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꽃]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의 참신성은 그것이 기독교인에 의해 세워졌고 기독교 예배를 위해 봉헌된 첫 번째 대도시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팔레스타인에서 유죄 판결 받은 한 랍비(예수)의 이름을 딴 종교가 이제 로마의 국가 교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ㅡ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에서
330년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의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새로마'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통치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이다. 그곳은 현재 이슬람 문화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원래 그 도시는 최초의 기독교 도시였다.
이스탄불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곳에 가고싶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걸으며 1700년 전, 최초의 기독교 도시를 음미하는 것도 이스탄불을 향유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역사는 참 신비한 것 같다. 꽃처럼 폈다 진다. 역사는 생명을 가진 듯하다. 그러므로 역사를 산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산다는 뜻일 것이다. 꽃처럼 폈다 지는 역사이기에 폈다 진 역사를 아쉬워할 것은 없다. 핀 꽃은 지고, 진 꽃은 다시 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이 현재 이슬람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쉬워할 것은 없다. 기독교인이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그 꽃은 어딘가에서 다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얼마나 생명력 있게 살아갈 것이냐에 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고, 생명력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핀 꽃은 지고, 진 꽃은 다시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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