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담이 첫째 아담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다

 

인간은 첫째 아담이다. 우리는 모두 첫째 아담의 후예이다. 첫째 아담의 후예는 카인의 후예라고도 불린다.

 

첫째 아담의 실존은 ''로 규정된다. 죄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죄는 인간의 본질에 섞여 있는 타락으로 보지는 않는다. 인간은 선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함에는 어떠한 죄성이 섞여 있을 수 없다.

 

죄는 인간의 선함을 자꾸 무너뜨리는 외부의 힘이다. 문제는 인간이 선함을 무너뜨리는 외부의 힘에 자꾸 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죄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나름대로 죄성에 저항한다. 인간은 자신의 선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이것을 ''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선함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의 의로운 활동(행동/의지)에는 인간 스스로 감지할 수 없는 불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아담 예수는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첫째 아담들에게 수난을 당했다. 예수를 핍박하고 그를 십자가에 매단 첫째 아담들은 소위 말해 '악당들'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다. 그들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존경을 받던 계층이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 무너져 가던 유대인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었던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그룹 또한 자기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대 민족의 생존을 지켜나가던 '선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의 관원들도 불한당들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해 '로마의 평화'를 지켜내려던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두번째 아담인 에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까? 이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것에 대한 라인홀드 니버의 해석은 이렇다. "모든 인간적인 의가 의롭지 않은 것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의로운 자들의 죄로 인해서 (예수는) 수난을 당한다"(수난의 종과 인자).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선함을 지켜내려 하고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선함을 무너뜨리는 죄를 견제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행위들 자체 속에 불의가 가득하다는 것을 첫째 아담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이 선하다고 말하고, 그 선함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선을 세우기 보다 오히려 선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께 다가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그를 꾸짖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7,18).

 

첫째 아담인 인간은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선함을 지켜나가고 드러내려고 하면할수록 그곳에서 '불의'가 발생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기독교는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두번째 아담이자 인자로 불리는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향 전환'을 일컬어 '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며, 그것은 두번째 아담이자 인자, 즉 이전의 타락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는 메시아를 '믿을 때' 가능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선함도 결국 전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메시아의 의로움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만이 모든 불의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아담인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당당하게 둘째 아담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가. 마치 나는 선함을 지켜내는 무슨 투사라도 된 듯이 말이다. 나의 선함이, 선하고자 하는 그 의로운 행동이 얼마나 많은 불의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멈추고, 주님(메시아/인자) 앞에 나아와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 나는 선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선하십니다. 나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 교만한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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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