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구원]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을 다음의 글로 끝맺는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카토(Marcus Porcius Cato)의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은 '사유의 시간'이다. 사유할 때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앟는 게 아니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 자신과 또는 다른 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의 시도만큼 활동적인 활동이 없다. 그리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 같으나 혼자 있는 게 아니므로 외롭지 않은 것이다.

 

아렌트는 '사유'의 개념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하는데, 그녀에게 사유란 '말 없는 대화'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들로부터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유하면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교제하듯이 자기 자신과 고제를 나눈다. 이 교제의 시간, 즉 사유가 없으면 인간은 '독선'에 빠질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사유란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주장하는 '구원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은 '잘 지내는 것'이다. 사유를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사유는 구원의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아렌트는 그의 저서 <정신의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지 검토하는) 침묵의 교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는 법도 발견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않는 삶은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펼치지 못한다. 그런 삶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몽유병자와 같다."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에서 인용)

 

구원은 절대 맹목으로 인간을 이끌지 않는다. 구원은 '사유'로 인간을 이끈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돌보게 하며, 자기 자신을 반대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잘 지내게 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인간은 구원에 들어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맹목적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유에로의 초대'이다. 그 초대에 응한 자는 '사유'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온다. 구원으로 들어온 '사유하는 인간'을 세상이 어찌 감당하랴.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