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어느 시인은 키스하는 순간을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내가 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 시집 중, '키스'에서)

우리는 엄마 자궁을 통해 이 세상에 오기는 했으나, 아직 다 태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신의 배려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모두 태어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신은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가르쳐 주기 위해, 엄마 자궁을 통해 나올 때 모든 것이 태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위한 진정한 자궁은 엄마의 자궁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신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태어남의 자궁'이다. 이 세상에서, 매일, 무엇을 통해 '조금 더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엄마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온 아기는 엄마와의 눈맞춤을 통해서 조금 더 태어나고, 엄마와의 입맞춤을 통해서 조금 더 태어난다.

 

한꺼번에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생명들(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생명, 다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아주 조금씩 태어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가장 모자란 눈, 한 참 더 태어나야 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을 고정된 생명으로 바라보고, 그 모자람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인생은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을 찾는 놀이와 같다. 그 놀이에 열중하지 않으면 인생은 재미없다. 그 놀이를 하는 중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한 순간에 모두 태어나려 하는 욕심이다. 그러한 순간은 없다. 신은 그러한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모두 태어나는 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조금 더 태어나야 한다. 오늘 하루의 일(놀이)은 우리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가장 허무를 느끼는 순간은 어느 일을 통해 조금 더 태어나지 못했다고 느낄 때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하는 이 일(놀이)은 무엇을 위한 일인가?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지도 못할 무의미한 일인가, 아니면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인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일은 어쩌면 따로 있는 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하찮게 여긴 바로 그 일, 그냥 지나쳐 버린 바로 그 일이 어쩌면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해줄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시인이 키스를조금 더 태어난 순간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늘 조금 더 태어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것으로 그동안 멈추어 있었던태어남을 깨워보는 것은 어떨까? 키스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그것이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연인이든, 애완견이든, 신의 손등이든)가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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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