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지비

 

살인마는 사람을 죽이면 죄책감을 갖는 게 아니라 우월감을 갖는다. 자신이 굉장히 잘난 사람이고, 상대방의 삶과 죽음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잉여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과 정남규를 심문한 프로파일러의 통찰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한 '살인'이 아닐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시기하며 질투한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그 미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비난, 비협조, 무관심, 왕따, 외면, 혐오, 폭력. 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시하고 멸시한다. 인간은 그 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비난, 비협조, 무관심, 왕따, 외면, 혐오, 폭력. ,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을 갖든지, 열등감을 갖든지 표현하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러시아어에 유로지비(yurodstvo)’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이다. 이것은 러시아 정교회(러시아 기독교)가 발전시킨 영성의 개념인데, 성경의 케노시스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케노시스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뜻하는데, 이는 빌립보서의 말씀에서 비롯된 말이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케노시스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갖는 영성과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영성을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러시아 정교회는 유로지비의 영성, 성스런 바보의 영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러시아의 유로지비 영성을 본받아 살아간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러시아의 대 문호 중 한 명인 도스토예프스키와 대 작곡가 중 한 명인 쇼스타코비치가 있다. 이들은 유로지비의 마음으로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섬겼고, 글을 쓰고 작곡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유로지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성스런 바보처럼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양보하고,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희생정신이 생기는 것이다. 못나고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은 케노시스의 마음으로 유로지비(성스런 바보)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은 하늘 나라의 약속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로지비(성스런 바보)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상대방을 향한 우월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월감을 마음에 갖지 않기 때문에 유로지비의 삶을 사는 자는 부지불식 간에 상대방에 대한 살인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순간에서도 생명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도 생명을 살리는 자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처럼 케노시스의 영성’, 즉 유로지비(성스런 바보)의 삶을 살게 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게 살다 간 바울 사도의 간증은 이렇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10-13, 표준새번역).

 

우리도 성스런 바보처럼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행복하고 아름다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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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