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인간, 그리고 기독론]

 

"사제집단의 방만한 생활방식과 그들의 교양 없음에 대한 인본주의적 비판과 오컴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의 결함은 점차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당시의 교회가 내세우던 세계관과 종교관을 버리고 초대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촉발시켰다"

(양대종 논문, <니체 철학에 나타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에서)

 

알리스터 맥그레스의 <종교개혁사>에서도 그렇고, 종교개혁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하는 책이나 논문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혼란을 전하며, 특별히 성직자와 교회의 비뚤어진 세계관과 생활방식를 언급한다.

 

예나 지금이나 성직자들의 '교양 없음'은 인문주의의 폭로로 드러난다. 인문학 공부가 턱없이 부족한 성직자들에게서 '교양 없음'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의 교양 없음을 자신들만 모르는 듯,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 하는 성직자가 역사의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는 것은 예수님도 못말리는 현상이다.

 

개혁이란 무엇일까? 개혁의 근본에는 '인간'이 놓여 있다.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고 그 시스템에 의해 살아가는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 시스템의 개혁이라기 보다도 '인간개혁'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위의 인용문에서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개혁은 '초대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개혁이 과거로의 회귀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종교개혁자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희망했던 것일까?

 

한국교회에서 개혁을 외치는 자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구호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이다. 멋진 구호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너무 모호하다. 성경에 그려지는 초대 교회는 전혀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맥락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적대적이다. 초대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이들에게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그때가 그립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개혁은 과거로의 회귀가 될 수 없다. 개혁은 인간에게 집중되는 운동이되, 과거로의 회귀라기 보다 '진리로의 회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로의 회귀라는 것은 과거 지향적이지 않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개혁은 종말론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개혁을 이야기할 때 '예수'라는 인물에 다시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종말론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는 예수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해석했지만, 아리우스는 그와는 달리 '하나님이 되신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아리우스가 비록 니케아 지지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하긴 했지만, 아리우스주의는 니체를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예수의 해석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던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유발 하라리가 주장하듯이 'homo deus(하나님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 사는 인간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그들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되신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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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