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자기 혐오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8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한 책이다. 그 중에 ‘끝없이 죄책감을 주는 교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교회를 떠난 이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신앙심이 크게 고양된 시기나 경험 같은 것이 있나요?” 이에 대하여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삶이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신앙도 강해졌던 것 같아요. 첫사랑이랑 헤어졌을 때, 국가고시 앞두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시험에 붙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거든요. 그때 교회에서 한 3시간을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아이 낳기 전에도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느낌보다는 내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죄책감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했던 것 같아요. 결혼생활 중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그 이후로는 더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56쪽).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접하고 이해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감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기 객관화 개념이지 자기 혐오를 조장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존재를 구성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인 통찰이다. 우리는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인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파묻혀 있으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죄는 바로 메타인지에 대한 신학적 용어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혐오를 불러오면 안 되고 자기 객관화, 상대방에 대한 객관화를 불러와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신학적 메타인지를 통해서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욕망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바로 ‘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죄’의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자기 혐오를 이루고 타인에 대한 혐오를 이루는데 쓰여왔다. 건전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를 구분하는 방법은 ‘죄’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건전하지 못한 교회, 특별히 이단교회는 ‘죄’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혐오를 심어준다. 이는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불안을 유발하게 되고,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메카니즘은 한 인간을 착취하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위의 인터뷰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책감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해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기도할 뿐이다. 죄책감은 결국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 이렇게 죄의 개념을 자기 혐오를 이루는 죄책감의 측면에서 유용하는 교회는 떠나는 게 좋다. 신앙은 자기 혐오를 불러오지 않는다. 신앙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자기 혐오/타인 혐오를 불러오는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는 빨리 떠나는 게 좋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