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글을 읽다가 참 멋진 문장을 만났다.

 

"주후 372년에 믿음을 위한 그레고리우스의 공적 수고가 시작되었다"(기독교 고전총서 3, 330).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는 '신앙'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이다. 우리는 왜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해야 하는가?

 

신앙을 지키는 일은 '수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실수를 범한다. 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지를 묻지 않은 채, '신앙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다 생명을 허비하고 만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레이우스(Basil)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더불어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불리는 인물이다. 초대교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선포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겼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 당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들이 공존했다는 뜻이다.

 

"카파도키아 학파가 직면한 문제는 인간의 구원이 성자의 온전한 신성에 달려 있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중심 사상을 보존하면서도 사벨리우스주의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35).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전후로 해서 발달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은 헬라어와 라틴어의 복잡한 문법체계를 이용한 '언어게임'의 성격이 짙다. 특별히 그 당시 유행하던 수사학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는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은 현대인들, 특별히 헬라어와 라틴어 체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헬라어 '우시아(ousia)'라는 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을 가리키는 '휘포타시스(hypotasis)' 등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은, 고대 헬라인들의 사상체계가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전후로 기독교 세계에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을 주도한 학파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세력은 너무도 우세하여, 정통 삼위일체론의 수호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맞서다 여러분 파문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될 정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를 질문해야 한다. 카파도키아 학파, 특별히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왜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카파도키아 학파가 활동하던 시대는 확정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학파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저런' 사상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정립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지금도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멈춰선 논쟁이 아니다. 앞으로 종말의 때까지, 즉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게 아니라 두 눈으로 보는 것같이 드러내 주실 때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논쟁을 멈추지 않고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유는 '자기 학설'이나 '자기 신앙'을 수구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 아니다. 잘못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은 인간의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하고 그릇된 신앙으로 인도하여 생명을 망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바 '신념'을 고수하는 수구세력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 신앙이 생명을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지, 우리에게 정말 구원을 가져다 주는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을 해치거나 억압하고, 또는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수고' '열정'은 신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수고와 열정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배제와 혐오'에서 비롯된 수고와 열정, 또는 배제와 혐오를 조장하기 위한 수고와 열정은 생명을 해치고 억압할 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한 수고와 열정은 차라리 갖지 않는 게 좋다.

 

오히려, 수고와 열정은 배제와 혐오를 '허물기 위하여' 필요한 신앙의 덕이다. 잘못된 '관념(생각/사상)'은 잘못된 행동을 낳고, 잘못된 행동은 자기의 생명 뿐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도 해치고 만다.

 

 

배제와 혐오를 조장하는 신앙, 그러한 신앙이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분의 그러한 수고 덕분에 우리는 '사랑으로 연합하신' 삼위일체의 형상에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와 이웃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믿음을 위한 공적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한다. 생명은 그 수고로움을 먹고 자란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