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정통주의 (Radical Orthodoxy)
현재 서구 신학은 '급진적 정통주의'가 이끌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새로운 신학운동은 영미신학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신학운동을 이끈 세 명의 신학자는 다음과 같다. 존 밀뱅크(John Milbank),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 그리고 캐서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이다. 이들의 신학적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신학이 아닌 것이 없다.
2.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이다.
3.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이며, 은총의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모두 신학이다.
4.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사고를 넘어, 초이성적이고 계시적이며 신비적인 은총의 신학을 말한다.
이들의 신학은 보수신학이 아니라 정통신학이다. 이들은 보수신학이 행하는 것처럼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나 세대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성서의 정경성과 계시성을 인정하면서, 성서에 입각해서 세상을 본다. 그리고 이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상에 깔린 '세속주의'를 넘어 고전적 신학을 포스트모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의 유산은 교부들의 신학 전통과 중세의 아퀴나스 신학 전통,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 중 헨리 데 루박과 한스 폰 발타자르의 신학유산이다. 또한 바르트,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데리다, 리요타르, 푸코 등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신학적 작업을 한다.
특별히 이들이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어거스틴의 신학이다.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으로 바라본 어거스틴의 시각이 맞다고 동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사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대하여 어거스틴의 명제를 바탕으로 해석과 비판을 시도한다. 이들이 어거스틴의 명제를 받아들여 신학작업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반자율성(anti-autonomous) 사상 때문이다. 모더니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에게 자율적 이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정통주의자들은 그러한 모더니티의 자율성을 거부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독립된 자율성을 갖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창조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 가장 광범위하게 신학적 작업을 진행한 존 밀뱅크의 <Theology and social Theory(신학과 사회이론)>은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으로 된 것이며, 신학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보여주는 저서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주의 이래 세속주의에 밀려 주변으로 밀려난 신학과 교회, 또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세계(창조세계)의 중심부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신학과 신앙이 보수화되는 것도 사실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신학과 신앙이 보수화될수록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정통주의'가 시도하고 있는 신학, 신앙, 교회 운동은 굉장히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기독교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 없이 생존해 보려는' 세속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이유,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선 지위'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신학, 신앙,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놓여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끝에는 죽음과 허무 밖에 없겠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생명과 기쁨이 넘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은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사역이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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