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있는 펠라기우스적 신앙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숙적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 반면, 그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강조했다.

 

교회의 역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주장이 승리했고 우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은 '은총론'이 되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서 온 부작용도 존재한다. 교회에서 은총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소홀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론을 강조한 이유는 '자유와 책임'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통해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펠라기우스의 신학에 큰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외에도 도나티우스와도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도나티우스(도나티즘, Donatism)는 부도덕한 사제의 성례집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제가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이후에 그 사제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이 받은 세례는 무효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성례전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사상이었다.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나 '날라리' 신앙인이 아니라, 모두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들의 경건이 지나쳐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신앙 경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가진 엘리티시즘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했고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들에게 신앙 생활의 중심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이고, 타락한 존재이고, 오직 구원이 필요한 가련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 싶었던 은총론은 인간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만 보게 만드는 것일까?

 

요즘 교회는 은총론의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더 강조되어야만 하는 시절이 되었다. 그렇다고 은총론을 폐기할 수는 없다. 여전히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은총론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더 깊으신 하나님의 은총 없이, 우리가 어떻게 모든 죄를 뒤로 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요즘 점점 펠라기우스의 기운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기운을 자칭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지식인들에게서는 펠라기우스의 기운과 더불어 언제나 '영지주의'의 기운이 엿보인다. 지식인들은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보다 지식 수준이 떨어지는 '성직자'의 설교나 성례전 집전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우스와 논쟁을 벌여 그들의 신학을 물리친 이유는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우스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교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식'은 교만을 불어오기 쉽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즉 영지의 경험은 구원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지식은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보니,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존재(사제)의 설교나 성례전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불신앙의 상태를 불러오는 것이다.

 

우리는 줄곧 하나님의 은총을 탈육신화시키는 우를 범한다. 우리는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가 설교하고 성례전을 집전하는 것을 속마음으로 '무효'라고 선언해 버린다. 그러한 내적이고 은밀한 교만이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끊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의에 의해, 자신은 저들과 다른 존재이고 구원 받은 존재라는 내적이고 은밀한 구원이 선포된다.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교만의 작용이다.

 

기독교 신앙은 영지주의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소위 '자력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은총을 말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들이 보기에 지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리끼고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은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모자라지만 은총에 의해 성직을 수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모자람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우습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너무도 명확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자신이 지금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지'에 의해 도취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고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의 신학 사상에 맞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교회에서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함으로 인해 '은총'이 오용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 안의 교만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선한, 그리고 신비로운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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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