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전복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그의 저서 <인류세 Defiant Earth>에서 다음과 같은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세계의 구조에 생겨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균열(rupture)에 직면해 우리는 기존의 모든 신념을 의심해야 한다"(p.70).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근대에 형성된 사유들은 홀로세(Holocene)의 안정된 지구 환경 위에서 세워진, 하지만 인류세에 들어선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사상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과학을 근거로 한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 1945년을 기점으로 지구의 역사는 홀로세를 넘어 인류세로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류의 엄청난 힘 때문이다. 지구의 진화에 인간의 '의지적인 힘'이 개입함으로써 지구의 행로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균열(rupture)'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균열로 인해 인류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책에서 대결을 벌이는 사상은 에코모더니즘이다. 에코모더니즘은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상인데, 그들은 '좋은 인류세'를 주창하며 인간의 능력과 미래를 밝게 전망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러한 낙관주의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지구는 더 이상 근대의 인간들이 믿었던 것처럼 인간의 착취 아래서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연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p.84). 인류세에 들어선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착취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이며,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자연 재해를 동반하며 인간의 의지적 힘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오해하게 한다. 인류세를 잘못 해석하면, 드디어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제압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세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뜻은 오히려 "생태계 교란을 뛰어 넘어 지구 시스템의 균열을 인식하는 질적 도약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이다.

 

그는 이제 '생태계'라는 말로 지구의 환경을 파악할 수 없고, '지구 시스템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적 사고를 통해서만 지구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성장 주도의 기술 산업 시스템의 초기 잘못은 보통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라기보다는 가공할 인간중심주의다.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인간중심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p.78).

 

그는 그의 주장에 따라, 신인간중심주의를 주창한다. 신인간중심주의란 "인간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을 갖게 된 것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세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을 말한다. "신인간중심적인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 (p.91).

 

근대의 사상은 인간을 주체로 파악할 뿐 아니라,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주체로, 자연을 객체로 생각하며 주체인 인간은 객체인 자연을 자신의 요구와 의지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세에 들어선 지금 인간은 더 이상 근대적 주체의 자유와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연이 더 이상 인간의 자유와 힘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지배와 착취의 시대는 끝났다. 인간의 운명은 단순히 인간의 손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 즉 가이아의 힘에도 달려 있는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평화의 시기, 또는 '인간화된 지구'의 시기는 끝났다.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 강해졌다. 이 둘을 합쳐 생각하면 지구상에는 더 강력해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과 지구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이 줄다리기에서 인간은 지구를 우리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당기려 애쓰고 있다. 지구는 우리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잡아당기고자 한다"(p.82).

 

인류세라는 균열(rupture)은 기존의 사고 방식으로 존재(생명)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한다. 사고의 전복 없이 인류는 그 균열이 만들어낸 새로운 국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할 것이고, 해결책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신학은 인간의 편에 서야할 것인가, 자연의 편에 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인간과 자연의 중간에 서서 두 거대한 힘이 균형을 이루어 공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신인간중심주의'의 옷을 입고, 소유한 힘을 훨씬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인류세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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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