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성의 원리(Subsidiarity)

 

Pius XI's encyclical Quadragesimo Anno: the developing concept of "subsidiarity", which held that social problems should be solved when possible by people organizing themselves at the local level.

 

Subsidiarity(보충성의 원리),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중요한 원리이다.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다.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분야와 그것을 유지한 힘이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한 힘, 또는 어떠한 한 원리로 다원주의 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들 때, 그것은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망상에 불과하다.

 

에밀 부르너는 'orders of creation'로 국가와 교회와 가정과 노동과 문화를 제시했고, 본 회퍼는 'divine mandates'로 일과 결혼과 정부와 교회를 제시했다.

 

사회의 질서는 이들끼리의 연합에 달려 있고, 그 어느 한 분야가 다른 한 분야에 대하여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 한 분야와 다른 분야가 어떠한 문제를 놓고 충돌할 수도 있다.

 

일례로, 본 회퍼가 나치 정부에 대하여 저돌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가 정부의 견해와 충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치 정부가 우위를 차지하여 질서를 구현하려고 들 때, 또다른 질서의 힘을 가진 교회가 저항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다른 분야보다 사회 질서를 제시하는 데 있어 힘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다른 분야의 활동을 도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활동을 얕보게 되고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보수세력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오류인데, 그들은 여전히 다원주의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가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위치와 위상을 '중세시대'로 환원하려고 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지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직무유기다. 그것은 권력에의 욕망일 뿐이다.

 

교회는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사회의 한 세력이 아니라, 사회 발전을 면밀히 살펴 그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더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 그리고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의 다른 세력과 발을 맞추어 걸으며 그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제시하고 그들이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보여주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지는 사회적 세력은 사회의 짐이 될 뿐,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그러한 안타까움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변화와 발맞추어 가는 교회, 한 가지의 원리로 질서와 평화를 세워 나갈 수 없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가져야 하는 선교적 위치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