자체는 소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대중들의 소비재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소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떠받쳐주는 '소통'이다.

 

소통에 실패하면 누구나 괴롭다. 인기가 치솟은 걸그룹으로서 뭇매를 맞아 괴롭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무엇이 진정한 소통인가를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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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21세기 과학시대의 기독교

 

인간은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가령 신화적 세계관과 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과 과학적 세계관과 탈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과 가치관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해이다(이를 종말론 또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역사발전을 논했고,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헤겔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마르크스도 역사발전의 주체를 투쟁계급(프롤레타리아)로 정했을 뿐, 큰 틀에서 역사발전의 방향에서는 헤겔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보면서, 그리고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대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인간 지성은 이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새로운 종말론의 도입을 갈망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이고, 그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말의 시대를 열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트는 종말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의 사후, 그의 종말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이가 몰트만이다. 다행히도 몰트만은 바르트의 맥락에서 기독교 종말론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제는 바르트에서 시작해 몰트만에서 완성된 기독교 종말론만으로는 이 세계의 종말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이점을 간파한 몰트만도 바르트의 맥락에서 완성시킨 종말론 이후에, 과학과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기독교신학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그래서 나온 책이 <과학과 지혜>이다).

 

우리는 어떻게 끝을 맞게 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재림이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거라고 주장하지만, 과학적 발견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독교의 그런 주장에 대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과학의 발견에 의하면, 예수의 재림이 아니더라도 45억년만 더 있으면 태양이 수명을 다해 어차피 태양의 폭발과 함께 지구는 끝을 맞이 하게 된다.

 

게다가, 구글의 미래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에 의하면, 인류는 2029년 정도 쯤 눈부신 과학기술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될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은 과학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과 어떻게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이게 단순히 성경을 들이대며 과학의 주장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지금도 '창조과학회'라는 꼴통보수 집단을 필두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신학은 확정된 진리가 아니라 '되어져 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과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절대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사이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어떠한 세계관과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뭘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예수의 재림과 함께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게 될 거라면 우리는 뭣하러 우리의 인생을 열심히 살겠는가? 광신도들처럼 다 집어치우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 될 것을.

 

반대로, 과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45억년 후에 생명이 자연적으로 멸망 당하게 되거나,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곧 영생의 순간을 맞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 기독교의 종말론(구원론)은 과학의 종말론(구원론)과 어떠한 일치도 없으며 오직 적대적인 관계를 견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과학시대를 살아가며 과학이 주는 편리와 풍요를 다른 인류와 똑같이 누리며 사는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과학이 말하는 종말과 영생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가 과학의 문명을 누리면서 과학의 성과에서 비롯되는 문제제기를 등한시한다면, 이는 물 속에 살면서 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 안 하다가 물이 더러워져 또는 물의 환경이 변해 거기에 적응 못하고 죽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는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오직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자만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을 좋아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 교회는 의지력만 기르고 있을 뿐, 그 어떠한 개념 확립에도 매진하고 있지 않다. 체질은 의지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개념의 확립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줄 개념, 즉 세계관과 가치관의 확립이다. 21세기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게 될 것인가?


Posted by 장준식

미주특별연회 해법

 

시대는 정책을 낳고 정책은 개인들의 삶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자본주의, 가나출판사, 381). 지금 미주특별연회는 총회에서 얻은 자치법 마련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 정책을 낳아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는데, 개인들의 삶(교회와 목회자)을 지배할 정책을 정의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세계는 지금 고장난 자본주의를 어떻게 고쳐서 써야할까, 고민이 크다.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인류가 자본주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정부도 아닌, 시장도 아닌, 자본주의를 이끌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중심에 국민이 있다. , 국민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이른바, 복지자본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복지란 미래 불안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다. 복지자본주의란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실수의 가능성과 불운을 염두에 두고,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사회가 복지자본주의이다.

 

실패하면 끝인 사회에서 창의가 나올 수 없으며, 창의가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결국 쇠퇴하게 되어 있다. 한국 사회를 말하기 전에, 다른 교단을 말하기 전에, 감리교단을 먼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질문해 보자. 감리교회는 어떠한 복지를 가지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어떠한 사회안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실패한 목회자를 어떻게 끌어 안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젊은 목회자들이 실패를 생각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돕고 있는가?

 

이 문제를 미주특별연회로 좁혀서 생각해 보자. 기독교대한감리회 미주특별연회 소속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영세하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영세하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삶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중직을 가진 목회자가 허다하고, 목회자 사모가 목회를 돕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바깥에 나가 일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 교회는 전쟁터일지 모르나, 이민교회는 지옥이다. 전쟁터에서는 이길 경우 전리품이라도 챙길 희망이 있지만, 지옥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할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은 과연 희망적인가? 미주연회 발전위가 상정한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을 보면, 최대의 쟁점은 교구제와 감독선거법이다. 교구제는 그동안 연회 안에 존재해 왔던 갈등의 해법을 자처하며 연회를 태평양 교구와 대서양 교구로 둘로 나눠 총리사(가칭)’를 두어 치리 하는 법안이다. 감독선거법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법을 차용하여 선거인단을 구성해 감독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선출한다는 법안이다.

 

지금 미주특별연회는 연회를 앞두고 이 법안들에 대하여 찬반의견이 뜨겁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뜨거운 논의는 법안 자체보다 법안 처리를 앞두고 연회회원권을 둘러싼 행정처리이다. 자치법안을 상정한 상황에서 자치법안 통과를 놓아두고 그 법안을 통과시킬 연회원 자격 문제가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일단, 전년도 1231일까지 연회부담금과 본부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에게는 회원권이 없다. 그리고 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는 연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으므로, 연회 회비 자체를 받지 않는다. 게다가 연회 회비는 당일 접수가 전혀 되지 않고 연회 이전에 지방회 회계를 통하여 일괄 접수된 것만 유효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이번 연회에서 연회원의 자격을 박탈 당한 회원의 수가 거의 절반이 된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통계 낼 수 없는 부분이므로 잘못된 계산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미주특별연회는 연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여러 지방에서 성명서를 내는 등, 열기가 뜨겁다. 연회원의 상당수가 참여하지 못한 표결에서 결정된 정책이 얼마나 실제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갖는 것이다. 또다른 갈등이 발생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복지자본주의를 고민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감리교회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사회안전망을 확대하여 실패한 이들이 재기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 마음껏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만들어 가는 이 시대에, 지옥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은 무슨 정책을 담아내고 있는가?

 

인도 야무나 공원의 마하트마 간디 추모 공원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악덕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연회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이다. 연회의 정책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이다. 자치법 마련을 앞두고 미주특별연회에 필요한 것은 헌신이 아니라, ‘철학이다. 철학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이다. 철학 없는 정치는 교회(교단)를 망하게 하는 첫번째 요소이다. 교구제와 감독 선거법이 쟁점인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에는 어떠한 철학이 담겨 있는가? ‘철학은 없고, 혹시 예수님이 왕국을 세우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던 야고보와 요한처럼 자리에 대한 탐욕만 있는 것은 아닌가?

 

미주특별연회의 자치법은 지옥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연회원들의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자치법, 창의적인 목회를 도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는 자치법, 복지목회의 신학이 담긴, 일선 목회자가 중심인 자치법이 절실하다. 그러한 철학,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정되고 선포되는 미주특별연회의 자치법은 연회원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주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름다움에 눈 멀다

 

T. S. 엘리엇이 말하기를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내가 지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4월에 오고 싶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자연은 겨우내 꽁꽁 숨겨 놓았던 생명의 숨을 트면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기 때문이다.

 

4월이 되면 꽃집이나 정원을 따로 찾아갈 필요 없이, 사방천지가 꽃잔치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밀려오는 아름다움은 숨을 멎게 할 정도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다른 곳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오직 아름다움의 대상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4월이 피워내는 아름다움에 눈 멀고 보니, 아름다움이 내게 말을 걸어 온다. 무엇이든지 말을 건네 올 때 그 신비가 벗겨지며 존재가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움은 결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초월성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저만치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움을 발견한 자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름다움에게로 시선과 생각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 발견한 자가 아름다움에게로 다가서는 게 아니라, 발견된 아름다움이 발견한 사람에게로 다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내재성이다. 아름다움은 저만치 있지만, 발견되고 나면 어느새 곁으로 온다.

 

아름다움과의 만남은 수고와 위험을 동반한다. 곁으로 다가온 아름다움은 나도 모르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게 하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수행하도록 이끈다. 마치 베드로가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바다 위를 걷듯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활을 경험하듯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롭고 새로운 세계를 누비게 된다.

 

아름다움에 눈 머는 일은 달콤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 눈이 멀어 있을 때 겪게 되는 모든 수고와 위험은 아름다움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벗어났을 때, 눈을 다시 뜨게 될 때,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을 느껴 바다에 빠지듯 삶의 수고와 위험 속으로 매몰되고 만다.

 

궁금하다. 무엇이 진짜 삶의 현실일까.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며 매일의 삶 가운데 지쳐서 사는 게 삶의 현실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눈 멀어 수고와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게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사는 게 삶의 현실일까.

 

분명한 것은, 아름다움에 눈 멀었다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사로 잡혀 영원히 아름다움과 사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잔인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잔인함은 아름다움에 눈 머는 잔인함일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믿는 자여, 사유하라, 그리고 행위하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그가 재판과정에서 본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악은 진심으로 평범하다. 때론 선량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악은 보통 '발견'되지 못한다. 아렌트는 평범한 아이히만이 그렇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게 된 까닭은 그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전혀 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사유 (생각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유'란 단순히 '깊이 생각하기'가 아니다. 사유란 역역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공감이라 할 수 있고, 소통이라 할 수 있고, 연대(solidarity)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는 '행위(action)'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e)을 이루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노동, 작업, 행위. 여기에서 '노동'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말한다. '작업' '예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업(예술행위)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꾸고 만나게 된다. '행위'는 타자와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하면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행위'를 다른 말로 하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는 '행위'로 규정한다. 정치를 사유와 결부시켜 말한다면, 정치란 개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도록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의 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사유'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한 그동안의 한국 정치는 성경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다스렸다"( 34:4).

 

무엇보다, 국민들이 '사유'하며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게 끔 내버려두지 않고, 깊은 생각을 못하도록 언론을 조작하고, 스포츠나 스크린이나 때로는 북풍을 통해 정신을 딴데 쏟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에 맞서 마땅히 싸워야 할 교회는 어떠했는가?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성경의 말씀을 왜곡시켜 국민인 신자들을 '무사유(無思惟)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믿음이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생각 없이 따르다'는 뜻으로 변질시켰다. 예수는 우리의 사유를 막으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진정 구원이란, '악의 평범성'에 눈을 뜬 후 그에 맞서 '행위'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믿는 자여, 사유(思惟)하라. 그리고 행위(action)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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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단발머리

 

구글에서 단발머리를 검색하면 걸그룹 AOA의 노래 단발머리가 제일 먼저 뜬다. 그런데 사실 80년대의 대중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AOA단발머리보다는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먼저 뜨길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바뀐 탓인지,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검색하려면 단발머리 앞이나 뒤에 조용필을 함께 검색어로 붙여 넣어야 한다.

 

AOA의 노래 단발머리는 스타 작곡가 용감한 형제의 곡이다. 대중가요 작곡가인 그가 자신의 만든 곡에 단발머리라는 제목을 붙일 때 조용필의 대히트곡 단발머리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발머리라는 제목을 붙여 곡을 낸 이유는, 아마도,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지니고 있는 아성에 도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는 제목은 같지만 곡이 추구하는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1979년에 발매된 조용필의 단발머리는 과거지향적이다. 이 곡에서는 한 남자가 자신에게 꽃을 건네던 단발머리 여자(소녀)를 추억한다. 핵심 가사는 이렇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그러나 2014년에 발매된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는 미래지향적이다. 이 곡에서는 여러 명의 다양한 직업군의 여자들(AOA 멤버들로 대표되는)이 역경을 딛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노래한다. 핵심 가사는 이렇다. “단발머리 하고 지난 날은 잊고 나 새롭게 태어날 거에요…”

 

하지만, 두 곡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발머리의 모티브는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7,80년대의 단발머리는 소위 신여성을 상징했다. 게다가, 조용필의 단발머리에서 노래 되고 있듯이 꽃다발을 건넨 건 남자가 아니라 단발머리 여자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깨는 일이다. 보통 꽃다발은 남자가 여자에게 건넨다. 그 당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사회적 통념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이 그리워하는 여인은 그 사회적 통념을 깨고 꽃다발을 남자에게 건넨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단발머리 여인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과감하게 깬 그 여인의 도전정신인지 모르겠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에서는 사회적 통념을 깨는 도전정신이 감추어져 표현되고 있지만,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에서는 그것이 바깥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뭔가 변화를 꾀하고, 통념을 깨는 행위로서의 의식(ritual)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은 일을 잠시 내려 놓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꾼다.

 

두 노래의 뒷면에 흐르는 사회적 합의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단발머리는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의식을 담아내는 메타포이다. 그렇다. ‘단발머리도전정신이다. 머리를 싹둑 잘라내는 마음,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잘라낼 머리는 없지만, 나는 답답한 현실에 축 늘어진 나의 마음을 싹둑 잘라 단발머리를 만들려 한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흥얼거린다. “단발머리 하고 지난 날은 잊고 나 새롭게 태어날 거에요날씨 참 좋아요 분위기 참 좋아요…”


Posted by 장준식

세월호 참사 2주기에 즈음하여

ㅡ 에스겔 아내의 죽음과 성서 해석

 

나는 지난 10년간 약 3천 번의 설교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의 운명에 갇혀 열심히 설교를 했다. 설교를 하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수 많은 스토리이듯이 성경을 구성하는 것도 수많은 스토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스토리는 평범하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다루었던 본문 중에 가장 충격적인 스토리는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다(24:15-27).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에스겔서에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앞 뒤 문장이 있는 가운데서 아주 짧게 나온다.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24:18). 너무 짧게 나와 성경을 정독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을 담담하고 짧게 기록하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를 생각하니, 그 사람의 신앙과 내공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하나님은 에스겔 아내의 죽음사건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게 하시고자 에스겔의 아내를 데려 가신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려니…”(24:16). 여기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아내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쳐서 빼앗으신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아내의 죽음을 놓아두고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초상을 치르는 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오직 조용히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표징(Sign)’이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묻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일어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일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게 될 거라는 메시지이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성소(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리고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아내 죽음의 표징을 통해, 그들이 성소와 자녀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은 모두 남의 일로 여겨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어떠한 일이 자기 자신의 일이 될 때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성숙한 자, 또는 영성이 있는 자를 가르는 척도 중 하나이다. 성숙한 자 또는 영성이 있는 자는 어떠한 일이 자기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과 끊임 없이 연대(solidarity)’한다.

 

이 부분은 정말로 조심하게 해석해야 할 본문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이 부분을 설교하며 막말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며 윽박지를 것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 수 있느니 조심하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니, 회개하라!” , 이 본문을 가지고 이러한 막말을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설교자가 아니며,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을 넘어, 성령을 훼방하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다고 우리의 소중한 것을 마구 빼앗아 가시는 분이 절대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자기 아들)을 내어 놓으시는 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 표징을 우리가 잘 분별하여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너무도 많다.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심판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구현해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본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파렴치한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만큼, 악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정도로 무지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세상의 악이 세월호 아이들을 학살하였다. 세상의 악은 무구한 아이들을 학살하고도 떳떳하게 낯을 들고 다닐 정도로 무지하고 파렴치하다.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표징이다. 그 표징을 보고도 이 세상의 악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뻔뻔한 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 파렴치하고 뻔뻔한 악과 맞서 싸울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성소와 자녀들을 빼앗긴 예루살렘처럼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 눈에 기뻐하는 것,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연대(Solidarity)’이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부모들에게서 일어난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나의 일이다. ‘표징’인 세월호 참사를 보고도 침묵하며 연대를 소홀이 하거나,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실현하지 못한다면,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24:23).

 

세월호 참사는 에스겔 아내 죽음의 사건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에스겔 아내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백성들의 일이었듯이,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두려운 자, 지금 일어나 광화문으로 나가라.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게 만든 악에 맞서 싸우라. 세상 모두가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라. 그것으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삶의 스토리를 만들라. 바로 당신의 삶에.


Posted by 장준식

대나무 예찬

 

우리 교회 마당 둘레에는 대나무가 많다. 바람이 세차가 불면 대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는 폭포수처럼 시원하다.

 

사실 대나무는 사람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마당 식물이 아니다. 대나무를 키워 본 이들은 왜 그런지 알 것이다. 바로 대나무의 무지막지한 번식력 때문이다.

 

대나무는 마치 중세시대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징기스칸처럼 땅을 무섭게 정복한다. 게다가 대나무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뿌리를 그물처럼 펼치기 때문에 뿌리째 뽑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무엇보다 대나무는 놀라운 성장 속도를 지니고 있다. 대나무의 성장은 마치 스펀지 같다. 성장이라는 인자를 쭉쭉 빨아들여 하루 아침에 놀랍도록 자기 자신의 키를 늘려 놓는다.

 

우리는 흔히 대나무를 통해 군자의 기개를 말한다. 군자는 대나무처럼 곧아야 한다고 말이다. 대나무를 보면 왜 선조들이 대나무에 비유해서 군자의 곧은 기개를 빗대어 말하는지 알 것 같다.

 

곧다는 것은 단순히 다 성장한 대나무처럼 반듯하게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다는 것은 대나무처럼 뿌리를 깊게 내리고 웬만해서는 절대로 뽑히지 않을 중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늘 성장시킬 줄 아는 것이며, 무엇보다, 세찬 바람을  맞닥뜨리더라도  시원하게  흘려  보낼  줄 아는 삶의 여유를 지니는 것이다.

 

뿌리내림, 성장, 여유,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군자의 덕()임을 대나무가 가르쳐 준다.


Posted by 장준식

칠병이어 이야기와 배고픈 목사

 

이 탐욕의 시대에 목사는 참 배고픈 사람이다. 탐욕이 샘솟을 때, 나는 번민하게 된다. 탐욕을 부추기는 '광고'들은 마치 사탄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굴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너무 멀리 떠나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어, 더 이상 나에게 탐욕이 작용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무리들을 먹이시는 이야기가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오병이어' 이야기, 다른 하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이다. 나는 이 두 이야기 중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서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8:2-3).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그저 해가 저물어 배가 고팠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칠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느라 며칠씩 굶었고, 너무 멀리, 광야까지 따라 나왔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에서 예수를 따라 광야까지 나온 무리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도 어쩌다 보니 (물론 부르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라는 신앙고백이 있지만) 예수를 광야까지 따라 오게 됐다. 이젠 너무 멀리 떠나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이제, 이 나이에, 내가 목사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것을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기쁨과 유익을 주겠는가.

 

광야까지 따라 온 무리들에게 오직 희망은 예수 외에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품은 희망을 꺾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를 통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일곱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넉넉히 먹이신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어, 이 탐욕의 시대에 탐욕조차도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신세에 처해진 나 같은 사람에게 칠병이어의 말씀은 힘이요 능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니,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기에 이 말씀이 힘이요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돌아갈 수 있는 곳까지만 따라 나선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워 애굽의 고기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패악을 저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인생을 살겠는가. 어차피 길 떠난 인생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그 무엇도 나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그 무엇'에게 던지는 것이 멋진 인생일 터.

 

나는 예수를 따르다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른 '배고픈 목사'.


Posted by 장준식

이건 통치가 아니라 모방범죄다

 

모방범죄라는 것이 있다. 어느 누가 지은 범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변이가 일어난다. 범죄영화나 범죄드라마, 또는 범죄소설이나 범죄심리 책 같은 것을 보면 단순히 범죄를 나열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조밀하게 분석해 놓는다. 그런데 지능범들은 조밀하게 분석해 놓은 바로 그 범죄를 이용하여 오히려 법 망을 빠져나가거나 그것을 역이용하여 누군가를 옭아매는 데 사용한다.

 

일례를 들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보면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전체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대중들의 인권을 빼앗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예전에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주의라는 것이 이렇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최근에 이 소설을 다시 보니 새로운 게 보인다. , 한국의 박근혜 정부가 하는 일들이 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등장하는 '' '빅 브라더'를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84>에 등장하는의 슬로건은 이렇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은 이 슬로건 아래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벌인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행하고 있는역사왜곡과 너무도 닮아 있다. 이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은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대중들을 통제한다. 소설 속에서는골드스타인이라는 증오의 대상이 등장하는데, 대중들은 ‘2분 증오 프로그램(two minute hate program)’을 통해 증오를 발산하며 통제 당한다. 박근혜 정부가 계속하여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증오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사상경찰(Thought Police)’이다. 소설 속에서 사상경찰은텔레스크린이라는 장비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감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이중사고라는 것을 하는데 익숙해 진다. 소설에서 말하는이중사고란 이런 것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다 똑 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박근혜 정부는 모방범죄의 변이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실세들은 모두 조지 오웰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박근혜 정부는 이 소설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국민들을 옭아매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역사왜곡을 하고,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대중을 통제하고, ‘테러방지법을 만들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들겠는가.

 

 박근혜 정부가 하는 정치는통치가 아니라모방범죄처럼 보인다. 만약 국민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국민들 모두가 소설에서처럼이중사고를 하며 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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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