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책에서 한국인은 왜 행복하지 못하는가?’라는 글을 읽었다. 각 민족마다, 각 나라마다 행복의 기준이나 척도가 다르겠지만, 한국인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외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지나친 물질주의적 사고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았다.

 

2010년 한 조사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이다.” 이 질문에 라고 응답한 한국 사람의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 그리고 어느 때 가장 행복할 것 같나라는 질문에 복권 당첨되었을 때라는 응답을 내놓은 대학생들이 부지기수이다. , 한국인은 부자=행복이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에 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지난 30년간 행복 연구로 누적된 자료를 보면, 인생의 여러 조건 즉, ,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은 행복의 개인차를 10-15퍼센트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인은 행복의 10퍼센트와 관련된 조건을 얻으려고 인생 90퍼센트의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더 큰 문제는 에 대한 욕심은 자기 충만감이라는 우쭐한 기분을 들게 하여,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신뢰도 수준을 낮춘다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너희가 없어도 나 혼자 살 수 있어!”라는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자기 충만감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넣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나 의존도를 낮추어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이게 왜 문제냐면, 인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은 타인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 다른 말로 해서 안정된 가정생활마음 편히 속마음을 애기하는 가까운 친구가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 대한 욕심에 사로 잡혀 있고, 돈이 있다는 자기 충만감은 그러한 애정의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한국인, 그리고 부자가 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인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행복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을 때 온다. UCLA의 알렌 파르두치 교수의 범위 빈도 이론(range-frequency theory)에 의하면,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천만불(100억상당) 짜리 복권에 당첨된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은 그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별 감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인생이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우리는 사소한 것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일과를 마치고 나만의 시간에 TV 시청하는 것, 럭셔리한 쇼핑센터가 아닌 TJ Maxx같은 곳에서 쇼핑하는 것, 바쁜 와중에서도 틈을 내서 친구들과 식사시간을 갖는 것, 주말에 동료들과 어울려 운동을 즐기는 것 등, 어떻게 보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 같은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소소한 일상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배 시간에 많은 이들이 못 나와도 마음에 불평이 없다. 개척의 극단적인 경험때문이다. 오래 전(2006710), 조지아에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의 창립일을 710일로 정한 이유는 그 날이 컬럼버스 조지아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첫 예배라는 게 정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집사람하고 나하고 단 둘이서이곳이 예배 처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어느 교회의 주차장에서 (그 교회의 예배당이 아니다. 주차장 한 구석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예배를 드린 날이었다.

 

100명 나오는 교회, 또는 1000명 나오는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면, 예배 시간에 많은 이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에 불평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사람과 단 둘이서 주차장 구석에서 개척을 시작한 극단적인 경험덕분에, 예배에 우리 가족 외에 단 한 사람만이 함께 있어도 행복과 감사가 넘친다.

 

행복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아주아주 작은 것에서도 감동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또는 존재의 겸손함을 지니는 것! 우리는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것 자체 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의 겸손을 지닌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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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된다는 것의 현대적 의미

(이사야 35)

 

성경은 그 시대의 문제(problems)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약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약자의 생명을 구하고 보호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가령 이사야서를 보면, 이사야 시대의 문제는 지정학적 국제정치였다. 앗시리아와 바벨론, 그리고 애굽 사이에 낀 약소국 이스라엘이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한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관점에서만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애굽에 붙었다 앗시리아(앗수르)에 붙었다 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었다.

 

물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했고, 그 재물은 당연히 국민들로부터 걷은 세금(?)으로 충당했다. 결국, 국제정치의 문제 속에서 피부로 와 닿게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국민들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관리들의 탐욕과 무능을 책망했으며,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주문했다.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사야 35장을 근거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면,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 왕권이 드러난 새시대를 여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러한 시대를 맹인이 눈을 뜨고, 못 듣는 사람이 듣게 되는 것을 통해서, 저는 자가 뛰고, 말 못하는 자가 유창하게 노래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묘사한다.

 

다른 말로 정리하자면, 여호와의 왕권이 도래하는 시대는 사람들의 감각적 기능과 행동적 기능이 회복이 되어, 어려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깨닫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탐욕에 눌려 생명을 멸망시킨다. 탐욕에 눌려 있는 자는 영혼이 황폐되어 있는 것이고, 영혼의 황폐는 바깥으로 드러나 약자와 자연을 착취하며 거기에 폭력을 저질러 이웃과 자연을 황폐하게 만든다.

 

반대로, 황폐한 사람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면, 이웃과 자연의 황폐함도 풍요로워진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일,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고 그 나라가 임하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모든 생명이 깃들어 사는 자연을 살리는 거룩한 일이다.

 

이사야는 그렇게 될때, 우리가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된다고 선포한다.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되는 것의 현대적 의미는 결국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우리의 감각 기능과 행동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지자의 경고대로 감각 기능과 행동 기능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탐욕의 노예가 되어 이웃과 자연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무뢰한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면, 성령께서는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 기능과 행동 기능을 회복시키셔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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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루스드라 전도 이야기(14)를 보면 계시 없는 종교성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치유한다. 이런 기적을 목격하자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

 

 

 

루스드라의 주민들이 바울 일행의 기적을 보고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여 제사를 드리고자 한 이유는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신화 때문이었다.

 

 

 

옛날,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루스드라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천 개의 집을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오직 늙고 가난한 필레몬과 바키우스만이 신들을 맞아 대접했다. 신들이 사람들에게 벌을 내릴 때, 모든 집은 수장되고 말았지만 필레몬과 바키우스의 오두막은 살아남았고, 이후 신전으로 쓰였다.

 

 

 

요즘의 과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신화적 세계관에 살았던 바울 당시의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다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방문한다면, 이전에는 소홀히 했으나 이번에는 영예롭게 대접하리라는 결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결기에 의해 바울 일행을 자신들의 고장에 다시 찾아온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제사 드리려고 했다는 행위 자체가 꽤나 거룩하게 여겨진다. ‘오랫동안 기다리던메시아가 임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로마제국과 협력한 유대인들에 비하면 말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 드리려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옷을 찢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루스드라에서의 선교 방식은 매우 독특한데, 바울 일행은 그들에게 예수 믿으시오!’라는 복음의 선포 없이, 그저 옷을 찢으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서 계시 없는 종교성의 위험성을 알리고, 루스드라 주민들의 행동 양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이끌었다.

 

 

 

기독교는 계시(revelation)의 종교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 편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며, 진리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어둠과 무지에 휩싸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라고 믿는 종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빛과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둠과 무지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학문, 과학, 종교)은 자칫 잘못하면 계시 없는 종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것이 종교성을 갖게 되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빛과 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죄 가운데 빠뜨려 죽게 만드는 악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없는 종교성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행동 가운데 하나이다. 불쾌감은 폭력이 아니다. 복잡한 설명 없이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드러내 주는 의로운 행동이다. 불쾌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의한 일과 신성모독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끔 공간을 열어준다.

 

 

 

우리는 그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살 뿐, 계시 없는 종교성에 대하여 불쾌감을 드러내며 살지 못한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불쾌감을 표현하지 못한다. 물론, 무엇이, 어떠한 일이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 것인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로 불쾌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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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인류는 세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전쟁, 기근, 죽음이 그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요, 기근과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분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이 세 가지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처럼, 굶어 죽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있나.

 

성경조차도 전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야기도 전쟁을 빼놓고는 이야기 진행이 안 될 정도다. 출애굽 이야기도 전쟁 이야기이고, 구약 이야기의 백미는 가나안 정복 전쟁 이야기다. 구약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divine warrior)로 묘사하고 있고,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구약성경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독교이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믿음을 지는 게 당연해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왜 이렇게 호전적일까?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나라-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기독교인들은 왜 평화를 사랑하지 못하고 전쟁을 일삼을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쟁은 대개 종교전쟁이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은 초기 때부터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매우 마이너리티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핍박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을 때부터 기독교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기독교의 역사는 (종교) 전쟁의 역사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전쟁은 대략 세 개다. 첫째는 중세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이다. 이때 기독교 국가들은 이슬람 국가들과 예루살렘을 놓아두고 극심한 전쟁을 벌였다. 둘째는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30년 전쟁(1618 - 1648)이다. 이 전쟁은 가톨릭을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간에 발생한 전쟁있었다. 셋째,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독일의 나치가 일으킨 홀로코스트 학살도 일종의 종교 전쟁이다. 유대인 또는 유대교에 대한 탄압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은 대개 패권 또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종교 전쟁의 원인도 별단 다르지 않다. 한 종교의 대 사회적 패권 또는 기득권 싸움이 종교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그리고 패권 또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은 이미 한 사회에서 패권을 자치하고 있던 권력 또는 종교가 힘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물리적 폭력의 사용은 권력의 적용이 아니라, 권력이 파산했다는 표현이다”(29). 권력이란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인데, 권력이 파산하면 타자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가 되지 않기 때문에, 타자에게 폭력을 써서라고 타자를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권력이 파산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한병철은 권력을 의미와 관련해서 설명하는데, 그는 말하기를 권력은 의미 있음의 빛 속에서 등장할 때에야 비로소 안정성을 얻는다고 한다.(52).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의미를 상실했을 때 전쟁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발생한 불상훼손사건(20161월 경북 김천 개운사)’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한 기독교인의 일탈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종교라면 굳이 그러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상을 훼손해서라도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 기독교()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의미 없는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지, 민낯을 보여준 부끄러운 일이다.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종교 간 평화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가톨릭 신부 출신의 학자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 맞는 말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 간에 적극적인 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각자의 종교가 각자 지니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내어 보일 때, 평화는 선물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의미를 잃으면 체제나 삶은 초조해진다. 불안해진다. 그 초조와 불안은 평화를 깨며, 폭력을 통해서라도 의미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의미와 기독교인 됨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우리에겐 영성(spirituality)이 있는가?

 

한국인들은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spirit)’을 생각할 때 귀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들으면 귀신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여, 무엇인가를 귀신처럼 알아보고, 무엇인가를 귀신처럼 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귀신처럼 무엇인가를 해내며 자기의 삶과 이웃의 삶을 생명이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영성을 그렇게 이해해도 나쁠 건 없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이 손에 잘 잡히는 말은 아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영성이라는 것을 말할 때 그 영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많다. 영성에 대해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만큼 손에 잡히게 설명하고 있는 학자도 드물다. 다음은 미셸 푸코가 그의 책 <주체의 해석학>에서 영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문장이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미셀 푸코, <주체의 해석학>, 58-59).

 

영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규정에 따르면, 영성이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또는 예배를 잘 드리거나, 성경을 100번 통독하거나, 등의 물리적 훈련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물리적 훈련이 영성을 위한 실천의 범주에는 포함되겠이나, 영성이란 주체(자기 자신)가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주체에 가해지는 전반적인 생명의 힘을 아우르는 말이다.

 

주체가 변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현재의 주체로서는 진리(truth/진실)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주체는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주체가 선한 존재가 되려면 진리와 맞닿아야만 한다. 주체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변화 또는 변형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주체는 진리와 맞닿은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정화가 필요하고, 자기수련이 필요하고, 포기가 필요하고, 시선과 생활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영성은 진리에 다가서기 위한 주체의 거듭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마주하기 위한 주체의 변화 또는 변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성은 다른 말로 진리를 향한 순례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례는 한 걸음에 마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한 방향으로 순종할 때 마칠 수 있는 거룩한 발걸음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순례의 여정이 부족한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편안함과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는 정주의 영성이 부족하다.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악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보니, 현대 기독교인들이 영성의 정의를 마음 깊이 새기는 것도 힘들 뿐더러, 영성의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어느덧 영성이라는 용어는 중세의 구시대적 유물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평안과 안전을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평안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성취하는 방식이 매우 세속적이다. , 평안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삶의 태도 자체가 이미 현대인들의 영성이 얼마나 비천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평안과 안전은 세상에서 기득권을 쟁취하고 물질적 풍요를 많이 일군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니다. 기득권과 물질적 풍요가 자유를 선물해줄 거라는 것도 현대 문명 사회의 거짓 약속이다. 평안과 안전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며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이사야 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지, 기득권과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32).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 우리에겐 영성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사는가? 우리는 진리를 갈망하는가? 우리는 영원한 안식(평안과 안전)을 갈망하는가?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하며 사는가? 우리는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 우리의 부족한 주체를 변화/변형시키기 위해서 거룩한 순례를 떠날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기꺼이 감당할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주체의 거듭남을 위해 자기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순종을 지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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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으로부터 '휴거'되듯이 쏙 빠져나와 어디 평안이 넘치는 곳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불의와 고통이 넘치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맞서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마음 먹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과 맞서 그것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불의와 악을 몰아내고 승리할 것을 믿고 죽기까지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 나라'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그가 고난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서다. 반대가 아니다. 예수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를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서 쏙 빼내어 우리를 평안이 넘치는 어떤 곳(천국)으로 옮겨 가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두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 이 지구, 이 우주가 아무리 불의하고 악이 넘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자기를 버려 피조물을 구원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이 불의하고 악이 판치는 세상에 오게 하신다.

 

구원 받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불의한 세상, 악이 판 치는 세상으로부터 상관 없는 듯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부활을 믿으며 죽기까지 이 세상의 불의와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 위에 임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 즉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지금도 이 땅 위에 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매일 앞으로 나아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외치며 나아간다. 구원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하다 낙담하지 않는다. 악을 선으로 이긴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최후 승리를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동물 농장>과 한국교회
    소설을 통해 본 오늘날 교회 현실…'배반의 복음' 벗어나려면

    <동물 농장>은 조지 오웰의 대표적인 풍자 우화 소설이다. <이솝우화>처럼 동물을 의인화해서 썼기 때문에 우화 소설이고, 당시 스탈린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풍자 소설이다. 민음사판 <동물 농장> 번역자 도정일은 작품 해설에서 이런 말을 한다.


    "사회주의를 위해 소비에트의 신화를 깨는 일은 필요하다. 이것은 강력한 역설적 진술이다. 이 진술로 보면 오엘은 소비에트라는 형태의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를 온 동네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일종의 희화로 규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이 잘못된 사회주의를 애써 은폐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이 진실의 편에 서려는 작가로서의 자기 임무라 여기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점에서 오웰이 구현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양심이다." [<동물 농장>(민음사), 154쪽]


    무엇을 풍자하고자 이 소설을 썼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면 <동물 농장> 독해는 어렵지 않다. 등장 동물 중, 메이저는 마르크스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돼지들은 볼셰비키를, 복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풍자는 (중략) 약자의 서사이다. 이 약자는 권력보다는 진실의 편에 서고자 하기 때문에 궁지로 몰리는 약자이다. 약자의 이야기이므로 풍자가 두들기는 대상은 권력을 쥔 부당한 강자, 지배 세력과 이데올로기, 지배적 제도와 관행이다."(147쪽) 오웰이 수많은 문학 형식 중 풍자를 빌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으로 다가온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약자들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똑똑한 돼지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메이저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동물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상 체계를 바탕으로 동물 농장의 개혁을 추진해 나간다. 동물주의의 가장 기본 되는 원칙은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이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문제다!"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본가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인간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적 표지로 '손'을 지목한다. "인간의 특징적인 표지는 그의 손이오. 손은 그가 온갖 못된 짓을 하는 도구입니다."(34쪽) 손은 자본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으나, 손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처럼 <동물 농장>에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이런 문장도 있다. "유일하게 좋은 인간은 죽은 인간이오."(42쪽) 이러한 것을 볼 때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단순히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야기 흐름을 보면, 결국 그들이 피를 흘려 쟁취한 '동물 농장'이 이전에 존스 씨가 경영하던 메이너 농장(동물 농장의 원래 이름)과 다를 바 없고, 더 나아가 그때보다 못한 상태가 된 것은 의인화한 동물의 탐욕과 권력욕 때문이다.


    소설에는 좌절된 꿈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한탄이 나온다.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 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 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 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78쪽)


    <동물 농장>은 우화로 표현된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은 이상 사회를 꿈꾸며 새로운 제도와 법을 만들지만,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한다. '동물 농장'도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투쟁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폴레옹의 권력욕과 권력형 돼지들의 조력, 권력을 뒷받침하는 개들(비밀경찰)의 충성 아래 이전 농장(사회)보다 더 불의해질 뿐이다. 타락한 동물 농장과 그 타락의 정점에 선 나폴레옹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에 대한 공식 호칭은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무'로 바뀌었고 이 밖에도 돼지들은 '모든 동물의 아버지', '인간들의 두려운 존재', '어린 오리들의 친구' 등의 칭호를 그에게 갖다 붙였다. 스퀼러는 연설할 때마다 나폴레옹의 지혜, 그의 선량한 가슴, 만방의 동물들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 특히 아직도 무지와 노예 상태 속에 살고 있는 다른 농장의 불행한 동물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사랑을 생각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일이 성공적으로 완수되거나 운수 좋게 잘 풀리면 그 공로는 어김없이 나폴레옹의 것으로 돌려졌다." (83쪽)


    충직한 일꾼, 프롤레타리아트였던 복서가 죽자,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연설을 통해 동물들을 이렇게 선동한다. "'내가 더 열심히 한다'와 '나폴레옹 동무는 언제나 옳다' 이 두 가지 신조는 이제부터 모든 동물들이 각자 자신의 신조로 택하는 게 좋겠소."(109쪽) 이쯤 되면 동물 농장은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종교적 신념으로 바뀐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이용해 사회적 체계를 세우고, 그 위에서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지배적 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동물 농장> / 조지 오웰 지음 / 도정일 옮김 / 민음사 펴냄 / 160쪽 / 7000원


    조지 오웰이 <동물 농장>을 통해 사회주의 양심을 드러냈듯이,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양심'을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온 동네 우스갯감으로 전락한 한국교회가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물 농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그들도 모두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덧 사람과 자본이 모이고 권력을 갖게 되면서, 종교적 신념을 이용해 교회의 체계를 세우고, 그 위에서 자연스럽게 권력자로 군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법 세습도 발생하고, 횡령도 발생하고, 무자격으로 목사 행세하는 사람들도 발생했을 것이다.


    오웰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배반당한 혁명', 또는 '배반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직접 겪은 '사회주의혁명의 배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의 또 다른 책 <카탈로니아 찬가>(민음사)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나는 현재 한국교회 상황을 '배반당한 복음', 또는 '배반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배반의 복음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오웰은 자기 소설에 대한 평가와 의의를 이렇게 내린다.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꾸는 것으로 끝날 뿐 본질적 사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들을 감시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은 성공한다는 것이 <동물 농장>에 싣고자 한 메시지이다."(153쪽)


    '대중이 살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에 눈이 간다. <동물 농장>에서는 돼지들과 개들이 권력자로 등장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권력자들은 대중을 '개', '돼지' 취급하기 일쑤다. 현실 사회에서는 오히려 동물 농장의 돼지들과 개들처럼 '똑똑한' 개, 돼지가 되는 게 중요하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넓게, 한국 사회의 희망은 지도자들보다는 대중들에게 있고, 좁게, 한국교회의 희망은 목회자들보다는 일반 신도들에게 있다."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은 일반 신도들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세우는 최선의 일이라 생각한다. '권력보다 진실의 편에 서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가고 싶다.


    장준식 / 미국 북가주 세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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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는 문학의 밤을 허()하라

     

    나는 교회오빠다. 나를 교회오빠로 키운 건 팔할이 문학의 밤이다. 학생부 시절(1980년대), 문학의 밤은 여름성경학교와 더불어 교회의 양대 문화행사였다. 대중문화가 발전되기 전, 세계화가 진행되기 전, 교회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은 마을 단위 최고의 문화행사였다. 문학의 밤은 대개 깊어 가는 가을, 시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곤 했다.

     

    여름 행사가 끝난 뒤, 교회는 문학의 밤 모드로 돌아섰다. 시낭송, 독창, 중창, 합창, 콩트,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문학의 밤을 장식했다. 문학의 밤 사회는 주로 학생부 회장과 부회장이 보았으며,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주는 DJ가 필요했고, 핀 조명을 쏘아주는 조명팀이 있었으며, 막을 걷고 치는 막돌이들이 있었다.

     

    노래는 주로 그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을 골라서 했지만, 콩트와 연극은 창작극이 많았다. 친구들과 공동으로 창작하기도 했고, 혼자서 창작하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아마추어 가수였고 배우였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공연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뒤에서 관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좋은 코너, 좋은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기를 갈망했다.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쁨이고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오빠로 등극하게 된 것은 문학의 밤 무대에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뒤였다. 또한 기타 치며 찬양 인도를 했고, 마이크를 잡고 문학의 밤 사회를 보게 되면서 나는 전형적인 교회오빠가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교회오빠가 되는 길을 정석으로 밟았다. 문학의 밤은 모두의 축제인 동시에 각자의 기억 속에 독특한 추억을 남긴 매직 같은 시간이었다.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혹은 좁혀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문학의 밤을 통해 정서적인 교감을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간직했다.

     

    그 매직의 위력은 88올림픽 후,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대중문화가 발달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급지고 매력진 대중문화의 보급은 문학의 밤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경쟁사회로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을 낭만에서 생존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자유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학원을 다녀야만 했으며, 친구들과 정서적 교감할 시간이 없이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만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문학의 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21세기의 사회를 분석한 철학자 한병철은 지금 시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투명사회, 42). 여기서 탈서사화되었다말은,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는가?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같은 책, 42).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이야기를 상실한 벌거벗은 생명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는 건강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육신의 노예가 되어 육적이지 않은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육적인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활동적인 삶, 노동의 삶을 만들어 낸다.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노동의 삶을 넘어 사색적인 삶을 살 때 인간은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한 명의 철학자만 이야기하는 주장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때부터 이어온 철학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사색적인 삶을 위해서 배워야 할 세 가지를 말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에 대해 한병철은 이렇게 해석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책, 47). ,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 있는 사색의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머무르며 응시하는 능력이 없다. 잠깐의 고독도 참아내지 못한다. 21세기에 문학의 밤을 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의 밤은 활동이라기 보다 사색이다. 오랫동안 머무르며 응시하는 능력이 없으면 문학의 밤은 열릴 수 없다. 시를 창작하는 일, 시를 음미하는 일, 시를 낭독하는 일은 모두 사색의 영역이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연습하는 일도, 콩트나 연극의 대본을 만드는 일, 그것을 연습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무대에 올리는 일,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즐기는 일도 모두 사색의 영역이다.

     

    사색의 삶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를 응시하고,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낸다. 삶이 서사화 될 때, 즉 삶이 이야기로 넘칠 때, 삶은 우울할 겨를 없이 기쁘고 즐겁다. 반대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우울한 이유는 우리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사는가?

     

    교회오빠의 방점은 고독에 있지, 활동에 있지 않다. 그 옛날 교회오빠는 몸짱이어서 인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독해 보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사색하는 것 같았기에,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면 삶에 가치와 의미가 찾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이 시대에, 우리는 이야기를 되찾아와야 한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이나 다름없다. 짐승에겐 이야기가 없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삶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다. 문학의 밤은 우리들에게 풍성한 이야기를 안겨 주는 이야기 보따리와 같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우리는 21세기에 고한다. 21세기는 문학의 밤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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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명구령운동과 세화하늘축제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이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잘 알려져 있으나, 1909년에 거국적으로 일어났던 백만명구령운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3년 운동은 1907년 운동을 불러왔고, 1907년 운동은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190910, 서울에서 열린 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백만명구령운동1910년 공의회의 전도 운동으로 채택하고 운동을 전개했다.(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381)

     

    그 당시 한국 개신교 신자는 20만명 정도였는데, 한 사람당 4명씩 전도하면 백만명구령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된 구령 운동 수단은 기도와 성경과 날연보였다. (옥성득, 382). 여기서 주목하여 볼 것은 날연보이다. 날연보란 전도하기로 결단하고 1년 중 며칠을 전도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루를 전도에 바치거나, 7일을 바치거나, 또는 30일을 바치는 것이다. 자신이 정한 날만큼 주님께 날연보를 바치면, 그 날 수만큼 바깥에 나가서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백만구령운동에 참여한 교인들이 바친 날연보의 총합계는 ‘100,000’일이 넘었다. (옥성득, 382).

     

    백만구령운동이 일어난 1909년과 1910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1910년 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수치를 겪었고, 그 이후 삶의 전반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리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신앙생활을 유지하려 해도,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백만구령운동 뿐 아니라 그 이후에 전개된 모든 기독교 부흥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사가 옥성득 교수는 백만명구령운동을 이렇게 평가한다. “애국계몽 운동인 백만명구령운동은 단순한 전도 운동이 아니라 교회 설립 운동, 교육 운동, 계몽 운동이 결합한 구국 운동이었다. 비록 의병 전쟁처럼 물리적으로 일제에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미래를 책임질 십자가 군병을 모집하는 운동이었다”(옥성득, 389-390).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차치하고서, 한국 기독교사에서 이어온 부흥운동(부흥회)’은 한국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100년을 넘게 이어온 가장 오래된 전통 중 하나이다. ‘세화하늘축제는 우리 교회만의 외톨이 행사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 맥락 속에 있는 역사적 행사이다. 우리는 그 역사의 맥락 속에서 세화하늘축제를 열면서 지금 우리 시대,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우리의 민족을 구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부흥운동의 빛이 많이 바랬다. 110년 전, 백만명구령운동 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며칠을 하나님께 날연보하며 헌신했지만, 요즘에 우리는 몇 시간도 시연보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게다가 교회의 부흥운동은 세상의 이벤트에 밀려 매력적이지 못한 종교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세화하늘축제가 열리는 날과 한국의 인기 보이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공연 날짜가 겹친다. 비싼 BTS 공연에는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값없이와서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부흥회는 초라한 집안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LA에서 하는 BTS 공연이 실제로 우리 교회 행사에 영향을 미친다. 대단한 보이 그룹이다.)

     

    백만명구령운동과 관련하여 옥성득 교수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올바른 부흥 운동은 현실과 이성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동시에 시대 정신을 이끌 비전을 제시하는 운동이어야 한다”(옥성득, 390). 부흥회에 오지 않고 BTS 공연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힐난의 눈빛을 보낼 수 없게 만드는 문장이다. 교회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현실과 이성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으며, 시대 정신을 이끌어 갈 어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세화하늘축제는 우리 교회만의 집안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은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역사를 새롭게 하며,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화하늘축제에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자(messenger)를 통하여 지금 우리 시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 시대 정신과 비전을 발견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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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철학으로 풀어보는 구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성경을 말한다. 여기서 본질은 'substance'를 말한다.

     

    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본질(substance)'은 하늘에 존재한다. 하늘에 존재하는 본질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본질의 차원에서 구원을 설명하자면,

    구원이란 본질이 바뀐 것이다.

    구원이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본질이 바뀌어 '본질상 축복의 자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구원은 본질이 바뀌는 것이다. 본질은 하나님만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꾸려고 '무슨 짓'을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본질은 하늘에 속해 있고,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이 땅에서 공로를 많이 쌓아도 우리의 힘으로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하늘의 속한 본질은 하늘에서 하나님만이 바꾸실 수 있는 배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말한다.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있다고 말이다. 가능한 일이다. 예수는 이 땅을 살다간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능히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전한 사도 바울의 복음이 플라톤 철학 바탕 위에 세워진 헬라문화권 사람들에게 잘 먹혔을 것이다. 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본질이 바뀌어 본질상 축복의 자녀가 되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Posted by 장준식

    청년인가, 노년인가

    ㅡ 교육의 중요성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ㅡ 안창호 (시국대강연)

     

    안창호는 독립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은 이상의 실현을 위한 실제적인 수단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교육은 인격의 발전을 이루고, 행위를 변화를 가져오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은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고, 한 개인의 깊은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유의 갈망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 아니 하는 이야말로 독립의 정신을 잃지 아니하오. 국가를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시간 있는 대로 힘써 공부하시오”(안창호, 시국대강연)

     

    국가가 망해 실의에 빠져 있는 한국 민족 구성원들에게 교육을 외치는 일이, 누군가에는 팔자 좋은 일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은 팔자 좋은 사람이 하는 사치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유를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이다.

     

    교육은 매우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안창호는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 기간에 우리는 교육을 힘씀이 마땅할까요? 나는 단언하오. 독립운동 기간일수로 더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죽고 살고 노예되고 독립됨이 판정되는 것은 지력과 금력이오.”(시국대강연)

     

    교육은 철학적인 면만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도 인간이 힘써야 할 당면한 기본 과제이다. 안창호는 교육이 지력과 금력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실용적으로 말해, 지력과 금력은 한 개체(인간이든 국가이든)의 독립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안창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특별히 청년들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본국에는 아직 우리의 힘으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지마는, 기회 있는 대로 공부 해야 되고 시켜야 되오.”(시국대강연)

     

    안창호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이 교육에 매진할 것을 토로했다. 그것만이 나라를 빼앗긴 수치와 슬픔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고도 실용적이고도 지속적인 독립의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강연을 들었던 이 중, 남강 이승훈은 실제로 실행에 옮겨, 사업으로 모은 자신의 재산을 투자해 오산학교를 세운다.

     

    교육은 아이들이나 청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내가 아직 청년인가 노인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교육에 대한 열정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느냐, 아니면, 공부하기를 멈추었느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젊었어도 배움을 멈추면 노년인 것이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으면 청년인 것이다.

     

    안창호의 말처럼, 국가에 누 끼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

    (기독교적으로 말해, 하나님 나라에 누 끼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


    Posted by 장준식

    니버의 죄론

     

    니버는 기독교적 인간관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신의 형상(Image of God), 2) 인간의 피조물성, 곧 그의 약함, 의존성 및 유한성, 3) , 곧 인간이 그의 의존성, 유한성 및 불안정성을 거부하는 데에서 생기는 죄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1, pp. 137-138).

     

    니버의 인간론은 죄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니버에게 ''는 인간의 존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 아니다. 니버에게 죄는 인간의 바깥에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데,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적이고 안전한 삶을 만들어 가려고 할 때 발생한다.

     

    또한 니버에게 죄는 인간이 가진 자유에서 비롯되는 필연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유를 지녔기에 죄를 짓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니버에 의해서 거부된다. 니버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때 옳은 생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치료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죄에 굴복시키지 않고 인간성을 끝까지 보존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구원의 길'을 제시한 사건이 된다.

     

    예수는 자기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다. 인간의 생명을 생명되게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없기 때문이다.

     

    니버는 말한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그 자신, 그의 나라, 그의 문화, 그의 문명을 신성하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허영과 오만,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 수도 없이 자기초월을 시도한다. 성경 속의 이스라엘 역사는 그러한 속성을 드러낸다.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반란, 왕을 달라는 요구, 이방신에 대한 우상숭배 등,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생명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자기 초월을 시도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니버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 즉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기대어 사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성취는 자기 초월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나, 그 자기 초월적 성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자기 구원을 이루고 다른 생명을 차별하는 죄가 될 뿐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여 가며, 생명의 기운을 써 가며 성취를 이루어 내려고 하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주여,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자기 구원을 이루고 차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기쁨 자유, 평화, 사랑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놀이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3.1절 아침에

     

    지난 주일, 우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다. 겉으로 만세 삼창은 안 했지만, 안으로는 만세 삼만창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찬양예배라 예배의 분위기는 힘차고 흥겨웠고, 무엇보다 일본인이 지은 복음성가와 남궁억 선생님이 지은 찬송가를 함께 부르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설교시간에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중심으로 '먼저 보냄을 받은 자'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먼저 보냄을 받았던 자' 안창호의 삶을 병행해서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즉 이 세상에 '먼저 보냄을 받은 자'로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이 아름답게 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드렸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북미회담이 성과 없이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속상할까? 한숨만 짓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국 뉴스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하여 듣기 위해 NPR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NPR 뉴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뉴스업체이다. 아무리 진보 뉴스 업체여도 이 방송은 미국 방송이다. 뉴스의 관점이 북한 외무성에서 내놓은 보도 자료나 남한 측의 관점과 달랐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들은 트럼트 행정부가 내놓은 협상 결렬의 이유를 부각시켜 보도를 했다. 마치, 북한 쪽에서 협상을 받아 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보도를 접하면서,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한 나라에는 정부가 있지만, 국제 무대에는 정부가 없다. 무정부 상태이다. 니버는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문제는 더욱더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1차 대전 후에 세워진 국제연맹이나 2차 대전 후의 국제연합(UN) 같은 연합 기구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말한다.

     

    안창호는 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기 전,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중일전쟁이 한국의 영토에서 발생하는 일을 두고, '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렇다.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고, 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그는 계속하여 '힘을 키워야 한다'며 국민들을 조직하여 힘을 키울 방안을 줄기차게 마련하고 실천한다.

     

    2차대전을 치르면서 세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이 얼마나 위험한지 학습했다. 그래서 그 이후 세상은 그러한 이념들을 넘어서 세계가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명목 아래 민족들 간에, 국가들 간에 교류를 활발하게 해왔다.

     

    그러나, 그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 경제를 통한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구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세계화를 통해 불평등과 국제분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게 요즘 세계의 현실이다.

     

    세계화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 사랑'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류애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계화는 결국 경제강국(대국)들이 그렇지 못한 나라들에게 시장 개방을 강요하여 시장의 확장을 통해 자신들의 부를 늘려 가는 교묘한 착취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났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국제 무대에서 힘이 약한 나라가 힘이 강한 나라를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미국은 계속하여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북한을 압박할 것이고, 북한과 남한은 생존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게 될 것이다.

     

    무정부 상태인 국제 무대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안창호가 주장했듯이, '힘을 기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힘이 도덕을 상실한,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힘이면 안 될 것이다. 안창호도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덕과 사랑을 상실한 힘은 그저 야만일 뿐이다.

     

    NPR 뉴스를 들으니, 미국은 절대로 한국의 편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도 자꾸 미국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자적인 생존을 위해서 북한의 핵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고국, 대한민국이 '힘 센 나라'가 되면 좋겠다. 하지만, 그 힘이 '덕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힘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을 야만에 빠지게 만드는 파렴치한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좋은 나라, 군자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나라가 되기를, 3.1절 아침, 타향살이 중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 그리고 (목회) 세습 문제

     

    경제적 힘이 소수의 손에 있고 그들이 정치적 힘을 그들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한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ㅡ 라인홀드 니버

     

    경제적 불평등이 얼마나 큰 불의를 생산해 내는지 안다면, 요즘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큰 문제가 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종교가 무슨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경제적 힘이 곧 정치적 힘이 된 요즘, 경제적 불평등을 생산해 내는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려 할 것이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주의>에서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경제적 불평등은 '세습 자본주의'에서 온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분배되어 개인의 자유가 증대된다고 하는 자본주의 논리가 '세습 자본주의'에 의해서 허물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에서도 한창 논쟁을 벌이는 '목회 세습'의 문제를 경제적 불평등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목회 세습은 단순히 '목회직'의 세습이 아니라, 자본의 세습이다. 피케티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본의 세습은 개인의 자유를 자본을 소유한 소수에게만 집중시킬 뿐, 대다수 사람들의 자유는 자본에 의해 구속당하고 만다.

     

    목회 세습을 통하여 자본의 세습을 이룬 이들은 경제적 힘에서 비롯된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뜻에 맞게 목회 현장을 조작하고 교회 생태계를 혼란시킨다. 세습한 이들이 세습 자본으로 교회의 생태계를 주무르는 한 정의는 묘연해 진다.

     

    이것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보수화되는 현상은 이미 고착된 세습 자본을 놓치지 않으려는 투쟁에서 비롯된다. 피케티가 제시하고 있는 누진세 제도와 국제적 부유세의 도입을 하려면 할수록 정부는 다른 층보다도 젊은 층에 의해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자본이 세습되고, 권력이 세습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 나라의 말기적 현상이다. 고려 말기, 권문세가는 자본과 권력을 세습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 갔지만, 그것이 곧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세워지는 기폭제가 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 '세습'은 고인물이고 곧 썩은 물이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물고기가 살 수 없다.

     

    세습의 물꼬를 트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인간은 악하고, 악한 인간이 만들어 가는 사회는 더 악한데, 어떻게 해야 이 악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종교(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수많은 민중을 구원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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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유토피아주의의 위험성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수호하려 든다. 그들은 '자유' '자본'이 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유일한 기능적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급진주의자들, 곧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들은 자신들이 제창하는 새로운 사회가 사회의 모든 악을 치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이든 급진주의자들이든 모두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들이 제시하는 사회적 토대가 유토피아를 가져올 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주의자들도 이들과 다를 바 없다. 교회 유토피아주의자들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성취'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의 방주'이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유토피아에 입성하는 일이고, 교회는 새로운 사회이므로 세상의 모든 악을 치유하고 물리친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은 선취이지 성취가 아니다. 선취와 성취를 헷갈리면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맞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종말론적 선취라고 말하는 이유는 십자가 사건,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판을 치고 생명은 여전히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아직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되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너무도 확실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유토피아로 착각하면 안 된다. 여전히 교회는 부족하고, 싸워야 할 악이 존재하고, 채워야 할 고난이 남아 있다. 이것을 안다면, 교회는 스스로의 만족과 스스로의 안위 속에서 평안을 누릴 것이 아니라, 전투를 아직 끝내지 못한 군사로서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말고,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마음을 열고 미래를 준비하는 겸손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교회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사회의 적폐가 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