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 같은 설교]
나는 언제나 나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생각 안 하던 사람이 생각하게 되고, 질문이 없던 사람이 질문을 가지게 되는, 아름다운 한 편의 예술작품 같기를 소망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보이고, 조각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느껴지길 원한다.
그러나 많은 순간 그 소망은 성취되지 않는다. 때로는 나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때로는 청중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실패는 몇 가지에서 오는데, 한 가지는 내가 일주일동안 충분한 영성생활을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어떤 '바쁜 일' 때문에 정해놓은 일상이 흐트러질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다른 한 가지는 나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을 때 발행한다.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을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그리고 또한,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운동을 못해서 몸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음식을 조심해서 먹지 못했다거나, 괜한 일에 분노를 표출해서 마음을 흐트러뜨려 놓았거나 했을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경험하는 실패는 대개 내가 통제 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의 쪽에서 오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 노력하고, 기도하며 충분히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몸 컨디션을 언제나 최상으로 유지하려고 조심한다.
청중 쪽에서 오는 실패는 사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려 있는 일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다만 두 가지를 말하고 싶은데, 하나는 청중이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을 때 실패를 경험한다. 사랑 안에서 교통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돌처럼 여겨질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돌을 주어도 그것이 보석처럼 여겨질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조악한 작품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청중이 설교자를 향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일단 50퍼센트는 성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중의 설교를 듣는 능력이 부족할 때 실패를 경험한다. 대개 음악도 미술도 감상하는 이들의 소양에 따라 그 음악작품과 미술작품에서 느끼는 감동의 정도가 다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개차반 설교자가 아니라, 교양있고 소양있는 설교자라면 그 설교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논증의 틀이 있게 마련이다. 청중이 설교자의 논증과 그 논증에 담긴 메시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쫒아오지 못하면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설교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내어놓은 예술작품 같은 설교는 이제 청중의 입장에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청중이 그 예술작품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작품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매우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 있다. 그러나 그 가치는 청중이 정할 것이다.
작품은 기교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작품에는 그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혼'이 담기기 마련이다. 혼이 담긴 작품은 청중이 알아볼 것이고, 혼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청중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물론, 기교만을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혼을 담은 작품을 알아보는 청중이 드물지만, 그렇다고, 작품활동하는 사람이 기교만 부려 청중을 홀리는 것은 직무유기일 뿐더러 사기행각이다.
한 편의 설교에서 '은혜'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정말 여러가지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야 한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설교자의 자리에서, 청중은 청중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잘 수행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가 그 안에서 역사하기를 바라는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질 때, 예술작품 같은 설교는 그 작품을 내놓은 설교자나, 그 작품을 눈과 귀로 경험하는 청중이나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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