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근대(또는 현대/modernity)는 경제의 자본주의화, 그리고 정치의 민주주의화 시대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곧 '근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근대를 공부한다는 것, 근대를 직시한다는 것, 근대를 논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직시하고 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토대를 이룬 근대의 시민들은 그것들에 의해서 삶이 주조되어 왔다. 즉, 근대인(현대인)은 소비자로, 그리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소비자가 아니면, 그리고 민주시민이 아니면 근대를 사는 모던 보이(boy), 또는 모던 걸(girl)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근대인이다. 더 이상 19세기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 산 사람도 모두 20세기 사람이다).

 

근대(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모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토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벗어나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비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민주시민은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가치나 민주주의의 가치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부합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극명하게 대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무엇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소비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민주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소비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소비하고, 민주시민의 상태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갈등이 심화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상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국가의 절대적 '폭력' 또는 '권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인데, 세속적 신(god)인 국가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늘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 '꼴통'이 되거나, 아니면 '배교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고 있는 대다수 기독교 신앙인들은 '꼴통'이 된 듯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건전한 경제와 정치 체제를 세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악의 기독교인은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이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신앙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과 같다. 거룩이란 구별된 삶인데,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는 삶의 태도만큼 구별된 삶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기 위해서, 현재 우리 삶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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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