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적 사유]

 

교부들의 신학을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는 마르키온의 그노시스적 사유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신정론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아직까지도 신정론 문제는 미궁이다. 이 문제를 납득할 만하게 대답한 신학자는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납득할 만하게 신정론 문제에 대답한 신학자는 마르키온 밖에 없다. 그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지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정론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고,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을 발전시키고 성경의 정경화를 꾀했던 마르키온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지만, 그 당시 마르키온은 '악의 문제'에 질문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신학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마르키온의 신학을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했다. 교부들에게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신약의 구원자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신학사상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이 말하고 싶은 일차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의 일치를 말함으로 마르키온 신학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위일체 신학이 신정론의 문제(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를 납득할 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우리는 '신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신정론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노시스(영지주의) 사유의 특징은 이 세상은 낮은 단계의 하나님(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악이 존재하는 세상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결국은 '파국'이다. 그 파국에서 구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자 하나님에 의해 기획된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는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이 악이 가득한 세상을 끝장낸다.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너무도 간단하게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만, 그러한 그노시스적 사유는 삼위일체 신학의 출현으로 인해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역사에서 절대악을 경험할 때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악이 판치는 세상은 메시아에 의해서 끝장나야 하고,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노시스적 사유가 가장 강하게 등장한 시대는 근대(Modernity)의 끝자락에 발생한 세계 1차대전 이후였다. (사실 근대의 끝자락에 1차 대전이 발발한 게 아니라, 1차 대전이 발발함으로 인해서 근대는 끝난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긍정하던 근대, 그래서 그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던 근대인들은 세계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 모든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다시 고개를 든 것이 그노시스적 사유였다.

 

그 당시 근대의 사상가들(철학자/신학자)은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신학 개념'을 만든 칼 슈미트를 비롯하여, 하르낙과 블로흐, 마틴 부버와 심지어 칼 바르트도 그노시스적 사유를 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시몬 베이유도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유는 그노시스적 사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사유였다.

 

칼 슈미트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안에 숨겨진 '내전'에 대하여 주목하는데,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창조주 아버지(성부)와 구원자 아들(성자) 간의 '내전상태(statiastion)'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마르키온이 일찍이 신정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설파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 간의 싸움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위와 같은 사유를 하는 까닭은 '정치신학'의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서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 악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정부'라고 말하는 것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다.

 

이러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려면, 그의 '카테콘(Katechon)' 이론을 비판한 야콥 타우베스와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지난한 과정임으로 생략한다. 대신,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발생한 근대의 '메시아 신학'을 다시 한 번 들여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1, 2차 대전 이후 우리는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진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유 자체가 그노시스적 사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파국'을 경험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그노시스적 사유 안에서 그들의 사상을 세워나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담이자만, 지금 사회적으로 한창 논의되고 있는 '젠더문제'도 그 밑바탕에는 그노시스적 사유가 깔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을 정하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정한다고 말해왔다.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남자이고, 여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여자였다. 그러나 그노시스적 사유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누스(nous/정신)'이다. 나의 누스가 나를 남자로 규정하면 내가 여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나는 남자인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노시스적 사유는 우리의 삶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듬으며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더 이상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면, 이 세상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기다려야 할 텐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구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어둡고, 구원은 묘연하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라는 신앙의 무대]

 

요즘은 개그맨들이 자신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공중파에서는 더이상 그들을 위한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성을 가지고 아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은 유튜브가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어 가고 있다. 개그를 표현하는 방식과 개그를 소비하는 방식이 변했다는 뜻이다.

 

개그맨들의 웃픈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오버랩 됐다. 예로부터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간은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점점 그 신앙의 '무대'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던 사람들마저 자리를 떠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약점으로 지목되어 온 것은 교회론의 부재였다. 모더니티에 기반을 둔 복음주의는 '너가 곧 성전'이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교회론을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것은 개인을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 교회를 개인에 의해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추락시키는 생각일 뿐이다.

 

'교회'라는 것이 참 신비스러운 게, 실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지워버리고 교회를 어떠한 '실체'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현재 우리가 '교회'를 떠올릴 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실체로서의 교회가 그렇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신성이다.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응집되면 교회라는 것이 발생한다. 거꾸로 말해,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사멸하면 교회는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지, 아니면 죽은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덧 '교회는 이런 것이야'라는 어떠한 실체에 사로잡혀 왔다.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교회라는 생각, 그래서 교회건물이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소위 성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활동(프로그램)들 등을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교회 현상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신성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개그맨들처럼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 교회를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 존재하는 '무대'에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기에는 그 무대와 정신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멋지고 아름답게 펼치기 원하는 신앙인은 그 정신성에 합당한 '무대'를 찾고 있거나,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례전 신학(sacramental theology)에 의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성을 펼쳐내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곳 하나, 그 어느 시간 하나 '성전'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이다. 즉,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교회'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쳐 보인다면, 그곳에 '교회'가 생길 것이고, 그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는, 기쁨의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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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메타 내러티브]

 

인간의 역사는 부단히 어딘가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이었다. 예수의 이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도 종교적 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이 있다. 그렇게 어디론가로부터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해방'되고 싶어하면서도 '해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들으면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게 한국인의 심리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자유를 갈망하되, 그 자유는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누리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어서 그런가? 자신만 자유롭고 남들은 자신의 자유 아래 속박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가?

 

해방을 말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겪은 어려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예수의 메시지는 해방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열광하면서도 결국 해방신학자들을 죽인 것은 남미인들이다. 해방을 말하면 죽는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인이요 잘 사는 것이라 말한다. 기독교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은 창조-타락-구원-종말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를 설명하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는 계속하여 공격을 받아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메타 내러티브가 인간들을 자유하게 하지 못하고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오히려 구속을 가져다 준다면 그 메타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원-종말'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방식은 매우 플라톤주의적이다. 오죽하면, 니체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의 대중화"라고 말하겠는가.

 

소위 복음주의적 메타 내러티브의 성경 해석을 보자. 우선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금을 받은 존재'이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에 따라 해석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형상'은 설계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는데 '설계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설계도(이데아)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설계도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데아'를 따라 창조된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럴까?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형상(이데아)대로 사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라고 한다.

 

그러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인간에게는 '이데아'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죄가 그것을 가로 막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시므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인간은 그분을 믿음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묻게 된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그 형상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되찾는 일은 현재의 이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저 천국에 가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완전한 구원, 완전한 형상의 회복이 있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된다.

 

메타 내러티브는 이렇게 인간의 인생을 방향 지어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인생을 구속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속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을 미리 규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데아)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로 인하여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구원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으며,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뒤,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천국을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존재를 속박하는 그 무엇이든지 거부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메타 내러티브' 자체를 거부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내러티브에 의해서 결정되고 목적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메타 내러티브에 의해서 그 내러티브와 동일하게 삶의 이야기를 복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만의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딜레마다. 메타 내러티브를 인정하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속박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를 부정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허무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허무에 처해질지언정 자유를 빼앗길 수는 없다는 결기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 여기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 눈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허무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메타 내러티브'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러한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재해석하는 일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그들과 함께 자유를 지켜내며 허무를 몰아내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계속하여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오래된 메타 내러티브를 고집하려 든다면, 기독교는 인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폐기처분 될 것이다. 죽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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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추운 겨울을 생각해 보죠. 그리고 집 한 채를 생각해 보고요. 칼바람이 부는 겨울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집 한 채. 그곳에 ''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라는 게 사방으로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습니다. 옛날 허름한 초가집이라서 그럴까요. 문풍지를 대서 겨우겨우 막아 놓은 구멍들이 막아도 막아도 소용없는 듯, 구멍은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추위를 막아보고자, 온 힘을 다해서 그 구멍을 막아봅니다. 그런데, 구멍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 구멍이 또 뚫려서, 새로 생긴 구멍을 막느라 정신이 없죠. 추운 겨울 밤을 이겨내고자 열심히 구멍을 막아 댑니다. 열심히 막다 보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이 올까요?

 

구멍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의 그림자들을 하나씩 지워 나갑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것이지요. 아무리 막아도 들어오는 칼바람처럼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스포츠를 하는 것도, 낚시를 하는 것도, 축구를 차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종교를 갖는 것도, 그리고 미쳐버리는 것도 모두 죽음에 맞선 행위들입니다.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를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죠. 우리가 마주한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모두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 사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끝은 '실패'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이지요.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죠.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실패가 끝이니까 실패를 받아들이며 절망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하여 물었던 수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묻고 있는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오롯이 존재하는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생산해 내고 있는 구멍들을 최선을 다해 메우는 것이 죽음의 허무를 이겨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춥다고 아우성입니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습니까?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 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버텨왔습니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입니다.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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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

 

미국은 연일 지난 주 수요일에 발생한 국회의사당 난입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뜨겁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그 불미스러운 일의 중심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여론조사를 보면 굉장히 놀라운데,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그러한 행동을 오히려 두둔한다. 국론이 분열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미국 언론에서는 civil war의 발발 가능성이 높아진 것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책 논의를 한창 진행 중이다.

 

민주당 측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의사당 난입 사건의 책임을 묻는 동시에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려 들지만, 나는 이것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사태나 극우적인 운동들을 보면 '트럼프 현상'은 트럼프라는 인물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생산해내고 있는 매우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한 명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2, 3, 또는 트럼프보다도 더  극성스런 인물이 출현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만 보고 그 현상을 일으키는 인물이나 집단들에게만 손가락질을 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그 현상들의 심층적인 면을 들여다 보면,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 잠식당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마르크스를 '빨갱이'정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본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병패를 적나라하게 직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역사적 정황 때문에 마르크스를 직면하지 않으려 하고, 그렇다 보니, 결국 자본주의를 직면하여 그것의 병패를 들여다 보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 불신이 극에 달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서로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며칠 전 언론 발표에 따르면, 20-30대 젊은이들인 집을 소유하고 있을 때 연애할 확률, 또는 결혼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서 훨씬 높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비극적인 결과다. 20, 30대 젊은이가 집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부의 대물림, 뻔한 결과 아닌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주의가 위의 조사결과에서 보듯, 인간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이 자본을 매개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그것은 인간성을 고양하는가, 아니면 인간성을 말살하는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들끼리 경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시각문화와 소유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보이게 만들어야 하고, 무엇이든지 소유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말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이다. 욕망은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을 이끌어낸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은 언제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잔 같을 뿐이다.

 

나는 니체에 대하여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니체만큼 기독교를 심층적으로 비판한 인물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인은 니체를 넘어서야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니체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기독교인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비겁하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내가 니체에 대하여 아쉬움을 갖는 것은 그가 기독교를 비판해서가 아니다. 그가 마르크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자본주의를 더 심층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함께 자본주의와 결합한 기독교, 또는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관계, 또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기독교의 정신성을 상실해 버린 기독교를 비판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냥 기독교만 비판해서 아쉬운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자본에 잠식당해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이 '경제'로 환원되어 돌아가는 시대이다. 모든 분야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자본주의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신이 노예가 된지도 모르게 노예가 될 뿐더러, 자신을 자본에 스스로 종속시키는 자발적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시대는 모든 성과의 결과를 자기 자신에서만 찾을 뿐이다. 취직을 못해도, 실직을 당해도 그 원인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자신이 못나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루저'가 된다.

 

인간이 '괴성'을 지르는 것은 못살겠어서 그런 것이다.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자본주의 체제가, 신자유주의 체제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트럼프 현상'은 한 개인의 몰상식과 부도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더 심층적 의미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근본이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세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 것이다.

 

나는 트럼프 현상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을 본다. 우리는 지금 혼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혼돈 속으로 들어가야만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가 혼돈 속에 있기에,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허무'이다. '허무'라는 현상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깊은 어둠이다.

 

우리가 이 혼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직면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하고, 어떤 세상으로 가야할지, 서로의 상상력을 활발하게 공유해야 한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른 세상을 끊임없이 꿈꿔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또는 기괴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다른 세상을 꿈꿨던 이사야가 많이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예수'라는 다른 세상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것이 구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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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신학]

 

성취는 자기 구원이고, 자기 자신을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두려는 행위이다. 성취는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성취는 나의 생명은 풍성하게 할지 모르지만 나 외의 다른 생명은 착취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취를 부추기는 사회는 생명이 고통 당하고 생명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놀이는 생명들과의 어우러짐이다. 놀이는 자기 바깥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두기보다 그들과 어울려 모든 생명을 보듬으려 한다. 그러므로 놀이의 사회는 생명이 만족을 느끼고 생명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사귐을 갖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우리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성취가 되는 순간 생명의 크기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놀이가 되는 순간 생명의 크기는 커진다.

 

나는 성취하려 일하지 않는다. 나는 성취하려 공부하지 않는다. 나는 성취하려 목회하지 않는다. 나는 생명을 보듬기 위하여 일하고 공부하고 목회한다. 나는 이것을 '놀이의 신학'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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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내가 너에게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택한다는 것은 폭력이다. 선과 선을 가장 명료하게 그리고 빠르게 잇는 방법인 직선은 구부러진 곡선을 거부하거나 파괴해야 가능한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난 경부고속도로가 얼마나 잔인한가. 그 직선 길을 내기 위하여 잘려나간 산이며 나무, 쫓겨난 주민이며 동물들을 생각해 보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직선으로 잇겠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폭력인가. 너와 내가 직선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없으며 곧 식상한 사이가 될 것이다.

 

나는 너에게 가되, 최대한 돌아가려 한다. 존재를 보듬는 그 구불구불한 길을 통해 너에게 가려 한다. 그 험난한 길을 걸으며 너의 존재를 사모하며, 길마다 펼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련다.

 

모든 권력은 통치를 용이하게 하게 위해 직선의 역사를 요구하고 미화시키겠지만, 직선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도 그 잔인성에 물들어 생명을 파괴하게 되리니, 직선으로 이어지길 거부하며, 너와 나 사이에 나 있는 그 원래의 구불구불한 길을 오롯이 걸어가려는 열망과 용기와 성실이 우리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원래의 아름다움을 지켜낼 것이다.

 

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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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꽃]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의 참신성은 그것이 기독교인에 의해 세워졌고 기독교 예배를 위해 봉헌된 첫 번째 대도시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팔레스타인에서 유죄 판결 받은 한 랍비(예수)의 이름을 딴 종교가 이제 로마의 국가 교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ㅡ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에서

 

330년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의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새로마'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통치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이다. 그곳은 현재 이슬람 문화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원래 그 도시는 최초의 기독교 도시였다.

 

이스탄불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곳에 가고싶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걸으며 1700년 전, 최초의 기독교 도시를 음미하는 것도 이스탄불을 향유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역사는 참 신비한 것 같다. 꽃처럼 폈다 진다. 역사는 생명을 가진 듯하다. 그러므로 역사를 산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산다는 뜻일 것이다. 꽃처럼 폈다 지는 역사이기에 폈다 진 역사를 아쉬워할 것은 없다. 핀 꽃은 지고, 진 꽃은 다시 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이 현재 이슬람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쉬워할 것은 없다. 기독교인이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그 꽃은 어딘가에서 다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얼마나 생명력 있게 살아갈 것이냐에 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고, 생명력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핀 꽃은 지고, 진 꽃은 다시 핀다.


Posted by 장준식

[안식일이란?]

 

안식일은 쉬는 날이다. 안식한다는 것은 쉰다는 뜻이다. 주일은 안식일을 기독교 버전이다.

 

우리는 대개 안식일을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근대적 개념이고, 자본주의적 개념이다. 노동의 노예로 일주일을 살다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안식일은 옳은 것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옳은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만물은 옳은 것을 향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게 창조성이고, 하나님 지향성이다. 그게 은총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옳은 것을 지켜내기란 정말 힘들다. 옳은 것을 지켜내려 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예수의 십자가도 결국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도 옳은 일을 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만 생각하고 말면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누구나 노동을 한다. 그러나 그 노동은 무엇을 위한 노동인가? 옳은 것을 위한 노동인가? 정의와 사랑을 위한 노동인가? 우리의 노동은 정의와 사랑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기집중과 착취를 위한 노동일 때가 많다.

 

일주일 동안 옳은 것을 위하여,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 옳은 것을 지키려고 죽도록 고생한 사람만이 안식일이 귀한 줄 안다. 그 힘든 일을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날, 정의와 사랑의 완성이신 주님의 품에 안겨, 옳지 못한 것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겨, 더 이상 옳은 일을 하느라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기독교인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즉 주일을 지키면서 감동과 감격이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옳은 것을 지키려고 죽도록 고생해보지 않은 채, 그저 자기 욕심에 따라,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노동을 하다 교회 와서 주일을 지키려니, 안식일에 감동 감화가 없는 것이다.

 

고통에서 놓이는 순간, 우리는 안식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으로 우리의 삶을 밀어넣고 있는가? 옳은 것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 안식일에 주님의 품에 안기는 일이 기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다. 그렇지 못하니, 안식일에 쉬면서도 쉼을 얻지 못한다.

 

안식일에 안식하지 못하는 가련한 우리들이여.


Posted by 장준식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아이러니]

 

동방의 거대도시들(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에 대한 로마의 승리로 끝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 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통'으로 채택한 신학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신학이다. 이는 철저하게 인간을 부정하는 신학이다. 성악설이다. 이와는 반대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에서 정죄된 '아리우스주의' '하나님이 되신 인간' 신학이다. 이는 인간을 매우 긍정하는 신학이다. 성선설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인해 기독교의 정통신학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 성악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로마 가톨릭의 행보는 자신들이 채택한 정통신학과는 반대방향으로 간다. 로마 가톨릭의 지배체제는 '보다 나은 인간'인 성직자들에 의한 '보다 못한 인간'인 평신도들을 향한 지배체제이다.

 

내 눈에 이것은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인간을 부정적으로 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의 성직을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인간이 어떻게 성직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 서서 그 둘을 잇는 '대리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티스트의 논쟁을 통해서 보듯이, 성직이 유지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성직이 가진 거룩함 자체라는 것을 주장하는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원천적으로 철저히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부족한(또는 타락한) 인간이라면, 아무리 성직 자체에 거룩함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성직을 감당하는 일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기획했던 것은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체제'에 의한 세상의 지배였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처음부터 인간을 매우 긍정한 '아리우스주의'를 정통 신학으로 채택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인간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신학을 정통으로 채택해 놓고, 실제 삶에서는 인간을 긍정하는 지배체제를 채택하는 것은 자기 모순처럼 보인다. 이 모순은 설명이 필요하고, 해명이 필요한 신학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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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인간, 그리고 기독론]

 

"사제집단의 방만한 생활방식과 그들의 교양 없음에 대한 인본주의적 비판과 오컴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의 결함은 점차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당시의 교회가 내세우던 세계관과 종교관을 버리고 초대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촉발시켰다"

(양대종 논문, <니체 철학에 나타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에서)

 

알리스터 맥그레스의 <종교개혁사>에서도 그렇고, 종교개혁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하는 책이나 논문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혼란을 전하며, 특별히 성직자와 교회의 비뚤어진 세계관과 생활방식를 언급한다.

 

예나 지금이나 성직자들의 '교양 없음'은 인문주의의 폭로로 드러난다. 인문학 공부가 턱없이 부족한 성직자들에게서 '교양 없음'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의 교양 없음을 자신들만 모르는 듯,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 하는 성직자가 역사의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는 것은 예수님도 못말리는 현상이다.

 

개혁이란 무엇일까? 개혁의 근본에는 '인간'이 놓여 있다.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고 그 시스템에 의해 살아가는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 시스템의 개혁이라기 보다도 '인간개혁'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위의 인용문에서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개혁은 '초대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개혁이 과거로의 회귀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종교개혁자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희망했던 것일까?

 

한국교회에서 개혁을 외치는 자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구호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이다. 멋진 구호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너무 모호하다. 성경에 그려지는 초대 교회는 전혀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맥락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적대적이다. 초대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이들에게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그때가 그립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개혁은 과거로의 회귀가 될 수 없다. 개혁은 인간에게 집중되는 운동이되, 과거로의 회귀라기 보다 '진리로의 회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로의 회귀라는 것은 과거 지향적이지 않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개혁은 종말론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개혁을 이야기할 때 '예수'라는 인물에 다시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종말론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는 예수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해석했지만, 아리우스는 그와는 달리 '하나님이 되신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아리우스가 비록 니케아 지지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하긴 했지만, 아리우스주의는 니체를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예수의 해석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던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유발 하라리가 주장하듯이 'homo deus(하나님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 사는 인간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그들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되신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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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뻥이야]

 

정치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참 재밌는 말을 한다. "정치철학의 목표와 의무는 '도시의 생존과 안녕을 위하여 '고상한 거짓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그 임무를 소크라테스가 훌륭히 해냈다고 말하며, 소크라테스가 바로 정치철학을 처음 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플라톤이 상상한 세계, 그가 말하는 이데아, 진리 같은 것들은 모두 형이상학으로서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플라톤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상력이 엄청 풍부한 노인네'라는 생각이 든다.

 

수사학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신이 말하는 바, 그 상상력의 산물을 '사실 또는 진리'인것처럼 믿게 만드는 능력, 그것이 수사학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플라톤은 수사학의 대가가 아닌가 싶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 즉 형이상학적 진술(이야기)를 너무도 자신 있게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생각이 어떠한 '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이든, 신학이든, 형이상학 분야의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모두 그럴싸하다. 믿고 싶어지고, 심지어 멋있다. 그들은 인간존재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서 정말 그럴싸한 거짓말들을 능수능란하게 만들어 낸다.

 

인간에게는 실로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상상력)과 그 거짓말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것도 상상력) 말이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 허무적으로 생각해보면, 모두가 뻥인 것이다. 뻥이면 어떠리, 우리의 인생이 기쁘고 즐거우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사랑하며 살면,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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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배타성]

 

기독교는 세심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배타성을 생성해낼 수밖에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1. 유일신관(Monotheism)

2. 선민사상(Chosen People)

3. 기독론(Christology)

4. 종말론(Eschatology)

 

1. 유일신관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신관이다. 기독교 생성 초기부터 유일신관은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의 교리였다. 다신론의 세계였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태동한 기독교가 그 시대에 배척당하는 역할을 한 교리이기도 하다. 다신론의 세계에서 유일신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들은 그당시 사람들에게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이것은 굉장히 재밌는 현상이다. 지금은 '무신론자'라고 하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또한 유일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용했다. 예수를 ''이라고 부르면, 유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론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일신관과 충돌하지 않는 기독론을 생각해낸 결과가 삼위일체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유일신관에 대한 세심한 해석을 하지 않으면, 유일신관은 매우 폭력적인 교리로 작용할 수 있다. 폭력적이지 않은, 평화로운 기독교가 되려면, 유일신관을 세심하게 해석해야 한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그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유일신관을 핑계로 폭력적인 성향을 표출하고, 배타적인 종교를 형성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악한 무리들은 결코 유일신관을 세심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진리보다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악함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용당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희생되었는가. 애가(Jeremiad)가 필요한 시대이다.

 

2. 유대교의 선민사상의 기독교 버전은 '부르심(calling)'이다. 이 또한 세심한 해석이 없으면 폭력적인 교리로 전환되기 쉬운 교리이다. 현대 기독교 이단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인데, 특별히 배타성과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교리이다. 이단들은 자신의 집단을 세력화하기 위하여, 그래서 자신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선민사상을 주입시킨다. 마침 요한계시록에 14 4천명이라는, 아주 '문자적인' 선민신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기에, 그들은 그것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선민사상은 배타적인 민족을 이루거나, 선택받은 사람에게 (심리적) 우월성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고안된 교리가 아닐 텐데, 이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연약한 자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현혹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특별한 선택을 받는다는 것에 목말라 있다.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는 사람들의 '인정욕구'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장사치들은 그러한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장사하고, 종교 이단은 그러한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탈탈 턴다. 이 또한 애통한 일이다.

 

3. 기독론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불리는 교리이지만, 기독론만큼 오용되고 있는 교리도 없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저 앵무새처럼 "예수는 주, 예수는 메시아, 예수는 뭐뭐뭐...'하면서 명제적으로 확정된 예수를 외칠 뿐이다.

 

예수는 인격적 사귐을 원하는데, 우리들은 예수와 인격적 사귐을 가지기 원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 땅을 걷기 원하는데, 우리의 삶에 들어와서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기만 좋아하고, 예수를 하늘로 빨리 승천시키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이 또는 우리의 신념이 또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예수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현존하는 예수는 우리의 삶을 고치고 싸매고 온전케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 예수는 우리의 욕망의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4. 한국교회의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는 정말 남루하다. 기독교 고유의 시간성에 접근하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고안하고 있는 공간성에만 매몰되어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은 우리가 이땅에 발 딛고 사는 한 공존해야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시간성의 종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성은 시간성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사유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간성에 대한 사유만 확장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종말은 '폭력'이 가해지는 시간이 아니라, 심판이 내려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심판을 폭력으로 잘못 생각한다. 심판은 폭력이 아니다. 심판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심판은 새창조를 위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종말론을 오용하여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 끝날에 폭력이 가해질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명백한 기독교 종말론의 오해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하기에 딱 좋은 교리가 종말론이다. 소위 '공포정치'는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자기들의 통치를 쉽게 만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술수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공포가 조장되고 있는가. 미디어는 권세 잡은 자들과 협력하여 그 일을 너무도 잘 해내고 있다. TV 뉴스, 인터넷 뉴스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기사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온다. 공포는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들을 통치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치게 만든다. 기독교 종말론도 딱 그렇게 씌고 있다. 종말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권력에 순종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 얼마나 나쁜 짓이고, 슬픈 일인가. 

 

기독교는 세상 변혁의 힘을 지닌 강력한 종교이다. 그러나, 세심한 해석 없이 남용되고 있는 교리들 때문에 그 강력한 힘이 엉뚱한 데 쓰이고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던 노벨이 다이너마이트가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발명을 후회했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작금의 기독교를 보면 자신의 희생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리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기독교가 지닌 그 엄청난 힘을 선하게 사용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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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 목회 철학]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이 '차가운 세상'을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세상'을 만나더라도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의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예수는 '차가운 세상'을 만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으나, 끝까지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 '따스한 마음'으로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가 '부활'했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vere homo)이었던 그가 그랬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섭취한 에너지를 체온 유지, 즉 몸을 따스하게 유지하는 데 90%를 쓴다.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삶의 '따스함'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온힘을 다해 '따스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나는 그 '따스함'을 위해 부름 받았고, 사람들이 '따스함'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일을 위해 내 몸의 체온을 다 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사유와 구원]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을 다음의 글로 끝맺는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카토(Marcus Porcius Cato)의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은 '사유의 시간'이다. 사유할 때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앟는 게 아니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 자신과 또는 다른 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의 시도만큼 활동적인 활동이 없다. 그리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 같으나 혼자 있는 게 아니므로 외롭지 않은 것이다.

 

아렌트는 '사유'의 개념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하는데, 그녀에게 사유란 '말 없는 대화'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들로부터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유하면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교제하듯이 자기 자신과 고제를 나눈다. 이 교제의 시간, 즉 사유가 없으면 인간은 '독선'에 빠질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사유란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주장하는 '구원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은 '잘 지내는 것'이다. 사유를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사유는 구원의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아렌트는 그의 저서 <정신의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지 검토하는) 침묵의 교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는 법도 발견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않는 삶은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펼치지 못한다. 그런 삶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몽유병자와 같다."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에서 인용)

 

구원은 절대 맹목으로 인간을 이끌지 않는다. 구원은 '사유'로 인간을 이끈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돌보게 하며, 자기 자신을 반대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잘 지내게 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인간은 구원에 들어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맹목적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유에로의 초대'이다. 그 초대에 응한 자는 '사유'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온다. 구원으로 들어온 '사유하는 인간'을 세상이 어찌 감당하랴.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