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영성(spirituality)이 있는가?

 

한국인들은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spirit)’을 생각할 때 귀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들으면 귀신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여, 무엇인가를 귀신처럼 알아보고, 무엇인가를 귀신처럼 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귀신처럼 무엇인가를 해내며 자기의 삶과 이웃의 삶을 생명이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영성을 그렇게 이해해도 나쁠 건 없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이 손에 잘 잡히는 말은 아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영성이라는 것을 말할 때 그 영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많다. 영성에 대해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만큼 손에 잡히게 설명하고 있는 학자도 드물다. 다음은 미셸 푸코가 그의 책 <주체의 해석학>에서 영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문장이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미셀 푸코, <주체의 해석학>, 58-59).

 

영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규정에 따르면, 영성이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또는 예배를 잘 드리거나, 성경을 100번 통독하거나, 등의 물리적 훈련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물리적 훈련이 영성을 위한 실천의 범주에는 포함되겠이나, 영성이란 주체(자기 자신)가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주체에 가해지는 전반적인 생명의 힘을 아우르는 말이다.

 

주체가 변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현재의 주체로서는 진리(truth/진실)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주체는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주체가 선한 존재가 되려면 진리와 맞닿아야만 한다. 주체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변화 또는 변형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주체는 진리와 맞닿은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정화가 필요하고, 자기수련이 필요하고, 포기가 필요하고, 시선과 생활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영성은 진리에 다가서기 위한 주체의 거듭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마주하기 위한 주체의 변화 또는 변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성은 다른 말로 진리를 향한 순례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례는 한 걸음에 마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한 방향으로 순종할 때 마칠 수 있는 거룩한 발걸음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순례의 여정이 부족한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편안함과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는 정주의 영성이 부족하다.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악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보니, 현대 기독교인들이 영성의 정의를 마음 깊이 새기는 것도 힘들 뿐더러, 영성의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어느덧 영성이라는 용어는 중세의 구시대적 유물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평안과 안전을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평안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성취하는 방식이 매우 세속적이다. , 평안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삶의 태도 자체가 이미 현대인들의 영성이 얼마나 비천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평안과 안전은 세상에서 기득권을 쟁취하고 물질적 풍요를 많이 일군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니다. 기득권과 물질적 풍요가 자유를 선물해줄 거라는 것도 현대 문명 사회의 거짓 약속이다. 평안과 안전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며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이사야 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지, 기득권과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32).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 우리에겐 영성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사는가? 우리는 진리를 갈망하는가? 우리는 영원한 안식(평안과 안전)을 갈망하는가?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하며 사는가? 우리는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 우리의 부족한 주체를 변화/변형시키기 위해서 거룩한 순례를 떠날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기꺼이 감당할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주체의 거듭남을 위해 자기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순종을 지니고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