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가야 할 때

 

누군가 길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먼 곳에 여행 갔다 돌아올 때, 정말로 희한한 것은 길을 따라온 것뿐인데,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길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것이다. 그 길만 따라 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길이 안전하고 평안하길 바란다. 길을 따라 가다가 안전하지 않아 보이거나 울퉁불퉁하면 긴장하거나 불평을 늘어 놓는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 이미 닦아 놓은 길, 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다닌다. 길이 놓여 있지 않거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히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놓거나, 아니면 혼자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죽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 정현종 번역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시이다. 이 시를 통해 어떤 이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명백한 오독이다. 이 시의 주제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점에 놓여 있던 두 갈래의 길 중, 한 길을 택했더라도, 나중에, 선택하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후회하게 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시이다. 그렇다. 우리는 후회 없이 살 수 없다.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보면 후회가 몰려오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면, 길을 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지점에 주의(Caution)’ 간판이 놓여 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빠르게 지나면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을 안전하게 통과하는 방법은 천천히, 느리게 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속도를 줄인다.

 

그렇다. 인생의 길이 울퉁불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가는 것이다. 울퉁불퉁 한데도 평소처럼 빠르게 지나다가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돌아오며 후회하기 보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일을 돌아보며 더 큰 후회를 한다. 느리게 가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갈 때는 무조건 느리게 가야 한다. 그래야 후회 많은 인생의 길을 돌아보며 지혜로웠던 자기 자신을 대견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름다움과 이끌림

 

자동차로 이동하는 동안 주로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을 튼다. 하나는 NPR 뉴스 채널이고, 다른 하나는 클래식 방송 채널(Classical KDFC)이다. 뉴스는 주로 출근하면서 틀고, 클래식은 주로 퇴근하면서 튼다. 아침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하고, 저녁에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지난 밤에 돌려놓았던 클래식 채널을 잠깐 듣게 되는데, 대개는 기계적으로 뉴스 채널로 바꾼다. 그런데, 어느 날은 클래식 채널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놓아두는 때가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올 때가 그렇다. 며칠 전, 그러한 경험을 또 했다. 아침에 자동차 시동을 건 동시에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었다.

 

브람스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의 곡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의 교향곡 1번에는 그의 아름다운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잇는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파 작곡가이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이름을 내놓은 후에도 20년이 넘게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 베토벤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죽은 후,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교향곡을 작곡할 자신이 없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에는 그러한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교향곡 선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베토벤이라고 하는 큰 산을 기어이 넘어선 후, 자신만의 선율을 조가비 속의 진주처럼 반짝이며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은 브람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멈추어 서게 하는 이끌림이 있다. 그런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움은 짧은 시간에 빚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뇌와 노력, 그리고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빚어지는 신비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후서 1장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듯, 구원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길인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은 정말 부단히 걸어 높은 산을 넘는 것과 같다. 마치 브람스가 부단히 걸어 베토벤이라는 높은 산을 넘었던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꾼다. 베토벤의 교향곡 같이 아름다운 교회, 베토벤의 교향곡을 넘어서기 위하여 무단히 고뇌하고 노력했던 브람스의 교향곡 1번 같이 아름다운 교회, 우리 모두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간다면,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처럼 가슴 뛰는 일이 될 거라 믿는다. 그 꿈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듣는다.


Posted by 장준식

좋은 설교란


1. 좋은 설교는 그 설교를 듣기 전과 들은 후의 세상이 달라 보이게 한다.


2. 좋은 설교는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ㅡ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선교 또는 봉사, 섬김 (즉, 하나님 나라의 일) ㅡ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3. 좋은 설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확대,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해서 말하려고 애쓴다. 


4. 좋은 설교는 어디선가 진실은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기도의 자리로 이끈다.

5. 좋은 설교는 문제와 사태를 다루는 데 있어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사태를 보는 다른 눈, 제 3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돕는다.

6. 좋은 설교는 성경과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 속에서 장차 내 생각이 될 것을 찾아내고 다른 것을 느끼도록 자극하고 다른 일을 해보도록 격려한다.

7. 좋은 설교는 누군가 이미 용기를 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예화가 하는 일)

8. 좋은 설교와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 자아도 사라지고 ‘이건 진짜다, 멋지다’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정혜윤의 <뜻밖의 좋은 일>에서 얻은 문장을 바탕으로 재구성)


Posted by 장준식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고

 

악의 이상야릇한 모습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자유,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돌리고 자기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것을 바꿔 서로의 자유를 해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사회를 사는 의미가 아닐까요.”(175).

 

악은 왜 존재하고, 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그 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적인 악을 파헤치고, 그 시스템적인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악은 텅 빈 마음에 깃든 병이다. 악은 관계를 결여한 병이다. 악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외, 타자에 대한 소외, 이 세상에 대한 소외에서 발생한다. 악은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아와 세계 사이에 팬 골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악은 죽음과 파괴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악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문학과 철학과 성경(신학)을 동원한다. 다양한 악의 실체를 밝힌 후,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있을까? 이 세상은 과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사랑할 만한 존재인가?

 

우리는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즉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의 능력은 책임(responsibility = response + ability)’을 불러오는데, 책임이란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타자가 요청하면 거기에 응답하는 것, 세상과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악과 타락을 대면하고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통찰력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혁명이나 사회 변혁 같은 거대담론보다 세간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얻은 것인데,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은 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엉망진창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세간의 세부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 지루하고 진부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나를 뛰어 넘는 어떤 존재와 이어져 있다는 소망 안에서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악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이 세계와의 단절의 골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는 자기 자신 안에 생긴 골, 타인과의 관계에서 패인 골, 그리고 이 세상과의 사이에서 생긴 골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고, 사랑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감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존재) 안에 사랑의 능력을 태동시키고 성장시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세간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토마스 홉스의 사상으로 보는 남북관계


근대는 전쟁을 통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유럽에서 발생한 30년 전쟁(1618-1684)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며 자신의 사상을 키운 토마스 홉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every man against every man. 왜 인간은 서로를 향해 투쟁할 수 밖에 없을까?


토마스 홉스가 주목한 것은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이다. 여기에서 홉스의 독특한 인간론이 발견되는데, 그는 인간에 대해서 비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관론은 어거스틴이나 루터, 또는 칼뱅이 말하는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다. 앞의 신학자들은 죄의 개념을 인간에게 가져와 인간에 대한 비관론(죄에 의한 타락)을 전개하지만 홉스에게서 발견되는 비관론은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라 경험적 또는 철학적 비관론이다.


홉스는 사람의 정신과 몸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더 뛰어난 몸이나 더 뛰어난 정신이 없고, 모두의 몸과 정신은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평등성이 인간에게 고통과 비참함을 가져다 준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몸,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바라고 소망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때 발생한다. 서로 같은 것을 얻고자 할 때 거기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서로를 파괴하려는 열망이 생긴다.


남한이나 북한, 그리고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같다. 그것은 국가의 안전이다. 홉스의 평등성에 기대서 말한다면,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다스리거나 간섭할 수 없다.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모든 나라가 같은 것을 향해 경쟁할 때이다.


홉스는 이러한 상태를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바로 그 죽음의 위협이 인간들 간에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을 통해 서로 투쟁 관계에 있던 인간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평화를 일구어 낸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은 서로 간에 평화 계약을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하기 때문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자연 상태에서 서로 간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내는 가장 큰 원동력은 홉스가 말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the fear of death’이다. 이처럼 남한과 북한은 21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연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홉스가 발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오는 사회 질서는 굉장히 원시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심오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그대로 적용되는 실제적인 정치 이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남한과 북한이 평화 협정을 맺게 되는 계기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크고 위대한 가치가 없을까’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심리적 압박이 아니라, 보다 위대한 긍정적 가치가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일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측면에서 기독교는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어떠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

해방의 끝은 어디인가?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미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흑인여성해방신학, 남미여성해방신학(Mujerista), 퀴어신학, 탈식민지신학, 그리고 장애인신학,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악들과 맞서 싸우느라 참 고생이 많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분명히 느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지목하는 일 보다(물론 이것도 중요하다)는 어떤 악이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생산되고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었는지, 왜 차별하고 있는지 모르고 차별한다. 일례로, 장애인신학에서 말하는 근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주체이다. 근대는 경제적 관심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를 파악하지,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성이 없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거부된다. 그러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거부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장애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탈근대(Post-Modernity)를 살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탈근대는 근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를 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런데,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보면, 내 생각에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가 아닌가 싶다. 모든 분야에서 자기 자신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어필하느라 모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일 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시키는 현대인은 그렇게 사회에서 소비되다 쓸모가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뿐이다. 이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가 주장하고 실천했던조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이 거대한 소비사회를 돌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메시아를 더 갈망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메시아 사상이 할리우드에 히어로 물들과 만나 판타지로 치닫고 있지만, 판타지가 아닌 희망(궁극적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은 깊고, 내 발걸음은 너무 느리다.


Posted by 장준식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그리고...

마음의 고향 같은 작은 숲(리틀 포레스트),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작은 숲을 가지고 있는가. 그 숲은 치유와 회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게 없다면, 인생의 아픔을 어디에서 달랠 수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느낌,
스캇 &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읽는 느낌,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는 느낌,
그리고,
나영석 PD의 <삼시세끼>를 시청하는 느낌이었다.

아프면서도 그 아픔을 치유(힐링)할 공간과 방법을 모르는 현대인의 삶에
작은 숲이 되어 작은 힐링을 제공하는 <리틀 포레스트>,
결국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연과 그 자연에 깃든 추억과,
무엇보다 인생의 이야기를 함께 써나갈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작은 숲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숲을 함께 거닐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행복을 완성한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말한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괜찮아’의 위로가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권하는 영화,
그리고,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도 일독을 권한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를 살리고 싶다

Christianity is Platonism for the masses.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처방약을 보면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의사가 이 약을 당신에게 처방해 준 이유는 이 약이 부작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장)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들은 이 사명을 열심히 지켰다. 유대땅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나갔고, 땅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 서기 위해서 그 땅과 그 땅의 사상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복음만 봐도, 로고스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로고스는 유대 개념이 아니다.


유대 땅을 넘어 헬라 세계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차용한 것은 헬라인들의 철학인 플라토니즘(플라톤 철학)이다. 그런데, 그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사상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 세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적,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차용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이 더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현재 기독교에서 유통되는 소위 기독교의 교리는 대개 플라톤 철학을 차용한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등장하는 두 왕국 이론도 그렇고, 그의 원죄 개념도 그렇고, 그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도 그렇다.


중세에 가면, 플라톤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더해져, 더 복잡한 기독교 교리가 생성된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성만찬 교리가 대표적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섞인 교리이다. 형상(Form)과 질료(Matter)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의 보편 논쟁은 모두 플라톤 사유의 반영이다. 보편의 개념(이데아)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 철학이 실재론이고, 그것에 대항하여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철학이 유명론이다. 중세의 가톨릭이 교회를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한 것은 교회가 보편의 개념으로 교회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야, 보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교회는 영토와 사상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복음의 훼손을 가져왔다. 복음의 이원론적 해석이 불러온 가장 큰 재앙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몰이해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더 이상 현실을 정의롭게 정화시키는 원동력을 잃었고, 오히려 사회의 적폐가 되었으며, 여전히 몰역사적인 구원만 외치고 있는 데 머물고 있다.


니체가 외친 구호,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는 옳다. 그리고 그가 말한,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도 옳다. 니체가 도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왜곡한 교회의 파렴치한 역사와 권력이다. 치료를 위해 처방한 약이 그 부작용 때문에 오히려 해를 끼친 격이다. 교회가 지금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떻게 그 부작용을 걷어내고, 약효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게 끔 만들 수 있을까? 교회를 살리고 싶다.


Posted by 장준식

라인홀드 니버에서 시작되는 나의 정치신학적 관심과 과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매일 같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이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은 다르다. 집단은 개인이 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타적이지 못하다. 집단은 매우 이기적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기독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다. 그런데, 연일 뉴스를 통해서 들려오는 교회 집단의 소식은 참담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라인홀드 니버는 그러한 괴리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은 다르다는 것이다. 개인은 도덕의 원리를 통해 움직일 수 있지만, 집단은 그 도덕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아무리 집단(교회)에 양심적인 호소를 해도 집단(교회)은 그 도덕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집단에는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집단들 간의 관계는 항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특별히 우리는 교회를 대할 때 이러한 것을 간과한다. 일례를 들어, 요즘 교회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목회 세습의 경우에서도 보면, 세습을 감행하는 개인 목사나 그 자녀들은 신실한 신앙인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습을 감행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그 집단에 흐르는 정치적인 영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서 아무리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그들은 그들의 도덕적 양심에 흔들려 세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목회 세습을 끊어내고 방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면 안 되고, 목회 세습에 얽힌 집단의 정치적 영역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가진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이 이성(또는 양심적 호소)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버의 분석과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거기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힘을 소유한 정치적 대항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 가의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인간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한, 어떠한 일이 아무리 비도덕적이라도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인의 도덕이 집단의 도덕보다 뛰어날 수는 있지만, 개인의 도덕 자체의 질적인 향상은 그 자체로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리고, 집단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을 자기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로 양성하기 위한 자기들만의 도덕을 주입한다. 이미 주입된 도덕적 페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항세력이 정치적 힘을 가지고 도덕적인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할 때, 이해 또는 가치가 상충되는 두 집단 간의 갈등은 자칫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물론, 니버는 그에 대하여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non-violent coercion)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운동이 사회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능성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서 보여준 촛불혁명은 니버가 제시한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의 한 예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운동을 통해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는 했지만, 과연 세상이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의 관심은 니버가 말하고 있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도덕을 지닌 개인들 간의 연대(solidarity)를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는가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연대(solidarity)에 자기 자신을 투신(내어줌)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아무튼, 교회는 집단으로서, 단순히 개인에게 적용하는 도덕,윤리의 양심적 호소로만 정의로워질 수 없다. 집단이 정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접근법보다는 정치적 접근법이 훨씬 중요하다. 교회라고 하는 집단은 개인의 도덕과는 상관없이 그 집단 자체의 속성에 따라 집단이기주의적인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달려간다. 그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부정의한 정치적 욕망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하나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자체를 집단의 속성을 담지하지 못하도록 해체하는 것이다. 첫째의 방법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고, 둘째의 방법은 우찌무라 간조와 그의 제자들, 특히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둘 중에서, 21세기 교회와 사회에 어떠한 것이 더 효과적일지는 연구를 해봐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질 들뢰즈의 철학(리좀, 노마디즘, 멀티플러서티)과 요한 밥티스트 메츠(Dangerous memory)의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의 문제를 정치신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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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은총을 잃은 목사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재밌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은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와 그녀의 오라비 레어티즈의 대화 중에 나오는 문장이다. 레어티즈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누이 오필리아에게 처녀로서 몸 조심 할 것에 대하여 멋진 교훈을 준다. 오라비의 교훈을 들은 오필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훌륭한 교훈의 골자를 제 마음의 파수꾼 삼을게요. 그러나 오라버님, 은총을 잃은 어떤 목사들처럼 나에게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 보여주고, 자기는 허풍선이 무모한 탕아처럼 환락의 꽃길을 밟으며, 자신의 설교를 저버리진 마세요.” (햄릿, 33, 민음사)

 

뜨끔한 문장이다. 오필리아의 문장에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환락의 꽃길이 대조되고 있다. 은총을 잃은 목사들은 설교단에서 청중에게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길을 걷지 않고 환락의 꽃길을 걷는다는 비판이다.

 

무엇보다, ‘은총을 잃은 목사라는 구절이 마음에 꽂힌다. 누구나 목사가 될 수 있지만, ‘은총을 잃지 않은목사로 남아 있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 하나님이 부르신 은총을 간직한 목사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을 설교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 세상에는 온통 은총을 일은 목사들천지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 그들은 은총을 잃어버렸을까? 무엇보다 은총을 잃어버리는 일만큼 끔찍한 일이 목사에게 어디에 있을까? 목사가 무릇 지켜내야 할 것은 교회 건물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자존심도 아닌, 은총이다. 은총은 잃은 목사는 환락의 꽃길을 걷게 된다. 꽃길을 걸어 좋지만, 결국 그 끝에는 천국이 없다는 것, 그것은 슬픈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할로윈과 기독교

 

10 31, 시월의 마지막 밤, 학창시절 이 날은 대개 문학의 밤을 했다. (물론 반드시 10 31일은 아니었으나, 그 즈음, 토요일이었다.)

 

10 3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 전야제가 있는 날이다. 이 풍습은 캘트 족이 지키던 할로윈을 통해 발전된 기독교의 축제일이다. '할로윈(Halloween)'이라는 말 자체가 '만성절 이브'라는 의미이다. (켈트어로 Hallow는 성인(Saints)이고 여기에 'eve' 붙어 'Halloween'이 된 것이다.)

 

할로윈에는 원래부터 귀신 숭배의 개념이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산자와 죽은 자의 교통(communication)을 말하는 신학이 있는데, 그러한 신학과 캘트 족이 지키던 샴하인(samhain)의 개념이 맞아 이것이 기독교화(할로윈)된 것이다.

 

할로윈 문화가 발달된 미국에서는 할로윈 데이에 교회에서 따로 모여 '할렐루야 데이' 'Saint Night' 같은 행사를 한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할로윈 파티를 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할로윈 데이에 따로 모여 교회 행사를 치르는 목적은 세상의 할로윈 파티가에 귀신 분장을 하고 귀신을 숭배하는 요소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원래 할로윈을 기독교의 축제일로 만든 취지를 잘못 알아서 일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할로윈에 '영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 문화의 배경을 숙고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다.

 

할로윈이 미국 사회에서 번성한 이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번성하는 이유는 순전히 '시장' 때문이다. 미국에서 할로윈 데이로 인해 발생되는 경제 효과는 10조원에 이른다. 그야말로 대목이다. 할로윈 데이가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좋은 것은 시장이지, 귀신이 아니다.

 

현대 교회가 싸워할 대상은 할로윈 데이의 귀신이 아니라, ''이 중심이 되어버린 물신숭배이다. 세상에서 할로윈을 즐기는 것이 '귀신을 숭배하는 행위'라는 입장에서 교회의 행사를 따로 마련하는 교회는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교회의 행사는 불순한 영과의 싸움보다 '(시장자본주의)'과의 싸움을 지향해야 한다.

 

할로윈에 하는 교회의 행사는 세상에서 하는 할로윈 파티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지,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시장과 자본에 뿌리까지 물든 세상, 그리고 은근슬쩍 그 풍경에 자기를 밀어 넣은 교회가 그것에 얼마큼이나 저항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럴바에야, 교회에서 따로 행사를 갖기 보다, 할로윈 축제에 기괴한 분장을 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그 날이 만성절(All Saints Day)의 전야제인만큼, 기독교인은 기독교 역사의 기념할만한 성인(Saints)으로 분장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가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어떨런지.

 

그러한 시도는 시월의 마지막 밤에 교회 공간에서 하던 문학의 밤을 더 넓은 공간인 '세상'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될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Posted by 장준식

졸혼풍조와 교회

 

'졸혼'이라는 용어는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졸혼'이 유행인 듯 하다. 이혼의 상처가 만만치 않기에 차선책으로 졸혼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도 줄일 수 있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법적 이익도 계속 누릴 수 있으며, 법이 정해준 테두리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 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졸혼의 가장 큰 장점은 '별거'와 사생활'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 받으려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당해온 '개인'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 주는 유용한 통로도 쓰이고 있는 듯 하다.

 

모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풍조처럼 느껴진다. 이것의 가치평가를 따지는 일은 매우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로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교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는 공동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가 '믿음' 또는 '구원'이라는 신앙공동체적 요소 때문에 때로는 개인의 자유가 얼토당토 안 하게 침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현상에 반발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공동체 생활에 대한 '졸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선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체감하는 현실은 매우 난감하다. 교회공동체를 떠난 '가나안교인'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공동체 내에는 대개 두 부류의 교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인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며 신앙생활 하고 싶어하는 신앙인 부류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 보면,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부류도 저변에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공동체를 강조하는 부류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공동체에 희생하는 만큼 희생을 보이지 않는 부류들에 대한 불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들도 자신들이 희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선다 싶으면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대(신앙)인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못하는 목회자는 공부를 더하거나, 목회현장을 떠나야 한다.)

 

요즘 목회현장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졸혼'의 저변에 깔린 것과 같은 '별거' '사생활'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유행 때문이다. 요즘 신앙인들은 교회에 출석하긴 하지만 교회에 소속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사생활의 일부분 일뿐이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개방하는 것만 수동적으로 교회가 받아들이길 바랄 뿐, 교회(또는 목회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생활의 대표적인 공간인 가정집 심방은 극도로 드물고, 대신 전화심방이나 다른 형태의 심방이 선호된다.

 

교회공동체성의 회복은 단순히 공동체를 강조하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을 통해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기 원하는 요즘 신앙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 또는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말한 스텐리 하우워즈의 말처럼, 공동체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교회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은 올바른 개념의 확립을 통해서이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지력을 통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공동체의 운명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신앙인들)을 위한 현대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그 명암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과제일 뿐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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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순절 맞이하기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릿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 쓰는 사순절을 보내고 싶다. 그러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설교 준비 노우하우

 

1.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한다. 독서를 하되 신학서적이나 신앙서적만 읽지 말고, 문학서적이나 철학서적도 병행하여 읽는다.

 

2. 다른 설교자의 설교는 가급적 듣지 않는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많이 들으면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설교를 무의식적으로 베끼게 된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독창적인 설교를 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근본적인 밑거름이다.

 

3.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언론 기사를 주목한다. 특별히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적 사건 사고를 챙겨 본다.

 

4. 교인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당면한 문제, 그들의 고민 등을 잘 메모해 둔다.

 

5. 성서 본문을 택할 때, 사회적 문제, 교인들의 문제에 초점을 먼저 맞추지 말고, 되도록이면 성서정과에 맞춰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먼저 맞춘다.

 

6. 성서 본문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성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닌, 평소 성경을 많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서학 분야와 조직신학 분야의 책을 평소에 많이 읽어 두어야 한다.

 

7. 선택한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을 한다. 성서 본문이 원래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밝혀낸다. (이것을 충분히 하지 않고 설교를 하면 다 사기치는 거다.)

 

8.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이 이루어졌다면, 그 말씀을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로 가져 오는 작업을 한다.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평소에 해 놓은 독서이다.

 

9. 성서의 본문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를 공적인 사회 문제에 적용하는 일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사적인 교인들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교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그 선을 넘으면, 설교가 아니라 잔소리가 된다.

 

10. 설교 준비는 일주일에 걸쳐서 하되, 최종 설교문 작성을 주일에서 너무 멀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주일 설교문 작성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끝내는 것보다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끝내는 게 더 좋다. 왜냐하면, 최종 정리는 뇌 속에 말씀을 새기는 작업인데, 우리의 뇌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문을 뇌가 기억하고 있어야, 단순히 설교문을 읽는 설교에서 벗어나 설교문에 기초한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내 기억에 없는 것은 그만큼 영감과 감동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자신이 내 설교에 영감과 감동이 넘쳐야 그것이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되는 법이다.

 

11. 주요 요점을 적은 메모 형식의 설교문을 작성해서 설교하면 안 된다. 설교문은 반드시 완성된 문장 형태여야 한다. 자기의 생각, 또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전한 형태의 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기가 지금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12. 최종 설교문을 작성했다면, 반드시 두 세 번 읽으며, 색깔 있는 팬으로 첨삭을 해야 한다. 그렇게 첨삭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야 현장성을 살릴 수 있다.

 

13. 설교 초보자라면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한 게 낫다. 그래야 말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하되, 때로는 그때그때의 영감에 내맡기는 것도 괜찮다.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말로 때우기식의 설교는 죄이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14. 예배를 마친 후,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여 자기 자신의 설교를 다시 정리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설교문 작성에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최종 설교문에 표시되어 있는 첨삭 부분을 다시 정리하여 파일에 저장한다.

 

15. 스스로 자신의 설교의 청중이 되어 자신의 설교를 들어본다. 그리고 스스로 피드백을 해 본다. 더 나아가, 배우자에게 피드백을 받아 본다. 배우자의 피드백만큼 좋은 피드백이 없다.

 

16. 설교 준비와 실제 설교의 전 과정을 통해서, 설교 작업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설교를 소비적으로 하면 남는 게 없고 영적 허탈감만 올 뿐이다. 설교 작업을 생산적으로 한다는 것은 설교 작업을 통해서성장해 가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압박감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을때우면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설교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서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실력과 영성을 기르는 실전(實戰)이어야 한다.

 

17. 믿음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예배 때 드려지는 찬양이나 선포되는 설교는 감정을 고양시키는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변화는 사건이 발생해야만 일어난다. 어떠한 사건을 겪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전의 존재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게 문제고 과제다. 과연 우리는 설교를 사건이 되게 하는가?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그러한 능력은 우리에게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만 일으키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누구보다 성령께 모든 존재를 맡길 줄 아는 깊은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사건, 갈등, 그리고 성장

 

나는 군대에서 장군 운전병을 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최상위 부대에서 최고 고위급 인사를 모시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 여지껏 잊혀지지 않는,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교훈이 있다.

 

모시는 분의 보직 상 장거리 운행이 잦았다. 장거리 운행을 하기 전에 운전병이 꼭 해야 할 일은 정비대에서 차량을 점검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거리 운행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량 정비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게다가 얼마전 차량 정비를 받았던 터라 별 문제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때가 여름 가까웠던 것 같다. 사건은 그때 터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 천안 쯤에서 갑자기 차가 서 버린 것이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일이 벌어지자 장군은 나에게 차량 점검 여부부터 물었다. 점검을 못 받았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 수송대에 전화해 빨리 일처리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이후의 사건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견인차에 끌려 이동 도중 차 안에서 장군이 나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장군 그 때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사건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후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니, 앞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조속히, 그리고 잘 수습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라."

 

인생을 더 살아보니,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 목회를 해 보니 그때 장군의 교훈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알겠다.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터진다. 갈등은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사건과 갈등이 있어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공간, 또는 어긋난 공간을 매울 수 있는 기회도 온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괴로운 일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사건과 갈등을 통해 더 나은 인간관계, 공동체를 만드느냐, 아니면 사건과 갈등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살다보면 원치않는 사건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사건과 갈등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사건과 갈등을 통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다. 아픔 없이 성장하는 생명은 없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