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루스드라 전도 이야기(14)를 보면 계시 없는 종교성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치유한다. 이런 기적을 목격하자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

 

루스드라의 주민들이 바울 일행의 기적을 보고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여 제사를 드리고자 한 이유는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신화 때문이었다.

 

옛날,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루스드라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천 개의 집을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오직 늙고 가난한 필레몬과 바키우스만이 신들을 맞아 대접했다. 신들이 사람들에게 벌을 내릴 때, 모든 집은 수장되고 말았지만 필레몬과 바키우스의 오두막은 살아남았고, 이후 신전으로 쓰였다.

 

요즘의 과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신화적 세계관에 살았던 바울 당시의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다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방문한다면, 이전에는 소홀히 했으나 이번에는 영예롭게 대접하리라는 결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결기에 의해 바울 일행을 자신들의 고장에 다시 찾아온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제사 드리려고 했다는 행위 자체가 꽤나 거룩하게 여겨진다. ‘오랫동안 기다리던메시아가 임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로마제국과 협력한 유대인들에 비하면 말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 드리려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옷을 찢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루스드라에서의 선교 방식은 매우 독특한데, 바울 일행은 그들에게 예수 믿으시오!’라는 복음의 선포 없이, 그저 옷을 찢으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서 계시 없는 종교성의 위험성을 알리고, 루스드라 주민들의 행동 양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이끌었다.

 

기독교는 계시(revelation)의 종교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 편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며, 진리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어둠과 무지에 휩싸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라고 믿는 종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빛과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둠과 무지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학문, 과학, 종교)은 자칫 잘못하면 계시 없는 종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것이 종교성을 갖게 되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빛과 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죄 가운데 빠뜨려 죽게 만드는 악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없는 종교성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행동 가운데 하나이다. 불쾌감은 폭력이 아니다. 복잡한 설명 없이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드러내 주는 의로운 행동이다. 불쾌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의한 일과 신성모독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끔 공간을 열어준다.

 

우리는 그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살 뿐, 계시 없는 종교성에 대하여 불쾌감을 드러내며 살지 못한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불쾌감을 표현하지 못한다. 물론, 무엇이, 어떠한 일이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 것인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로 불쾌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공부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