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었다.

 

첫 번째 챕터에서 김누리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챕터를 읽으며 정확히 한국 기독교의 괴리 현상과 오버랩 됐다.

 

왜 김누리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라고 평할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 '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32).

 

그는 한국의 일상 민주주의가 낙후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 군사독재 시대가 남긴 집단주의, 그리고 군사주의와 병영문화'를 꼽는다. 특별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군사문화'이다.

 

한국의 모든 집단에서는 '군사문화'가 그 근본에서 작동한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물론 이것은 유교 문화라고 볼 수 있으나, 나이가 깡패 역할을 하는 것은 군사문화다), 학번을 따져 서열 세우는 문화, 정신교육 같은 것도 해병대 가서 받는 문화 등이 그것이다.

 

군사문화가 그 기저에 작동하는 한국사회를 일컬어 김누리 교수는 "사디스트(sadist)와 마조히스트(mashchist)들의 향연"이라고 말한다(33).

 

최근 한국교회에서 '빛과진리교회' 사건이 이슈다. 이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은 한국의 군사문화가 한국사회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들은 '교회리더훈련' 명목으로 교인들에게 공동묘지에서 매를 맞고, 인분을 먹는 일을 요구했다. 그들이 '리더훈련'을 위해서 내세운 성경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의 말씀이다.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까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빛과진리교회의 문제를 언론을 통해 밝힌 이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위의 성경구절이 이렇게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특정 행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느나, 훈련 참가자들은 이 구절을 적용해 '믿음이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줘야 했다. 예를 들어, B LTC 훈련은 이렇게 구성됐다. '먹지 못함' 3일 금식, '매 맞음'은 종로 게이 바 골목에 가서 매 맞을 때까지 전도하기, '영광과 욕됨'은 사창가에 가서 전도하기, '많이 견디는 것'은 양수리에서 교회까지 약 30k 7시간 30분 만에 행군해서 도착하기, '갇힘'은 음식물 쓰레기장에 3시간 갇혀 있기 등으로 진행됐다.' (뉴스앤조이, 2020 4 30일 자 보도)

 

물론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비뚤어진 이해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이러한 문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가 작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군사문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작동하는 것을 에리히 프롬의 책 <건전한 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정상성의 병리성(pathology of normality)'의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이는, 너무나 병든 사회인데,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정상생활 하는 사람들을 정상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군사문화가 합쳐져 생긴 기형적인 믿음 때문이다. 군사문화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목사를 섬기는 것이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오도되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군사문화에 대한 청산과 민주주의의 일상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안다면, 대한민국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작동하고 있는 군사문화를 해체하고 일상의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결코 그 사회의 컨텍스트와 분리되어 생존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를 막아 설,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속속히 일어나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Psilanthropism 그리스도 인간론

 

'싸일랜뜨로피즘'이라고 발음한다. 한국말로 '그리스도 인간론'이라 번역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스도를 '인간'이라고 말한 분파는 모두 이단으로 몰렸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두 본성'이 있다. 인성과 신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뉘는 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들어 있는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본질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인성을 말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인간'이라고 말하면 이단이 된다. 이것은 5세기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의 논쟁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고, 키릴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다. 그 당시 '뜨는' 신학은 'Theotokos'였다. Mother of God'이라 한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는 명칭이다. 여기서 마리아 신학이 시작되지만, 그 당시 논쟁은 마리아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마리아를 'Mother of God(Theo-Tokos)라고 부른 이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고백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소위 아리우스주의자들은 'Anthropotokos' 'Mother of Man'을 고백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마리아는 '인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에 이 문제가 발생하자, 네스토리우스가 두 진영이 만족할 만한 신학적 해결을 위해 고안해 낸 용어(title)가 바로 'Christotokos', 'Mother of Christ'이다.

 

지금 보면, 재치 있는 해결책 같지만, 그 당시 이 문제는 엄청난 저항을 불러왔고, 급기야 '국제적인' 신학논쟁을 불러왔고,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두 번이나 소집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마련된 공의회가 바로 에베소 공의회(431)와 칼케돈 공의회(451)이다.

 

'Mother of God'의 고백을 지켜내기 위해 등판한 신학자가 바로 키릴로스이고, 키릴로스의 학식과 정치적 수완과 영향력은 결국 마리아에 대한 정통 고백을 'Mother of God'으로 이끌며,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추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John McGuckin의 책 <Saint Cyril of Alexandria and Christological Controversy>에 보면, 네스토리우스가 위의 신학논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이 논쟁에는 명백히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그 당시 황제의 섭정인이었던 황제의 누이 the Augusta Aelia Pulcheria의 개입이 두드러진다. 그녀 자신이 '처녀'로서 마리아 신학에 관심이 많았고, 마리아를 'Mother of God'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지지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처녀'로서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archbishop)으로 부임한 후, 그 이전에 교회의 예전에서 여성인 Pulcheria에게 제공되는 특권이 중단되었다. 그 당시 성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황제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는데, 황제를 섭정하던 Pulcheria는 황제 옆에서 황제와 같이 성찬 받는 것이 허락되어 왔다. 네스토리우스는 이것을 부당하게 여겨 Pulcheria에게 성찬 주는 것을 거부했고, 그로 인해 Pulcheria는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다. 이 일로 인해 네스토리우스는 Pulcheria와 정적이 되고, 그 이후에 진행된 신학논쟁에서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몰려 대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이집트로 유배를 가게 되지만, 그의 신학 논쟁은 여전히 논란 중이다.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에 대하여 'Mother of God'을 인정하지 않고, 'Mother of Christ'했던 것은 그가 안디옥학파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안디옥학파 전통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안디옥 학파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도 분명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다만, 위격과 본질의 언어적 이해가 달랐을 뿐이다.

 

기독론, 또는 삼위일체론 논쟁에서 중요한 용어는 '본성(ousia), '실체(hypostasis)', 그리고 '위격(persona)'이다. 위격은 그리스도의 겉모습을 말하고, 실체는 그리스도의 내적 실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실체'에 대한 이해가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간에 달랐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했던 키릴로스는 '실체'라는 용어를 '위격'이라는 용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키릴로스는 '두 개의 다른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결합체로 함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안디옥 학파였던 네스토리우스에게 '실체'라는 용어는 위격 이전의 실제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것을 두 본성의 혼합이라고 보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혼합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 출생, 고난,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일컫는 'Mother of God'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 서 있다. 용어에 대한 개념 이해가 다르다 보니,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몰릴 정도로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의 기독론 논쟁은 오해와 불신으로 빚어진 비극처럼 보인다. 13세기 시리아 정교회의 신학자 바르 에브로요(Bar Ebroyo/Bar Hebraeus)도 다음과 같이 이런 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논쟁은 실제적인 본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용어와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비록 기독론적인 입장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증오심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신앙고백 문제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Bar Hebraeus's Book of Dove, 60).

 

물론 명백히 틀린 고백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고백들까지 모두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적어도 오해와 불신에서 생겨난 논쟁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서로 포용하고 이해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분석하지 않기 - 신비에 잠기기

 

과학적 사고란 대상을 분석하는 사고를 말한다. 학문은 이렇게 발전되어 왔다. 대상을 분석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파악'하는 것이 학문의 원리이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를 한다. 가령 상대방의 성격을 분석하여, 그 사람이 어떠한 유형의 사람인지 '파악'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하여 '안다'고 말하며 안심해 한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대상(타자라고 불러도 좋다)을 분석하는 일은 가능한가? 우리는 왜 대상을 분석하고 싶어하는가?

 

가령,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아직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이유는 그것을 정복하여 더 이상 그것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면에서, 뭔가를 분석하여 파악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분석은 대상에 대한 '신비감'을 무너뜨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상이 파악되고 나면 사람은 그 파악된 대상에 대하여 지배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파악된 존재는 나에게 더이상 신비를 줄 수 없다. 내 존재보다 아래의 존재인 것처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게는 결코 신비감을 갖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과학적 사고를 발휘해야 하는 삶의 부분과 그러면 안 되는 삶의 부분을 구별하고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령,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상대방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일을 삼가는 게 좋다. 상대방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비는 무너지고 만다. 신비감 없는 사랑은 타다 만 장작이 될 뿐이다.

 

현대인들이 가진 최고의 비극 중에 하나는 세상을 모두 '과학적 사고'로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약육강식'의 세상처럼 서로가 서로를 자기의 발 아래 두려 할 뿐, 상대방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그리고 인간과 신(God) 사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분석하지 않고 신비에 잠기는 연습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분석하면 대상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착각을 거둘 필요가 있다. 분석하면 자신이 분석한 만큼만 알게 될 뿐이고, 나머지 분석하지 못한 부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어, 분석된 존재는 그 존재의 크기가 내가 분석한 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가지게 될 뿐이다. 이 얼마나 낭비인가.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분석하지 않고 신비에 잠길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분석은 '냉소'를 불러오지만, 신비는 감사와 경탄을 불러올 것이다. 냉소가 판 치는 세상에 살기보다 감사와 경탄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싶다.

 

나는 그대를 분석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신비롭게 사랑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한국의 지배계급의 주요 논리

 

1) 성장과 발전 가치의 절대화

2) 반공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확대

3) 미국 없는 독자생존의 불가능성

(현대정치의 위기와 비전, 121)

 

이번 한국의 총선 결과는 팬데믹 영향일까, 아니면 위에서 열거한 지배계급의 주요 논리에 대한 반발일까?

 

'자유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1번과 2번의 논리에 맞닿아 있다. 자유 민주주의를 거역하는 것은 성장과 발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요,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적인 이념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패배하는 것이라 여긴다.

 

성장과 발전 가치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끝없는 탐욕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다. 탈북자 출신들이 보수당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게 된 것은 한국의 보수당이 아직까지 얼마나 2번의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지 알 수 있는 예시이다.

 

탈북자 출신 정치인들이 한국 사회에 희망이 되려면 '반공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확대'를 공고히 하는 데,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치에 활용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 그러한 논리와 기반으로 한국에서 정치활동을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들은 '새터민'의 인권과 번영을 위해 일해야 함과 동시에 '사회적 약자층'의 인권과 번영도 함께 챙겨야 한다. 더 나아가, 남북통일을 위한 지렛대가 되어야지, 반공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활용하여 남북분열을 조장하면 안 된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대국'에 기대어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오랜 세월 한국은 중국에 기대어 살았고, 미국에 기대어 산지도 벌써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까지 이러한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에 대처하고 있는 미국의 그 부족한 역량을 목도하고서도 아직까지 '미국 만세'를 부르고 살 것인가? 한국은 더이상 미국의 헐리우드 액션에 속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헐리우드 영화 등을 통해 거대서사를 창조하여, 그 거대서사 속에서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미국은 지구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위기를 구원해 주는 메시아의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자연발생 위기가 닥쳐도, 외계인이 침입해도, 미국은 언제나 앞장서서 자신들의 발전된 문명과 기술을 바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해 왔다.

 

그런데, 미국의 거대서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 비참하게 무너졌다. 실제 문제가 발생하니, 대처 능력이 없는 게 탄로났다. 동네에서 제일 싸움 잘 하는 '형님'인 줄 알았는데, 막상 붙어보니 별거 아닌 허풍쟁이였던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의 논리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의 논리는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아직까지 이 논리를 통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든다면, 그들은 스스로 멍청이인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내가 보기에 민주당의 국정철학도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다. 민주당의 국정철학은 보수당이 가질 만한 정도 밖에 안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의 보수당이 얼마나 시대에 뒤쳐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시대는 변한다. 그 변화에 맞춰 정치도 열심히 변해야 한다. 안 그러면 그 어느 당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불한당'이 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슬기로운 집단]

ㅡ 그람시와 교회론

 

안토니오 그람시는 니체, 칼 슈미트와 더불어 현대 정치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 사상가이다.

 

그의 정치사상 중 '헤게모니' 이론과 그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 이론은 현대 정치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사상이다. 그람시는 지배계급이 어떻게 형성되며, 그 지배계급의 작동방식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데 힘을 썼다. 그러면서 그가 주조한 개념이 '헤게모니'이다. 헤게모니는 흔히 '주도권'이라고 번역하는데, 지배계급은 자신 속한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피지배계급은 그들의 헤게모니 속에서 착취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람시의 관심은 지배계급이 확보하고 있는 '헤게모니'를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에 있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되는 지, 그 메커니즘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지배계급에 맞선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민적이고 대중적인 문화'이다. '문화'라는 것은 지배계급이 기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국민적이고 대중적인 문화는 지배계급의 강요에 의해서 형성될 수 없는 것이고, 문화는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지배계급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한국 사회는 지난 2016~2017년도에 발생한 '촛불혁명'을 통해서 '대항 헤게모니'의 힘을 직접 목격했고, 대항 헤게모니를 위한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되는 지를 직접 경험했다. 촛불집회를 기획한 사람들에게 직접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십중팔구 그들은 그람시가 주창한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교회가 지배계급에 맞선 '대항 헤게모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는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문화'를 계속해서 새롭게 창조하는 '슬기로운 집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교회의 모습은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슬기로운 집단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그 뜻을 같이 하는 지배계급 그 자체인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역할은 주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감행된다.

 

물론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그들만의 '대항 헤게모니'만으로 지배계급에 맞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슬기로운 집단'이 되기 위해서 마지막 희망은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소위 '평신도 집단'이 그람시가 말하는 '국민적이고 대중적인 문화'의 창조를 통해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라는 것은 '놀이'이다. 놀이는 누군가 조작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놀라'고 지배계급이 지침을 내려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문화와 놀이는 인간이 가진 고유의 창조성이다. 그 고유한 능력을 발휘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지배계급에 맞선 '대항 헤게모니'를 만든다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고이고 썩은 물'이 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는 역동적인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항 헤게모니로서의 슬기로운 집단'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싶다. 자기 안에 내재된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할 줄 아는, 소위 '놀 줄 아는'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고 싶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고 싶다.

 

"모여라! 우리 한 번 신나게 놀아보자!"

Posted by 장준식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글을 읽다가 참 멋진 문장을 만났다.

 

"주후 372년에 믿음을 위한 그레고리우스의 공적 수고가 시작되었다"(기독교 고전총서 3, 330).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는 '신앙'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이다. 우리는 왜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해야 하는가?

 

신앙을 지키는 일은 '수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실수를 범한다. 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지를 묻지 않은 채, '신앙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다 생명을 허비하고 만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레이우스(Basil)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더불어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불리는 인물이다. 초대교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선포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겼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 당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들이 공존했다는 뜻이다.

 

"카파도키아 학파가 직면한 문제는 인간의 구원이 성자의 온전한 신성에 달려 있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중심 사상을 보존하면서도 사벨리우스주의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35).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전후로 해서 발달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은 헬라어와 라틴어의 복잡한 문법체계를 이용한 '언어게임'의 성격이 짙다. 특별히 그 당시 유행하던 수사학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는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은 현대인들, 특별히 헬라어와 라틴어 체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헬라어 '우시아(ousia)'라는 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을 가리키는 '휘포타시스(hypotasis)' 등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은, 고대 헬라인들의 사상체계가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전후로 기독교 세계에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을 주도한 학파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세력은 너무도 우세하여, 정통 삼위일체론의 수호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맞서다 여러분 파문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될 정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를 질문해야 한다. 카파도키아 학파, 특별히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왜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카파도키아 학파가 활동하던 시대는 확정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학파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저런' 사상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정립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지금도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멈춰선 논쟁이 아니다. 앞으로 종말의 때까지, 즉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게 아니라 두 눈으로 보는 것같이 드러내 주실 때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논쟁을 멈추지 않고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유는 '자기 학설'이나 '자기 신앙'을 수구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 아니다. 잘못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은 인간의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하고 그릇된 신앙으로 인도하여 생명을 망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바 '신념'을 고수하는 수구세력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 신앙이 생명을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지, 우리에게 정말 구원을 가져다 주는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을 해치거나 억압하고, 또는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수고' '열정'은 신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수고와 열정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배제와 혐오'에서 비롯된 수고와 열정, 또는 배제와 혐오를 조장하기 위한 수고와 열정은 생명을 해치고 억압할 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한 수고와 열정은 차라리 갖지 않는 게 좋다.

 

오히려, 수고와 열정은 배제와 혐오를 '허물기 위하여' 필요한 신앙의 덕이다. 잘못된 '관념(생각/사상)'은 잘못된 행동을 낳고, 잘못된 행동은 자기의 생명 뿐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도 해치고 만다.

 

 

배제와 혐오를 조장하는 신앙, 그러한 신앙이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분의 그러한 수고 덕분에 우리는 '사랑으로 연합하신' 삼위일체의 형상에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와 이웃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한다. 생명은 그 수고로움을 먹고 자란다.  

 

Posted by 장준식

[순종과 온유]

 

신앙의 핵심은 '순종'에 있다. 순종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려는' 생명의 결단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려는 삶이 참된 삶이고 참된 생명을 누리를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순종하려는 신앙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덕목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온유(meekness)가 아닌가 싶다.

 

온유(meekness)는 참 신비한 성품이다. 끝까지(죽기까지) 순종하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의 뜻은 '의로운(righteous), 겸손한(humble), 가르침에 열려 있는 마음(teachable),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인내할 줄 아는 능력(patient under suffering)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기나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long suffering willing to follow gospel teachings) 성품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온유란 '한 방향으로 오랫동안 순종하는 성품'을 가리킨다. 여기서 한 방향이란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려는' 신앙의 삶을 말한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복이 임하게 되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5:5)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해서 순종하며 온유한 자로 살지는 않겠지만,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애처롭고 감사하다.

 

현실의 삶에서 온유한 자로 살아가는 일은 오히려 땅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이삭(Isaac)'이다. 이삭은 척박한 브엘세바 땅에 살아가며 우물을 팔 때마다 모두 빼앗겼다. 그러나 그의 온유한 성품은 자손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복을 안겨주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온유한 자에게 내어주면서까지 그를 지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오랫동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니, 하나님이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순종과 온유는 신앙인에게서 볼 수 있는 신비로움이다. 이 신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Posted by 장준식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한국 기독교를 돌아보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일본인 학자, 오구라 기조가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를 분석한다. 그의 분석의 도구는 '유교'이다. 특별히 성리학의 틀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다. 그의 분석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성리학이란 '()'를 세상의 '보편적 원리'로 보는 이론 체계이다. 이는 마치 플라톤이 주장한, 서구사회의 '이데아'와 비슷하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리는 천(),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 규범이다"(20).

 

도덕은 바로 이 ''의 성취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의 성취를 잘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도덕지향적'이다. 한국에서 권력과 부를 누리는 계층은 '도덕'을 갖춘 사람, ''를 이룬 사람이 차지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도덕 쟁탈전'이 살벌하게 벌어지는 사회이다.

 

도덕 쟁탈전은 ''의 쟁탈전이다. 누가 '보편적'인가를 놓아두고 싸운다. 다른 말로 해서, 누가 '옳은가'를 두고 싸운다.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다.

 

한국인의 '상승'의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를 많이 쌓은 사람이 ''를 적게 쌓은 사람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는 ''를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나와 동일한 ''를 지닌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가 되고, 나보다 ''를 많이 쌓은 사람에게는 ''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나보다 ''가 낮은 사람에게는 ''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에서 '나와 너'를 거쳐 ''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만한 사회인 것이다. (학벌이나 좋은 직업, 또한 부를 쌓는데 혈안인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것들이 상대방보다 ''를 높이 쌓는 방편들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 사회는 '배움(학벌)' ''를 높이 쌓는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은 그래도 ''라고 하는 범주 안에서 '우리'의 호칭을 갖는다. 아무리 ''이어도 ''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우리'라는 범주 안에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라는 범주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그들을 일컬어 ''이라고 한다. '' ''가 없는 부류로서, 인간 취급 자체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오랑캐가 대표적). 그들은 사라져야 할 존재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벌레 같은 존재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부인이 남편을 너무 존경하고 사랑하면, '남편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대등한 존재에서는 그냥 '남편'이라고 한다. 그러다, 남편이 본인 마음에 안 들거나 ''에 있어 자신보다 못하다 생각되는 순간, 남편에 ''자가 붙어 '남편놈'이 된다. 그러다, '우리'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면, ''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은 '도덕/'를 매우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재능이나 기술, 또는 능력을 보지 않는다. 상대방이 아무리 재능과 기술이 뛰어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보기에 ''가 없으면, 그냥 '싸가지'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한국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싸가지', '도덕/'인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공동체'라는 것은 같은 '리의 원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는 '리와 기'의 원리에 따라 '질서'가 부여된다. 그 질서를 잘 지키면, 그는 '우리'가 된다. 한국 사람들은 그 '우리'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라는 범주에 머물기 위해서 '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질서를 깨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데, 질서를 깨는 순간 그 사람은 ''이 되어 공동체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부장님이 설렁탕 먹으면 부하 직원들은 모두 설렁탕 먹어야 한다. 갈비탕 먹는 ''은 역적이 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카르텔'을 형성해온 가장 보편적인 말이다. 우리는 ''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 즉 같은 질서 안에 존재하는 사람,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것을 지향하며, 같은 것을 나누어 먹는 사이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

 

한국 기독교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기독교가 왜 이렇게 배타적인지 생각하게 된다. 성리학과 기독교가 만나게 되면, '보편적 원리'에 대한 폭발적 반응이 생겨나는 것 같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해 온 탓에, 게다가 플라톤의 보편성의 철학이 기독교 사상에 유입된 탓에, '보편성'은 기독교 복음의 중심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에 쉽게 동화된 듯싶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남이가?"를 공유하게 되고, 같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 ''이라 부르며, 그들을 향하여 너무도 손쉽고 마음 편하게 '배제와 혐오'를 뿜어 내게 된 듯싶다.

 

현재 한국 '보수' 기독교의 그 못된 습성을 고치려면, 우선 한국 고유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고찰과 반성이 먼저 필요해 보인다. 그런 후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보편성'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기독교는 적어도 '우리와 남'을 가르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 '막힌 담(우리와 남)'을 허무셨다고 고백하는 기독교가 왜 이렇게 '배제와 혐오'를 조장하는 '삼류 종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 통렬한 마음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오구라 기조)-도덕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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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마카비서] ㅡ 신정론과 부활

 

외경으로 분류되어 있는 '마카비서(Maccabees)'는 개신교 정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가톨릭을 비롯한 다른 기독교 전통을 지닌 교파에서는 '외경'이라는 이름이지만 '성경'에 포함되어 읽힌다.

 

특별히, 마카비 2서 같은 경우, 거기에 나오는 순교자들의 이야기와 그것과 연관된 진술들은 놓치기 너무 아까운, 귀한 신앙의 이야기들이다. (개신교의 성경에도 '외경'들이 포함되어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일곱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순교) 이야기라든지, 유대인의 지도자 라지스의 순교(죽음) 이야기는 많은 감동과 영감을 준다. 그러한 순교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카비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신정론' '부활'이다.

 

신정론과 부활은 얽혀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을 경험하고, 의인이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인이 오히려 의인 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넘어서지 못한다.

 

신정론에 대해서 마카비서는 이렇게 말한다. "Therefore he never withdraws his mercy from us. Though he disciplines us with calamities, he does not forsake his own people.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자비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에게 징벌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채찍질하시는 것이지 절대로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2 Maccabees 6:16).

 

일곱 아들과 어머니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끝내 죽는 길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이렇게 죽더라도 몸과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몸과 생명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부활신앙' 가운데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에 대해 김근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활신앙은 순교의 현장에서 피어난 꽃이며, 이 꽃의 뿌리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언제나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자비로우신 야훼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이다"(김근주, <구약으로 읽은 부활신앙>, 117).

 

일곱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지만, 마카비 2 14장에 나오는 '라지스의 순교' 이야기도 숨죽여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순교 장면은 이렇게 그려지고 있다.

 

"still alive and aflame with anger, he rose, and though his blood gushed forth and his wounds were severe he ran through the crowd; and standing upon a steep rock, with his blood now completely drained from him, he tore out his entrails, took them with both hands and hurled them at the crowd, calling upon the Lord of life and spirit to give them back to him again. This was the manner of his death.

라지스는 그래도 죽지 않고 분노가 불처럼 일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피가 콸콸 솟고 상처가 중한데도 군중을 헤치고 달려 가서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의 피가 다 쏟아져 나왔을 때에 라지스는 자기 창자를 뽑아 내어 양 손에 움켜 쥐고 군중에게 내던지며 생명과 영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기 창자를 다시 돌려 주십사고 호소하였다.  그는 이렇게 죽어 갔다."(2 Maccabees 14:45-46).

 

부활은 결코 '영혼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될 수 없다. 부활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자 한 자,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끝까지 하나님의 의를 지킨 자,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끝까지 외로운 삶을 살았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창조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부활을 입에 담거나, 함부로 부활을 꿈꿀 수 없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온 몸으로 믿은 자만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수 있는 자비인 것이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듯하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ㅡ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일부

 

부활을 생각하며, 나는 심보선의 시를 다시 읽는다.

 

(심보선, <> 전문)

 

오늘날 피를 제외하고는 따스함이 없다

피를 제외하고는 붉음도 없다

피가 그저 의미 없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마지막 절규가 터지기 전까지

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장미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예전에 우리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여전히 같은 가사와 같은 선율의 노래

그러나 이제 그 노래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노래를 가장 잘 불렀던 이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래를 멈추지 마라

 

지금까지 손이 나와 동행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나를 이끌고

다리 난간에서 나를 버텨주었던 손

나는 손을 신뢰했다

사랑하는 이의 볼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입에 밥을 떠먹였기에

무엇보다 내 몸이 가장 자주 피를 흘렸기에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노래를 멈추지 마라

갓 지은 밥에서 피 냄새가 나는지 맡아봐라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태양이 아닌 것

그러나 태양이라고 믿는 것

그쪽을 향해 걸어가라

 

마음의 빈민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

장미, 노래, , 너의 손, 나의 태양……

 

삶은 피의 무게로 저울질될 것이다

계속해서 걸어가라

번민하며

번민을 버리며


Posted by 장준식

욕망인가 은혜인가

 

St. Ephrem of Nisibis 4세기 동방기독교의 대표적인 영성가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the Hymns on Paradise>는 그의 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설파했는데, 그가 이용한 방식은 'Lyric Doctrinal Hymns(madrashe)'로 불린다. 풀어서 설명하면, 시의 형식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데, 시의 형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찬송시의 형태를 띈다.

 

그는 수도사는 아니었지만, deacon으로서 교회의 일을 돌보며, 금욕주의자(ascetic)로 살았다. 그는 문학적인 작품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을 했는데, 그의 공헌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표현하며 교회의 예배와 삶을 풍요롭게 한 것이다.

 

그는 예표(type)와 상징(symbol)을 통해 성경과 자연(nature)을 해석하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일차 원천(primary source)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연은 성경에 이은 두 번째 원천(second source)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경과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아무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과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셔야만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 때문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간격) 때문에, 그 간격을 메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겸손(condescension)이 없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St. Ephrem은 제사장의 제의(ephod/제사옷)와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를 각각 지성소와 성소에 대한 예표(type)로서, 계시의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로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Accompanied by the knowledge

which was hidden in the ephod,

the priest entered the sanctuary,

a type for Paradise,

and he tasted of the Tree

through the symbol of the revelation given him.

But if anyone entered

contrary to the commandment, they died,

as a type of Adam who died

for taking the fruit prematurely.

The priest put on sanctification,

but Adam was stripped of glory.

(Hymns on Paradise. 15:8)

 

제사장의 제의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성화'이다. 성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이것은 레위기 제의 신학을 매우 잘 설명해준다. St. Ephrem은 레위기 제의신학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을 type symbol로 표현하는 그의 능력도 매우 탁월하다.

 

다른 곳에서 그는 Adam과 한센병 환자(the leper) type의 형태로 해석한다. 그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담과 한센병 환자가 에덴동산과 진영에서 쫓겨났다가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type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있는데, 그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Adam had been most pure

in that fair Garden,

but he became leprous and repulsive

because the serpent has breathed on him.

The Garden cast him out from its midst;

all shining, it thrust him forth.

The High Priest, the Exalted One,

behind him

cast our from Himself:

He stooped down and came to him,

He cleansed him with hyssop,

and led him back to Paradise.

(Hymns on Paradise. 4:4).

 

위의 찬송시는 정결했던 아담이 어떻게 한센병 환자처럼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뱀이 그를 향해 숨(breathed on him)을 쉬었기 때문이다.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그를 쫓아낸다. 땅이 그를 토해낸 것이다. 이것도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면, 쫓겨난 아담은 어떻게 다시 '낙원(Paradise)'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것은 구원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에서 기독론이 등장한다. 대제사장, 가장 높은 곳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케노시스(자기비하, 낮춤, 겸손)'를 통하여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왔고, 그를 우슬처로 씻어 다시 동산에 넣어주셨다.

 

나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접할 때마다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욕망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안고 사는 것 같다. 구원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안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이란 저항할 수 없는 비참함이 짓누른다는 뜻이다.

 

현실이 그렇다. 죄가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막을 길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밀려오는 쓰나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쓰나미를 온 몸으로 안아 처절하게 죽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죽어버리는 생명이라면, 얼마나 허무한가. 그렇게 허무로 점철된 인생이라면, 무슨 살아갈 희망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의 욕망을 달래주는, 우리의 욕망을 넘어서,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이기에, 그 비참함을 다시 영광스럽게 탄생시켜 줄, 신적 존재(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욕망이든, 은혜든, 구원은 언제나 생명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지막 희망이다.

 

주여, 주의 영광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인문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역할

 

경제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현재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 때문에 세계경제가 둔화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금융경제가 무너진 게 아니라 실물경제가 먼저 무너졌다는 것이다. 금융경제가 무너진 거라면 금리조정이나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서 돈이 돌아가게 끔 만들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정부에서 금융정책을 써서 돈을 푼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돈을 쓸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가령, 돈이 있어도 전세계 어느 곳이든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바이러스 감염 우려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의 해법은 경제전문가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치료제와 백신, 그리고 방역 등에 달렸으므로 생물학자들과 의학자들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 집단이 달라진다. 앞으로 경제전문가들보다 생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의 활동이 더 요청될 것이다. 바이러스의 팬데믹 현상은 이번으로만 그치지 않고, 환경 파괴로 인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카프카의 소설에서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판'의 형태로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어두운 밤이 다가오고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어두운 밤으로 들어섰다. 거대서사가 무너져 더 이상 어두운 밤에 아스라히 올려다 볼 수 없는 '별들'이 사라졌고, 질병의 팬데믹 현상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 생겨 버렸다. 우리는 이제 모여도 함께 나눌 '이야기'가 없고, 우리는 이제 의도적으로 모이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어두운 밤에서 짙은 어둠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햇살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생생한 컬러(color)도 없는, 그레이(grey)한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전문가도 중요하고, 생물학자나 의학자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지만, 그 누구보다 인문학자나 신학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문학자와 신학자의 역할은 거대서사를 만들어 내어 어둡고 그레이한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햇살을 비춰주고, 이야기를 나누어주고, 생상한 컬러를 전달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인간은 상상력을 지녔기 때문에, 인문학자와 신학자가 전달해 주는 햇살과 이야기와 컬러를 통해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그것을 위해 현재를, 그리고 현실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상상력은 지금처럼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지만, 상상력은 다른 세상을 꿈꾸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다른 세상을 꿈 꿔야 한다.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세상이 아닌,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세상, 그야말로 '에덴동산' 같은 세상을 부지런히 꿈꿔야 한다.

 

16세기, 어두운 시대,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부지런히 꿈꿨다. 우리에겐 그런 꿈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 꿈을 위해 인문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더욱더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거대서사를 부지런히 만들어, 그것을 부지런히 전달해 주어야 한다. 상상력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거대서사의 붕괴, 신천지 천지,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재구성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그의 책 <인류세 Defiant Earth>에서 근대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적 성격의 거대서사 지배질서와 권력관계 구조에 합법성을 부여했다면, 이제 인류세가 도래함으로써 합법성을 잃게 된다새로운 서사는 기득권을 위해 복무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의 완벽한 실패를 드러낸다”(132). 해밀턴이 주장하는 바는, 이 시대는 거대서사가 붕괴된 시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리오타르(J. F. Lyotard)를 통해 프랑스 68혁명 이후 세계가 포스트모던세계에 들어섰으며 거대서사가 무너지고 개인과 사소한 일상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선포된 사실이다.

 

거대서사(grand narratives)는 사람들을 모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뿐 아니라 거대서사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기능도 가진다. 그래서 위에서 해밀턴이 기술하고 있듯이, 거대서사는 지배층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서구 사회에서 거대서사의 중심은 기독교의 메시지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왜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의 붕괴가 그렇게 급속도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해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거대서사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대서사의 붕괴와 함께 중요해진 것은 개인과 사소한 일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의 거대서사 아래 자기 자신과 일상을 희생하며 교회에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더 이상 교회에 모여 거대서사의 메시지 아래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집에서 드라마 보며 쉬거나 밥 먹는 시간이다.

 

한국도 서구사회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진입한지 오래다. 한국 사회도 더 이상 종교적 거대서사나 민족적 거대서사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붕괴되고 있는 이유는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나 전도활동의 부재, 또는 사회적 영향력의 감소 때문이라기 보다는(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사회도 거대서사가 붕괴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깊숙이 진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한 가지 현상이 더 있다. 왜 한국사회에 신천지 같은 이단이 판을 치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그것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그것도 21세기에 어떻게 전근대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집단 광기가 한 교주를 통해서, 그리고 한 이단 집단을 통해서 분출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도 거대서사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거대서사가 붕괴된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증가한다. 거대서사가 붕괴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마치 삶의 목표를 상실한 것 같은 허탈한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더욱더 거대서사를 갈망한다. 이단 교주의 특징은 사람들의 그러한 마음을 잘 파악하여 그들에게 만족을 주는 거대서사를 만들어 낼 줄 안다는 것이다.

 

얼마전 사회적 무리를 일으켰던 신옥주의 타작 마당이나 피지섬으로의 집단 이주는 그가 얼마나 교묘하게 거대서사를 지어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작마당은 서로의 죄를 눈에 보이게 고백하고 속죄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거듭남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렇게 속죄함을 받은 사람만이 에덴동산과 같은 피지섬의 집단 거주지로 들어갈 수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 즉 거대서사는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원리이다.

 

신천지는 그보다 더 큰 거대서사를 지어내어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들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이용하여 거대서사를 만들어냈는데, 144,000명의 숫자와 이기는 자의 판타지를 결합하여 육체적현세영생의 거대서사를 전파했다. 거대서사의 붕괴로 인해 영적 허기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천지의 그러한 거대서사에서 영적 만족감을 채운다. 뭔가 자신의 조그마한 일상보다 큰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는 것은 의외로 큰 희열과 만족을 주고, 무엇보다 초월감과 전능감을 가져다준다. 거대서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기독교는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성경의 이야기는 주로 거대서사로 해석되고선포되어 왔기 때문이다. 거대서사의 붕괴는 기독교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클라이브 해밀턴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가 지식, 언어, 텍스트의 세계로 진입한다면, 인류세의 세계는 우리를 하고 지구로 되돌려 놓는다”(132). 거대서사를 붕괴시킨 포스트모더니즘 세계도 인류세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상의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거대서사가 붕괴된 이 시대에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그동안 거대서사로 해석하고 선포했던 성경의 내러티브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계속 성경의 내러티브를 거대서사의 측면에서만 다룬다면 기독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아무리 거대서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해도, 거대서사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위에서 해밀턴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기독교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거대서사에서 하고 지구의 담론으로 전환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동안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만 쳐다보며 살도록 했다면, 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땅의 일(우리의 현실/특별히 기후변화와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성경의 내러티브를 다시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거대서사의 붕괴와 함께 기독교는 붕괴했고, 거대서사만을 진리로 외치던 교회의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현상을 보면서 당황해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들어선 세계는 인류세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기독교의 신학과 메시지를 재구성한다면, 거대서사가 붕괴되어 영적으로 허덕이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충분히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교회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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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순교의 광기?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어떤 '광기'가 느껴진다.

 

그의 편지에 대한 어떤 신학자의 평가처럼, 순교를 향한 그의 태도는 '자기 학대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순교자 정신의 광채'를 보여주기도 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기의 순교를 막지 말라는 당부를 전한다. "저는 방해 없이 저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1:2).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행운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4:1).

 

그는 말한다. "저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합니다"(3:2). 그에게 순교는 세상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게 해주는 수단 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은 순교에 대한 그의 광기 또는 광채를 보여준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여라!"(5:3).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독히도 갈망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생명에 이르게 한다. 온전한 지식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주장은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의 사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의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열정도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교회는 순교자의 핏값으로 세워졌다는 말이 있다. 그 진술의 중심에 이그나티우스가 있다. 우리가 이그나티우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선다면,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될까?

 

순교의 '광기'는 고사하고, 순교의 정신, 또는 광채를 찾아보기 힘든 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신앙이 얕아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그나티우스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마십시오"(7:1).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골로새서는 거짓 교훈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교훈은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혼합하여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을 말한다.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만나면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무엇보다 육신을 부정하게 되고, 학대하게 되며, 거짓 겸손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곡된 유대주의는 율법을 오용하게 만든다. 이는 율법의 몇 가지 행위를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 표출되는데, 음식 규정이나 절기 규정 같은 것을 통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종교적 금욕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대신 율법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종교적 금욕주의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사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헬라의 이원론과 만나게 되면 몸에 대한 자기 비하는 겉잡을 수 없게 번진다. 플라톤의 사상에 뿌리를 둔 헬라철학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물질세계를 영원의 세계의 그림자로만 볼 뿐이다. 그래서 이원론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악한 물질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몸을 비하하게 만든다.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몸을 정당하게 학대하기 위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는 매우 요긴한 도구가 된다. 복음도 이렇게 변한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말을 서슴치 안고 한다.

 

자신의 몸을 비하하는 것은 그릇된 겸손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몸에 대한 폭력이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자기의 육신은 저급한 것이니 금욕을 통해 절제하고 통제하고, 괴롭히고 학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것을 효과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요, 그러한 것을 철저하게 실행하고 실천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머물게 된다.

 

골로새서는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일침을 가하며, 이러한 사상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을 이미 성경에서 이렇게 2천년 전부터 경고했는데, 아직도 못알아듣고, 자기 비하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잘못된 금욕은 생득적인 기쁨을 제어하고 빼앗는다.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물들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몸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고백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인 것을 실감하고 절감하고 간절히 고백하기 위해서, 한 가지 해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을 과감하게 어겨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현대 그리스도인 중에 이것을 잘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거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늘 불안한 인생을 산다. 그러니, 현대 그리스도인은 "몸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지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웃긴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를 선포하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함께 하길 빈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초기 기독교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The Epistle to Diognetus>를 보면 정말 멋진 말이 나온다.

 

"In a word, what the soul is in a body, this the Christians are in the world"(ED, 6:1).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혼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정체성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 될지,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혼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이 세상은 영혼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만,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당연히 이 세상은 영혼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고 칭찬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영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시간 낭비와 괴로운 일도 없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증언대로라면,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달린 것 아닌가.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허투루 살 수 없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질 뿐 아니라,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쭐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누구인지, 물론 편지에서 밝히는 저자는 "사도의 제자(a disciple of the Apostles)'이지만,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그가 매우 궁금하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