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와 기독교인들의 오해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선언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우리(인간)가 신을 죽였다"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엄청 불편해 한다. 그리고 니체를 오해한다. 니체는 무신론자이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정한 불신자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니체의 ''자도 모르는 무식과 '근대성'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이해의 무지에서 오는 불행이다.

 

'근대(modern)' 또는 '근대성(modernity)'란 무엇인가? 근대의 핵심 키워드는 '인간'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지배함으로, 근대의 세계에서는 이성적이지 못한 것, 즉 이성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세계에서 신(God)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아니,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아포리즘을 통해서 이러한 근대의 비극을 꼬집는다. 다시 말해, 니체는 기독교인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무신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근대성을 규정하고 꼬집기 위해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근대는 낭만주의를 꽃 피운다. 근대의 낭만주의는 마치 재산을 챙켜 먼 나라로 떠난, 탕자와 같다. 자신을 구속하던(실제로는 구속한 것이 아니라 돌봐준 것이지만)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의 분깃을 챙겨 떠난 탕자의 삶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진 듯 싶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낭만적으로, 화려하게, 자유롭게,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 행복이 가득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은 자유와 낭만이 넘쳐난다. '신이 더 이상 자신들을 구속하지 않으니', 근대, 즉 낭만주의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인간중심적인, 이성중심적인 세상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다시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은 AD 80년 경에 쓰여진 문서이지만, 탕자의 비유만 보자면, 마치 낭만주의 시대에 쓰여진 문서같다. 거기에는 인간중심, 이성중심의 삶에 대한 경고가 날카롭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죽은 것처럼 여기고(고대 유대 사회에서 자식들이 분깃을 나누는 일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자유'를 만끽한 것은, 근대에 인간이 이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것과 닮아 있다.

 

이성 중심의 근대가 탄생시킨 과학기술 문명을 사는 우리의 과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학기술 문명을 더 발달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신"을 되살려 놓은 일이다. 이것은 이성 중심의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것은 이성이 괄시해 왔던 '//'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종교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과학기술 문명의 세계, 이성이 끝까지 간 세상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인간의 지속적 존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삶의 영역이다.

Posted by 장준식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인 온누리교회가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이재만 씨를 불러 교사교육을 시키는 행사를 두고 논란이 심한 모양이다.

 

마르크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비판은 종교의 비판에서 시작된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종교가 항상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를 만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종교를 등에 업은 과학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기 마련이다. 창조과학이 대표적인 예이다.

 

창조과학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는 자신들의 주장은 '성서적', 즉 종교적이고, 현재 과학계에서 말하고 있는 주장을 넘어서는 절대성과 궁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확신에 있다.

 

이것만큼 큰 교만도 없다. 건전한 과학계에서는 자신의 발견을 확신하거나 맹신하지 않는다. 그것을 종교적 이상으로 끌어 올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인양 말하지 않는다. 과학의 가장 큰 덕목은 겸손이다. 그래서 과학은 모든 것을 '가설'로 상정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열린 결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창조과학은 '과학'을 표방하면서 과학계가 지니고 있는 '겸손'의 덕목을 지니지 못하는 것인가.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를 등에 업은 창조과학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온누리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창조과학을 종교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오면 안 된다. 그리고, 창조과학을 소개했다면, 그와는 다른 시각을 지닌 현 주류 과학계의 입장에서 창조에 대한 해석도 동일하게 소개해야 할 것이다.

 

건전성과 열린 결론을 견지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혹한 비판에 직면할 뿐이다. 종교는 그 존재가 신과 동일하지 않으며 신의 육화도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진리를 향해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지, 진리를 담지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 그러한 겸손이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이고,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악마의 도구가 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프로메테우스적 비극과 디오니소스적 비극

 

비극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비극'을 생각하면 '슬픈 일'을 떠올린다. 가령 누군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쓸쓸한 최후를 맞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비극은 가련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비극은 단순히 '슬픈 일'이나 '가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의 작품 속에는 '비극'에 대한 정의가 매우 잘 드러나 있다.

 

가령,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눈을 피해 불을 인간에게 전해준 일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평생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이것은 비극이다. 그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행한 일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신에게 반항하거나 보다 높은 의무로 생각되는 것 때문에 역사적 도덕성의 어떤 법에 위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는 그의 강함, 바로 그 때문에 패망한다."(니버, 기독교와 비극)

 

비극이 발생시키는 요인은 인간의 상상력과 정신력이다. 인간에게 지워진 운명을 넘어서는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력이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온다. 아니, 그것 때문에 오는 어려움을 '비극'이라고 부른다.

 

비극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프로메테우스적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적 비극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비극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것을 상상할 때 발생하고, 디오니소스적 비극은 인간이 자신의 의식 아래 있는 무의식의 세상을 상상할 때 발생한다. 이 두 비극의 공통점은 그 상상력이 기존의 도덕적 체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한다. 그리스 비극은 비극의 발생까지만 이야기를 하고 그친다. 사람들은 그 비극을 바라보며, 그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인지(그 주인공은 영웅이라 불린다), 아니면, 그냥 기존의 도덕적 체계에 순응할 것인지를 결정할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리스 비극을 넘어선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은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비극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버는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비극적이 아니고 비극의 해결이다"(기독교와 비극).

 

왜 십자가는 비극의 해결일까?


Posted by 장준식

둘째 아담이 첫째 아담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다

 

인간은 첫째 아담이다. 우리는 모두 첫째 아담의 후예이다. 첫째 아담의 후예는 카인의 후예라고도 불린다.

 

첫째 아담의 실존은 ''로 규정된다. 죄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죄는 인간의 본질에 섞여 있는 타락으로 보지는 않는다. 인간은 선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함에는 어떠한 죄성이 섞여 있을 수 없다.

 

죄는 인간의 선함을 자꾸 무너뜨리는 외부의 힘이다. 문제는 인간이 선함을 무너뜨리는 외부의 힘에 자꾸 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죄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나름대로 죄성에 저항한다. 인간은 자신의 선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이것을 ''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선함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의 의로운 활동(행동/의지)에는 인간 스스로 감지할 수 없는 불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아담 예수는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첫째 아담들에게 수난을 당했다. 예수를 핍박하고 그를 십자가에 매단 첫째 아담들은 소위 말해 '악당들'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다. 그들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존경을 받던 계층이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 무너져 가던 유대인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었던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그룹 또한 자기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대 민족의 생존을 지켜나가던 '선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의 관원들도 불한당들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해 '로마의 평화'를 지켜내려던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두번째 아담인 에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까? 이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것에 대한 라인홀드 니버의 해석은 이렇다. "모든 인간적인 의가 의롭지 않은 것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의로운 자들의 죄로 인해서 (예수는) 수난을 당한다"(수난의 종과 인자).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선함을 지켜내려 하고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선함을 무너뜨리는 죄를 견제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행위들 자체 속에 불의가 가득하다는 것을 첫째 아담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이 선하다고 말하고, 그 선함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선을 세우기 보다 오히려 선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께 다가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그를 꾸짖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7,18).

 

첫째 아담인 인간은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선함을 지켜나가고 드러내려고 하면할수록 그곳에서 '불의'가 발생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기독교는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두번째 아담이자 인자로 불리는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향 전환'을 일컬어 '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며, 그것은 두번째 아담이자 인자, 즉 이전의 타락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는 메시아를 '믿을 때' 가능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선함도 결국 전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메시아의 의로움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만이 모든 불의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아담인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당당하게 둘째 아담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가. 마치 나는 선함을 지켜내는 무슨 투사라도 된 듯이 말이다. 나의 선함이, 선하고자 하는 그 의로운 행동이 얼마나 많은 불의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멈추고, 주님(메시아/인자) 앞에 나아와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 나는 선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선하십니다. 나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 교만한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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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

 

인간은 보편성과 전체성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나와 같지 아니함'에 스트레스를 받고, '너와 같지 아니함'에 절망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서든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어떻게서든 나를 상대방과 같은 사람으로 끌어올리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질투이고 자기 과장이다. 인간의 행복은 이것의 성취인양, 세상은 속이고 또 속인다.

 

진리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보편성만 강조하고, 진리의 개별성을 간과하면, 진리의 보편성은 사람들의 손에서 폭력이 되고 만다.

 

기독교(종교)는 수없이 이같은 잘못을 저질렀고, 저지르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표지중 하나가 교회의 보편성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한다. 이때의 보편적인 교회는 '교회가 진리다'는 보편성을 말한다.

 

보편적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이 확보된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도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생산해 내었는가.

 

인류의 사상적 싸움은 '진리의 보편성'을 지켜내려는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진리의 개별성'을 진리의 보편성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진리의 보편성에서 오는 폭력이 너무 과도하기 때문에 진리의 개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함이 인간의 사상사에는 배어 있다.

 

진리의 보편성의 폭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던 시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시대이다. 그때 기독교는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았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고통 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교회의 자비에 매달렸다.

 

그 병폐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오캄이 있다. 그는 진리의 보편에 맞서, 진리의 개별성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진리의 보편에 맞서 진리의 개별성을 주장한 전통에 서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서 발견되는 정말 신기한 일은,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환원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 아래 세워진 개신교가 진리의 보편성 아래 저지르는 수많은 폭력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매우 고무적인 사람이다. 그는 진리의 보편성 속에서 끊임없이 진리의 개별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실존은 보편성과 전체성 때문에 무시당하고 고통당하기 십상이다. 그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고 있듯이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성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한다. 존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존재가 존재가 되는 길은 하나님처럼 '나는 나다'의 정체성을 견지할 때만 가능하다.

 

나는 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와 같지 아니함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가 그로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나는 나다. 그러니, 나를 상대방처럼 만들기 위해서 나 자신을 달달 볶지 말아야 한다. 고통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기를 포기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라인홀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를 세 종류로 나눈다. 1) 기독교 정통주의, 2) 자유주의적 기독교, 3) 예언자적 기독교

 

이 중에서 니버는 '예언자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킨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 정통주의는 예수를 역사와 분리시키고,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상적 인간으로 보며 이 세상에서의 낭만주의적 이성의 부활을 꿈꾼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 정통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것 같고,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합리적 이성주의 영향 아래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기독교 정통주의는 기독교 우파이고,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기독교 좌파처럼 보인다. 니버는 이 두 개의 기독교 전통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잘 분석하고 있다.

 

니버가 취하고 있는 예언자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분석하는 시각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폴 틸리히가 독일에서 망명하여 유니온 신학교로 온 이후로, 니버의 사상은 틸리히의 영향 아래 더 깊어지는 것을 본다. 그 궤적을 따라 가며 니버의 사상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특별히 니버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데, 그는 공산주의의 악마적 요소들을 잘 분석한다. 특별히 그들이 인간의 본성적 죄를 얼마나 쉽게 간과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물론 니버는 마르크스주의가 보여주는 좋은 통찰도 놓치지 않는다.

 

니버는 세상 속에 있는 '악마적 신비'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이것은 이성의 제한성과 인간 마음의 부정직, 즉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성'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인간은 결국 불행해질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적 삶에서는 무한의 옷자락에 닿는 것 같은 인간이 여전히 유한성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인간이 그 유한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할 때 그의 삶에서 악을 증대시키지 않는 지점이 역사와 사회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접하는 도덕적 명령 속에 있는 가능한 것을 아는 것만큼 불가능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82-83).

 

니버는 참 열정적이고, 건전하고, 경건하고, 좋은 학자이다. 니버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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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무소유의 중요성

 

무소유. 불교 승려 법정이 주장해서 유명해진 개념이지만, 이것은 기독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예수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6:31, 32). 또한 예수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순히 재물의 부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집중, 또는 자기 초월이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과장하고 확대해서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기독교는 이것을 ''라고 칭한다.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가능한 일을 하려다 절망에 빠진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다.

 

인간이 '자기 확대'를 위해 자연적(naturally)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소유'를 늘리는 일이다. 인간은 소유를 통해서 자기 확대를 시도한다. 가진 게 많으면 '자기'를 벗어나 '위대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기 집중과 상대방에 대한 착취나 배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 자기 확대를 시도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자기의 생명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까지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무소유를 검소한 삶이라든지 욕심을 초월한 삶 정도로 도덕화시키면 안 된다. 무소유는 인간 존재, 생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기' 안에서 만족하며 살줄 아는 겸손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유' 때문에 '자기 확대'가 일어났다고 생각이 들면, 살고자 하는 자는 그 '소유'를 아낌없이 내다버려야 한다. 생명이 소유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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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결핍이다

 

죄는 결핍이다. 결핍된 존재는 자기 상승을 꿈꾼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죄를 일컬어 '자기 집중'이라 불렀다.

 

결핍된 존재는 자기에게 집중하게 된다. 자기 집중은 주변의 다른 것들을 모두 상대화시키고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상승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죄는 필연적으로 배제와 폭력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죄의 권세에 눌린 자들은 인정투쟁에 끊임없이 휘말릴 수 밖에 없다. 죄를 짓게 하는 권세를 지닌 사탄(마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닌 세상 나라의 가치를 제시하며 그것을 통해서 존재의 결핍을 메울 수 있다고 부추긴다. 속임수에 능한 사탄과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죄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온통 결핍을 메우기 위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거룩이란 완전성을 의미한다. 결핍된 존재는 결코 거룩할 수 없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결핍에서 벗어나 거룩(완전한 전체)에 이를 수 있을까?

 

인간이 절망하는 이유는 사탄이 제시하는 것을 쫒아가다 그것으로 존재의 결핍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에서 돌아서지 못한다.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가련하다.

 

존재의 투쟁은 결핍을 메우기 위한 투쟁이다. 존재는 결핍을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결핍을 메워보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는 하루가 멀다하고 방황한다.

 

존재의 결핍을 극복한 상태가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핍된 존재가 그토록 염원하던 결핍의 극복의 길을 그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핍된 존재가 부활의 신비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활은 깊숙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을 경험한 증인들(사도들/제자들)이 조바심을 내며 열심히 그 비밀을 알리고 다녔으나,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그 비밀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에는 역부족인 듯 싶다.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이 아직 산더미다. 그런데, 증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산더미 같은 일을 잊은 채, 잠 자고 있던지, 놀고 있던지, 아니면 나쁜 짓 하느라 산더미 같은 일을 처리하고 있지 못하는 듯 싶다.

 

세상은 어둡고, 할일은 많다. 나의 동지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동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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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광야와 교회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자와 용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언어다.

 

아이는 탄생하여 광야로 도망한다. 그곳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피난처이다. 광야는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고, 믿음의 싸움 없이는 머무를 수 없는 곳이다.

 

교회는 예수를 따라 광야로 나가, 그곳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면서 생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양육은 광야에서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교회는 때로 이러한 유일한 생존 방식을 잊어버곤 한다. 교회가 광야에 있지 않고 고기와 밥을 주는 애굽으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도처에 광야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LA로 가는 5번 고속도로를 타면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의 길이 참 좋다. 엔젤스캠프로 가는 길에 만나는 광야도 참 좋다.

 

그런 물리적인 광야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광야다. 삶의 자리가 광야인 것을 영안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광야인 것이 보이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광야인 것이 보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하여 다른 것에 매달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다. 이게 보이면 사는 것이고, 이게 보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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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두 증인 이야기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두 증인 이야기'가 참 좋다.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마흔 두달(1,260일)동안 사역을 한다. 이 두 증인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불리는데, 스가랴 4:10을 배경으로 보자면, 이들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로 볼 수 있으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들은 사역을 감당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보고, 저항과 핍박에 부딪힐 것이지만, 주님은 이들을 모세와 엘리야처럼 보호하신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죽게 된다. 이들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수치와 고난 가운데 사흘 반 동안 죽은 상태로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부활하여 하늘로 높여 올려진다.

 

두 증인의 이야기는 교회 공동체의 사역의 목적을 뚜렷이 보여준다. 교회 공동체는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여, 열방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외쳐야 한다. 그 선포를 통하여 땅에 사는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증인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증인의 삶을 살면서 직면할 수 있는 저항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주님이 지켜주실 뿐더러, 죽더라도 주님께서 영광 중에 일으켜 세워 하늘로 올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거대 서사가 참 좋다. 이러한 거대한 이야기의 관점에서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 보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이러한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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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소확행과 작은교회 운동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으로, 1986년 발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주조된 개념이다. 소확행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다. 특별히 한국사회에서는 1997IMF 사태 이후, 저성장과 불평등이 구조화되면서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진 후, 현대인들의 삶에 새롭게 등장한 행복의 개념이다.

예전에 학업, 취업, 결혼은 자연스러운 생애주기였다. 한 사람은 고등학교든 대학이든 공부를 마치고 취직을 한 뒤, 사회에 정착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그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고 행복을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IMF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생애주기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욕망보다는 당장의 행복에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작은교회 운동이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생태계도 자본으로 인해 저성장과 불평등으로 구조화되었다. 자본이 있는 큰교회는 살아남기 유리해졌고, 자본이 없는 작은교회는 생존조차 불투명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이길 힘은 없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설교를 잘 해도, 자본을 갖춘 교회를 따라가지 못한다.

소확행이 개인주의 사회의 결과이듯, 교회가 개교회주의로 가면서 개인이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개교회도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이 없는 작은교회가 우리도 언젠가는 큰교회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꾸는 교회가 되는 것이 더 현실적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비극인지 잘된 일인지 아직 결정짓기에는 이르다. 작은교회가 소확행을 꿈꾸는 개인들에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되어줄 수 있다면, 작은교회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소확행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교회가 되지 못한 좌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이 소확행을 시행하는 교회에 머문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소확행을 찾는 현대인들에게도 비극이 될지 모른다.

자본에 의한 불평등한 구조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을 쥔 큰교회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구석구석 소비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 자본이 없는 작은교회는 그런 큰교회를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또는 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온 사회적 병폐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작은교회는 소확행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작은 이들과 또다른 행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보듬어야 하는 존재지 세상에서 좌절하는 존재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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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작심삼일(作心三日)

우리는 이 말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 ‘마음 먹은 게 삼 일도 안 돼서 꺾인다는 뜻으로 말이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그만큼 나약하다는 부정직인 인식을 담겨 있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는 박약하고 게으르고 초라할 때가 많다. 3일만 지나도 우리는 기억을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작심삼일이 다른 뜻으로 다가왔다. 왜 우리는 마음 먹은 것을 3일도 지속시키지 못할까? 그것이 온전히 인간의 의지 박약 탓일까? 인생을 살아보니, 그런 것 같지 않다. 우리는 굳게 결심하여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나 인생의 굴곡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도록 막는다. 인생은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무쌍하다. 오늘의 결심을 내일까지 이어갈 수 있는 안정성이 우리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혹시 작심한 것을 3일 이상 지속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가 대단하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냥 은혜다.

, ‘작심삼일이 이렇게도 다가왔다. ‘작심하고 3일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경험상, 무엇이든지 3일을 넘기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일례로 들어,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3일 이상 쓰는 것은 좋지 못하다. 3일이 넘어가면 흥미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흐려져 읽은 내용이 전혀 기억도 나지 않을 뿐더러 빨리 읽기를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만 마음에 쌓인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책을 읽으면, 3일 이내에 끝내려고 한다. 이것을 실패하면, 뿌듯함 보다는 죄책감이 몰려온다.

인간에게 3이라는 숫자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듯싶다. 동양사상에서도 3은 완전수이고, 기독교에서도 3은 완전수이다. 뇌과학에서도 3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데 최소의 수로 생각한다. 세 번은 봐야 머릿속에 박힌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3일 정도는 지나봐야 그 일의 모양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3일 동안 생각하며 천천히 결정하는 게 지혜다.

인생은 너무 변화무쌍하다.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지켜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 다반사 일어난다. 마음 먹는 것 자체도 힘들지만, 마음 먹은 것을 지켜내는 일은 더 힘들다. 그래서 혹시 마음 먹은 것을 지켜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의지의 대단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가 지켜질 수 있도록 돌보아준 어떠한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은 그 힘을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작심삼일. 작심하고 3(또는 세 번)만 해보자. 그리고, 그 작심이 3일 동안 지속되도록 은혜를 간구해 보자. 3일 뒤에(또는 3번 뒤에), 우리의 삶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겨우 3, 또는 겨우 세 번인 것 같지만, 3, 또는 그 세 번이 인생을 바꾼다. 참을 인() 세 번이면(세 번만 참으면) 살인도 면할 수 있다 하지 않았는가.

Posted by 장준식

교회 없는 세상이라니, 아무 신비도 없어

 

인간이여, 너희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이마 아래 선명한 두 개의 불순물

눈동자라 불리는 작고 동그란 요물단지로

너희들은 너무 먼 곳의 빛과 어둠을 보았고

그것들을 전부 이곳에 데려왔다 그리하여

이 고귀한 땅은 미래라는 원숭이들의 난장판으로 전락했다

.

.

여름꽃의 독에 탐닉하여

일생의 복을 탕진한 자여

극장 없는 세상이라니

아무 신비도 없어

아무 신비도 없어

.

.

이곳은 한때 극장이 있었지요

사람들은 행복했지요

사람들은 언덕 너머에 사는 원숭이 떼 같은

미래 따위는 개의치 않았지요

극장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천변만화하는 동시에 적재적소에 정돈되는

신비로운 곳이었지요

ㅡ 심보선, '극장의 추억' in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는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이 즐비하다. 우리 집에서 다리 건너 10분만 가면 '페이스북' 본사가 있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 '구글' 본사가 있고, 그 밑에 내려 가면 '애플' 본사가 있다. 우리 교회 옆에는 '테슬라자동차' 본사가 있다. 다니는 곳곳마다 우리가 현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IT 관련 제품의 선도 회사의 본사가 즐비하다.

 

그런데, 미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집 구하는 것과 교회 건물 구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미래 산업이 발달하고 전세계에서 IT 관련 종사자들이 몰려오고, 땅값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자,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바깥으로 내몰리고, 그때문에 기존의 교회 부지들은 모두 개발업자에게 팔려 집과 회사건물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에 취직하기 위하여 미래를 꿈꾸며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그야말로 '이땅은 미래라는 원숭이들의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종교는 그들이 꿈꾸는 미래를 가로막는 불순물에 불과하다. '요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어?'가 상식적인 언어이다. 그래서 이곳의 지형도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인구가 5%도 안 된다.

 

이곳에서 살면 살수록 느껴지는 풍경은 사람들이 '여름꽃에 탐닉하여 일생의 복을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오래 살며 이 지역의 변하는 풍경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느 특정 지역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 있었던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지금은 모두 집이 들어서 있고, 회사부지로 바뀌어 있다.

 

'교회 없는 세상이라니, 아무 신비도 없어, 아무 신비도 없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미래를 선도한다는 이곳의 기업들은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지독하게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이곳의 하늘은 온통 한 숨으로 뿌옇다.

 

'이곳은 한 때 교회가 있었지요. 사람들은 행복했지요. 그때는 미래 따위에 개의치 않았어요.' 교회가 없어진 땅, 미래가 들어왔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래는 도대체 무슨 미래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교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신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비는 불안이 아니라, 기대이고 희망이다. 미래는 희망이어야지, 불안이면 안 된다.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들은 '여름꽃에 탐닉하여 일생의 복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마술과 같다.

 

그나마 얼마 안 남은 교회부지도 '탐닉'에 위협당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싸움은 지독한 영적인 싸움이면서, 동시에 지독히 현실적인 싸움이다. 땅이 없으면 신비도 없다. 땅이 미래다. 땅을 빼앗긴 교회는 미래도 신비도 다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실리콘밸리의 영적 싸움은 땅을 지키는 싸움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부활이 요구되는 곳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Posted by 장준식

원 이광수, 가장 잘한 일


100년 전, 개화 초기 한국 사회의 3대 천재 중 한 명으로 불리던 춘원 이광수, 교과서에서 배운 계몽주의소설무정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실상 그는 언론인이면서 사회운동가였다. 국문학자 김윤식이 이광수에 대한 글에서 평가하고 있듯이, 그에게 문학은 여기(餘技)였다.


이광수는무정’, ‘유정’, 그리고등 한국 근대 소설의 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언론을 통하여서 수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대표적인 논설로 <민족개조론>이 있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후 이광수는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를 결성한다. 수양동우회는 자신의 민족개조론을 실천으로 옮길 단체였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 보다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의 연장선에 있었다. 일찍이 도산은 급진적인 독립운동에 맞서 점진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주장을 펼쳤는데, 그 핵심 사상이실력양성론이다. 급진적인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력충돌을 일으켜 즉각적인 대일항전에 나설 것을 촉구했으나, 도산은 그들의 생각에 반대하며 힘을 먼저 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에서 강조하는 무실ㆍ역행ㆍ충의ㆍ용감의 자기개조 및 자아혁신은 이미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에서 주장하던 내용이었다. 이광수와 안창호는 같은 평안도 사람으로서 이광수는 안창호의 제자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는데, 급진적인 독립운동보다는 점진적인 독립운동, 즉 힘과 실력을 먼저 기른 후 영구적인 독립의 기회를 맞는 것이 더욱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믿었다.


안창호는실력양성론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국민, 실력 있는 국민, 화합하는 국민을 만들고자 흥사단과 수양동우회를 조직한다. 이 두 단체는 각기 미주와 한국에서 세워진 단체인데, 이 단체는 직접적인 독립운동 활동이나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훗날 일제에 의하여 수양동우회가 정치단체로 지목되어 안창호와 이광수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다.


안창호와 이광수는 대단한 독립운동 의지를 지닌 분들이었다. 안창호는 미국에 있는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평생 독립운동을 하느라 세상을 떠돌아다녔고,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 안창호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옥고 후유증으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스승을 잃은 이광수는 망명지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친일행각을 한다.


우리는 이광수를 기억할 때 한국 근대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문장가로 기억하지만, 친일행각을 벌인 반역자로도 기억한다. 친일행위 때문에 해방 후 이광수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됐고, 구속수감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어 자신의 고향 땅에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 독립선언서를 쓸 정도로 대단한 독립 운동가였던 이광수, 그가 왜 안창호의 죽음 이후 친일 행위자로 돌아섰는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어느 안창호 연구서에는 안창호가 이광수의 친일 행위를 예견해서 망명지에서 이광수의 귀국을 극구 말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유는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에 이광수가 깊게 물들어 있었는데, 안창호는 그것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 사상이란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그 당시 제국열강들이 약소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였던 사회과학의 사상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에 의해서 주장된 사회진화론은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 논리에 사용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사상이다. 그 당시 최첨단의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사회진화론에 휩쓸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의 민족개조론도 결국 사회진화론의 측면에서 보면, 민족의 개조가 사회진화론적 입장에서 다른 민족보다 우위에 올라설 수 있는 길이었기에 이광수는 그토록 민족개조론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힘 있는 민족의 배양을 이루고자 했던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민족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일본이 사회진화론적 측면에서 보면 한민족보다 더 훌륭한 나라이고 본받아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상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얼마나 무서운 도구인지 알 수 있다.


어떠한 사람의 행위는 한 가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그 안에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광수는 분명 친일행위를 저지른 인물이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식인이었던 한 인간의 고뇌와 맞물려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피 흘려 죽어 가며 끝까지 항일 했던 민족 지도자들에게 아픔이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친일행각에 대한 좀 더 깊은 연구와 평가를 뒤로하고, 그의 일생의 말년에 그가 행한 일 중 잘한 일은 <안창호 평전>을 쓴 일이다. 이광수는 한국역사의 인물 중 이순신과 안창호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스승으로 모셨던, 깊은 영향을 받았던 안창호에 대한 평전을 기술한다.


이광수의 <안창호 평전>은 안창호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안창호와 평생 사귐을 가지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동지로서 이광수는 안창호의 삶과 그의 사상에 대하여 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광수의 <안창호 평전>을 읽고 있노라면, 이광수의 파란만장한 삶이 애처롭고, 그러면서도 이렇게 훌륭한 책을 후대에 남겼다는 게 고맙기도 하다.

Posted by 장준식

별을 본 사람은 길을 떠난다

 

떠난다는 말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하늘에는 별도  많았다. 밤 하늘을 수 놓은 별을 올려다보는 것 만으로도 어느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보다 더 큰 환희가 있었다. 별을 보면 시 한 구절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은 외로운 인생의 친구요,팍팍한 삶의 희망이요, 희미한 미래의 비전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으뜸은 동방박사들 이야기(마태복음 2)’이다. 동방박사들은 유대 땅을 기준으로 동쪽 나라에 살던 사람들인데, 어느 날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경배하러 유대 땅에 왔다.

 

그들이 보았다는 그의 별은 어떻게 생긴 별이었을까? 무슨 별을 보고 그의 별이라고 한 것일까? 그 별은 일시적으로 그때 그 곳에만 뜬 별이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그 별은 하늘에 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밤하늘을 쳐다본다. 그런데 도무지 동방박사들이 그의 별이라고 가리켰던 그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마도 그 별은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대기는 점점 어두워졌고, 하늘의 별은 점차 줄어갔다. 별이 없어진 게 아니라 나쁜 공기가 하늘의 별을 가린 것이다. 하늘의 별이 하나둘씩 보이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외로워졌고, 희망과 비전을 잃고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다. 외로울 때 위로해 주는 친구가 없어졌으니, 팍팍한 삶에 빛을 비춰주는 희망이 없어졌으니,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비전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도시의 문명 속에서, 밤이 너무 환해서 하늘을 쳐다볼 수 없고, 별이 너무 없어 하늘 쳐다보는 재미를 상실한 우리들이 별을 보고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처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들은 좀처럼 길을 떠나지 않는다. 모험을 하지 못한다. 그저 머문 자리에서 안주하기에 바쁘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면서 산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낮은 이성이고, 밤은 상상력이다. 이성이 세상을 난도질하는 사이, 밤의 상상력은 자취를 감췄다. 밤 하늘의 별은 상상력의 원천이었는데, 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도시 문명에 사는 우리들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길 잃은 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별을 본 사람은 길을 떠난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다 멈추어 서지 않았다. 별이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갔다. 중간에 헤롯 궁전에 들렀지만 궁전의 화려함과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엉뚱한 사람을 경배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떠났기 때문에 하늘 아래 땅에서의 영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별이 머문 곳에는 헤롯의 궁전과는 대비되는 평범한 집이 있었고, 그 안에는 헤롯 대왕과 대비되는 힘 없는 산모와 아기가 있을 뿐이었다. 동방박사들은 가장 귀한 예물을 드려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산모와 아기를 경배했다. 그들의 시선은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자(산모와 아기)에게 머물렀다. 별을 보고 길을 떠나온 결과다.

 

밤 하늘에 별이 별로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별이 없으니 길도 없고, 길이 없으니 떠나는 사람도 없다. 머문 자리에 안주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니 돌봄이 필요한 연약한 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툼만 늘어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하늘의 별을 되살려 놓는 일이다. 별이 하늘을 수놓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외롭다고 울지 않을 것이고, 사는 게 팍팍하다고 좌절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가 불안하다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별을 본 사람은 동방박사들처럼 길을 떠날 것이다. 별을 보고 길을 걷다 별이 머문 곳 아래 놓여 있는 연약한 생명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값진 것을 내어 놓으며 생명을 보듬고 보살피는 방식으로 경배할 것이다. 구원은 떠남이 만드는 신비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