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

 

미국은 연일 지난 주 수요일에 발생한 국회의사당 난입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뜨겁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그 불미스러운 일의 중심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여론조사를 보면 굉장히 놀라운데,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그러한 행동을 오히려 두둔한다. 국론이 분열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미국 언론에서는 civil war의 발발 가능성이 높아진 것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책 논의를 한창 진행 중이다.

 

민주당 측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의사당 난입 사건의 책임을 묻는 동시에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려 들지만, 나는 이것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사태나 극우적인 운동들을 보면 '트럼프 현상'은 트럼프라는 인물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생산해내고 있는 매우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한 명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2, 3, 또는 트럼프보다도 더  극성스런 인물이 출현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만 보고 그 현상을 일으키는 인물이나 집단들에게만 손가락질을 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그 현상들의 심층적인 면을 들여다 보면,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 잠식당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마르크스를 '빨갱이'정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본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병패를 적나라하게 직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역사적 정황 때문에 마르크스를 직면하지 않으려 하고, 그렇다 보니, 결국 자본주의를 직면하여 그것의 병패를 들여다 보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 불신이 극에 달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서로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며칠 전 언론 발표에 따르면, 20-30대 젊은이들인 집을 소유하고 있을 때 연애할 확률, 또는 결혼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서 훨씬 높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비극적인 결과다. 20, 30대 젊은이가 집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부의 대물림, 뻔한 결과 아닌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주의가 위의 조사결과에서 보듯, 인간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이 자본을 매개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그것은 인간성을 고양하는가, 아니면 인간성을 말살하는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들끼리 경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시각문화와 소유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보이게 만들어야 하고, 무엇이든지 소유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말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이다. 욕망은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을 이끌어낸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은 언제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잔 같을 뿐이다.

 

나는 니체에 대하여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니체만큼 기독교를 심층적으로 비판한 인물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인은 니체를 넘어서야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니체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기독교인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비겁하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내가 니체에 대하여 아쉬움을 갖는 것은 그가 기독교를 비판해서가 아니다. 그가 마르크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자본주의를 더 심층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함께 자본주의와 결합한 기독교, 또는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관계, 또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기독교의 정신성을 상실해 버린 기독교를 비판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냥 기독교만 비판해서 아쉬운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자본에 잠식당해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이 '경제'로 환원되어 돌아가는 시대이다. 모든 분야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자본주의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신이 노예가 된지도 모르게 노예가 될 뿐더러, 자신을 자본에 스스로 종속시키는 자발적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시대는 모든 성과의 결과를 자기 자신에서만 찾을 뿐이다. 취직을 못해도, 실직을 당해도 그 원인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자신이 못나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루저'가 된다.

 

인간이 '괴성'을 지르는 것은 못살겠어서 그런 것이다.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자본주의 체제가, 신자유주의 체제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트럼프 현상'은 한 개인의 몰상식과 부도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더 심층적 의미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근본이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세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 것이다.

 

나는 트럼프 현상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을 본다. 우리는 지금 혼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혼돈 속으로 들어가야만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가 혼돈 속에 있기에,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허무'이다. '허무'라는 현상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깊은 어둠이다.

 

우리가 이 혼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직면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하고, 어떤 세상으로 가야할지, 서로의 상상력을 활발하게 공유해야 한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른 세상을 끊임없이 꿈꿔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또는 기괴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다른 세상을 꿈꿨던 이사야가 많이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예수'라는 다른 세상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것이 구원 아니겠는가.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타 내러티브  (0) 2021.01.21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0) 2021.01.21
놀이의 신학  (0) 2021.01.07
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0) 2021.01.07
역사와 꽃  (0) 2021.01.0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