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정신성 정신성의 심포니]

 

우리는 대개 'spirituality' '영성'이라고 번역한다. 그렇다 보니, 영성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역의 잘못이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신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 저 친구 정신(spirit)이 살아 있네!' 그런 것처럼, spirituality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기독교의 'spirituality', 그래서, 기독교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정신성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신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사람은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여기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보는지, 그 사람의 생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 또는 그 사람의 작품 등은 모두 그 사람의 '정신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기교만 살아 있는 작품을 내놓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정신성이 깃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작품은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예 없다.

 

설교는 설교자의 정신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정신성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실패하면 설교는 설교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정신성이 결여되면 그 설교는 그냥 '아무말 대잔치'가 될 뿐이다. 또는 듣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에 머물 뿐이다. 대개 정신성이 없는 설교자는 입담으로 청중들을 웃기려고 할 뿐이다. 정신성의 빈약함을 입담으로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정신성'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한다. 그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설교는 정신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말잔치일 뿐이다.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신학교육은 목회기술을 가르치면 안 된다. 기술은 목회현장에서 배워도 된다. 신학교육의 목표는 기독교의 정신성을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좋은 신학교와 나쁜 신학교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난다. 그 신학교가 정신성을 뚜렷하게 갖도록 교육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의 강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펼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결국 신학교의 실패일 수 있다. 신학교가 목회 기술을 가르치는 데만 급급했는지, 아니면 정신성을 키워 설교자가 강단에서 그 정신성을 설교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그리고 목회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가르쳤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신학교육은 더욱더 정신성을 훈련하고, 그리고 목사 후보생들이 스스로 그러한 정신성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성도의 입장에서 설교를 잘 듣는 방법은 설교 안에 담긴 정신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정신성이 담겨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아무 의미 없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아무말 대잔치이거나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정신성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 정신성이란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성과 분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답습하지도 않는다. 설교자는 성경의 정신성을 전달하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도록 정신성을 새롭게 구성하여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방법은 그 설교자의 정신성을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다.

 

설교 시간은 사실 굉장한 시간이다.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성경의 정신성과 설교자의 정신성, 그리고 청중의 정신성이 한 데 어우러져 정신성의 심포니를 연주하기 때문이다. 실로, 설교 시간은 웅장한 한편의 교향악이다. 정신성의 교향악.

 

가장 실망스러운 설교자는 전혀 정신성을 찾아볼 수 없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이고, 가장 실망스러운 청중은 설교자의 정신성을 전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청중이다. 이 두 부류의 설교자와 청중이 만나는 예배는 정신성이 사라진, 죽은 예배일 뿐이다. 그야말로 종교모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성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예배를, 설교시간을, 늘 사모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