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ㅡ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켜 놓은 라디오(KQED/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의 대표 시사 라디오 방송)에서 ‘오징어 게임(Squid Game)’ 열풍에 대한 대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라디오 진행자가 질문한다. “왜 한국의 드라마 컨텐츠가 이렇게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킬까요?” 대담의 패널 한 명이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한국 드라마 컨텐츠가 미국화(Americanized)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성공과 BTS의 선풍, 그리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연이은 흥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오징어 게임. 우리 동네(서울시 서초구 우면동/개발 전 강남)에서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렇게 불렀으나 지역마다 게임에 해당하는 ‘가이상’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 같다. 아무튼 그 모든 명칭을 통일해서 정리한 것이 ‘게임’이니, ‘오징어 게임’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미국화(Americanized)의 흔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징어 가이상’이라 타이틀을 정했으면 아마도 세계적 열풍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오징어는 알겠는데, 가이상은 뭐야?’ 직관적 이해가 없으면 요즘 사람들은 흥미를 잃으니까.

 

오징어 게임에는 여러 가지의 서사가 얽혀 있다. 우선 전면적으로 내세운 서사는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서사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체제를 고스란히, 눈으로 보듯, 아주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오징어 게임 장에 들어온 참가자들 중 그 누구도 강제로 그곳에 참가한 사람은 없다. 모두 자발적 의지를 통해서 들어왔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데,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착취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성과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 자신만이 질 수 있다. 게임에서 진 참가자가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서사는 리트로(retro/추억)서사이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은 한국의 7,80년대에 유행하던 게임들이다. 오징어 게임 자체가 그렇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줄다리기가 그렇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잔인한 게임 룰에서 등장하는 ‘깐부’라는 용어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정말 좋은 장치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술래를 맡은 거대한 인형은 옛날 교과서에 철수와 함께 등장했던 영희이다. 리트로, 즉 지난 날을 추억하는 서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 일으켜 따스한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도 ‘시간’이라는 매직을 거치면 그리운 향수를 불러오는 법이다. 리트로 서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 서사는 현대성(또는 근대성/modernity)이다. 천재 시인 이상이 쓴 <날개>에는 현대인(modern people)의 지루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현대성의 대표적 발명품인 백화점에서 “날자, 한 번 날아보자꾸나”를 외치는 것이다. 현대(또는 근대/modernity)라는 말 자체가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현대인은 새로움을 갈망한다. 현대인은 ‘신상품’을 갈망한다. 금방 싫증을 느낀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되고,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이 온갖 탐욕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기획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다. 그들은 삶의 지루함을 ‘새로움’을 통해서 달래고자 하는데, 그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 냈다.

 

오징어 게임을 직관적으로 보면 분명 그것은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고통 당하는 자신들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를 가진 오징어 게임을 본다.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 게임 자체가 자본주의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심화된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하도록 내버려 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체제를 더욱더 공고히 한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권위 있는 영화제나 예술대상에서 상을 받는 작품들은 대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Parasite>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라는 것이 원래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선전물로 생겨난 것이기에, 대중매체는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결국 자본주의에 이용당하고 말 뿐이다.

 

우리는 오징어 게임의 돌풍 이후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넷플릭스 CEO가 오징어 게임의 돌풍을 축하하며 본인이 직접 467번째 참가자의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고, 오징어 게임 체험관을 만들어 드라마를 홍보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게임들은 다시 선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특별히 달고나 세트는 없어서 못 팔릴 정도이다. 오징어 게임 컨셉은 돌풍을 타고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파고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감각적으로 보는 바, 자본주의(신자유주의)는 무지막지하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에는 ‘야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람을 잡어 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서사에 열광한다. 이쯤 되면 이것은 종교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 시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종교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통제하고 착취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래서 종교적이다.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하다. 눈에 보이는 상(부/정규직/안정적 고용)과 벌(가난/비정규직/불안정적 고용)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지옥(불평등)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발버둥 치게 하는 것, 그 불안의 조장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악이 따로 없다. 우리는 지금 악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현대/근대(modernity)의 산물인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분명히 간파했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오징어 게임에서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에 열광한다. 지금 전세계에서 부는 오징어 게임 열풍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원망을 퍼붓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열광하게 만들어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마법과 같은 능력이다. 우리는 모두 이 마법에 걸려 산다.

 

현대(modernity)는 사랑의 개념도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락시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인 능력을 축소시키고 빼앗아 갔지만,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그러한 사사로운 감정 놀이가 아니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인간성을 훼손하고 생명을 빼앗는 그 어떤 악한 세력들에게라도 저항하게 하여 그들의 악마적 게임 법칙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전복적인 힘이다.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악을 이기고 전복시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은 오징어 게임 같은 자본주의적 서사가 아니라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우리를 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에 있다.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 세상이 정해 놓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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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것이냐, 저것이냐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삶의 방식을 돌이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에 빠지게 되는데, 불안한 존재는 자기 존재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사이비 신앙을 갖기 십상이다.

 

사이비 신앙을 갈구하는 소비자와 사이비 신앙을 공급하는 업자가 만나면, 거기에는 진리가 상실되고 수치를 모르는 탐욕만이 유통될 뿐이다.

 

이런 일은 대개 부자나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서 일어나기 쉽다. 물론 평범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들은 당대 종교 중 가장 보편적이고 힘이 있고 공신력 있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그들은 사이비 신앙으로부터 위로와 보호를 받으며 그 대가로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나누어 준다.

 

이제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삼위일체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부, 권력, 도덕적 정당성은 아무도 못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대단한 힘을 갖는다.

 

그렇게 형성된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의 세상은 난공불락이다. 그것을 무너뜨릴 힘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 일이 그리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이 못 박아 죽인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으며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사이비 신앙의 소비자도 공급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삶을 돌이켜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자기의 삶 안에 구현하면서 살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시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고, 새로운 윤리적 세상을 꿈꾸며 세워 나갈 것이고, 그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다짐한다. 사이비 신앙을 유통시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불안을 감춰줄 사이비 신앙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 답게 살든지, 아니면 자기의 욕심에 따라 영원히 죽든지,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

 

크리스틴 헬머는 자신의 저서 <교리의 종말> 1장에서 북미에서의 신학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교단 신학교는 전례 없는 재정 압박을 겪으며, 교회를 섬길 다음 세대 종교 지도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킬지 고심하고 있다. 전임 사역자라는 전통적인 모델은 갈수록 불가능해 보인다. 이로 인해 급격히 변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일하며 살 목사를 교육하는 창조적이지만 또한 벅찬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게 된다. 신학교 건물과 떨어져서 열리는 온라인 과정, 집중 강좌, 주말반이 미래의 추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미래는 언제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들로 흐르리라고 보는 확신에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정당하지만 말이다). 성직자들이 사역으로 얻은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때를 예견하며, 전문적인 훈련과 대안적인 직업 준비 모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교육 모델이 개발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문제는 아니지만 ㅡ 사례비를 두고 교구회(vestry)와 계속 싸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투쟁만 생각해 보더라도 ㅡ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영구적 위기의 맥락에서는 특별히 절실한 문제이다"(29-30쪽).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심화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삶을 위기로 몰고갔다. 1997년 한국이 겪은 외환위기(IMF 사태) 이후 한국의 경제체제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바뀐 뒤, 한국사회는 '헬조선'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삶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종교 분야도 예외일 수 없다.

 

경제적 불평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기후위기, 그리고 영적 빈곤 상태 등 현재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당연히, 현재 교회 내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 문제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인간의 삶(공동체)을 무너뜨렸는지를 알려면,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를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만약 이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거나 이러한 목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단이나 교회, 또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와 소통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 환경도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따라 부익부빈익빈, 즉 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반영되고 있다. 대형교회는 계속 부흥할 것이고, 나머지 교회는 점점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는 마치 대형백화점이나 대형마트만 살아남고 동네상점들이 문을 닫는 것과 같다. 아마존 공룡 때문에 지역상권이 죽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인데, 무엇보다 지역상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지역의 특수한 문화가 파괴된다는 뜻이고, 그만큼 생명의 다양성이 축소된다는 뜻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한 대형교회가 획일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상품이 아니다. 신앙은 생명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성을 띌 수밖에 없고,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합창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이 획일화될 때, 그것은 정치가 획일화 되어 전체주의를 낳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신앙 생태계는 다양하고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이 끊임없이 재탄생하며 세대와 세대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는 다양한 지역과 현장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맞선 목회적 전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목회 형태이다. 위에서 크리스틴 헬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을 위해서 "전문적인 훈련과 대안적인 직업 준비 모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교육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현재의 신학생, 또는 목회자가 다른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거나 또는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을 넘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전자가 우세하다. 현재 신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이나 또는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경제적인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카페를 운영하거나 여타 다른 스몰비즈니스를 겸하여 하는 형태의 목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발전하면, 완전히 다른 개념의 목회가 형성될 것인데, 신학교를 간 사람들이 신학 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어 스몰 비즈니스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이 후에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내가 공부한 에모리대학교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내가 그곳에서 공부한 2000년대 초반부터, 전문대학원들(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비즈니스스쿨, 신학전문대학원)끼리 교차 지원과 학점공유를 실행했다. 일례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이 신학전문대학원(Candler School of Theology)의 과목을 들으며 일정과목을 이수하면,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장과 신학전문대학원 졸업장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신학교가 이제 '신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자신들만의 영역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서 '신학 또는 교회'는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전통적인 '전임사역자(담임목사)' 모델로는 목회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자립교회'는 아직 '자립교회'가 되지 못했고, 언젠가는 '자립교회'가 될 거라는 소망 안에서 그들을 '비전교회'라고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립교회'와 '미자립교회'의 구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종교 자체가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감행해야 한다. 이 구조조정은 커리큘럼의 변화를 넘어서 신학생을 키워내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신학교는 신학교 담을 넘어 일반대학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신학생을 일반대학교에 보내 교육 받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일반대학교 학생들을 적극 유치해 신학교육을 받아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 바탕 위에 목회를 구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신학교는 더욱더 대학원 중심의 교육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감리교회는 그런 면에서 다른 교단에 비해 뒤처져 있다. 감리교회는 아직까지 대학원 중심의 신학교육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중심의 신학교육을 펼쳐 가되, 다른 일반대학교의 전문대학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그들과 학사교류, 학점교류 등의 공유를 통해서 신학생이 다른 학문을 공부하여 경제적인 문제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넘어 다른 학문을 하는 학생들이 신학교육을 받게 함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기반 위에 목회를 구상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는 전통적 목회에 대한 일탈이 전혀 아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신학교나 교회 또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이중직 또는 사회적 목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듬고 해결하려고 하는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목회적 전략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서도 아직도 복음의 능력을 믿으며 그 복음으로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부름 받아 나선 이들'의 목회가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를 통해 활짝 피어나길 기대한다.

Posted by 장준식

[공정이라 쓰고 경쟁이라 읽는다]

 

경쟁 -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설법.

공정 - '나는 너를 미워해'의 간접화법.

 

공정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을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정당화한다. 아주 부드럽게. 설득력 있게. 합리적으로. 경쟁, 또는 공정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숭고한 삶을 짓밟는 행위에 불과하다. 경쟁은 잔인하지만, 공정은 교묘하다. 그러나 마찬가지 결과다. 경쟁과 공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결말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를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 이것만큼 불경한 죄가 어디에 있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경쟁, 또는 공정은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갈 뿐이다. 임계점에 이르면, 경쟁과 공정의 논리는 생명을 찌르는 칼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또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아야 할 인간 존재가 경쟁과 공정 속에서 모든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존재를 무겁게 만든다. 무거운 존재는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모든 술수들은 단호히 구분하고 구별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쟁과 공정의 논리이다. 가벼운 존재는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고 착취하고 자신의 무모하고 잔악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법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적'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죽음'의 그림자가 길고 짙고 깊게 드리운 이유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내면을 지배하는 경쟁과 공정의 논리 때문이다. 경쟁은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설법이고, 공정은 '나는 너를 미워해'의 간접화법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경쟁의 논리에서 공정의 논리로 그 이슈가 바뀌었지만, 공정을 '공정하다' 즉 'just'하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배자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것에 불과하다. 경쟁의 논리를 감춘 것이 공정의 논리다. '나는 너를 미워해'를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저항하고 적대적으로 나오니까, '나는 너를 싫어해'를 간접화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상처를 덜 받으니까. 자신이 나이스해 보이니까.

 

그러나, 그러한 화법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는 공정을 통해서 '나는 너를 미워해'의 관계를 내면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보다 '나는 너를 미워해'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고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더 많은 욕심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공정의 덫에 빠져 있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한국 보수당의 새로운 젊은 총수가 '공정'이라는 가치를 들고 나왔다는 말은 사회가 '공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공정의 덫'이 더 강력해졌다는 뜻일 뿐이다. 공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덫'이라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고, 그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접화법인 경쟁과 그것의 간접화법인 공정의 말에 귀를 닫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여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직접 보여주신 '나는 너를 사랑해'의 새로운 말과 세상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이 더 많은 세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먼저 '공정의 덫'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할 것!

Posted by 장준식

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를 다시 읽다

ㅡ 신학은 종말론적 지성이다.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그때까지 인간을 잠정적인 존재로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적인 작업은 가설이며 언제나 상대화될 수밖에 없음을 신학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역사도, 현실도 끝나지 않은 이때, 죄인인, 불완전한 인간은 진리의 일부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적 지성'이며 달리 말하면 '종말론적 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194쪽)

 

3년 여 전, 일본학자가 쓴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의 학문도 성장한 바, 다시 읽어본 이 책은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다.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묻는 책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 신학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기독교의 사회사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실전에서 목회하는 이들에게는 제7장 '실용주의로서의 신학'이 매우 도움될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기독교 신학이 청교도 DNA에 따라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실용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쓸모'에 방점을 두는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 안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실제적' 도움이 될지, 상당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러나 '미국적 기독교'가 가져다준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은 미국적 기독교를 마냥 환영하고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 또한 떠맡게 된다. "즉 시장화된 신학계에서 그 신학의 좋음과 나쁨,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교파의 지도자, 대학교의 신학자들,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비자들, '대중(교인/나의 첨가)'이다."(174쪽). 이 말은, 곧 시장화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장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적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성공은 '시장화된 교회'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다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의 성공 신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먹히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자본가적 스펙/교회 운영을 잘 할 것 같은 스펙)을 쌓으면 시장화된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청빙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 원리를 아는 목회자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을 쌓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고, 목회 성공의 기회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스펙 쌓기 때문에, 그렇게 스펙을 쌓은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바람에 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교회와 목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시장의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할 것인가. 목회란 시장의 개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하는 것인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시장이 보장해 주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시장의 권력은 강력하고, 우리는 벌거벗었고.

Posted by 장준식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

 

'주권-국민국가'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주권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국민을 이루고, 그 국민이 자신들의 주권을 국가에 (계약에 의해) 위탁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개념이 바로 근대에 생겨난 '국가'의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산다. 그래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세금도 내고 징집도 되고 열심히 일한다. 현대 정치철학은 국가에 대한 그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출현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들의 비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주권-국민국가'의 신념을 산산이 부서뜨린다. 대신, 국가를 '주권-국민'에서 분리시킨다. 이것은 더 이상 국가 주권을 가진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국가는 시장과 대립관계에 있으며, 국가는 시장에 대하여 간섭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더이상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는 기구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는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 잔인한 경쟁 원리를 내장한 시장 질서를 국민들에게 관철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 즉 무한경쟁 원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주권-국민'을 통제하며 법을 무기 삼아 시장원리에 국민들이 지배되도록 강제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주권-국민'은 국가의 변절로 인하여 당황스럽고 황당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질서에 의하여 자신이 시장의 하위 주체로 전락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국가는 각종 복지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현대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백신 접종 문제를 통해서 이것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접종을 권고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즉 복지혜택으로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이유는 시장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이다. 즉 자본가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노동자가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추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국가의 임무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주권-국민'을 자본이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시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팬데믹 상황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의 유연화에 불가피한 타격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은 '주권-국민'을 다시 자본이 원하는대로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백신 개발을 위한 국가의 저돌적인 투자, 그리고 개발된 백신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투여시키는 정책은 '주권-국민'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즉 시장을 위한 충성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국가의 통치술을 '벌거벗은 생명'의 통치(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주권-국민'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를 위하여 국민들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가 행한 백신개발과 백신공급을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그것은 가장 큰 착각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더이상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국민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배신에 저항하려고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벌거벗겨져 있으며, 백신을 맞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이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구원하리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인간의 위약함(weakness)]

 

인간의 위약함이란 인간 이하로, 즉 존재의 무의미로 추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의 이러한 위약함을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규정해 주는 신학 용어가 바로 '죄(sin)'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위약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나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조에ζωή'라는 신학적 개념은 인간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제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존재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은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인류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체계나 과학기술의 발전도 모두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지배 통치술로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로 그것에 자신의 생명을 맡겨버림으로 인하여 그것에 의해 자유를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조에'라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배 통치술에 대한 반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조에'를 주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약함, 즉 존재의 무의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의 영 이외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에(하나님의 생명)'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하기 보다, 다른 것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한다. 가령, 건강, 경제적 풍요, 세련된 정치체계 등,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으며, 우리는 점점 더 '조에'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 끝간 데 없는 불안,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원래 유약한 것인데, 그 유약한 존재의 구원을 구원하지 못할 것들(우상)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불안은 이유모를 불안이 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정치신학]

 

정치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류 역사가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치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낸 행위를 뒤집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밀려 공공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종교'는 더 이상 공공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힘들어졌다.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더이상 종교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더 이상 종교의 지혜를 듣지 않게 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특별히 허무주의의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는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파국' 앞에서 다시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의 지혜를 발현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졌다.

 

정치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두 왕국 이론'은 이 세상에 마치 두 왕국(교회와 정부)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두 영역 간의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유되어 왔으나, 그것은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참한 오해이다. 이러한 조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적대적으로 싸우고 있다.

 

정치신학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어떻게 견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정치 비전이다. '주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긍정이며,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다.

 

정치신학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저주나 멸망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랑의 보듬음이다. 공공영역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복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끔 공공영역을 이끄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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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형도의 시 '소리의 뼈']

 

김교수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드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1989년 3월 7일 새벽, 2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 그리고 그가 남긴 시는 그 이후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을 읽는 것은 그당시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의 시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시집의 제목을 정하기도 하고 그의 시에 대한 평론을 쓴,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의 공로가 큽니다. 김현은 기형도 시에 녹아 있는 '죽음'의 모티브에 주목했고, 그래서 시집의 제목도 '입 속의 검은 잎'이라고 정했죠. 기형도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이 그의 시 세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형도의 시는 한국 예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시 제목을 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와 "질투는 나의 힘"이 그것이죠. 그리고 그의 시 "우리동네 목사님"은 '진보적인' 목사님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도 했죠.

 

위의 시 "소리의 뼈"에 등장하는 김교수처럼, 때로는 저도 강단에 올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내려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설교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설교'를 통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를 해야하는 목회자로서, 불가능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늘 불안한 마음과 부족한 마음,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설교하려고 주일 강단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오면, 교회가 갑자기 술렁대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심정으로 매주일 강단에 섭니다. 내가 지금 뭔가 설교를 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심정. 나는 침묵할테니,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라는 심정. 우리 모두, 설교 시간에 발생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하는, 좋은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침묵해야 하는데, 오늘도 말이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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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문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큐티의 영향으로 성경을 '구절구절' 읽고 묵상하는 데 익숙하다. 구절구절을 읽다 은혜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에 밑줄을 진하게 긋고, 읊조리고, 외우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그 말씀 구절을 붙들고 하루를 승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구절구절 읽고 큐티하는 방식은 '은혜'가 될지는 몰라도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경읽기 방식을 바꿔야 한다. 큐티식 구절구절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성경 각 권마다 발생하고 있는 목회적 또는 신학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저자가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 지를 면밀히 살펴 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에서 또는 역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적용하여 삶과 역사를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성경읽기를 해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는 성경읽기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 인내와 열심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달리듯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 믿음의 경주에서 낙오되는 구성원이 없도록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

 

믿음의 성장은 나이 먹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세심한 돌봄과 끈질긴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앙의 성장을 일으키는 성경읽기가 아닌, 하루 반짝 은혜만 받고 마는 성경읽기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런 성경읽기로는 이 악의 시대를 건널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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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발전]

 

이성의 발전 역사를 보면, 이성은 사물(자기 바깥의 존재)을 '파악'하는 기능을 가지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파악'은 분석해서(또는 분해해서 / 조각조각 나누어) 손에 쥔다는 뜻이다. 이성의 파악 능력은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었다. 즉,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입장에 올라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해 보인다. '사물'을 조각조각 내서(파악해서) 그것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고, 이성을 가진 인간은 우쭐해졌을지 모르나, 사물이 가진 '신비'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인간의 마음과 현실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파악해서 자기 아래 둔 존재에게서 '황홀감'을 느끼거나 '경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사물을 활용하거나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만드는 일에는 탁월해졌으나, 사물을 자기의 대화상대로, 즉 친구로 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한 없이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발전을 되돌아 보고, 이성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사물을 지배하기 위해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외롭게)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인간은 이성을 발전시키되, 사물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사물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사물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일찍이 신앙의 선조(선배)들은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믿음은 이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이성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믿는다는 것은 사물을 파악하여 자기 아래 두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신비를 발견하여 그 신비 안에 감추어진 신적 아름다움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인간이 이 우주에서 외롭게 쓸쓸히 죽어가지 않으려면, 이성을 버리고 믿음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발전시키되 믿음을 지향하는 이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신비한 이 세계는 '파악'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명칭의 의미]

 

'무기원'을 상정하는 온당한 이름은 '성부'입니다.

그리고 '무기원'을 지닌 낳음을 받은 자의 합당한 명칭은 '성자'입니다.

또한 무기원적으로 생기거나 발출 혹은 유출하는 존재의 적절한 이름은 '성령'입니다.

The Proper Name of the Unoriginate is Father, and that of the unoriginately Begotten is Son, and that of the unbegottenly Proceeding or going forth is The Holy Ghost.

(Gregory of Nazianzos, Fourth Theological Orations, 19)

.........................................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명칭을 '인간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자식'이어서 '성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여서 '성부'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신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본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더욱이,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기독론의 발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서 고안된 언어이다.

 

성자를 '독생자(only begotten son)'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에게 자식이 단지 한 명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고안된 언어이다. 하나님에게 '낳음을 입은 자'는 오직 '성자' 밖에 없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을 갖는다. 즉, 성자는 하나님이다.

 

성령에게는 'unbegotten'이라는 용어가 붙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이기는 하나, 성자와 다른 위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Godhead)을 '성부'와 '성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부장적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명칭을 굳이 여성적으로 바꾸려 한다면, '성모'와 '성녀'로 바꾸어야 할까?

 

'성모'는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어진 명칭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과 관계를 더 잘 설명해 주는 명칭을 고안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교부들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일일히 반박하며 그 용어를 더 잘 개진시켜야 할텐데, 그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신학적 논의를 잘 간파하여, 이것이 가부장적인 표현이 아닌,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충분히 숙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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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앙의) 만장일치가 줄어 들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선행에 있어서의 관대함이 감소하는 것과 비례하여 만장일치(unanimity/consensus)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자기 소유의 집과 농장들을 팔곤하였다.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비용을 사도들에게 제공하곤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색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며, 그리고 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팔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동산을 매입해서 늘리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 신앙의 활기는 시들어짐에 따라서 믿음의 능력은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시대를 살펴보면서, 주님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 올 때에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그의 예견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있어서, 의의 법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선행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다가올 두려운 일들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으며, 아무도 주님의 날과 하나님의 진노, 불신자들에게 쌓이는 심판, 배교자들에게 지정된 영원한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믿는다면, 우리 양심은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그러나 우리 양심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믿는다면, 주의할 것이고, 만일 주의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

 

이것이 누구의 글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이것은 요즘 시대의 어느 '선지자'가 이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3세기에 살았던,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의 글이다. 그는 주후 250년경 노바티안(Novatian)으로 인하여 벌어진 교회의 분열 사건 때문에 쓴 '교회의 일치(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에 대한 글 말미에서 위와 같이 그 당시 교회의 사태를 진술한다.

 

키프리아누스의 이러한 서술은 위안인가 절망인가. 위안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교회의 행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고, 절망의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의 행태의 이러한 역사는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절망이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나 하는 것일까. 요즘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선행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십일조 내는 것도 인색해진 초라한 믿음과 부동산(재산)을 늘리기에 급급한 욕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하늘'이 없는 것처럼 산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활기는 점점 시들어가서 더 이상 시들 것이 없는 것처럼 말라 비틀어졌고, 믿음의 능력은 점점 희미해져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다.

 

키프리아누스는 묻는다. 우리는 사도적 전승을 잘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며 그분의 법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말한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He can no longer have God for his Father, who has not the Church for his mother)."

 

어머니(교회)를 모르니, 아버지(하나님)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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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정치신학 ㅡ 정치경제학]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그것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악한 일들의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조력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이다.

 

신학의 정치적 측면, 그리고 경제의 정치적 측면을 본다는 것은 신학과 경제가 지배자들에 의해서 자기 지배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신학'을 말한 카를 슈미트와 '정치경제학'을 말한 카를 마르크스에게서 만천하에 드러난 사실이다.

 

종교(신학)와 경제는 사람들이 '삶'을 의미 있고 평안하게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몰두할 수밖에 없는 분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 삶의 전부다. 경제는 인간 삶의 전부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삶의 문제에 해당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종교와 경제를 이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의 모든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를 통한 지배계급의 지배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고,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점점 더 종교화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에서 귀족정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입고 지배계급은 생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노예제도에서 봉건제로, 그리고 자본가-노동자 제도(자본주의)로 발전했다.

 

18세기에 등장한 자본주의 제도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등에 업고 등장했지만, 그것은 아주 세련된 노예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이제 금융자본주의로 그 모습을 탈바꿈하여, 아주 교묘하고 절묘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신학)와 경제가 인간의 해방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인간의 억압을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이용당하고 있는 종교와 경제는 자신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만큼 그 억압과 착취의 메커니즘이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 공부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배논리, 즉 억압과 착취 메커니즘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공부이다. 만약 그 억압과 착취의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신앙생활)을 하거나 경제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과 착취의 조력자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쌍한 인생을 살거나 죄짓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 특별히 목회자들은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의 시작은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이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