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에 해당되는 글 404건

  1. 2015.05.07 규율(통제)의 가치
  2. 2015.01.27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
  3. 2015.01.24 사람됨이 먼저다
  4. 2014.11.30 너 자신을 알라 2
  5. 2014.11.15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4
  6. 2014.11.06 슬픔 1
  7. 2014.11.02 사랑의 공식 1
  8. 2014.10.29 참여 구원론 2
  9. 2014.06.14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1
  10. 2014.01.18 확실한 약속과 불안한 믿음
  11. 2014.01.11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12. 2014.01.05 설교자 1
  13. 2013.10.22 독립기념일과 세례
  14. 2013.07.31 하나님 아버지!
  15. 2013.06.14 마중물 기도의자 1

규율(통제)의 가치

 

“창조적인 유망주에게는 어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 - 거스 히딩크

 

최근 한국 축구 유망주 이승우 선수의 부적절한 행동을 두고 말이 많은가 보다. 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 국가대표 이영표 선수와 히팅크 감독이 한 마디씩 했다. 한 매체에서 이영표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선수 아르연 로번을 어떻게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거듭나도록 훈련시켰는지를 소개하며 이승우 선수에게 뼈 있는 충고를 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서도 확인한 바, 어린이가 성장하여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로 커 나갈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과 규율' 두 가지이다. 가장 뒤쳐지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부류는 부모에게 사랑만 받고 '통제' 받지 못한 아이들이고, 오히려 사랑을 못 받고 통제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앞의 아이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사랑과 규율(통제)'이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가치는 잘 알아도 통제(규율)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회에서 감동 받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들의 검소함이고(허례허식이 없음) 다른 하나는 이들의 질서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은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 학교를 다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면 강력한 규율 아래 아이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본다. 한 마디로, 학교가 무슨 수도원 같다. 복도를 걸어 다닐 때 뛰어다니거나 시끄럽게 잡답하는 친구가 없으며, 어딘가로 이동수업을 할 때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한국의 초중등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강한 규율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규율을 잊은 채 자기 자식에게 무조건 사랑만을 베풀기에 여념 없고, 학교에서는 부모와 학생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에게 강력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창조성은 자유분방함에서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창조적인 인재를 키워 창조경영의 국가로 도약하고 싶다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규율(통제)'에 대한 부분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규율에 자기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훈련부터 필요하다. 그 다음에 오는 자유로움이 가치 있는 창조, 방종하지 않는 창조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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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

 

子曰, 非其鬼而祭之 ,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조상의]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非其鬼而祭之비기귀이제지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에 비견할 수 있다. 이런 자에 비견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공자는 이런 자를 일컬어 용기 없는 자라고 한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義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의로움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의와 대면하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의에 죽고 의에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를 행하다 불의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빛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다. 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에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더러 그 빛을 싫어했다. 그래서 세상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의로운 것이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의로운 것) 그것을 전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단행위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아니라, 용기 없는 자에 불과하다. 믿음은 결단이다. 절대적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파울 틸리히는 이것을 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고도 표현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세상은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슴없이 불의를 행한다. 오히려 불의를 행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즉 비겁한 세상이다. 비겁한 자들이 잘 사는 세상이다. 용기 있는 자는 거지 꼴로 병신취급 받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운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할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용기를 지닌 자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아니, 그런 자만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리라.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요, 의로운 것을 보고서 행하는 용기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 그래서 난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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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람됨이 먼저다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증이친이.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떠나서는 우애로우며, 삼가고 믿음이 있으며 널리 대중을 아끼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 [이것들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학문)을 배운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공자의 인간론의 핵심은 인()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다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서 학문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목회하면서 가장 황당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믿음 좋은 신앙인이라 여기며 교회 봉사(주일성수, 헌금, 교회의 각종 행사 참여)를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날 때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은 '믿음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람됨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믿음'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급선무이고, 나머지는 구원 받은 후에 해결해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녕 기독교인은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소위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구원파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플라톤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이것은 구원을 너무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의 교리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그 시대의 언어로 옮기기 위해 헬라철학을 빌려온 것일 뿐 그렇다고 헬라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바탕으로 이원론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정작 성서의 사상은 이원론을 거부하고 전인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여기서 전인적이라는 말은 소위 육체와 영혼이 구분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육체와 영혼의 통합이다. 그리고 부활은 이 세상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체를 향해 되어져가고 있음에 대한 비전(하나님의 계획)이다.

 

사람됨을 생각지 않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사람됨 없는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사람됨의 믿음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됨의 구원이다. 믿음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실현하지 않으려는 자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됨이 먼저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됨에 대한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를 믿음 있는 자라고 부르지, 믿음 있는 자가 곧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라고 하지 않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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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너 자신을 알라

 

교계의 상황을 보면,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이런 저런 활동들을 통해 개혁을 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활동은 기득권자들을 향한 저항이 대부분이다. 참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들도 결국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개혁의 대상을 향해 외치는 개혁의 주체들은 분명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해 간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이란, 내 생각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흙탕물을 휘저으면 흙탕물은 계속 탁한 상태만 지속될 뿐이다. 흙탕물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고다. 그러면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앙금이 가라앉고 투명한 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자연을 고치겠다고 휘저으면 자연은 더 망가지고 만다. 자연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사람 손이 타면, 무엇이든 망가지고 마니까.

 

교회 개혁을 위해 뭔가 해보려는 시도들은 참 칭찬할만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그 시도들이 또다른 흙탕물을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꼭 필요한 것 같다.

 

, 그런데, 무엇인가를 가만히 냅두기에는 인생이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계속 하려고 드는 것 같다. 결국, 성자란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잘 견디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그냥 잠잠히 자기 자신이나 잘 달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개혁이 아닐까?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는 늘 교집합이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랴.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이 문구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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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대화는 대등한 위치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관계가 대등하지 못하면 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발생한다.

 

종교가 과학과 대화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종교와 과학이 대등한 위치에 섰다는 뜻이다. 그 동안 종교는 다른 분야의 학문을 그저 '시녀'로만 보아 왔다. 철학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래서 중세신학자들은 이런 말까지 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의 시녀이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인식했다기 보다, 과학이 종교의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 같다.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어찌되었든, 현재 종교는 과학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개봉된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는 그 동안의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종교의 독점적 주제인 종말과 구원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상황적 배경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구인들의 생존 위기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더 이상 양식이 없어 모든 생존자들이 곧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표현되어 있다.

 

멸망해 가는 지구인들을 구원할 프로젝트의 이름은 <나자로 프로젝트>이다. 나자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죽어 장사된 뒤 사흘 만에 예수의 신적 능력을 통해 되살아난 인물이다. 이왕 성서에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따올 거면, 궁극적 부활인 <그리스도 프로젝트>로 할 것이지, <나사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것이 흥미롭다. 어쩌면 이것이 과학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시아의 구원 능력을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나자로를 끌어 들이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나자로 프로젝트는 두 개의 플랜을 갖고 있다.  플랜 A는 거대한 우주선을 띄워 생존자를 모아 지구를 탈출하는 방안이다. 플랜 B 1천개의 인공수정란를 외계로 보내 인종을 새롭게 퍼뜨리는 계획이다. 플랜 자체가 과학적이다.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말론적 신적 개입이 없다.

 

영화의 재미는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힘든 천체 물리학 이론이 이야기 전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중력, 상대성이론, 웜홀, 그리고 블랙홀 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천체 물리학 이론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우주 여행을 떠난 쿠퍼 일행이 10년 전 정착 가능한 별을 찾아 먼저 떠난 우주비행사의 신호를 좆아 들어간 밀러 행성은 중력으로 인한 시간의 왜곡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쿠퍼 일행은 밀러 행성에 단지 3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 지구 시간으로 23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다. 또한 블랙홀을 통과한 몇 분의 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56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간이 시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 중 가장 압권은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사건의 지평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시간의 이편과 저편, 또는 시간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빨아들여 새로운 공간인 사건의 지평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책장을 사이에 두고 사건의 지평이 구분되고 있는 장면이 참 흥미로운데, 이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반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사건의 지평의 비밀을 풀어낸 쿠퍼의 딸(머피)은 어릴 적 서재에서 경험했던 신비로운 유령 또는 중력의 작용을 해독함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젖힌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유레카!”

 

인류는 과학의 힘으로 멸망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블랙홀을 빠져 나온 쿠퍼는 딸(머피)이 창조해 낸 새로운 구원의 세상(구퍼 정거장)으로 구출되어 지구 시간으로 거의 80년 만에 딸(머피)을 만난다. 우주에서 겪은 시간의 왜곡 현상으로 실제 나이는 124세이지만, 여전히 지구를 떠날 때의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쿠퍼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늙은 딸’(머피)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I knew I’d see you again.”

(“나는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아빠가 묻는다.

How?” (“어떻게?”)

“Cause my daddy promised me.”

(“왜냐하면 아빠가 나랑 약속했기 때문이죠.”)

 

종말과 구원을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차라리 종교적이다. 이 영화가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종말과 구원은 우리 인류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구원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종교적이냐 과학적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을 실제적으로 가져다 주기 위해서 종교와 과학의 끊임 없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종교와 과학, 대화의 끝에 발견한 구원의 길을 마주하며 함께 이렇게 외치는 날을 기대한다. 과학적으로 유레카!” 또는 종교적으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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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ㅡ 내 슬픔을 누구에게 호소하리?

 

러시아의 문호, 안똔 체호프의 <슬픔>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부 이오나이다. 마부 이오나는 얼마 전 아들을 잃었다. 그것이 그가 최근에 겪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사건 자체가 어떤 긴장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간 아들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돌린다. 물론 이것은 신앙고백적 차원이라기 보다, 아들의 허무한 죽음에 대한 아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부 이오나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혼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차를 탄 손님들과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긴장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한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과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 사이에서 묘한 긴장이 흐른다. 이제 긴장은 아들이 죽은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사람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 사이에서 온다.

 

모 인터넷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슬픔에 관한 기사이다. 그런데 기사를 보면, 그의 슬픔은 세월호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이오나의 상황과 똑같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그 어머니에게서 새롭게 생겨난 긴장은 이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말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했다. 공감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이었다. 행동이 없었다. 기도로만 아픔을 풀어 가고, 기도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나와 유가족을 상처가 있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들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고, 한 형제자매라고 말하지만 뒤돌아서면 남이었다. 우리를 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할 때만 형제자매이고, 정작 내가 어렵고 힘든 때가 되니 등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심이었다.”

 

체호프가 그의 소설 <슬픔>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만 남을 뿐이다.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쩌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다만 피해자는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싶어한다. 혼자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그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지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정부도 국회도 교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유가족들에게도 체념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회를 보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사건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긴장이 생겨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다. 체호프가 주목했듯이, 정부와 국회 그리고 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유가족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슬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다. 소설 <슬픔>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죽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그는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바로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만 말하라니? 소설 속에서 아들을 잃은 이오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인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는 아들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거나 아들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렵다……”

 

왜 대통령은 국회 연설 하러 가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들어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를 그냥 지나치는가? 왜 국회의원들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않고,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는가? 왜 교회는 그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들과 제대로 말 한 번 나눠보지도 않고, 서둘러 귀를 닫는가? 유가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들의 슬픔은 말하고 싶어한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들어주자. 혼자 방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벽에 대고 말하게끔 내버려 두지 말자. 제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견디고 있는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들의 슬픔은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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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식

 

사랑은 삶의 예술입니다.

그것이 존재케 하려면 창조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요.

신뢰라는 토대도 있어야 하고,

용서라는 버리기의 기술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함께 시간 보내기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술이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듯이,

사랑도 삶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입니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상태로 존재합니다.

사랑은 창조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형상을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저절로 빚어지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눈물과 땀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맛 있고, 그 잎사귀는 묘약입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아픈 곳을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스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릅니다.

사랑은 수고의 열매라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공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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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구원론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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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저는 이 문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교회라는 것을 빼면 그 무게가 2그램도 안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팔할이나 키워준 교회가 바로 벌떼교회입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제 인생은 온통 벌떼교회와 뒹굴었으니까요. 그래서 벌떼교회는 제게 참 특별합니다.

 

제 인생과 연관된 벌떼교회뿐만이 아니라, 벌떼교회는 그 역사 자체가 참 특별합니다. 벌떼교회를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 특별함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특별함은 1930년 정초, 덕적도에서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외갓집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 서인 계열의 정부 고위관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덕적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외갓집은 덕적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1930년도 정초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국의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가 1930년 정초에 덕적도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온 겁니다. 외할아버지(오지섭목사님)께서 청소년 시기에 그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셨다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려진 신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씨앗은 담쟁이넝쿨이었나 봅니다. 담쟁이넝쿨이 온 담에 퍼지는 것처럼, 외할아버지를 통해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금방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을 넘어 외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중에 벌떼교회로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1954년 여름,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원으로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벌떼교회(당시 과천하리교회)를 세웠던 학생들 중 송인호, 김광현 두 사람입니다. 송인호(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역임)는 저희 어머니(오세숙 사모)의 당숙이시고, 김광현(정신여고 역사교사 역임)은 저희 어머니의 4촌 오빠입니다. 결국 벌떼교회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집안 분들이셨던 것이죠.

 

저희 집안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이어 받아 성장한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유명한 부흥사셨고, 그 자녀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감리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로서 목원대학교를 세운 도익서(찰스 스톡스) 박사 그리고 목원대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내신 목원이호운 학장(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작사가)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저희 아버지 모두 도익서 장학금으로 신학공부를 하셔서 목회자가 된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용도 목사와 한국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재봉 목사는 저희 집안의 사돈이십니다. 박재봉 목사의 집안도 그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집안인데, 그 중에서 박재봉 목사의 동생인 박재훈 목사는 한국 찬송가 사()에 길이 남을 분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찬송가로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등이 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중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짜기 다람쥐”, 그리고 어머님 은혜등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박재봉 목사의 야사 중 유명한 것은 한국 주먹계를 주름 잡던 시라소니를 전도한 사건입니다. 시라소니 아들도 목회자가 되었는데 현재 저희 집안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교류 중에 있습니다.

 

벌떼교회는 태생부터가 참 특별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희망의 촛불을 밝히기 위한 청년들의 선교사업을 통해서 생겨난 교회로서, 그 태생이 선교적입니다. 20세기 신학의 교부로 추앙받고 있는 칼 바르트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떼교회는 그 증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태생된 벌떼교회에 그 증언의 역할을 특별하게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담쟁이넝쿨과도 같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장윤식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역사적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벌떼교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저희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 자손이 우연하게 목회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신앙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우로서 곁에서 지켜본 형님 장윤식 목사는 우리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가장 닮은 목회자입니다. 강직한 성품도 그렇고, 불 같은 메시지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라고 하지만, 형님 장윤식 목사를 들여다보면 나를 키운 건 십할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에서 교회를 빼고 나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남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이토록 한 몸, 한 뜻, 한 역사를 지니기는 정말 힘듭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특별한역사하심이 없으면 이토록 절묘한 조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지구와 달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오묘한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간의 삶 측면에서 60년은 이제 황혼으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가운데 놓여진 벌떼교회는 이제 청춘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벌떼교회는 이제 막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지닌 교회, 목회자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만들어 가는 벌떼교회에 몸담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분들입니다.

 

R. M. 크리소스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 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으로 탄생한 벌떼교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집니다. 특별한 역사와 사명을 가진 벌떼교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를 부지런히 지켜내는 꿀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떼교회 출신이며

장윤식 목사의 아우이며

컬럼버스감리교회 담임인

喜樂堂 장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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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의 세계가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언어 자체의 유희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아니, 언어의 장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가령, ‘종말이라는 언어를 생각해 보자. 종말이 담고 있는 언어의 뜻은 세상의 마지막 날정도다. 그런데 세상의 마지막 날이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종말이라는 언어에만 빠져 있으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언어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래야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신학적으로 종말은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은 심판의 때로도 불린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줄세워 놓고 정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만물이 벌거벗겨진 채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빛을 감당할 자 누구랴! 종말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인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종말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하니, 좀 허무하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긍정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수단(증거)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단은 믿음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허공을 치는 것 같이 공허하고 불안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믿음은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기도뿐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인간의 불안한 믿음이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인간의 불안한 믿음을 붙들어 주신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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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안셀름 그륀의 <축복>이라는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아침이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이라는 네 개의 단어로 된 문장이지만, 이 단어들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는 참으로 크고 깊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문화는 새벽기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해 뜨기 전 교회당에 모여 저마다의 소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신학적으로 살피지 않는다. 그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깊이에 대한 잣대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자주 빛이라는 그림언어를 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말씀과 빛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말씀으로, 어두운 이 땅에 임한 빛으로 소개한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것으로 세상 너머에 있는 실재를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보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연관시킨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크리스마스다. 로마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날, 1225일이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정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다는 믿음이 각인되어 있다.

 

떠오르는 태양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이유는 공적을 쌓거나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그분의 제자로서 세상의 빛으로 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으로 칠흙 같은 어둠에 떨어지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사망이라는 어둠을 이기시고, 빛으로 부활하셨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 가운데 임하는 어떠한 어둠도 그들을 덮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어둠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믿음 가운데 하루를 희망차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아침마다 이불 속에서 잠과 씨름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대의 삶에 이 비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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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너머에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며, 알아차린 그 세계를 어떻게 지금이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 이것은 설교자의 과제이다. 나는 텍스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세계를 확실히 본 것 처럼 자신하며,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확실한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자가 가장 무섭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텍스트 너머의 세계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는 종말의 때이다.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야만 하는 설교자의 직무는 참으로 고단하고 미련하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로 부르신 그분의 뜻 가운데 설교자에게 그 직무가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설 수 밖에 없다. 나는 무서운 설교자가 아닌, 부족해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설교자로, 강단에 겨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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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일과 세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기념일은 1776 7 4,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에서 대륙의회가 독립선언문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독립 선언문은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한 미국 식민지의 확고한 의지를 담은 강력한 성명서입니다. 독립기념일에는 1941년 법정 공휴일로 선언된 이후 해마다 축하행사가 전국적으로 벌어집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다시 되새겨보는 이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서 피크닉, 가두 행진 및 연주회, 화려한 불꽃놀이 행사 등의 기념축제로 뜻 깊은 하루를 보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독립기념일을 갖는 의미 있는 날이 어떤 날일까요? 아마도 세례 받은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례는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이 변하고, 죄의 권세에서 죄 가운데 살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그야말로, 독립(Independence)하는 날이지요. 미국이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만세를 불렀듯이,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만세를 불렀듯이, 세례 받은 날은 사탄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그리스도인의 만세인 할렐루야 아멘을 외쳐 부르는 귀한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내가 언제 세례 받았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세례 받은 날짜를 한 번 기억해 보고, 나름대로 그날을 '독립기념일'처럼 기념하기 위해서 의미 있는 이벤트를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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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하나님 아버지!

 

미국 달력에는 Father’s day(아버지 날)라는 날이 있습니다. 미국에 오래 사신 분들에게는 낯설지 않지만,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은 낯선 풍경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Mother’s day Father’s day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Parent’s day(어버이 날)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더 편만한 미국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죠. 한국은 아무래도 아직까지 가족의 개념이 개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을 따도 구분하지 않고, 어버이 날의 형태로 가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 전직 경찰이 지은 ‘아버지’라는 소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권위와 힘이 축소되고 자꾸 나약해지면서 소외되어 가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을 아주 실감나게 그려내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셨던 소설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를 흔히 ‘고개 숙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가장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잃고 직장인으로서의 정당한 자기 역할을 상실한 중년 이상 된 아버지들의 자화상인데,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왠지 가슴 찡한 정감과 서글픔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아버지’라는 호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먼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 ‘아빠’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상당히 깊습니다. 15세기 문헌에는 ‘아바’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흔히 사극에서 등장하는 ‘아바마마’의 ‘아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바’의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엄마’의 전 단계인 ‘어마’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아바’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어로 쓰여 왔는데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압바’ 또는 ‘아빠’로 그 어형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빠에 비해 아버지는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아바지’로 나옵니다. 평범한 호칭어인 ‘아바’에 접미사 ‘지’가 붙어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여기에 붙은 접미사 ‘지’는 고대의 관직명인 ‘막리지’, ‘세리지’ 등에 붙은 ‘지’와 비슷한데 이때의 ‘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아바지’라는 말이 ‘아버지’로 변한 것은 19세기 말입니다. 지금의 아빠와 아버지는 같은 호칭어이면서도 하나는 유아어 다른 하나는 성인어로 그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아빠라는 말은 1960년대만 해도 그렇게 자유롭게 쓰이던 호칭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구조가 핵가족화되고 생활양식이 서구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에 대한 호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지만,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마중물 기도의자

 

요즘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지만, 옛날에는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펐습니다. 요즘과 옛날 중간에는 펌프질을 해서 물을 펐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물을 한 바가지 부은 다음 손잡이를 잡고 아래위로 펌프질을 하면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던 펌프를. 그 물을 받아서 생활용수로 사용을 했지요. 펌프에서 물을 얻으려면 물 한 바가지를 꼭 부어야만 했습니다. 그 물 한 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콜링 워터(Calling Water)라고 하고, 경제학 용어로 쓸 때는 죽어 있는 투자욕구, 성취욕구를 유발해 주는 정책을 일컫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을 퍼낼 때 마중 나가서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도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자를 마중물 기도의자라고 이름 붙여 봤습니다. 기도의자를 사용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샘이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본 이름입니다. 이 기도의자는 특별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도움을 줍니다. 기도할 때 여러 가지 자세를 잡고 기도할 수 있으나, 뭐니뭐니해도 기도는 무릎 꿇고 할 때 가장 겸손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접힌 다리가 저리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무릎이 상해서 건강에 치명타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바로 기도의자입니다.

 

기도의자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무릎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릎 꿇고 기도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무리 없이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기도가 1시간 이상 길어지면 기도의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만, 어찌되었든 기도의자는 기도의 샘에서 거룩하고 참된 기도가 콸콸 쏟아져 나오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마중물 기도의자를 가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기도가 나오는 것이죠.

 

아무쪼록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마중물 기도의자가 기도의 샘이 터지는데 조그만 힘이 될 수 있다면,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톱밥을 먹어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의 샘아, 터져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