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인가 은혜인가

 

St. Ephrem of Nisibis 4세기 동방기독교의 대표적인 영성가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the Hymns on Paradise>는 그의 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설파했는데, 그가 이용한 방식은 'Lyric Doctrinal Hymns(madrashe)'로 불린다. 풀어서 설명하면, 시의 형식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데, 시의 형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찬송시의 형태를 띈다.

 

그는 수도사는 아니었지만, deacon으로서 교회의 일을 돌보며, 금욕주의자(ascetic)로 살았다. 그는 문학적인 작품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을 했는데, 그의 공헌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표현하며 교회의 예배와 삶을 풍요롭게 한 것이다.

 

그는 예표(type)와 상징(symbol)을 통해 성경과 자연(nature)을 해석하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일차 원천(primary source)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연은 성경에 이은 두 번째 원천(second source)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경과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아무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과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셔야만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 때문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간격) 때문에, 그 간격을 메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겸손(condescension)이 없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St. Ephrem은 제사장의 제의(ephod/제사옷)와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를 각각 지성소와 성소에 대한 예표(type)로서, 계시의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로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Accompanied by the knowledge

which was hidden in the ephod,

the priest entered the sanctuary,

a type for Paradise,

and he tasted of the Tree

through the symbol of the revelation given him.

But if anyone entered

contrary to the commandment, they died,

as a type of Adam who died

for taking the fruit prematurely.

The priest put on sanctification,

but Adam was stripped of glory.

(Hymns on Paradise. 15:8)

 

제사장의 제의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성화'이다. 성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이것은 레위기 제의 신학을 매우 잘 설명해준다. St. Ephrem은 레위기 제의신학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을 type symbol로 표현하는 그의 능력도 매우 탁월하다.

 

다른 곳에서 그는 Adam과 한센병 환자(the leper) type의 형태로 해석한다. 그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담과 한센병 환자가 에덴동산과 진영에서 쫓겨났다가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type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있는데, 그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Adam had been most pure

in that fair Garden,

but he became leprous and repulsive

because the serpent has breathed on him.

The Garden cast him out from its midst;

all shining, it thrust him forth.

The High Priest, the Exalted One,

behind him

cast our from Himself:

He stooped down and came to him,

He cleansed him with hyssop,

and led him back to Paradise.

(Hymns on Paradise. 4:4).

 

위의 찬송시는 정결했던 아담이 어떻게 한센병 환자처럼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뱀이 그를 향해 숨(breathed on him)을 쉬었기 때문이다.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그를 쫓아낸다. 땅이 그를 토해낸 것이다. 이것도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면, 쫓겨난 아담은 어떻게 다시 '낙원(Paradise)'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것은 구원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에서 기독론이 등장한다. 대제사장, 가장 높은 곳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케노시스(자기비하, 낮춤, 겸손)'를 통하여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왔고, 그를 우슬처로 씻어 다시 동산에 넣어주셨다.

 

나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접할 때마다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욕망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안고 사는 것 같다. 구원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안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이란 저항할 수 없는 비참함이 짓누른다는 뜻이다.

 

현실이 그렇다. 죄가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막을 길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밀려오는 쓰나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쓰나미를 온 몸으로 안아 처절하게 죽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죽어버리는 생명이라면, 얼마나 허무한가. 그렇게 허무로 점철된 인생이라면, 무슨 살아갈 희망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의 욕망을 달래주는, 우리의 욕망을 넘어서,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이기에, 그 비참함을 다시 영광스럽게 탄생시켜 줄, 신적 존재(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욕망이든, 은혜든, 구원은 언제나 생명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지막 희망이다.

 

주여, 주의 영광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