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어울리는 사람?

 

의자의 용도는 무엇일까? 의자는 원래 을 위한 기구였다. 의자는 생활하다 힘들면잠시 앉아 쉴 수 있도록 고안된 물건이다. 그런데, 어느새 의자는 쉼을 위한 기구보다는 일을 위한 기구로 탈바꿈 한 듯하다. 어느 시인은 그의 시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에서 그러한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곧추 세운 등뼈 아래로

엉덩이를 엉거주춤 유지해야 하는

이 포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각자의 배후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포즈를

우리는 언제부터 배워야 했습니까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부터 구부려야 했습니까

어디를 숙여야 했습니까

……

 

사로잡힌 척 의자에 앉아 우리는 손만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왜 멈출 수 없습니까

……

 

뒷모습이 구겨져 있습니다

캄캄한 곳에 우리는 너무 오래 접혀 있었습니다

(이원의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 중에서)

 

우리는 의자에 갇힌 인간 같다(새장에 갇힌 새처럼). 우리는 왜 하루 종일, 그토록, 지루하게, 또는 집요하게,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몸의 가장 중요한 마디를 구부리고 사로 잡힌 척쉴 새 없이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이 시는,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칭한 이탈리아의 예술가, 브루노 무나리가 1944년 발표한 포토에세이 [불편한 안락의자에서 편한 자세 찾기]라는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안락의자인데, 불편하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주인공은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모두 엉거주춤, 안락해 보이지 않고, 불편해 보인다. 그렇다면, 편한 자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안락의자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아보아도 불편한 안락의자는 나에게 쓸모 없다. 그러므로,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함을 느끼려면 나에게 맞는 안락의자를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을 잘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이미 우리에게 안락의자라고 제작해 준 그 의자에 편안하게앉아보려고 나의 몸을 이리 구겨보고 저리 구겨보곤 한다. 나의 몸에 맞지 않는 의자에 사로잡힌 척앉아 그 의자가 나의 몸에 맞는 의자라고 정신수양하며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의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쓰며 사는가. 세상에 나와 있는 각종 자기계발서는 자기를 계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이 이미 만들어 준 안락의자에 나 자신을 꾸겨 맞춰보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준 안락의자에 맞춰 앉아보려고 몸의 중요한 마디를 구부리고 숙이며산다.

 

우리는 그렇게 너무 오래 접혀 있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면, 우리는 이제 사로잡힌 척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멈추고, 한 끼를 위해서가 아닌, 생명을 위해서,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는 의자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구겨져 살지 말자.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풍  (0) 2018.10.22
유로지비  (0) 2018.09.30
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0) 2018.09.17
느리게 가야 할 때  (0) 2018.09.10
아름다움과 이끌림  (0) 2018.08.31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