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문학의 밤을 허()하라

 

나는 교회오빠다. 나를 교회오빠로 키운 건 팔할이 문학의 밤이다. 학생부 시절(1980년대), 문학의 밤은 여름성경학교와 더불어 교회의 양대 문화행사였다. 대중문화가 발전되기 전, 세계화가 진행되기 전, 교회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은 마을 단위 최고의 문화행사였다. 문학의 밤은 대개 깊어 가는 가을, 시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곤 했다.

 

여름 행사가 끝난 뒤, 교회는 문학의 밤 모드로 돌아섰다. 시낭송, 독창, 중창, 합창, 콩트,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문학의 밤을 장식했다. 문학의 밤 사회는 주로 학생부 회장과 부회장이 보았으며,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주는 DJ가 필요했고, 핀 조명을 쏘아주는 조명팀이 있었으며, 막을 걷고 치는 막돌이들이 있었다.

 

노래는 주로 그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을 골라서 했지만, 콩트와 연극은 창작극이 많았다. 친구들과 공동으로 창작하기도 했고, 혼자서 창작하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아마추어 가수였고 배우였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공연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뒤에서 관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좋은 코너, 좋은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기를 갈망했다.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쁨이고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오빠로 등극하게 된 것은 문학의 밤 무대에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뒤였다. 또한 기타 치며 찬양 인도를 했고, 마이크를 잡고 문학의 밤 사회를 보게 되면서 나는 전형적인 교회오빠가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교회오빠가 되는 길을 정석으로 밟았다. 문학의 밤은 모두의 축제인 동시에 각자의 기억 속에 독특한 추억을 남긴 매직 같은 시간이었다.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혹은 좁혀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문학의 밤을 통해 정서적인 교감을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간직했다.

 

그 매직의 위력은 88올림픽 후,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대중문화가 발달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급지고 매력진 대중문화의 보급은 문학의 밤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경쟁사회로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을 낭만에서 생존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자유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학원을 다녀야만 했으며, 친구들과 정서적 교감할 시간이 없이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만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문학의 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21세기의 사회를 분석한 철학자 한병철은 지금 시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투명사회, 42). 여기서 탈서사화되었다말은,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는가?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같은 책, 42).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이야기를 상실한 벌거벗은 생명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는 건강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육신의 노예가 되어 육적이지 않은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육적인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활동적인 삶, 노동의 삶을 만들어 낸다.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노동의 삶을 넘어 사색적인 삶을 살 때 인간은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한 명의 철학자만 이야기하는 주장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때부터 이어온 철학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사색적인 삶을 위해서 배워야 할 세 가지를 말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에 대해 한병철은 이렇게 해석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책, 47). ,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 있는 사색의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머무르며 응시하는 능력이 없다. 잠깐의 고독도 참아내지 못한다. 21세기에 문학의 밤을 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의 밤은 활동이라기 보다 사색이다. 오랫동안 머무르며 응시하는 능력이 없으면 문학의 밤은 열릴 수 없다. 시를 창작하는 일, 시를 음미하는 일, 시를 낭독하는 일은 모두 사색의 영역이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연습하는 일도, 콩트나 연극의 대본을 만드는 일, 그것을 연습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무대에 올리는 일,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즐기는 일도 모두 사색의 영역이다.

 

사색의 삶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를 응시하고,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낸다. 삶이 서사화 될 때, 즉 삶이 이야기로 넘칠 때, 삶은 우울할 겨를 없이 기쁘고 즐겁다. 반대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우울한 이유는 우리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사는가?

 

교회오빠의 방점은 고독에 있지, 활동에 있지 않다. 그 옛날 교회오빠는 몸짱이어서 인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독해 보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사색하는 것 같았기에,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면 삶에 가치와 의미가 찾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이 시대에, 우리는 이야기를 되찾아와야 한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이나 다름없다. 짐승에겐 이야기가 없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삶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다. 문학의 밤은 우리들에게 풍성한 이야기를 안겨 주는 이야기 보따리와 같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우리는 21세기에 고한다. 21세기는 문학의 밤을 허()하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