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한나 아렌트에게 모든 현실적 행위의 근원은 죽음에의 조망이 아니라 탄생에의 회고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탄생은 모든 인간의 일회성을 규명하는 사건이다. 유일무이한 사람만이 다시 어떤 전혀 새로운 것을 세상에 줄 수 있다."

(알로이스 프린츠, <한나 아렌트>, 209-210)

 

행위의 근원을 '죽음에의 조망'에 두지 않고 '탄생에의 회고'에 두는 아렌트의 생각은 하이데거의 생각과 정반대에 서 있다.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하이데거의 생각은 '죽음'이 실존의 가장 큰 변수이지만, 그것을 벗어나 생각을 발전시킨 아렌트에게 죽음은 '탄생'에 비하면 그 의미가 탄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아렌트의 생각이 너무도 좋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너무 '죽음에의 조망'에 파묻혀 있어 전혀 '탄생성'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기이한 현상인데, 원래 기독교는 아렌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행위의 근거가 '탄생에의 회고'에 있다. 기독교의 근간은 '부활'이다. 부활은 탄생성의 극치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탄생성에의 회고'에 근거한 행위를 저버리고, 자꾸 '죽음에의 조망'에만 몰두하는 지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될 수 없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부활'이다. , 다시 말해, 아렌트의 용어로 '탄생성'이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희망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것을 안다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진짜 래디컬하게 변할 것이다. 특별히 위에서 아렌트의 생각이 말해주는 것처럼, 탄생을 통해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는 일은 세상에 전혀 새로운 것을 전해주는 '메시아'의 차원으로 인생을 끌어 올린다. 예수의 부활은 탄생을 통한 인간의 일회성을 규명한 사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탄생을 통해 예수는 세상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전해주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복음인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