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발견]
서구 사회에서의 '자유의 과잉' 문제로 촉발된 자유주의자들(Liberalism)과 공동체주의자들(Communitarianism)의 논쟁은 '개인이 중요하냐 공동체가 중요하냐, 개인이 먼저냐 공동체가 먼저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하면 더 정의롭게 성취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 인간/사회적 인간'의 명제를 논한 이후 인간은 공동체성을 떠난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가 아니라 공동체와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연고적 자아(encumbered self)'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지만 서구사회는 국가와 종교의 권력에 의해 '개인'이 실종된 역사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을 그것들로부터 구원할 것인가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그 시작점을 종교개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구사회는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로크, 홉스, 그리고 루소를 통해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는 '개인'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자기(self)'를 구성하는데 최고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서구사회는 '개인의 발견'을 통해 권리와 인권의 개념을 정립해 나간다.
모더니티와 포스트 모더니티는 개인의 발견과 그것의 심화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개인의 발견은 개인에게 '자유'를 넘치도록 가져다 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과잉되어서 사회적 문제를 낳기 시작했다. 그 시점을 1980년대로 본다. 바로 그때 등장한 철학이 공동체주의자들의 철학이다. 이들은 자유의 과잉이 생산해내는 사회적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고, 그 과잉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자유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 철학을 전개시킨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에는 종교개혁 이후에 계속하여 발전한 서구의 '합리적 이성', 또는 '자율적 이성'의 사상이 깊이 배어 있다. 자유주의 진영의 수장 격인 존 롤스의 '정의론'도 서구사회의 시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싸워서 성취한 '합리적 이성, 자율적 이성'의 바탕 위에서 전개된 사상이다. 즉, 개인의 권리와 인권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회에서의 정의란 어떠한 모습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 '낙태법' 등 개인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법 제정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다르게 하는 진영 간에 갈등과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을 극렬히 반대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극심한 반대를 할까.
혹자는 이것을 '신앙의 문제' 또는 '성경 해석의 문제'라고 말할 지 모르나, 그러한 생각은 매우 귀여운 생각이다. 차별금지법 문제를 신앙의 옳고 그름 문제로 풀어가는 사람들은 교권주의자들이거나 공부를 덜 한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권리와 인권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서구사회는 '자유의 과잉'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반해, 한국사회는 '자유의 결핍'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즉, 한국사회는 '개인의 발견'이 아직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사회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과잉 문제로 촉발된 서구사회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은 한국사회에서는 부적절한 논쟁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다. (한국에서 나온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 대한 논문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한국은 유교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공동체'를 강조하는 측면이 매우 크다. 그러나 한국에서 강조하는 공동체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말하는 공동체의 의미와 확연히 다르다. 한국의 공동체는 집합주의(collectivism)의 의미를 띤다. 공동체주의자들이 말하는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합리적 이성과 자율적 이성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의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상태에서의 공동체가 아니다. 개인이 상실된, 공동체 또는 가부장제나 국가주의에 매몰된 공동체를 말할 뿐이다.
당분간 한국사회는 자유의 결핍으로 인한 저항과 고통이 지속될 것이다. 그 저항과 고통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개인의 발견' 즉 개인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충분한 자유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개인에게 충분히 주어져야만 하는 자유를 개인에게 주어지지 못하도록 막아설 것인가, 이 둘 중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 한국교회가 보이는 형태는 개인이 가져야 할 충분한 자유를 가로막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자유를 갈망하는 합리적 이성과 자율적 이성을 지닌 개인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차별금지법을 막는 광화문 집회를 통해서 오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막아서는 것이 참신앙인이라고 하는 선동을 한다고 한국교회는 부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바로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한국교회는 망해간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인의 발견을 가로막는 집단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다. 자유의 결핍을 돌보지 않고 자유를 억압한 집단은 몰락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 앞에서 현재의 한국교회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한데,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교회는 마치,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자유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그들의 자발적 노예가 되려는, 가데스 바네아의 이스라엘 같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결기는 안 보이고, "나에겐 자유 따위는 필요 없다. 가마솥의 고깃국을 달라."고 외치는 것 같다. 안타깝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거스틴 - 사랑이 구원이다 (0) | 2020.12.01 |
---|---|
신자유주의적 현실 (0) | 2020.11.29 |
급진적 정통주의 (Radical Orthodoxy) (0) | 2020.11.19 |
한국 기독교의 과제 (0) | 2020.11.05 |
예술작품 같은 설교 (0) | 2020.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