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시대의 기독교

 

인간은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가령 신화적 세계관과 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과 과학적 세계관과 탈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과 가치관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해이다(이를 종말론 또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역사발전을 논했고,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헤겔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마르크스도 역사발전의 주체를 투쟁계급(프롤레타리아)로 정했을 뿐, 큰 틀에서 역사발전의 방향에서는 헤겔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보면서, 그리고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대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인간 지성은 이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새로운 종말론의 도입을 갈망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이고, 그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말의 시대를 열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트는 종말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의 사후, 그의 종말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이가 몰트만이다. 다행히도 몰트만은 바르트의 맥락에서 기독교 종말론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제는 바르트에서 시작해 몰트만에서 완성된 기독교 종말론만으로는 이 세계의 종말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이점을 간파한 몰트만도 바르트의 맥락에서 완성시킨 종말론 이후에, 과학과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기독교신학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그래서 나온 책이 <과학과 지혜>이다).

 

우리는 어떻게 끝을 맞게 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재림이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거라고 주장하지만, 과학적 발견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독교의 그런 주장에 대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과학의 발견에 의하면, 예수의 재림이 아니더라도 45억년만 더 있으면 태양이 수명을 다해 어차피 태양의 폭발과 함께 지구는 끝을 맞이 하게 된다.

 

게다가, 구글의 미래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에 의하면, 인류는 2029년 정도 쯤 눈부신 과학기술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될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은 과학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과 어떻게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이게 단순히 성경을 들이대며 과학의 주장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지금도 '창조과학회'라는 꼴통보수 집단을 필두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신학은 확정된 진리가 아니라 '되어져 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과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절대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사이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어떠한 세계관과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뭘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예수의 재림과 함께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게 될 거라면 우리는 뭣하러 우리의 인생을 열심히 살겠는가? 광신도들처럼 다 집어치우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 될 것을.

 

반대로, 과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45억년 후에 생명이 자연적으로 멸망 당하게 되거나,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곧 영생의 순간을 맞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 기독교의 종말론(구원론)은 과학의 종말론(구원론)과 어떠한 일치도 없으며 오직 적대적인 관계를 견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과학시대를 살아가며 과학이 주는 편리와 풍요를 다른 인류와 똑같이 누리며 사는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과학이 말하는 종말과 영생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가 과학의 문명을 누리면서 과학의 성과에서 비롯되는 문제제기를 등한시한다면, 이는 물 속에 살면서 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 안 하다가 물이 더러워져 또는 물의 환경이 변해 거기에 적응 못하고 죽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는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오직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자만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을 좋아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 교회는 의지력만 기르고 있을 뿐, 그 어떠한 개념 확립에도 매진하고 있지 않다. 체질은 의지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개념의 확립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줄 개념, 즉 세계관과 가치관의 확립이다. 21세기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게 될 것인가?


Posted by 장준식

미주특별연회 해법

 

시대는 정책을 낳고 정책은 개인들의 삶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자본주의, 가나출판사, 381). 지금 미주특별연회는 총회에서 얻은 자치법 마련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 정책을 낳아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는데, 개인들의 삶(교회와 목회자)을 지배할 정책을 정의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세계는 지금 고장난 자본주의를 어떻게 고쳐서 써야할까, 고민이 크다.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인류가 자본주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정부도 아닌, 시장도 아닌, 자본주의를 이끌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중심에 국민이 있다. , 국민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이른바, 복지자본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복지란 미래 불안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다. 복지자본주의란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실수의 가능성과 불운을 염두에 두고,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사회가 복지자본주의이다.

 

실패하면 끝인 사회에서 창의가 나올 수 없으며, 창의가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결국 쇠퇴하게 되어 있다. 한국 사회를 말하기 전에, 다른 교단을 말하기 전에, 감리교단을 먼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질문해 보자. 감리교회는 어떠한 복지를 가지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어떠한 사회안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실패한 목회자를 어떻게 끌어 안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젊은 목회자들이 실패를 생각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돕고 있는가?

 

이 문제를 미주특별연회로 좁혀서 생각해 보자. 기독교대한감리회 미주특별연회 소속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영세하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영세하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삶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중직을 가진 목회자가 허다하고, 목회자 사모가 목회를 돕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바깥에 나가 일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 교회는 전쟁터일지 모르나, 이민교회는 지옥이다. 전쟁터에서는 이길 경우 전리품이라도 챙길 희망이 있지만, 지옥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할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은 과연 희망적인가? 미주연회 발전위가 상정한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을 보면, 최대의 쟁점은 교구제와 감독선거법이다. 교구제는 그동안 연회 안에 존재해 왔던 갈등의 해법을 자처하며 연회를 태평양 교구와 대서양 교구로 둘로 나눠 총리사(가칭)’를 두어 치리 하는 법안이다. 감독선거법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법을 차용하여 선거인단을 구성해 감독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선출한다는 법안이다.

 

지금 미주특별연회는 연회를 앞두고 이 법안들에 대하여 찬반의견이 뜨겁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뜨거운 논의는 법안 자체보다 법안 처리를 앞두고 연회회원권을 둘러싼 행정처리이다. 자치법안을 상정한 상황에서 자치법안 통과를 놓아두고 그 법안을 통과시킬 연회원 자격 문제가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일단, 전년도 1231일까지 연회부담금과 본부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에게는 회원권이 없다. 그리고 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는 연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으므로, 연회 회비 자체를 받지 않는다. 게다가 연회 회비는 당일 접수가 전혀 되지 않고 연회 이전에 지방회 회계를 통하여 일괄 접수된 것만 유효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이번 연회에서 연회원의 자격을 박탈 당한 회원의 수가 거의 절반이 된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통계 낼 수 없는 부분이므로 잘못된 계산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미주특별연회는 연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여러 지방에서 성명서를 내는 등, 열기가 뜨겁다. 연회원의 상당수가 참여하지 못한 표결에서 결정된 정책이 얼마나 실제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갖는 것이다. 또다른 갈등이 발생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복지자본주의를 고민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감리교회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사회안전망을 확대하여 실패한 이들이 재기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 마음껏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만들어 가는 이 시대에, 지옥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은 무슨 정책을 담아내고 있는가?

 

인도 야무나 공원의 마하트마 간디 추모 공원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악덕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연회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이다. 연회의 정책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이다. 자치법 마련을 앞두고 미주특별연회에 필요한 것은 헌신이 아니라, ‘철학이다. 철학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이다. 철학 없는 정치는 교회(교단)를 망하게 하는 첫번째 요소이다. 교구제와 감독 선거법이 쟁점인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에는 어떠한 철학이 담겨 있는가? ‘철학은 없고, 혹시 예수님이 왕국을 세우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던 야고보와 요한처럼 자리에 대한 탐욕만 있는 것은 아닌가?

 

미주특별연회의 자치법은 지옥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연회원들의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자치법, 창의적인 목회를 도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는 자치법, 복지목회의 신학이 담긴, 일선 목회자가 중심인 자치법이 절실하다. 그러한 철학,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정되고 선포되는 미주특별연회의 자치법은 연회원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주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름다움에 눈 멀다

 

T. S. 엘리엇이 말하기를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내가 지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4월에 오고 싶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자연은 겨우내 꽁꽁 숨겨 놓았던 생명의 숨을 트면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기 때문이다.

 

4월이 되면 꽃집이나 정원을 따로 찾아갈 필요 없이, 사방천지가 꽃잔치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밀려오는 아름다움은 숨을 멎게 할 정도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다른 곳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오직 아름다움의 대상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4월이 피워내는 아름다움에 눈 멀고 보니, 아름다움이 내게 말을 걸어 온다. 무엇이든지 말을 건네 올 때 그 신비가 벗겨지며 존재가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움은 결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초월성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저만치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움을 발견한 자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름다움에게로 시선과 생각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 발견한 자가 아름다움에게로 다가서는 게 아니라, 발견된 아름다움이 발견한 사람에게로 다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내재성이다. 아름다움은 저만치 있지만, 발견되고 나면 어느새 곁으로 온다.

 

아름다움과의 만남은 수고와 위험을 동반한다. 곁으로 다가온 아름다움은 나도 모르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게 하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수행하도록 이끈다. 마치 베드로가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바다 위를 걷듯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활을 경험하듯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롭고 새로운 세계를 누비게 된다.

 

아름다움에 눈 머는 일은 달콤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 눈이 멀어 있을 때 겪게 되는 모든 수고와 위험은 아름다움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벗어났을 때, 눈을 다시 뜨게 될 때,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을 느껴 바다에 빠지듯 삶의 수고와 위험 속으로 매몰되고 만다.

 

궁금하다. 무엇이 진짜 삶의 현실일까.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며 매일의 삶 가운데 지쳐서 사는 게 삶의 현실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눈 멀어 수고와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게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사는 게 삶의 현실일까.

 

분명한 것은, 아름다움에 눈 멀었다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사로 잡혀 영원히 아름다움과 사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잔인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잔인함은 아름다움에 눈 머는 잔인함일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믿는 자여, 사유하라, 그리고 행위하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그가 재판과정에서 본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악은 진심으로 평범하다. 때론 선량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악은 보통 '발견'되지 못한다. 아렌트는 평범한 아이히만이 그렇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게 된 까닭은 그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전혀 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사유 (생각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유'란 단순히 '깊이 생각하기'가 아니다. 사유란 역역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공감이라 할 수 있고, 소통이라 할 수 있고, 연대(solidarity)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는 '행위(action)'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e)을 이루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노동, 작업, 행위. 여기에서 '노동'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말한다. '작업' '예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업(예술행위)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꾸고 만나게 된다. '행위'는 타자와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하면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행위'를 다른 말로 하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는 '행위'로 규정한다. 정치를 사유와 결부시켜 말한다면, 정치란 개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도록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의 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사유'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한 그동안의 한국 정치는 성경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다스렸다"( 34:4).

 

무엇보다, 국민들이 '사유'하며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게 끔 내버려두지 않고, 깊은 생각을 못하도록 언론을 조작하고, 스포츠나 스크린이나 때로는 북풍을 통해 정신을 딴데 쏟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에 맞서 마땅히 싸워야 할 교회는 어떠했는가?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성경의 말씀을 왜곡시켜 국민인 신자들을 '무사유(無思惟)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믿음이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생각 없이 따르다'는 뜻으로 변질시켰다. 예수는 우리의 사유를 막으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진정 구원이란, '악의 평범성'에 눈을 뜬 후 그에 맞서 '행위'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믿는 자여, 사유(思惟)하라. 그리고 행위(action)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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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단발머리

 

구글에서 단발머리를 검색하면 걸그룹 AOA의 노래 단발머리가 제일 먼저 뜬다. 그런데 사실 80년대의 대중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AOA단발머리보다는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먼저 뜨길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바뀐 탓인지,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검색하려면 단발머리 앞이나 뒤에 조용필을 함께 검색어로 붙여 넣어야 한다.

 

AOA의 노래 단발머리는 스타 작곡가 용감한 형제의 곡이다. 대중가요 작곡가인 그가 자신의 만든 곡에 단발머리라는 제목을 붙일 때 조용필의 대히트곡 단발머리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발머리라는 제목을 붙여 곡을 낸 이유는, 아마도,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지니고 있는 아성에 도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는 제목은 같지만 곡이 추구하는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1979년에 발매된 조용필의 단발머리는 과거지향적이다. 이 곡에서는 한 남자가 자신에게 꽃을 건네던 단발머리 여자(소녀)를 추억한다. 핵심 가사는 이렇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그러나 2014년에 발매된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는 미래지향적이다. 이 곡에서는 여러 명의 다양한 직업군의 여자들(AOA 멤버들로 대표되는)이 역경을 딛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노래한다. 핵심 가사는 이렇다. “단발머리 하고 지난 날은 잊고 나 새롭게 태어날 거에요…”

 

하지만, 두 곡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발머리의 모티브는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7,80년대의 단발머리는 소위 신여성을 상징했다. 게다가, 조용필의 단발머리에서 노래 되고 있듯이 꽃다발을 건넨 건 남자가 아니라 단발머리 여자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깨는 일이다. 보통 꽃다발은 남자가 여자에게 건넨다. 그 당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사회적 통념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이 그리워하는 여인은 그 사회적 통념을 깨고 꽃다발을 남자에게 건넨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단발머리 여인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과감하게 깬 그 여인의 도전정신인지 모르겠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에서는 사회적 통념을 깨는 도전정신이 감추어져 표현되고 있지만,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에서는 그것이 바깥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뭔가 변화를 꾀하고, 통념을 깨는 행위로서의 의식(ritual)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은 일을 잠시 내려 놓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꾼다.

 

두 노래의 뒷면에 흐르는 사회적 합의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단발머리는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의식을 담아내는 메타포이다. 그렇다. ‘단발머리도전정신이다. 머리를 싹둑 잘라내는 마음,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잘라낼 머리는 없지만, 나는 답답한 현실에 축 늘어진 나의 마음을 싹둑 잘라 단발머리를 만들려 한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흥얼거린다. “단발머리 하고 지난 날은 잊고 나 새롭게 태어날 거에요날씨 참 좋아요 분위기 참 좋아요…”


Posted by 장준식

세월호 참사 2주기에 즈음하여

ㅡ 에스겔 아내의 죽음과 성서 해석

 

나는 지난 10년간 약 3천 번의 설교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의 운명에 갇혀 열심히 설교를 했다. 설교를 하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수 많은 스토리이듯이 성경을 구성하는 것도 수많은 스토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스토리는 평범하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다루었던 본문 중에 가장 충격적인 스토리는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다(24:15-27).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에스겔서에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앞 뒤 문장이 있는 가운데서 아주 짧게 나온다.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24:18). 너무 짧게 나와 성경을 정독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을 담담하고 짧게 기록하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를 생각하니, 그 사람의 신앙과 내공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하나님은 에스겔 아내의 죽음사건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게 하시고자 에스겔의 아내를 데려 가신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려니…”(24:16). 여기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아내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쳐서 빼앗으신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아내의 죽음을 놓아두고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초상을 치르는 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오직 조용히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표징(Sign)’이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묻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일어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일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게 될 거라는 메시지이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성소(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리고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아내 죽음의 표징을 통해, 그들이 성소와 자녀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은 모두 남의 일로 여겨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어떠한 일이 자기 자신의 일이 될 때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성숙한 자, 또는 영성이 있는 자를 가르는 척도 중 하나이다. 성숙한 자 또는 영성이 있는 자는 어떠한 일이 자기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과 끊임 없이 연대(solidarity)’한다.

 

이 부분은 정말로 조심하게 해석해야 할 본문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이 부분을 설교하며 막말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며 윽박지를 것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 수 있느니 조심하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니, 회개하라!” , 이 본문을 가지고 이러한 막말을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설교자가 아니며,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을 넘어, 성령을 훼방하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다고 우리의 소중한 것을 마구 빼앗아 가시는 분이 절대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자기 아들)을 내어 놓으시는 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 표징을 우리가 잘 분별하여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너무도 많다.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심판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구현해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본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파렴치한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만큼, 악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정도로 무지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세상의 악이 세월호 아이들을 학살하였다. 세상의 악은 무구한 아이들을 학살하고도 떳떳하게 낯을 들고 다닐 정도로 무지하고 파렴치하다.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표징이다. 그 표징을 보고도 이 세상의 악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뻔뻔한 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 파렴치하고 뻔뻔한 악과 맞서 싸울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성소와 자녀들을 빼앗긴 예루살렘처럼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 눈에 기뻐하는 것,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연대(Solidarity)’이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부모들에게서 일어난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나의 일이다. ‘표징’인 세월호 참사를 보고도 침묵하며 연대를 소홀이 하거나,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실현하지 못한다면,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24:23).

 

세월호 참사는 에스겔 아내 죽음의 사건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에스겔 아내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백성들의 일이었듯이,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두려운 자, 지금 일어나 광화문으로 나가라.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게 만든 악에 맞서 싸우라. 세상 모두가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라. 그것으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삶의 스토리를 만들라. 바로 당신의 삶에.


Posted by 장준식

대나무 예찬

 

우리 교회 마당 둘레에는 대나무가 많다. 바람이 세차가 불면 대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는 폭포수처럼 시원하다.

 

사실 대나무는 사람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마당 식물이 아니다. 대나무를 키워 본 이들은 왜 그런지 알 것이다. 바로 대나무의 무지막지한 번식력 때문이다.

 

대나무는 마치 중세시대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징기스칸처럼 땅을 무섭게 정복한다. 게다가 대나무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뿌리를 그물처럼 펼치기 때문에 뿌리째 뽑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무엇보다 대나무는 놀라운 성장 속도를 지니고 있다. 대나무의 성장은 마치 스펀지 같다. 성장이라는 인자를 쭉쭉 빨아들여 하루 아침에 놀랍도록 자기 자신의 키를 늘려 놓는다.

 

우리는 흔히 대나무를 통해 군자의 기개를 말한다. 군자는 대나무처럼 곧아야 한다고 말이다. 대나무를 보면 왜 선조들이 대나무에 비유해서 군자의 곧은 기개를 빗대어 말하는지 알 것 같다.

 

곧다는 것은 단순히 다 성장한 대나무처럼 반듯하게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다는 것은 대나무처럼 뿌리를 깊게 내리고 웬만해서는 절대로 뽑히지 않을 중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늘 성장시킬 줄 아는 것이며, 무엇보다, 세찬 바람을  맞닥뜨리더라도  시원하게  흘려  보낼  줄 아는 삶의 여유를 지니는 것이다.

 

뿌리내림, 성장, 여유,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군자의 덕()임을 대나무가 가르쳐 준다.


Posted by 장준식

칠병이어 이야기와 배고픈 목사

 

이 탐욕의 시대에 목사는 참 배고픈 사람이다. 탐욕이 샘솟을 때, 나는 번민하게 된다. 탐욕을 부추기는 '광고'들은 마치 사탄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굴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너무 멀리 떠나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어, 더 이상 나에게 탐욕이 작용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무리들을 먹이시는 이야기가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오병이어' 이야기, 다른 하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이다. 나는 이 두 이야기 중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서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8:2-3).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그저 해가 저물어 배가 고팠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칠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느라 며칠씩 굶었고, 너무 멀리, 광야까지 따라 나왔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에서 예수를 따라 광야까지 나온 무리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도 어쩌다 보니 (물론 부르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라는 신앙고백이 있지만) 예수를 광야까지 따라 오게 됐다. 이젠 너무 멀리 떠나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이제, 이 나이에, 내가 목사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것을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기쁨과 유익을 주겠는가.

 

광야까지 따라 온 무리들에게 오직 희망은 예수 외에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품은 희망을 꺾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를 통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일곱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넉넉히 먹이신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어, 이 탐욕의 시대에 탐욕조차도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신세에 처해진 나 같은 사람에게 칠병이어의 말씀은 힘이요 능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니,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기에 이 말씀이 힘이요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돌아갈 수 있는 곳까지만 따라 나선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워 애굽의 고기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패악을 저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인생을 살겠는가. 어차피 길 떠난 인생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그 무엇도 나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그 무엇'에게 던지는 것이 멋진 인생일 터.

 

나는 예수를 따르다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른 '배고픈 목사'.


Posted by 장준식

이건 통치가 아니라 모방범죄다

 

모방범죄라는 것이 있다. 어느 누가 지은 범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변이가 일어난다. 범죄영화나 범죄드라마, 또는 범죄소설이나 범죄심리 책 같은 것을 보면 단순히 범죄를 나열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조밀하게 분석해 놓는다. 그런데 지능범들은 조밀하게 분석해 놓은 바로 그 범죄를 이용하여 오히려 법 망을 빠져나가거나 그것을 역이용하여 누군가를 옭아매는 데 사용한다.

 

일례를 들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보면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전체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대중들의 인권을 빼앗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예전에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주의라는 것이 이렇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최근에 이 소설을 다시 보니 새로운 게 보인다. , 한국의 박근혜 정부가 하는 일들이 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등장하는 '' '빅 브라더'를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84>에 등장하는의 슬로건은 이렇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은 이 슬로건 아래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벌인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행하고 있는역사왜곡과 너무도 닮아 있다. 이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은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대중들을 통제한다. 소설 속에서는골드스타인이라는 증오의 대상이 등장하는데, 대중들은 ‘2분 증오 프로그램(two minute hate program)’을 통해 증오를 발산하며 통제 당한다. 박근혜 정부가 계속하여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증오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사상경찰(Thought Police)’이다. 소설 속에서 사상경찰은텔레스크린이라는 장비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감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이중사고라는 것을 하는데 익숙해 진다. 소설에서 말하는이중사고란 이런 것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다 똑 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박근혜 정부는 모방범죄의 변이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실세들은 모두 조지 오웰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박근혜 정부는 이 소설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국민들을 옭아매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역사왜곡을 하고,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대중을 통제하고, ‘테러방지법을 만들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들겠는가.

 

 박근혜 정부가 하는 정치는통치가 아니라모방범죄처럼 보인다. 만약 국민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국민들 모두가 소설에서처럼이중사고를 하며 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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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 되기

-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은 혁명이라 할 만큼 많은 것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디지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한병철 교수는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시대의 병폐를 논하며 이런 말을 한다. “, , 진리는 농부의 세계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냥꾼이다. 정보의 사냥꾼들은 먹이를 찾아 디지털 사냥터인 인터넷을 쏘다니고 있다. 농부와는 반대로 사냥꾼은 이동성을 지닌다. 그에겐 정착하도록 강제하는 경작지가 없다. 그들은 거주하지 않는다”(171).

 

이러한 정보사회, 디지털 사회, 투명사회를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주의하지 않으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정보의 사냥꾼들로 전락하기 쉽다. 사실, 그러한 일들이 이미 설교가 예배의 중심인 개신교회 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사의 설교는 정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급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는 어느새 정보로 변모한 듯 하다. 이것은 매우 기형적인 현상이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선택된 디지털 매체가 복음의 내용을 바꾼 듯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먀샬 맥루한이 말한 매체가 곧 메시지다의 실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병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과 정신이 없다. 기독교인이 디지털 무리에 속하는 순간 그들은 영혼과 정신이 없는 정보만 습득하게 되는 데, 이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접하게 되는 설교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디지털 매체 속의 설교자가 하는 설교는 그것을 듣는 이로 하여금 설교자와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설교를 자기의 삶에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한 자유를 맛본 디지털 무리 속의 기독교인은 자기 입맛에 맞는 먹잇감(설교)’을 찾아 인터넷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된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변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5:1). 열매는 그냥 맺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열매는 정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쌓아야만 얻어지는 지식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기본적으로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른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이 땅에 두발 딛고 살며 신과 진리를 찾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더욱더 농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교회는 그의 경작지이다.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에 오래도록 머무르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앙의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인 교회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한 교회에 오래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가 가져다 주는 사냥꾼 되기의 습성에서 벗어나 농사 짓듯이 복음을 진지하게 대하며 그 복음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농부가 되기보다 사냥꾼이 되려는 습성이 강하다. 어떻게 이러한 습성에서 벗어나 농부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목회자의 설교 듣기를 지양하는 일이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인격이다. 복음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나의 삶을 통째로 바꾸게 하는 능력(transformation)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지, 그분의 만 듣는 일이 아니다. <투명사회>에서 말을 빌려와 표현하자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디지털 매체, 특별히 인터넷에는 시선이 없다. 일방적 관음적인 태도밖에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물든 사냥꾼 같은 교인은 설교가 나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떠나고, 신선한 정보가 없으면 떠나고, 스타일이 자기와 안 맞으면 떠난다. 디지털을 통해 접하는 설교에는 함께 머무르는 시선이 없다.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복음이 되지 못하고, 눈과 귀와 마음만 즐겁게 해주는 외설적 정보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복음을 정보로만 접하면 행함이 없는신앙인이 되기 십상이다.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설교 중심의 예배를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다. 성례전이 가지는 일차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받는 일에는 참여가 필수 요소이다. 성례전은 곧 참여이다. 물론 설교학자 메어리 힐커트 같이 설교를 성례전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에게는 설교(말씀)와 성례전을 구분 짓는 것이 불합리해 보일지 몰라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설교는 기본적으로 참여의 요소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 참석자들은 설교 시간에 목사의 일방적인 선포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은혜 되는 말(?)’에 그저 아멘정도로 화답하는 것이 참여를 이룬다.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 디지털 시대에 중요한 이유는 성례전은 기본적으로 머무름거리 두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정보재미감동'에서 떠나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기억(anamnesis)에 머무르게한다. 사냥꾼은 이동하지만, 농부는 머무른다. 사냥꾼은 먹잇감(열매)을 즉시 보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한다. 사냥꾼은 먹잇감을 찾아 떠돌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하며 그 상상 안에서 오래 참고 견딘다(참여한다).

 

인터넷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허물어 그들 간에 친밀성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을 노출시켜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를 만든다고 한병철 교수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76).

 

인터넷을 통해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를 듣는 것과, ‘제의와 예식의 객관적 기호들참여가 없는 예배는 결국 나르시시즘만 가득한 교인을 만들 뿐이다. 성례전은 적극적인 참여(머무름)’인 동시에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놀이와 제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객관적 규칙이지 주관적 심리 상태가 아니다”(75). 성례전은 개인의 주관적 심리상태와는 상관 없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머무르게 하며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친밀성을 가장해서 머무름거리 두기를 제거해 버리는 디지털 시대에 성례전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더욱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는 편리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리품 팔아 복음을 들으러 가야 하는 수고 없이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내 입에 딱 맞는 말씀을 편리하게 골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이, 농부로 태어난 우리가 어느새 먹잇감을 찾아 이러저리 쏘다니는 사냥꾼이 되어 간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이다. 복음은 경작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씨를 뿌려 경작해야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 사냥꾼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내 입에 맞는 먹잇감고르듯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의 설교는 가능한 한 멀리 하자. 그리고 하나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나사이에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적극적인 참여를 갈망케 하는 성례전적인 예배를 세워나가자.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농부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제로(nothing)로 놓기

 

나이 들어가며 맛있는 게 없다. 음식 자체가 맛있는 음식은 없고, 그저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최고로 맛있다. 그래서 요즘엔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으려고 먼저 속을 비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때는 기대를 전혀 안 했는데 뜻밖의 무엇인가가 주어졌을 때이다. 특히,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고, 그 사람으로 인해 기쁘고 감사하려면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로 나의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인생에서는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원래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원래 벌거벗고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물건이든, 기억이든, 사랑이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

 

모든 것을 제로(nothing)로 놓기, 이것은 인생의 가장 뛰어난 기술(art)이다.


Posted by 장준식

케노시스의 일상화

 

미국 시골에서 목회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보니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시몬느 베이유가 신비주의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고난" "불행"으로 가득 찼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습이 별볼일 없고 초라해지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일반 인간이 그토록 혐오하는 "케노시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 짊어졌다. 그 당시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큼 별볼일 없고 초라한 인생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걸어갔다.

 

삶의 자리는 참으로 수렁과도 같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안 된다. 빠져나오려고 힘 쓸수록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감각은 마비되고 어둠은 깊어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은 고난의 향유가 아니라 케노시스의 일상화이다. 잠시 고난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권세를 잡은 자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래서 그에겐 자유가 있었다.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모두 ''이라는 십자가를 수동적으로 짊어졌다. 살면서 우리는 질병이라는 폭력, 늙어감이라는 폭력, 죽음이라는 폭력에 의해 고통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성실하게 마주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질병과 늙어감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케노시스의 일상화를 이루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란?


성탄절기를 맞아 양로원 봉사 가서 느낀 거지만, 복지국가에서는 특별히 개인이나 단체가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잠시 방문해서 어떠한 물건이나 돈 같은 것(물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을 전달해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마워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필요해 하지도 않는다.


우선,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시간 내어 와서 그들과 말동무 해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그들과 놀아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 ‘정기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방문을 통한 친구되기가 복지국가에서 필요한 진정한 봉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는 세금을 잘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지국가에서는 세금을 가지고 복지정책을 세우기 때문에 성실한 납세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나의 성실한 납세를 바탕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가는 것이 복지국가의 특징이므로, 세금을 성실하게 잘 내는 것을 통해 봉사하게 되는 것 .


여기서 더 나아가,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진정한 봉사인 것 같다. 세금을 아무리 잘 내도 그것이 엉뚱한데 쓰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낸 세금이 합당한 곳에 합당하게 쓰이고 있는 것을 모니터링 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정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만족할 수 있는 정책, 특별히 힘들고 어려운 약자들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세우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는 일은 행복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 같다.


복지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현혹시키는 당근이 아니다. 복지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 특별히 사회적 약자가 불평등을 겪지 않도록 배려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한 복지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러한 복지는 돈이 많다고,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일깨워주고 보듬어 줄 때, ,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있을 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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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감리교 개혁의 길을 묻다

-       예후의 개혁과 여로보암의 죄

 

지금 한국 감리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타락했다고 지적 받고 있는 오므리 왕조(아합 왕조)와 다를 바 없다. 감독 선거는 금권선거의 온상이어서 돈이 없으면 감독이 되지 못하고, 목사들은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 출신 학교에 따라 줄 세우기 바쁘고,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전혀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불합리한 선거법이 지배하고 있는 감리교의 요지경을 보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나본 감독님들 중에 자격이 미달인 감독님은 없었다. 내가 만나본 각 신학교 출신(감신, 목원, 협성) 목사님들 중에 이상한 목사님은 없었다. 내가 만나본 젊은 목회자 중에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감리교는 수렁에 빠져 있을까? 개인적으로 만나본 감독님들이나 각 신학교 출신의 목사님들, 그리고 젊은 목사님들은 모두 다 훌륭했다. 그래도 수많은 한국 교회의 기독교 교단 중에 감리교 목사라고 하면 어디에다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분들 아닌가. 그런데 왜 감리교는 이렇게 수렁에 빠졌을까?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사회가 부도덕하면 도덕적인 인간도 타락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이는 라인홀드 니버가 가졌던 관심사인데, 그는 개혁주의 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정치신학 사상을 펼쳤다. 정치신학에서 특별히 국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국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그 구성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발붙이고 사는 도덕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일 민족이 2차 대전 당시 그토록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던 것은 그들이 부도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국가’(사회, 시스템)가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수많은 신학자들이 정치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지금 신학계에서는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는 독자적인 분야가 생길 정도로 요즘 신학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 체계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열왕기하 9장에 등장하는 예후는 선지자 엘리사의 후원에 힘입어 저돌적인개혁에 돌입한다. 예후의 개혁은 아합의 집안에 초점을 맞춘다. 잘 알려졌듯이, 모반을 통해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방 여인 이세벨을 며느리로 들이면서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페니키아)과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오므리 왕조는 아합 왕 때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들의 오만 방자함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놓고 무시하며 바알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힘 없는 자들(대표적인 예로, 나봇)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괴롭힌다.

 

오므리 왕조의 횡포에 맞선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줄기차게 전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심판의 말씀을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의 끝자락까지 치닫는다. 결국 오므리 왕조에 대한 심판 예언은 요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던 예후를 통해서 실현되는데, 예후의 종교 개혁과 숙청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카락이 솟을 정도로 오싹하다. 예후는 아합 일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한다. 우선 아합의 아들 아람을 제거하고, 그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유다 왕 아하시야를 동시에 제거한다. 그리고 오므리 왕조 타락의 원흉 이세벨을 제거하고, 그의 모든 자녀들을 제거한다. 또한 그들과 연관이 있는 친인척들을 비롯하여, 바알 숭배자들 모두를 제거한다. 그야말로, 조선 시대 연산군 때 있었던 것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 작업이 벌어진다.

 

예후의 개혁은 그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고백하고 있듯이,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었다(왕하 10:16). 엘리사 선지가가 기름을 붓고 열왕기하 기자가 예후의 피비린내 나는 개혁에 대해서 악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예후의 열심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악에 관심이 높았던 호세아 선지자는 예후의 행동을 비판한다(1:4). 또한 예후의 개혁에 대한 열왕기서는 이러한 평가로 마무리 된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 28-29).

 

여기서 지적 받고 있는 예후의 잘못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얘기해서, 예후는 부도덕한 인간(아합 일가)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부도덕한 사회(시스템)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서 부도덕한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바꾼다 할지라도, 그 도덕적인 인간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사회, 시스템)가 부도덕하면 구조적인 모순과 악은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여로보암의 죄가 큰 것이다.. ‘여로보암의 죄는 구조적인 악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로보암은 솔로몬 이후에 정권을 잡은 뒤, 북쪽 열 지파의 지지에 힘 입어 북이스라엘을 세운다. 그러나 그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에만 있던 솔로몬 성전으로 북쪽 지파의 사람들이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결국 자신의 통치 영역에 두 개의 산당을 세워 금송아지 형상의 여호와를 모셔 놓고 거기서 예배하게끔 종교 시스템을 바꾼다. 신명기 사관의 입장에서 기록된 열왕기서에서 여로보암의 죄로 지적되는 이 문제는 독특한 성전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 없는 제도였다.

 

그러나, 북쪽의 열 지파 사람들(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만들어 놓은 벧엘과 단의 산당에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저 멀리 남쪽 예루살렘 성전(솔로몬 성전)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도적인 악이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 순수하고 거룩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벧엘과 단의 산당에 설치된 금송아지 신상(여호와의 신상)에게 절하며 예배 드리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잘못된 제도()는 그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을 생산하도록 인도한다. 내가 만나본 감독님들과 목사님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지만, 현재 감리교의 법 제도는 감독이 되고자 할 때 또는 어떠한 이익을 대변하고자 할 때 그들은 잘못된 제도 안에서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가피한 을 생산해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는 10월에 있는 입법총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장정개정위원회는 열심히 의견을 모으고 개정법안을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열심은 예후의 열심에 비견할 만 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공청회를 거쳐 확정 지어가는 장정개정위원회의 개정법안을 바라보자니, 그들에게 예후의 열심은 있는데 결국 여로보암의 죄를 피하지는 못할 것 같아 우려된다. 특별히, 그 동안 감리교회의 혼란의 중심이었던 감독제도와 선거권, 그리고 신학교 통합 문제에 대한 안일한 대처는 예후(장정개정위원회)의 열심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여로보암의 죄로 남을 것 같다.

 

도덕적인 인간이 그 도덕성을 잘 유지하려면 도덕적인 제도는 필수다. 도덕적이지 못한 제도 안에서 도덕적인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을 기대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이번 입법총회는 도덕성에서 다른 교단 목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감리교의 목회자들이 그 도덕성을 잘 유지하도록, 도덕적인 제도를 기필코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예후의 열심이 여로보암의 죄(제도적인 모순)까지도 바로 잡는 온전한 개혁을 이루게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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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가인의 후예에서 아담의 후예로

 

미국은 졸업의 계절이다. 졸업한 이들의 웃음이 담긴 사진이 도처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졸업한 이들의 희망찬 웃음은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은 정말 냉혹하기만 하다.

올해인가 작년인가,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이런 현수막이 걸린 적이 있다. "연대 나오면 뭐햐나, 백순데.."

 

요즘엔 아무리 높은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다. 학위가 다 자기만족에 머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자기 만족이라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인 시대이다. 자기 만족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의 낙오자인양 죄책감마저 드는 시대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그나마 낫다( 3:17). 수고하면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형벌을 받는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요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 같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수고한 만큼 먹고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땅을 아무리 갈아도 효력이 나지 않는데, 땅 가는 것 자체로 만족을 얻으며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을 먹을 때 오는 만족만큼 근본적이고 더 큰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자기만족만 누리다가 그렇게 그냥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일명백수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는가.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발표하여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할 수 있어.”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에서 가방 끈 길게 만들어 주는 데만 관심 있는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서태지는 가방 끈이 길어야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는 신화를 깨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깨졌는가?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은 단순히 가방 끈을 늘려 보겠다는 관심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가방 끈이라도 늘려야 빡빡한 현실이 좀 달라질까 시도해 보는 젊은이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땅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가인의 후예에서 벗어나, 그래도 평생 수고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던 아담의 후예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고, 목사 안수를 받아도 갈 데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신음하고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현실인식능력을 찾아보기 힘들고,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것인 것같다.

- 사회체제의 불의에 대해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마르크스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초인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사회체제가 불의한데 개개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불의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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