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목회 철학]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이 '차가운 세상'을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세상'을 만나더라도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의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예수는 '차가운 세상'을 만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으나, 끝까지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 '따스한 마음'으로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가 '부활'했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vere homo)이었던 그가 그랬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섭취한 에너지를 체온 유지, 즉 몸을 따스하게 유지하는 데 90%를 쓴다.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삶의 '따스함'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온힘을 다해 '따스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나는 그 '따스함'을 위해 부름 받았고, 사람들이 '따스함'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일을 위해 내 몸의 체온을 다 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사유와 구원]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을 다음의 글로 끝맺는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카토(Marcus Porcius Cato)의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은 '사유의 시간'이다. 사유할 때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앟는 게 아니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 자신과 또는 다른 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의 시도만큼 활동적인 활동이 없다. 그리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 같으나 혼자 있는 게 아니므로 외롭지 않은 것이다.

 

아렌트는 '사유'의 개념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하는데, 그녀에게 사유란 '말 없는 대화'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들로부터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유하면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교제하듯이 자기 자신과 고제를 나눈다. 이 교제의 시간, 즉 사유가 없으면 인간은 '독선'에 빠질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사유란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주장하는 '구원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은 '잘 지내는 것'이다. 사유를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사유는 구원의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아렌트는 그의 저서 <정신의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지 검토하는) 침묵의 교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는 법도 발견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않는 삶은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펼치지 못한다. 그런 삶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몽유병자와 같다."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에서 인용)

 

구원은 절대 맹목으로 인간을 이끌지 않는다. 구원은 '사유'로 인간을 이끈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돌보게 하며, 자기 자신을 반대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잘 지내게 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인간은 구원에 들어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맹목적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유에로의 초대'이다. 그 초대에 응한 자는 '사유'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온다. 구원으로 들어온 '사유하는 인간'을 세상이 어찌 감당하랴.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한나 아렌트에게 모든 현실적 행위의 근원은 죽음에의 조망이 아니라 탄생에의 회고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탄생은 모든 인간의 일회성을 규명하는 사건이다. 유일무이한 사람만이 다시 어떤 전혀 새로운 것을 세상에 줄 수 있다."

(알로이스 프린츠, <한나 아렌트>, 209-210)

 

행위의 근원을 '죽음에의 조망'에 두지 않고 '탄생에의 회고'에 두는 아렌트의 생각은 하이데거의 생각과 정반대에 서 있다.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하이데거의 생각은 '죽음'이 실존의 가장 큰 변수이지만, 그것을 벗어나 생각을 발전시킨 아렌트에게 죽음은 '탄생'에 비하면 그 의미가 탄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아렌트의 생각이 너무도 좋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너무 '죽음에의 조망'에 파묻혀 있어 전혀 '탄생성'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기이한 현상인데, 원래 기독교는 아렌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행위의 근거가 '탄생에의 회고'에 있다. 기독교의 근간은 '부활'이다. 부활은 탄생성의 극치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탄생성에의 회고'에 근거한 행위를 저버리고, 자꾸 '죽음에의 조망'에만 몰두하는 지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될 수 없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부활'이다. , 다시 말해, 아렌트의 용어로 '탄생성'이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희망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것을 안다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진짜 래디컬하게 변할 것이다. 특별히 위에서 아렌트의 생각이 말해주는 것처럼, 탄생을 통해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는 일은 세상에 전혀 새로운 것을 전해주는 '메시아'의 차원으로 인생을 끌어 올린다. 예수의 부활은 탄생을 통한 인간의 일회성을 규명한 사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탄생을 통해 예수는 세상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전해주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복음인가.


Posted by 장준식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

ㅡ 아리우스 논쟁에서 배워야 하는 것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세기는 4세기였다. 303년 대박해(Great Persecution)에서 시작된 격동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과 함께 갑작스럽게 변한 기독교의 운명 속에서 깊어졌다.

 

로마 제국을 손에 거머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옛 종교를 물리치고 새 종교(기독교)를 선택한다. 그러나, 기독교 진영 내에서는 이미 기독론 논쟁으로 인하여 분열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위하여 선택한 기독교 진영이 '교리적 통일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필수라고 느꼈다. 그래서 마련한 자리가 그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325)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공의회였다. 박해를 심하게 받던 시절을 끝내고, 제국의 종교로서 위상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영에서 갈등의 불씨가 된 기독론논쟁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놓고 시작한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대박해로 인하여 실제적인 상처를 입었던 주교들(눈이 하나 없다든지, 다리를 전다든지)은 황제의 초청으로 진행된 니케아 공의회를 참석하여 황제가 베푼 만찬에 참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독교의 평화, 또는 제국의 평화는 기독론 논쟁으로 인하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아리우스 논쟁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격동의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주교 아래의 직급인 장로사제였다. 그만큼 정치적 기반이 강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기독론 이론은 그 당시 동방의 많은 주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 주교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의 주장을 기독교의 정통신학으로 관철시켜려 했다. 거기에 반기를 든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라는 주교인데, 그는 아리우스의 기독론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위험을 넘어 이단적 주장이라고 느꼈다. 알렉산더 주교 밑에서 성장한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주교의 리더십 아래 아리우스 진영과 대립각을 심하게 세운다.

 

우리가 아리우스또는 아타나시우스라는 이름만을 접해서 그 사람의 외모나 됨됨이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묘사하고 있는 그 당시의 문서들을 보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를 갖고 있었고 게다가 달변가였다. 또한 그는 음악애호가였고, 자신의 신학을 시로 읊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것을 볼 때, 아리우스가 어떤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다. 하지만, 아주 똑똑했고, 대담했으며,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둘 사이의 나이 차이는 대략 40년 정도 난다. 이는 나중에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아리우스의 신학을 누르고 정통으로 자리 잡는 데 얼마간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알렉산더 주교와 아타나시우스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아리우스 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그 이후 다른 공의회를 통해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뒤집어지지만, 그래도 니케아 공의회가 맺은 결실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니는 사건 중 하나였다. 아리우스의 주장과 알렉산더 주교의 주장(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라고 해도 되는)이 첨예하게 대립된 가운데,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채택된 용어가 하나 있다. 이는 성경에서 온 용어가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온 용어인데, 그것은 우시아(ousia)’라는 용어였다.

 

한글을 쓰는 한국인이 고대 그리스의 아주 논쟁적인 용어였던 우시아의 개념과 뉘앙스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인데, 플라톤 철학에서도 우시아(ousia)’라는 용어가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시에 그 개념의 모호함 때문에 엄청나게 논쟁을 불러온 용어이기도 하다. ‘우시아는 대체로 5가지의 개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용어이다. 본질(essence), 본성(substance), 실체(reality), 존재(being), 양태(type)이 그것이다 즉, 우시아는 어떠한 개념을 우선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게 하는 용어이다.

 

우시아라는 용어가 가진 복잡성 때문에, ‘우시아의 개념으로 기독론을 설명하려던, 그리고 기독론을 확정하려던 니케아 공의회는 결국 기독교인들 사이에 더 큰 논쟁을 불러왔다. 이미 논쟁적인 용어를 끌어들여 논쟁을 종식시켜보려 했던 주교들의 패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그리스어권(Greek)이었던 동방 기독교와 라틴어권(Latin)이었던 서방 기독교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서게 한 원인 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우시아라는 논쟁적인 그리스어의 용어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기독론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가 무슨 관계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예수, 이 둘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너무 쉽게 기독교 신앙을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예수가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가?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통적으로 갖는 신관은 유일신관(monotheism)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신관이 기독론을 어렵게 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어떻게 우리는 예수를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유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이 되는 것 아닌가? 기독론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독교 신학이고, 기독론에서 출발한 신론은 결국 삼위일체론(the Doctrine of Trinity)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이단으로 쉽게 정죄하지만, 4세기 기독교는 아리우스의 기독론이 훨씬 더 우세했다. 아리우스를 쉽게 정죄하면, 4세기까지의 기독교는 모두 이단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이전의 기독교 신앙을 너무 쉽게 부정해 버리지 안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아리우스는 현대의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옳다고 여긴 주교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도 포함되어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우시아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의 동일본질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homoousios(호모우시오스)’라고 부른다. 호모는 같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우시아는 본질(essenc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가 동일본질이라는 것, ,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이지만, 그 문제에 깊게 들어가보면, 어떤 면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같다고 말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낳게 되는데, 이를 사벨리우스주의라고 부르며, 즉 하나님과 예수가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인격이라든지, 예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이는 곧바로 영지주의적인 생각으로 발전될 수 있고,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하는 본질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 기독론은 양태론(modalism)으로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모드(mode)로 변환되어 이 세상에 나타난 것뿐이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다를 바 없는 신관이다. 제우스가 인간 세계에 나타날 때, 모드를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선성과 유일신관(monotheism)을 지키기 위하여 아리우스가 합리적으로생각한 기독론은 종속론(subordination)’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차등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그리스 철학적인 생각인데, 그리스 철학은 모든 만물이 일자(God)’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God)에게 종속된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여기에서 신학적 진술을 멈춘 게 아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에게 종속된 존재이지만, 이 피조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지니는데,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adoption)’된 존재이고,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고양(promotion)’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도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이 예수 자체의 존재, 또는 예수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신성이 부여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종속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존재는 확실한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더 널리 합리적으로받아들여졌다.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예수가 예배 받으실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의 이러한 신학적 논증을 지지하는 아리우스파와 아리우스의 생각을 이단적 신학이라고 정죄했던 반아리우스 진영(아타나시우스 진영)의 싸움은 4세기 내내 피 튀기는 전쟁으로 치닫았다. 이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계속하여 개입을 했고, 아리우스 진영의 우세와 열세가 번복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리우스 신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의회가 네 번이나 있었고, 그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5번의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공의회가 열릴 때마다 두 진영 간에 음모와 협박과 폭력과 죽음이 발생했다. 두 진영 간에 발생한 기독론 논쟁은 결코 평화롭게 진행되거나 정착된 것이 아니다. 엄청난 정치적 술수와 폭력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게 된다. 왜 이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죽기살기로 싸웠을까?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면, 기독교인들은 대개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나님, , 주님, 말씀, 지혜, , , 진리, 부활, 목자, ,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Mediator), 우리 신앙의 사도, 인생의 대가, 친구 등등.” 모두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아주 은혜로운용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용어들을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고 있는 이 용어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중보자(Mediator)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면 그냥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이렇듯, 해결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을 우리는 안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아리우스 논쟁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유대인 학자 루벤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가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추기를 바랐지만, 실제에 있어 니케아 신조를 신봉하는 기독교인과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열은, 힘 있고 의로운 통치자를 보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고취시키는 친구가 보다 필요했던 사람들 사이의 대략적인 구분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194).

 

루벤슈타인의 진술은 이런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어떠한 신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느냐에 따라서 신학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종교의 이름으로 하는 싸움은 진리에 대한 싸움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종교의 이름으로 싸움터에 나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리를 전유하는 인간들의 방식은 진실하지않다. 인간은 자신의 뜻,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주 쉽게,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리는 방향으로, 또는 자기 자신의 죄를 가리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신학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현대 한국 개신교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반대도 같은 논리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앙관은 복음주의로 불리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면서 현대 복음주의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발흥되었는지에는 무지하다. 현대 복음주의의 뿌리는 복음서에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주의를 헷갈려 하는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뿌리는 근대의 자본주의에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기독교화가 바로 현대 복음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현대사회에 낳고 있는 문제점(병폐)을 한국 개신교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개신교는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못된 짓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간의 점유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는 한국 복음주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하는데, 자본주의의 요소를 받아들여 발전한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회성장, 무리한 건축, 선교지 확장 등은 공간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즉 시장(공간)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들이다. 교회 세습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의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한국 복음주의 교회들도 교회 세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온갖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부정함을 가리려면,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복음주의 교회권에서 결사 반대하는 동성애 문제는 진리 논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추악한 죄를 가려보려는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한다고 말하며 성서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장한다. 그러면서 성경에 죄라고 말하고 있는 다른 모든 죄의 항목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면서 산다. 그들은 동성애 문제를 들고 표면적으로 격렬하게 싸우면서 자신들의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는 투사인 것처럼 자기를 포장한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는 의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추악함을 가린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갇히게 되면, 자신이 진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자신의 싸움은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또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진리를 남용(abuse)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리우스 논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이라도 반드시 배웠으면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기의 죄를 가리는 수단이 될 뿐, 자기에게만 이익이 될 뿐,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져오고 죽음을 가져온다면,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한 인간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렇게 불쌍한 한 인간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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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설교자의 정신성 정신성의 심포니]

 

우리는 대개 'spirituality' '영성'이라고 번역한다. 그렇다 보니, 영성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역의 잘못이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신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 저 친구 정신(spirit)이 살아 있네!' 그런 것처럼, spirituality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기독교의 'spirituality', 그래서, 기독교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정신성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신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사람은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여기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보는지, 그 사람의 생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 또는 그 사람의 작품 등은 모두 그 사람의 '정신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기교만 살아 있는 작품을 내놓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정신성이 깃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작품은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예 없다.

 

설교는 설교자의 정신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정신성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실패하면 설교는 설교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정신성이 결여되면 그 설교는 그냥 '아무말 대잔치'가 될 뿐이다. 또는 듣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에 머물 뿐이다. 대개 정신성이 없는 설교자는 입담으로 청중들을 웃기려고 할 뿐이다. 정신성의 빈약함을 입담으로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정신성'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한다. 그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설교는 정신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말잔치일 뿐이다.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신학교육은 목회기술을 가르치면 안 된다. 기술은 목회현장에서 배워도 된다. 신학교육의 목표는 기독교의 정신성을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좋은 신학교와 나쁜 신학교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난다. 그 신학교가 정신성을 뚜렷하게 갖도록 교육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의 강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펼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결국 신학교의 실패일 수 있다. 신학교가 목회 기술을 가르치는 데만 급급했는지, 아니면 정신성을 키워 설교자가 강단에서 그 정신성을 설교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그리고 목회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가르쳤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신학교육은 더욱더 정신성을 훈련하고, 그리고 목사 후보생들이 스스로 그러한 정신성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성도의 입장에서 설교를 잘 듣는 방법은 설교 안에 담긴 정신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정신성이 담겨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아무 의미 없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아무말 대잔치이거나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정신성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 정신성이란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성과 분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답습하지도 않는다. 설교자는 성경의 정신성을 전달하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도록 정신성을 새롭게 구성하여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방법은 그 설교자의 정신성을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다.

 

설교 시간은 사실 굉장한 시간이다.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성경의 정신성과 설교자의 정신성, 그리고 청중의 정신성이 한 데 어우러져 정신성의 심포니를 연주하기 때문이다. 실로, 설교 시간은 웅장한 한편의 교향악이다. 정신성의 교향악.

 

가장 실망스러운 설교자는 전혀 정신성을 찾아볼 수 없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이고, 가장 실망스러운 청중은 설교자의 정신성을 전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청중이다. 이 두 부류의 설교자와 청중이 만나는 예배는 정신성이 사라진, 죽은 예배일 뿐이다. 그야말로 종교모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성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예배를, 설교시간을, 늘 사모한다.


Posted by 장준식

[강신주 아이러니]

 

강신주의 책을 읽으면 곳곳에 기독교 혐오가 배어있다. 그의 주장이 철학책 좀 읽는 한국의 교양인(또는 지식인)들의 기독교 혐오에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다보면 정말로 아이러니한 것이 그가 주장하는 자유니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모두 기독교의 가치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소유의 형식에 대하여 고민할 때 했던 말을 보면 그의 주장이 곧 기독교의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 형식의 극복을 고민해야 해요. 과연 소유 형식이라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해요. 예컨대 우리는 토지를 소유하잖아요. 그런데 과연 인간이 땅을 가질 수 있는 걸까요? 땅이 인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수명이 짧은 인간이 수명이 긴 것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강신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447)

 

그의 통찰은 매우 좋다. 전복적이고 변혁적이다. 그런데, 그가 위에서 말한 땅의 소유에 대한 성찰은 이미 기독교 신학에서 오래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했던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땅에 대한 신학은 한마디로,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이다. '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래 정신이다. 많은 이들이 '토지공개념'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주창한 개념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토지 공개념은 성경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자기의 주장이 기독교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기독교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고 있을까? 그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고 밝힌 바 있다. 출판사 편집자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좋은 책을 낼 수 있을 지 불신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주변에 기독교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줄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연세대학교 출신인데, 학교를 다니면서 철학공부, 문학공부, 역사공부는 많이 한 것 같은데, 신학공부는 전혀 안 한 것 같다. 연세대학교는 신학을 포함해 모든 분야의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을 몇 안 되는 학교인데도 말이다.

 

그는 인문학 강의를 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수업을 한다는 데, 연번에 걸친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강의를 들은 어느 한 신사가 마지막에 명함을 주며 이런 말을 했단다. '선생님의 모든 얘기가 모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을 전한 신사는 '목사'였단다. 그 말을 들은 강신주는 '내가 강의를 잘못했구나, 어쩌다가 기독교의 틀 속으로 내 강의가 들어가게 된거지?'라고 생각하며, 종교비판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강신주의 인문학적 성찰은 정말 좋다. 많은 이들이 이 정도로만 사유를 해도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는 철학적 사유는 풍성하지만 신학적 사유가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그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결국 신학적 사유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런지, 강신주가 신학을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의 곁에 기독교 신학을 잘 전해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그 일을 해보고도 싶으나, 나는 이역만리 타지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일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의 삶 가운데, 신실한 기독교인들과의 교제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인문학적 사유의 아이러니가 잘 극복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강신주는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지금 같이 있으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원칙이 좋은 게 오늘만 있잖아요. 내일 되면 또 오늘이라니까요.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에요. 반면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면 내일 돼고 또 내일이 있는 거에요. 계속 그렇게 가는 거에요. 그 극단이 기독교라고요. 마지막에 보자는 거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우리에게 천국은 있다, 똑같은 거에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고 현재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니체는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기독교인이라고 봐요. 자신의 현재 삶을 부정하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거죠.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은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는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자본 비판해놓고는 교회 나가면 말짱 도루묵인 거에요.....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 인문학자는 반드시 기독교를 비판해야 해요.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에요." (강신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409-410)


강신주가 말하는 '기독교'는 아마도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복음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자본과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아쉬운 점은 강신주가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으며, 기독교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신주는 기독교 종말론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강신주가 아는 기독교는 교조화된 기독교, 서구사회에서 권력에 의해 이용당한 기독교만 아는 것 같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 깊이 들어가 기독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기독교가 드러내고 있는 '현상'들을 통해 기독교를 경험하고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라는 강신주의 언급은 경솔한 것이다. 그가 기독교를 부정해서 경솔한 게 아니라, 기독교가 인류문화에 이바지한 엄청난 역사를 너무도 쉽게 한 마디로 부정해서 그런 것이고, 기독교 신학이 가진 엄청난 우주변혁적인 힘을 그가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미래만을 바라보게 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의 힘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응집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현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상승시킨다는 데 있다. 인문학자는 현재만을 살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산다. 현재만을 사는 사람의 삶과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사는 사람의 삶 중,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로울까.

 

강신주가 기독교를 비판하려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비판하면 안 된다.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기독교를 비판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 내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담론은 계속 생산되어 왔다. 그 역사를 모르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강신주는 기독교를 제대로 비판하는 책을 내서, 사람들이 더이상은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책이 어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명제 중 하나는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인데, 그가 이해를 추구하고,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이 깊은 진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자유와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기독교를 사랑하지 않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가 기독교를 얼마나 멋지게 비판해낼지는 미지수다.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에요"라고 강신주는 말하지만, 국문학(현대문학) 공부하고 인문학도로서 목사까지 된 나는 남루한 사람인가? 목사까지 된, 남루한 사람 중에 괴수인 나는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서적이 출간되기를 무척이나 기다린다. 마치, 칸트가 루소의 "에밀"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처럼.

Posted by 장준식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신이 살아있던 중세 질서가 무너지고, 신이 죽은 사회를 근대(modern)라 부른다. 의사처럼 신에게 공식사망선고를 내린 것이 니체였다. "신은 죽었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니체의 발칙한 이 신의 사망선고가 거슬리겠지만, 한국교회가 그토록 자신의 신앙을 동일화시키는 '복음주의'는 사실 근대의 산물이다. , 한국의 복음주의는 겉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선포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것을 선포한 시대를 바탕으로 발달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복음주의가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괴물이 된 것이다. 


로크, 홉스, 루소를 거쳐 다듬어진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은 신이 죽은 사회에서 인간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어떻게서든 잘 살아보려고 한 처절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신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말해 왕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혼란을 극복하고 인간들끼리 평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전쟁터에 내몰린 인간들끼리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로 죽이지 않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죽지 않기 위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은 기꺼이 자신이 가진 '권리' '계약'이라는 것에 내어놓고, 그 계약 안에서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며 살아가려는 것이 근대인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 , 신이 죽은 상황에서 인간들끼리 어떻게든 생명을 보듬으려는 생각은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은 신이 죽은 세상에서 500년 정도를 산 것이다. 


신이 죽은 상황에서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성'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은 신이 살아있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신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신앙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은 유용한 수단은 '이성'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500년간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500년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니,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없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인간이 모두 컨트롤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인간성은 말도 못하게 파괴되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 있던 길은 모두 지워졌고, 삶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말할 수 없는 허무함에 인간들은 쓸쓸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 '물질()'에만 집착할 뿐,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철학의 과제, 신학의 과제는 신이 죽은 세상에서 어떻게 인생들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할 것인가이다. 다시말해, 어떻게 질서를 다시 재편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그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정치철학과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을 다시 소환하여,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세계관, 즉 신이 살아있는 세계를 다시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인간에게 신을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면, 그래서 신을 죽였다면, 이제 인간에게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을까? 근대를 지나, 후기근대(포스트모더니즘)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살기위해 다시 신을 살려야만 하는 위기에 놓여있다. 


유발 하라리는 신을 되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 둘 다 어려운 문제이다. 죽은 신을 되살리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고, 인간이 그냥 신이 되어버리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 정말 위기인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을 못하고 있는 이 시절,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에서 올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절실하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시대의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완전 다른 차원의 시간이 인류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 기독교의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근대를 지나오며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을 죽이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여 대부분의 인류가 기독교를 등진 이 상황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이 어떻게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는 불투명하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철저하게 배타적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마지막 소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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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류의 끊임없는 싸움]

 

체제 안에 들어가면 모두 '보수화'가 된다. 체제에 들어가면 인간은 안 보이고, 체제를 보장해주는 초월적 가치, 자본, 체제자체만을 보게 된다. 인간의 영혼도 몸이라 불리는 체제에 들어가면 보수화가 된다. 그런 현상을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 부르는 것이다. 몸에 갇힌 영혼도 보수화되면 몸을 착취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 자기집중이다.

 

철학과 종교는 이렇게 인간이 보수화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억압하고 소유하고 소비시키는 그 보수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 좋은 철학과 훌륭한 종교는 체제에 가두어진, 또는 체제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인간을 해방시키지만, 나쁜 철학과 형편없는 종교는 인간을 교묘하게 착취하면서 체제를 공고히 한다.

 

키아누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매트릭스>는 그 현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 매트릭스 체제에 갇힌 인간은 자신들이 실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체제가 조작한 가상현실에 불과하다. 가끔 일어나는 버그 때문에 현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내 스미스 요원에 의해 그러한 의심은 제거된다.

 

매트릭스에 갇힌 그들의 현실이 조작된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매트릭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철학과 종교의 기능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체제 바깥에서 조작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조작된 현실의 실상을 깨달으면 영화의 니오(Neo)처럼 체제(매트릭스)를 빠져나올 수 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다.

 

그리고 구원의 순간을 경험한 이들은 진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처럼 매트릭스에 갇힌 자들을 구하는 일, 그 미션에 자기를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구원은 사명으로서의 깨어남, 다시 태어남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다. 매트릭스를 만들어 그 체제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으려는 자들과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찾아주려는 사람들의 싸움. 자기 자신의 몸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예수가 몸을 버려 세상을 구원한 것은 자기 구원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구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처럼 몸을 버려 자기를 구원하고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결단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체제에 묶여 자유를 잃은 노예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무너진 공동체, ?]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오는 거죠."

(강신주,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중에서)

 

1997 IMF의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한국 사회는 극속도로 붕괴되었다. 여기서 붕괴는 '공동체성'을 말한다. 본격적 경쟁체제 속에 돌입한 한국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우위'에 올라섰을지는 몰라도, 공동체성이 처참하게 붕괴되어 자본()만 있고 사람이 없는, 동물사회보다 못한 사회가 되었다.

 

사회 안에서 사회와 공존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이 붕괴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교회 자체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 흐름에 휩쓸려 버렸기에 교회의 공동체성은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의 메시지는 대부분 '위로'의 메시지다. 사람들도 그러한 메시지를 듣고 싶어한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경쟁에서 이길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경쟁에서 졌지만 괜찮다는 메시지, 이 둘 중 하나의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공동체성을 무너뜨리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주범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과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영혼까지 잠식했다는 뜻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인문학자도 이러한 통찰 아래, 어떻게 하면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여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설교자들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향해 어떤 저항을 하며 어떻게 공동체성과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근대의 자율적 이성은 자본주의를 내면화시킴으로 거대한 악으로 변이를 일으켰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처럼 한강을 자유롭게 거닐던 물고기(자율적 이성을 지닌 인간)가 화학물질(자본주의)을 먹음으로 한강에서 괴물이 탄생한 것과 같다. 그 괴물을 물리친 것은 경쟁이 아니라 결국 '가족애(사랑)'이었다.

 

목사들은 설교 강단에서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공동체'는 누구를 위한 공동체인가. 말만 공동체이지, 청중들(교인들)을 자기의 목적에 따라 순종시킬 바보 같은 공동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그게 사랑인가? 그것은 자기의 경쟁상대(다른 교회/교단/목사)를 물리칠 전략 중의 하나일 뿐 아닌가. 그렇게 교회를 키워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로서 영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려는 것 아닌가.


사랑은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특별히 목사들은) 사랑을 수단 삼아, 경쟁에서 이기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검은 속내를 내려놓고, 공동체성과 인간성을 해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도끼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고 모든 불신을 물리치는 사랑을 살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철학과 신학의 긴급한 과제]

ㅡ 근대성 넘어서기

 

근대성의 키워드는 '자유'이다. 그래서 근대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여기서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인간 중심성'이다. 이러한 근대성을 나쁘게만 보면 안된다. 근대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봉건사회'에 살며,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발견하고, 개인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그당시 핵폭탄같은 선언이었다. '자아'가 생각하는(사유하는) 주체로서 모든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자아'는 지식의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구사회에서는 '' 또는 '성경'이 그 토대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개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은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언제나 어딘가에 종속되어 살았다. 그래서 그때를 봉건사회라 부르는 것이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를 '토대주의(foundationalism)'이라 한다. 데카르트 이후, 그 토대는 생각하는(사유하는) 인간의 자아(cogito)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아'는 몸, 역사, 전통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아'이다. 인간을 매우 긍정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근대(modern)와 후기근대(post-modern)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자유'가 무한정 주어져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 자유를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지구촌 곳곳의 장소와 사람들이 있지만, 경제가 발전되고, 적어도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를 향유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과잉' 문제를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의 자유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었다. 특별히, 서구사회는 기독교의 존재가 너무 큰 존재였기에,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개인은 교회(또는 신)라는 거대한 힘에 종속되어 살았다. 가톨릭의 7가지 성사는 인간이 '교회(또는 신)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룩한 성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러한 '종속성'에 도전장을 던진 사건이고, 그 이후 서구사회는 '자유'를 위한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근대를 이루고, 그 근대의 심화라고 불리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우리는 진입해 있다.

 

동성애 문제를 ''의 문제로 접근하는 (보수) 기독교의 시각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의 문제라기 보다, '근대성'의 문제이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가 'cogito'가 된 근대 이후의 인간은 '자아'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규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순수한 자아(또는 '누스'(마음)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몸, 역사,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 , 내 몸은 '남성'을 가리키고 있다 할지라도, 내 자아(누스)가 나를 여성으로 규정하면, 몸은 비록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내 자아가 나를 '여성'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나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를 간과하면서 동성애 문제를 ''의 문제로 논의하는 것은 맹목적인 '정죄'에 불과하다. 이는 근대성을 형성하면서 획득하게 된, '자유'를 부정하게 되는 '역린'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유의 과잉' 문제로 인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환경에서 전방위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요즘,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걸음을 내딛으려면, 인간이 근대성을 구축하면서 토대로 삼았던 'cogito'의 문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cogito를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삼은 것이 옳은 것인가?

 

현대 철학과 신학은 이것을 질문하고, 이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답을 내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한마디로, 요즘 철학과 신학은 '근대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를 통하여 '자유'를 획득했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인다면, 우리가 얻어서 누리고자 했던 '자유'란 무엇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가 생각한 ', 역사, 전통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아', 즉 독립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 가능한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복잡하고 난해한, 그리고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바디우나 지젝 같은 철학자도 '사도바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급진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운동을 벌이는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전통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자아를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삼으며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간 근대의 인류는 마치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같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운운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정죄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근대성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의 고착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자아'만 있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놓여 있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도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 도전 안에서 인류는 계속하여 분열을 경험할 것이고, 고통을 떠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 던지고, '독립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을 토대로 삶을 꾸려 나가려는 인류의 삶은 탕자가 경험했던 '허랑방탕한 삶'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근대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고 고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 안에서 힘을 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톰(a-tom)의 시대, 우리는 모두 우주소년 아톰이다

 

우주소년 아톰. 어린 시절 손에 땀을 쥐며 보던 만화영화다. 아직까지도 몇몇 장면은 눈에 선하다. 우주소년 아톰은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의 제목이고, 원래 제목은 ‘Astro Boy(우주소년)’이다. 미국에 온 후, 어린 시절 TV에서 재밌게 보던 미국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우주소년 아톰 외에도 서부영화 내 이름은 튜니티를 찾아보았다. 영어 원제목은 ‘my name is Trinity’였다. 트리니티를 튜니티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A 특공대도 찾아보았는데, 원제목은 ‘The A-Team’이다. ‘전격제트작전‘A Knight Rider’이다. 비디오 씨디를 구입하여, 모두 다시 보았다. 지금 봐도 재밌다.

 

아톰(atom)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주소년이 아톰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에너지원이 등뒤에 건전지처럼 끼워넣는 원자/핵연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아톰(atom)’은 라틴어로 ‘individuum’으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영어의 ‘individual’이 나왔고, 이것을 한국어로 개인이라 번역한다.

 

중세를 지배했던 철학은 실재론(realism)이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핵심 개념으로서, 모든 만물은 실재하는 실체(substance)의 모상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보편을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은 그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재론이 신학에 적용되면,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최고의 실체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실체의 보이는 형상이므로, 모든 인간이 본받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된다.

 

중세의 이러한 실재론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 유명론(nominalism)이다. 유명론은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사상으로서 실체보다는 개체에 집중한다. 실체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개체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은 이렇게 개체에 집중하는 유명론의 철학 바탕 위에 발생한, 사고의 전환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개체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인간 세상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개체, 즉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이 모든 규범의 중심에 올라서게 된 시대를 우리는 근대라고 부른다. 근대는 한마디로, ‘개인을 발견한 시대이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자기 바깥에서 오는 전통이나 성서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규범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시작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규범으로 자기 바깥의 것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기 안에 있는 것, 즉 이성이 삶의 규범이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그래서 전통이나 성서가 아니라 이성이 되었다. 이성이 왕이 되었다. 근대 이후의 서구 사상은 이성의 역사이다. 이성과 함께 웃고 울었다.

 

원자의 개념을 처음 생각한 그리스 철학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이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고안한 원자(atom)’이라는 개념이 거의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근대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의 뜻을 가진 원자는 이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인간 존재, 개인의 개념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개인이 발견된 근대 이후, 우리는 진짜로 아톰(atom)’이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톰이다.

 

아톰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개인에게는 주체, 권리, 인권 같은 것을 바탕으로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 서구 사상은 아톰(개인)이 된 인간 개체가 다른 아톰과 어떻게 잘 어울려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성찰로 발전했다. 우주소년 아톰이 힘이 센 것처럼, 한 명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자신의 주체와 권리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영역(property/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힘과 힘은 잘 조절되지 않으면 충돌하여 큰 불상사를 발생시킬 수 있으므로, 아톰과 아톰이 어떻게 공멸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롤스의 자유주의사상이나 하버마스의 공론장개념은 모두 그러한 노력들이다.

 

요즘 소통이 강조되는 이유는 아톰의 시대에 아톰과 아톰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권리를 바탕으로 무한한 자유를 소유한(또는 소유해가는) 인간 개체는 이제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힘을 정의롭게 쓰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마치, 집에 자동차가 하나 있고 그 자동차는 가장만 운전할 줄 알면 되는 시대에서 각 사람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어 각 사람이 자동차 운전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과 같다.

 

자유를 손에 쥔다는 것, 권리를 손에 쥔다는 것은 사람에게 칼을 쥐어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이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쓰일지 무척이나 걱정되는 상황이다. 손에 쥐어진 칼을 정의롭게쓸려면 성숙이 필요한데, 만화영화에서 우주소년 아톰이 자신이 지닌 힘을 정의롭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아톰들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자유라는 칼, 권리라는 칼을 정의롭게 쓰도록 성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의 발견은 좋은 것이다. 개인은 충분히 발견되어야 한다. 모든 삶의 결정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그 결정권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자기 결정권(자유)을 빼앗으려 한다면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아톰들은 각자가 충분한아톰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톰들은 동시에 책임감을 철저하게 가져야 한다. 이것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아톰이 아니다. 그냥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잘 해내려면 갖춰야 할 덕성(virtue)’이 참 많다. 그래서 아톰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우아하기도 하지만 피곤하기도 하다. 지치지 않기를. 아톰의 힘과 우아함을 잃지 않기를.

Posted by 장준식

개신교의 공의회 기능 상실과 게으른 신앙

ㅡ 보편 신앙을 위하여

 

캐슬린 얀센 화이자 백신 연구 개발 책임자는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제 우리는 이 백신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제대로 작용하는 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 역시오늘은 과학과 인류에게 멋진 날이라며 성과를 자축했다.

(화이자 "임상 중인 백신, 90% 넘게 효과 있다"는 기사 중에서)

 

종교사상은 과학과 달라서 검증이 잘 안 된다. 컨트롤 타워가 없다. 그래서 누가 말하는 어떠한 종교사상이 세상으로 내보내도 되는지, 제대로 작용하는 지, 세상에 내보내지기 전에 검증할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이 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최대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대개 어떠한 사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없다. 어떤 원류(source)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확인해 가다 보면, 그 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유효한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이 공부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다. 마침 성경에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의심을 하면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종교권력은 그러한 종교문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 주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악으로 추락하고 만다.

 

종교사상, 또는 신앙이 건전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신학은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펼쳐왔다. 이러한 생각에 꽃을 피운 신학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다. 특별히 아퀴나스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가톨릭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 특별히 아퀴나스의 신학에 따라 이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가톨릭 신학은 굉장히 이성적이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말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사상의 보편성은 공의회를 통해서 확보되어 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신학자들이 모여서 어떠한 신학적 이슈를 놓아두고 공방을 벌인 뒤, 공의회는 서로 합의된 신학사상을 발표했다. 공의회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 기독교 정통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 기독론 논쟁은 결국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삼위일체론으로 귀결되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의 논쟁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삼위일체론의 핵심사항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확립한데 있다. 공의회를 통해서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는 정죄되고, 이에 맞서 동일본질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기독교 신학은 동일본질을 정통신학으로 공표하며 그 신학을 유지해 왔지만, 그렇다고 역사에서 유사본질을 주장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여 바이러스를 퇴치했다고 해서 그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늘 존재한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몸상태와 백신이 있는지 없는지 이다.

 

종교개혁은 보편을 앞세워, 또는 보편을 남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횡을 휘둘렀던 가톨릭의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탄생한 개신교신학(Protestant Theology)은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지만, 결국 이것은 이성과 보편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신학사상을 검증하여 무엇이 건전성을 확보하고 있는 신학인지 확인해 주는 장치인 공의회 기능을 상실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인들은 은총과 믿음을 통해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긴 했으나, 은총과 자유를 통해 내가해석한 성경의 내용이 건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게 되었다.

 

개신교인들은 해석이라는 말을 낯설어 한다. 성경 말씀을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반문하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에 해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무엇이든지 개념화시켜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개념화시키는 작업이 이성이고, 어떠한 것을 이성이 올바르게 개념화시켰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렇기에,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개념화시킨 하나님 존재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없으면, 악마를 하나님처럼 잘못 개념화시켜 놓고, 그것이 참 하나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결국 생명을 죽이고 만다.

 

요즘 개신교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신뢰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보편을 거부하고 개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지만, 적어도 개신교 안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더불어 공의회 기능 상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 즉 보편성을 확보한 것을 신뢰하면서, 왜 유독 신앙에 대해서는 보편성을 묻지 않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우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고 있으며, 신학 또는 신앙의 보편성을 따질 만큼 지성이 없으며, 보편성을 따지는 것을 귀찮아 하는 게으른 신앙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결국 잠언서의 지혜가 맞는 것 같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할 개신교인들이 누구보다 게으르게 살고 있다. 그래서 망하고 있다.

그런데 너 게으른 자야, 언제까지 잠만 자겠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겠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일손을 쉬어야지!” 하겠느냐? 그러면 가난이 부랑배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거지처럼 달려든다. (잠언 6:9-11/공동번역 개정판)

Posted by 장준식

[어거스틴 - 사랑이 구원이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랑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8.8.12)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자(actor of loving) '자기 자신'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발생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현존하신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사랑을 할 줄 안다.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이유는 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대단하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고, 그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한다.

 

어거스틴은 인간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다. 이 세상의 다른 어느 피조물보다도 인간 안에 하나님이 숨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는 삶,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말했던 '사색적인 삶'은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된다.

 

하나님(또는 하나님 나라)는 무지개 너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를 자기사랑/교만(self centered-ness/amor sui)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향하는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더 가로막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밖(이웃/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구원론적인 정향(orientation)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사랑이 발생하는 곳에 구원이 발생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뜻과 같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래도 인간이 아직까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해서 구원이 영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그 구원의 경험은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다.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적 현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1.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기후변화)

2. 가족(공동체)파괴와 가치의 물신화

3. 인간의 존엄성 하락 (자기 상품화)

4. 모든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이 시장에 종속

5. 불평등의 심화

6. 민주주의 후퇴

 

루소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현실화된 요즘, 우리는 인간의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짐승의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원자화된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서로 못 믿는 불신사회가 되었으며,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남으려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자기 자신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가다듬는데 여념이 없다. 모든 생활의 영역은 시장이 되었고, 그 무한 경쟁의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다. 최고의 상품, 또는 소비자들이 찾는 상품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품의 조건에 맞추어 자기를 조각한다.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선 상품이 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외모와 스펙이므로, 성형수술과 각종 자격증 시험이 만연한다. 소셜(social)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축소되었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대학교에서는 동아리 모임도 그렇게 재편되었다. 실용성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종교생활은 심신안정을 위한 취미생활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고,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위로와 복에 대한 간구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 이외의 다른 메시지를 전하면 뭇매를 맞기 일쑤다. 가뜩이나 삶 속에서 살기 퍽퍽한데, 교회에 와서까지 힘든 일 하기 싫고, '정의로운 메시지'를 듣는 것이 불편하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시장의 노예가 되었다. 아주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어디다가 하소연할 곳도 없다. 자기 자신의 못남을 탓할 뿐이다. 믿을 건 내 몸뚱어리 하나뿐이다. 그래서 건강이 최고다. 집 한 켠의 선반에 넘쳐나는 건강보조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밥 이외에 먹어야 할 게 너무도 많다.

 

우리는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왜 삶의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거부하지 못하고, 거기에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한 '자유'의고,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좋은 체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선언이 있은 지 불과 30년만에 우리는 바로 그 체제 내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의 어느 한 체제를 '이상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상의 도성과 하늘의 도성을 구분하여, 그 두 도성이 변증법적으로 공존하는 이 세계에 대하여 말한 것은 굉장한 통찰이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신학이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죽음 같은 고통을 가져다 주는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모든 것이 블랙홀 같은 시장에 잠식 당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는, 이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실제적인 힘(power)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