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를레프니스

 

독일어 에를레프니스(Erlebnis)’는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을 뜻한다. 이는 우주비행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overview effect’의 말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 나가서 지구와 우주를 보고 귀환해서 이전에 가졌던 시점과 같은 시점을 지니며 더 이상 살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은 그 사건을 경험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인류세(원제: Defiant Earth)>의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책의 서론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지금이 바로 모든 인류에게 에를레프니스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구과학자들은 줄기차게 지구 시스템 붕괴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간중심적이지 지구환경 중심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는 현재 지구 환경 시스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못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구과학자들이 데이터에 근거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해도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게 한다. 그는 말한다. “지구 시스템의 위기를 말할 때 가장 흔하면서 분명한 반응은 무감각한 태도다”(인류세, 8).

 

보통 사람들은 먹고사니즘귀차니즘에 빠져 자기 자신(또는 자기 가족) 외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다. 특별히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는 너무도 무감각하다. 그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지구 환경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어도, 그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비극을 비극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인류세, 9).

 

책의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가 반드시 새겨들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왜 지구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시간을 살면서, 그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드는 것일까? 그는 말한다. 사람들의 무관심은 이성의 쇠퇴나 심리적 나약함때문일지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좀 길지만,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의 글을 그대로 가져온다.

 

“…… 세상을 더 문명화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길 바라는 힘들, 이를테면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진보, 기술력은 사실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신뢰했던 힘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 믿었던 힘들이 이제 우리를 집어삼킬 듯 위협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말하자면 계몽주의를 저버림으로써 긴장 상태를 해소하려 한다. 다른 일각에서는 지구에 대한 고뇌가 낭만적 환상이나 미신적 퇴행이라도 된다는 듯,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주장을 인류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태도라며 폄하한다.”(인류세 11).

 

너무나도 놀랍게, 2800년 전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는 당대의 남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앗수르의 위협과 병들어 죽게 된 위기와 시련의 상황 속에서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극복한다. 그런데, 그는 앗수르의 위협이 감소되고 병도 치유된 평안의 시기에 안타깝게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딘이 병환의 회복을 축하해 주기 위해 보낸 사절단의 (정치적) 방문을 받고 바벨론이 내민 우호의 손길을 덥석 잡는다. (이사야 39) 그러나 그는 그가 덥석 잡은 바벨론의 우호의 손길이 나중에 자기 백성과 자기 후손들을 압제하고 약탈하는 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될 거라고 알려주는 것은 이사야다.

 

현대인들은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진보, 기술력을 메시아처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이 인간을 어떠한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번성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민 우호의 손길을 덥석 잡은 인간은 지금 바로 그것이 세계를, 특별히 지구 환경 시스템을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으로 인해 수많은 가난한 자들이 고통 당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지구 온난화로 삶의 터전이 망가져 가고 있음에도 지구 환경 시스템을 복구 시키기 위한 어떠한 발걸음에도 동참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저자가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에겐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 필요하다.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코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바로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다.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다. 그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또 한 번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 필요하다. 아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이들과 지구 환경 시스템의 붕괴를 자각하기에 충분한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먹고사니즘귀차니즘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돌보고 하나님이 주신 이 창조의 세계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지켜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부르심 대로 우리가 살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이며,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인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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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