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

 

인간은 보편성과 전체성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나와 같지 아니함'에 스트레스를 받고, '너와 같지 아니함'에 절망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서든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어떻게서든 나를 상대방과 같은 사람으로 끌어올리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질투이고 자기 과장이다. 인간의 행복은 이것의 성취인양, 세상은 속이고 또 속인다.

 

진리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보편성만 강조하고, 진리의 개별성을 간과하면, 진리의 보편성은 사람들의 손에서 폭력이 되고 만다.

 

기독교(종교)는 수없이 이같은 잘못을 저질렀고, 저지르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표지중 하나가 교회의 보편성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한다. 이때의 보편적인 교회는 '교회가 진리다'는 보편성을 말한다.

 

보편적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이 확보된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도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생산해 내었는가.

 

인류의 사상적 싸움은 '진리의 보편성'을 지켜내려는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진리의 개별성'을 진리의 보편성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진리의 보편성에서 오는 폭력이 너무 과도하기 때문에 진리의 개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함이 인간의 사상사에는 배어 있다.

 

진리의 보편성의 폭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던 시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시대이다. 그때 기독교는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았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고통 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교회의 자비에 매달렸다.

 

그 병폐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오캄이 있다. 그는 진리의 보편에 맞서, 진리의 개별성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진리의 보편에 맞서 진리의 개별성을 주장한 전통에 서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서 발견되는 정말 신기한 일은,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환원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 아래 세워진 개신교가 진리의 보편성 아래 저지르는 수많은 폭력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매우 고무적인 사람이다. 그는 진리의 보편성 속에서 끊임없이 진리의 개별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실존은 보편성과 전체성 때문에 무시당하고 고통당하기 십상이다. 그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고 있듯이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성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한다. 존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존재가 존재가 되는 길은 하나님처럼 '나는 나다'의 정체성을 견지할 때만 가능하다.

 

나는 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와 같지 아니함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가 그로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나는 나다. 그러니, 나를 상대방처럼 만들기 위해서 나 자신을 달달 볶지 말아야 한다. 고통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기를 포기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