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위기]

 

"자유와 민주주의 원리상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을 통제할 수 있다. 경제권력은 정치권력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협하는 힘이다. 피지배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배자를 통제할 수 있고, 그 통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경제권력도 통제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76쪽)

 

한국의 국가체제를 고려해 볼 때 여기서 피지배자는 '국민'을 말하고, 지배자는 '선출직 공무원'을 말한다.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용어를 많이 접한다. 왜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일까?

 

위의 문장을 통해서 파악해 보자면,

첫째,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일수도 있고, 경제생활(먹고사니즘)에 매여 있는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여력없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먹고사니즘의 지옥에 처박아 놓고 절대로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가진 결정적인 아킬리스건인데,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국가-재벌 주도의 경제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정치권력은 곧 경제권력과 그 뜻을 같이 한다. 정경유착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한국의 상황에서는 정경유착보다 정경애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길은 시민사회가 깨어서 민주주의의 원리가 잘 작동되도록 견제하고 요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생각해 본다. 교회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축복을 빌어주며 그들을 성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고 말면, 결국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민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견제하고, 그들에게 민주적 통제 안에 머물러 있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주도해 나간다면, 교회는 민주주의의 견인차가 될 뿐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goodness)의 실험 현장이다. 인간이 선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현장이 민주주의이다. 종말(선의 실현)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현장에서 선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어디까지 선을 실현할 수 있는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선의 실현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최선봉에 설 수밖에 없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민주주의는 이것의 실천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근대(또는 현대/modernity)는 경제의 자본주의화, 그리고 정치의 민주주의화 시대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곧 '근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근대를 공부한다는 것, 근대를 직시한다는 것, 근대를 논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직시하고 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토대를 이룬 근대의 시민들은 그것들에 의해서 삶이 주조되어 왔다. 즉, 근대인(현대인)은 소비자로, 그리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소비자가 아니면, 그리고 민주시민이 아니면 근대를 사는 모던 보이(boy), 또는 모던 걸(girl)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근대인이다. 더 이상 19세기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 산 사람도 모두 20세기 사람이다).

 

근대(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모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토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벗어나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비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민주시민은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가치나 민주주의의 가치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부합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극명하게 대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무엇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소비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민주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소비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소비하고, 민주시민의 상태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갈등이 심화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상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국가의 절대적 '폭력' 또는 '권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인데, 세속적 신(god)인 국가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늘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 '꼴통'이 되거나, 아니면 '배교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고 있는 대다수 기독교 신앙인들은 '꼴통'이 된 듯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건전한 경제와 정치 체제를 세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악의 기독교인은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이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신앙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과 같다. 거룩이란 구별된 삶인데,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는 삶의 태도만큼 구별된 삶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기 위해서, 현재 우리 삶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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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를 부탁해]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가 건강한 어른이 되듯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받고 자란 국가가 건강한 국가가 된다. 사실 국가란 가상의 세계이다. 실체가 없다. 국가라는 게 따로 있고, 그 국가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아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 그게 곧 국가가 된다. 사람이 국가다. 그 거꾸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이념체계이다. 국가라는 허구에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국가가 봉사하는 체계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이념체제 위에서 출발한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시대정신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활동은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에 일어난 4월 혁명,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항쟁, 2016년에 일어난 촛불혁명 등,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역사였고 민주주의 세상을 열어보려는 의지의 역사였다. 그 누구도 이 시대정신을 거스를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렸다. 구한말 여러 역사적 사건에 엮이게 되고,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독립운동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안창호는 어떻게 해서든 독립운동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하여 각 진영 간의 화합을 위해 양보하고 평화를 도모한 인물이었지만, 이승만은 자기 자신을 최고 정점으로 한 정치운동(독립운동)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국가 건설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만의 기질 탓에 안창호는 주변 동료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리를 이승만에게 양보한다.

 

민주공화국 건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견지해온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그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이승만은 민주공화국을 설계한 자 중 한명이요 그 이념을 지켜내겠다고 자부하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발하고 초대 정식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행보는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사뭇 달랐다. 한국전쟁을 치를 때 보인 행보며, 전쟁이 끝난 뒤 반공과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오히려 후퇴시킨 행보며, 장기집권을 노리며 벌인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결국 4월혁명을 불러왔고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행보가 그렇다.

 

이승만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역사가도 있지만, 대개 이승만에 대한 역사가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역사가들이 이승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반공 프레임과 독재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붉어지고 있는 '대통령 집무실 논란'을 보면서, 그것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정책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정책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공약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고, 이전 정부와 차별화를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삶이다. 민주국가의 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돌보기 위한 봉사(ministry)의 힘일 뿐이다.

 

누가 봐도 더 긴급한, 산적한 문제가 많다. 코로나 장기화 사태로 인하여 국민들은 지쳐 있고, 비즈니스가 어려워져 폐업하는 업주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고, 역대급 산불피해로 삶의 터전을 몽땅 잃어버려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급 비호감과 초박빙 대선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마음이 둘로 나눠져 있다.  

 

이러한 시기에 대통령직에 당선되자 마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정치행태는 매우 비민주적으로 보인다. 사는 게 어려운 국민을 먼저 돌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집권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려 한다면,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면 무리해서 지금 당장 그 일을 시행하려 드는 것보다 임기 내에 필요에 따라 차츰차츰 진행해도 될 일이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따른 혼란과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 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하는 대통령,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려면 청와대 같은 권력형 청사에서 나와 좀 더 시민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하며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당선자의 신념과 고집 보다는 국민적 공감과 합의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자이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은 실체이다.

 

국민이나 정권이나 행하는 모든 일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정권을 잡은 자가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서 자신의 봉사적 힘을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쓰고 만다면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 곱지 않게 기록될 것이다. 얼마나 치욕인가. 역사에 치욕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주의가 많이 필요하다. 아직 자유가 충분하지 않고, 평등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 충분해서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며 사랑하게 될 때까지 민주주의를 밀고 나가야 한다.

 

새로운 정부에게, 민주주의를 부탁한다.

Posted by 장준식

[강의의 한 구절]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개혁파가 도덕적 정의만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것에 반해서 보수 우파들은 동원하지 않는 전략전술이 없습니다. 엄청난 기만과 정보를 동원합니다. 기묘사화 때도 훈구파들이 잎사귀에다 꿀물로 주초위왕이라고 쓰고 벌레가 파먹게 해서 그걸 임금한테 갖다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개혁 사림의 가치가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자 훈구 척신들은 재빨리 개혁 이미지 속으로 피신합니다. 변신에 능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이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영복, <강의>, 329-393쪽)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며 개혁의 토대를 마련하고 싶은 사람은 <강의>의 22장 '피라미드 해체'를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그곳에서 신영복 선생이 제시하고 있는 개혁의 토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중앙에서 지방으로

2)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

3)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사회개혁은 하루 아침에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 아침의 혁명은 또다른 기득권을 낳을 뿐이다. 사회개혁은 교육처럼 백년지대계의 전략으로 가야한다. 무엇보다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의 전환이 중요하다. "사회 변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상 투쟁은 그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382쪽).

 

정치철학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로서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 기독교 사상은 사상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충분히 되고도 남는 사상과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 변혁은 커녕 사회 변혁의 걸림돌을 넘어 사회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한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사회 변혁의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더 깊게, 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부터 그리하려 한다.

Posted by 장준식

[무위의 공동체]

 

현대철학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종말론적이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나 장 뤽 낭시의 무위 개념은 모두 나의 눈에는 기독교의 종말론 개념처럼 보인다.

 

노장사상이라고 알려진 '무위' 개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협조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정확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태도와 일치한다.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이 세계에 갇혀 있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것이 무위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어떤 관념적 틀이나 제도적, 또는 사회적, 집단적 틀에 갇혀 있다. 갇혀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틀을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순응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장 뤽 낭시는 이러한 태도를 거부한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따지고 보면 낭시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왜 해체가 필요한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관념적, 제도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등 모든 틀들은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정의 세상이지 완성의 세상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에 담긴 생각이다. 종말론은 이 세상을 잠정적인 것으로, 즉 고정되거나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낭시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교회는 무위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의무를 지닌 것이다.

 

혐오와 배제, 그리고 폭력이 왜 발생하는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려는 욕망이다. 자신의 육체성(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성)이 절대이고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지는 필연적으로 혐오와 배제, 그리고 폭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현실성에 묻힌 자는 그 현실에 숨막혀 죽거나 그 현실성이 전부인 양 그 현실을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며 살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자기 현실에 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온갖 협박과 술수를 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지옥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말론적 태도를 견지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잠정적인 세상이지 종결된 세상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 파묻히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세상을 현실에 이루어내기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한 무위의 인간, 무위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고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현실이나 미래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가정되는 모든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지평을 넘어서는 계획/기획/프로그램의, 관념으로 동일화될 수 있는 모든 구도의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의 근거가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 근거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이미 결정된 사회나 결정되어야 할 사회로부터 돌아서는,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박탈과 비움의 움직임, 즉 무위의 움직임이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다"(<무위의 공동체>, 263쪽, 옮긴이의 해설 중).

 

무위의 움직임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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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세습을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로 분리하여 비난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지 교회세습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문맥(모든 것이 성장 발전해야 한다, 증식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교회세습은 목회자가 행하는 자본축적의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세습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문맥에 갇혀버린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윤리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세습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성과 신앙을 해치는지를 반성해서 자본문맥에서 자유한 탈자본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후기 근대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구조적 반성이 없다면 교회세습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윤리적 비난은 교회를 갈등으로만 밀어넣을 뿐 아무런 해결도 하지 못할 것이다.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참새한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라고 다그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참새가 다니는 길에 방앗간을 놓지 않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주조된 소비적, 소유적 인간이 어떻게 교회세습의 유혹을 뿌리치겠는가. 교회세습은 소비와 소유 욕망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절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하나도 자유롭지 못한 노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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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으로부터]

 

2014년 8월 10일 (일) 흐림 국지적 소나기

 

소설가 유순하 씨의 기사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평생 주변인으로 살아왔다"고 토로했다. 에세이 서언에선 “갈 데 없는 몽상가였지만 그것이 나의 생애였고, 그래서 미치거나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자족감마저 느끼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게 부끄러운 시대를 맞아 '주변인'이라는 정체성이 그에게 사명을 일깨우고 이끌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주류와 주변인. 누구나 주류에 속해 살고 싶어한다. 주변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주류에 속해 산다는 것은 유순하 씨의 말대로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비유의 위력>을 보면, 마가복음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마가의 복음을 도전하는 비유로 읽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름 있는 사람보다 이름 없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기독교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면서 마가복음이 도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내에 지도자들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주위를 환기시킨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대로 권력과 권위와 리더십을 행사한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가!"(263쪽).

 

그렇지 않은가? 교회 밖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소위 주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목회자들의 행태를 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처럼 보인다. 교회를 세습하고, 비자금을 조성하고, 스캔들을 일으키고, 복음을 장사치처럼 팔아먹고, 욕망의 노예처럼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이 땅에서 주류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니 차라리 유순하 씨처럼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양심을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이 아닐까?

 

'주변인'이란 말, 낯설지만 낯설지 않게 마음에 와 닿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4년 8월 10일에 쓴 일기다.

 

요즘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냥 나의 지난 세월에 대한 기록(일기장)을 들춰 보게 됐다. 그때의 묵상처럼, 요즘은 정말 '주류'의 타락이 너무 심해서 주류에 속해 산다는 것 자체가 타락 그 자체가 되었다. 주변인으로 사는 게 속시원하고 의롭고 이로운 시대다. 주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은 '나는 타락하고 싶다. 나는 타락하는 것을 욕망한다'라고 외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므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변방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히려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의 왜곡된 시선을 까발린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을 조금 가진 사람(지식인)이라면 사이드의 말처럼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으로 살아, 변방으로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며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 삶 아닐까.

 

실로, 변방의 사람들(주변인)과 연대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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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유]

 

"자유롭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한다... 자유는 도망치기 위해 터널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제임스 K. A. 스미스는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따라 현대 실존주의 철학이 제시한 '자유'에 대한 개념을 반박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유에 대하여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freedom as self-determination)' 밖에는 다른 자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에게 자유란 "선으로 간주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조해낸 이러한 류의 자유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동을 건다. 그에 의하면,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그러한 자유를 꿈꾸고, 그러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도시로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러한 류의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더 절망스러운 것은 하나님 조차 잃어버리게 하는 거짓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자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러한 세속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고 착각하며, 거리낌 없이 '자기 결정권으로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나 자신의 결정, 나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내 맘대로'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의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현대 실존주의 철학, 특별히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으로부터 발생한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유의 개념을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제임스 스미스는 일그러져버린 자유의 개념을 되살리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영적 순례를 면밀히 살피면서, 그리고 ‘실존주의자들 사이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가브리엘 마르셀의 통찰을 빌어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러한 통찰을 안겨준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한다… 자유는 도망치기 위해 터널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 119쪽).

 

나는 무엇보다 제임스 스미스가 인용한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친구 귀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의 지혜가 마음에 와 닿았다. 자유에 대한, 정말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함께 귀 기울이기 원하는 마음을 담아 좀 길지만 인용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당신은 속박을 당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당신은 탈출을 꿈꿉니다. 하지만 신기루를 경계하십시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도망치거나 달아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에게 주어진 좁은 공간을 파고들어 가십시오. 당신은 거기서 하나님과 모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평선에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본질(substance) 안에 잠들어 계십니다. 허영은 달아나지만 사랑은 파고들어 갑니다. 당신이 자신에게서 달아난다면 당신의 감옥이 당신과 함께 달릴 것이며 당신이 달아나는 그 바람 때문에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 안으로 깊이 내려간다면 그것(감옥)은 낙원 안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있는 자리를 떠나 먼 곳에 갈 필요 없다. 자유는 내 안에 있다. 자유를 원한다면 멀리 달아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파고 들면 된다. 나의 저 깊은 곳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9-20-2021에 쓴 글. 늦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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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평화는 가능한가]

 

나는 어제 교회 앞에 새로 생긴 일본 그로서리 스토어(Osaka Grocery Store)에 가서 식료품을 샀다. 오늘은 교회 앞에 있는, 일본 그로서리 스토어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새로운 장소에서 오픈한 중국 마켓(Ranch 99)에 가서 장을 봐 왔다.

 

원래는 15불 거리에 있는 한국마켓(H-Mart)로 장을 보러 다니지만, 교회 앞에 있는 일본 마켓이나 중국 마켓에 가도 내가 평소에 먹는 음식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 마켓에 가서 장을 봐도 별 문제가 없다.

 

한 가지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일본 마켓에서는 한국 제품을 팔지 않는데, 중국 마켓에는 한국 제품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중국이 일본보다는 친한국 성향이 강한 것 같기도 하다. 한국 마켓을 가면 한국말 하는 캐쉬어 아주머니가 일하고, 중국 마켓에 가면 중국말 하는 캐위어 아주머니가 일한다. 일본 마켓에서는 계산하고 나갈 때 당연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는 인사를 건넨다.

 

한국 마켓은 한국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중국 마켓은 중국인들에게, 일본 마켓은 일본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인구가 많은 이곳 배이 지역(Bay Area)은 어느 마켓이든 장사가 잘 된다. 그리고 한국 마켓이라고 한국 사람만 가는 게 아니고, 여러 민족들이 한국 마켓을 이용한다. 중국 마켓, 일본 마켓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함께 어우러져 산다.

 

아우 김성래 목사 교회(Aldersgate UMC)는 일본인 교회(Japanese American Church)다. 그 교회가 정말 특이한 것은, 교회는 일본인 교회인데 담임목사는 한국인이고, 평일에는 중국인들이 데이캐어센터를 교회 건물에서 운영한다. 한 공간 안에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그리고 영어가 공존한다.

 

2차대전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아주 큰 괴로움을 겪었다. 진주만 폭격 후에 미국 정부는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Manzanar Concentration Camps라는 곳에 감금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캘리포니아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인들을 핍박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언론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그때의 충격으로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은 본인들의 정체성을 아메리카나이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일본 본토와 거리를 둔 것이다.

 

2차대전 당시 한국인들, 그리고 중국인들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다.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가 사죄해야 해아할 대상은 한국인,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민족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도 해당된다. 악한 일이 발생하면 이렇게 구석구석 아픈 일이 발생하는 법이다.

 

동일한 역사로부터 당한 아픔의 색깔은 다르지만 '아픔'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녀서 그런 것일까, 캘리포니아의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지 않다. 중국인들도 미국에 이주하여 노동자로서 고생을 너무도 많이 해서 아픔이 많은 민족이다. 이렇듯, 아픔은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의 띠인 것 같다.

 

평화는 가능하다. 서로가 지닌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평화는 가능하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나는 한,중,일 민족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경험하고 있고, 나도 그 일원으로서 평화에 동참하여 산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민족주의의 색채는 옅어지는 것 같고, 인류애가 짙어지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평화가 묘연한 요즘, 평화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근대의 민족주의 국가 개념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삶을 생각하며,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사느라 고통 가운데 있고, 아픔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사순절을 하루 앞두고, 삼일절에, 평화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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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개 넘치는 기독교 인간론]

 

'기개(氣槪)'란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기개를 담고 있다. 정말 그렇다.

 

삼위일체론의 완성(?)에 발판을 놓았던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저서 <성육신에 관하여 On the Incarn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을 '신화(神化/,theosis)'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어 간다.

 

이러한 진술을 단순히 교리적 진술로만 보면 곤란하다. 그러면 '신화' 교리는 참 우스운 교리가 된다. 우습기 전에 이해가 되지 않는, 우리의 일상과는 참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교리는 존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이지 박제된 생각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의 인간론을 참으로 대담하게 진술한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라니, 감히 누가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하면 가히 웃음이 나오는 진술이다. '에이, 무슨 소리하는거야. 우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어! 장난 치지 마!'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오는 진술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인간론만큼 기개 넘치는 인간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화(theosis)에 대한 인간론을 펼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이 타락한 세상에, 이 비참한 세상에, 이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화만큼 정치적인 진술이 없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는 이러한 기개를 지닌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인간을 '개 돼지'로 보면서 피지배자들을 비웃으며 권세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의에 기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성육신의 교리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아무리 비참하고 불의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거나 기죽지 말아야 한다. 누가 감히 우리의 인간성을 훼손할 수 있으랴. 누가 감히 우리를 '개 돼지' 취급할 수 있으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처럼 되어가는 존재이다. 신적인 존재, 그 고귀한 존재의 품위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으랴.

 

신화(神化)적인 존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그 어떠한 행위도, 그 어떠한 정치세력도, 그 어떠한 불의도, 우리는 거부한다. 그리고 저항한다. 기개를 저버리면 지는 것이다.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품고,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기 위하여 무쏘의 뿔처럼 가자.

Posted by 장준식

[해석의 중요성]

 

텍스트가 중요한 것을 두말할 필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너무도 자주 간과한다. 이것은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두 손에 쥐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발생하는 가장 빈번한 실수이다.

 

텍스트를 제대로 독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전일수록 더 그렇다. 고전 중의 고전인 성경에 대한 독법은 정말 쉽지 않다. 해석은 텍스트 자체가 지닌 무게와 의미를 가늠해 보는 일 뿐 아니라 그 무게와 의미를 우리 시대에서 다시 재어 보는 일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어떻게 읽어냈으냐는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독법에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십중팔구 다음과 같이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세상 나 혼자 사는 거야! 즉, 이것을 인생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니 누군가를 의지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독법 아래서 인생은 원래 외로운 거라고 자위하면서 누구도 나를 도와줄 이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마음 먹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형편 없는 독법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인생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장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고정된 도(道)가 없으니 우리가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게 좋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 한다. 그들이 정해준 길,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기 보다, 자기 자신이 길을 개척해서 걸어가는 삶,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정신을 보여준다.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거야'와는 다른 결을 가진 말이라는 뜻이다. 인생은 외로운 게 아니라 자유로운 거다. 인생이 외로운 이유는 자유롭지 못해서이다.

 

이와 같이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그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법, 해석이 더 중요한 법이다. 해석의 잘못은 삶의 잘못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경 독법은 QT로 대표되는 수준에서 맴돌 뿐이다. QT 수준의 독법은 아전인수의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 읽기, 기복적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욕망의 표현 밖에는 안 된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경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형태,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성경을 잘 해석하기 위하여 수많은 학자들이 성경 해석에 달려들었고, 그 해석의 역사는 고스란히 기독교 역사로 남아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성경을 해석해온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해석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역사성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성경 해석의 역사, 즉 기독교 역사를 무시하고 그냥 성경으로 들어가 성경을 읽어내는 일은 복음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무모한 신앙인일 뿐이다. 이는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바다에 뛰어드는 일과 같다. 바닷물만 마시다 나올 수 있고,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일은 언제나 준비와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역사와 소통하며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입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시대 가장 무용한 무당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그냥 믿음으로 받으라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라고 말하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다. 은혜로운 말 같으나 사람들을 인간으로 만들지 못하고 짐승으로 만들고 노예로 만드는 것과 같다. 주체적이지 못한 것은 순종이 아니라 광신일 뿐이다.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역사와 진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소통하며 해석의 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입을 다물든지 해야 할 텐데, 입을 여는 일은 쉽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으니,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들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야말로 말씀의 공중부양 시대이다.

Posted by 장준식

[케노시스 - 겸손 - 그리스도의 마음]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려는 것입니다"(담론, 72쪽).

 

신영복은 <담론>에서 주역의 궤를 설명하며 겸손이 무엇인지를 위와 같이 말한다. 주역의 '지산겸괘'는 땅 속에 산이 있는 형상인데, 덕목 중 겸손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쾌이다. 그리하여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라 불린다.

 

기독교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로 시작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케노시스라고 부른다. 주역의 괘를 통해 표현하면, 예수의 케노시스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겸손과 같다. 그러므로 동양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적 사고로 예수는 '성인군자'로 불려왔다.

물론 기독교 일각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인군자'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 신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유교적 사고 틀 안에서 '성인군자'라는 표현은 신적인 경지에 이른 인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고의 칭호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케노시스의 마음, 즉 겸손의 마음이다. 그래서 겸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겸손은 관계성의 문제이다. 겸손은 그냥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구원은 결국 겸손의 열매였던 것이다.

 

케노시스, 겸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는 누구라도 구원을 창조할 수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라면 누구나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독점하지 않으신다.

 

우리 시대에 구원과 기쁨은 없고 폭력과 슬픔만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생각은 안 하고, 다시 말해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하여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려는 마음은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여 다른 존재를 자기 앞에 무릎 꿇리거나 줄세우려는 욕망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Posted by 장준식

[Don't Look Up, 돈 룩 업,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의 최후]

 

이 세상에는 진실을 말하는 자와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다.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말한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아서가 아니라, 대개 진실은 고통을 수반하는데, 진실을 말한 사람은 고통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며 7년 가뭄과 7년 풍년에 대하여 진실을 말한다. 요셉이 다가올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요셉이 7년 가뭄으로부터 그 자신만 살짝 비켜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고스란히 온몸으로 가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가뭄의 시기, 고통의 시기를 '함께' 경험하고 가로질러 간다.

 

최근 넷플릭스에 [Don't Look Up / 돈 룩 업]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천문학자와 그의 제자는 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중 거대한 혜성(comet)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 진실을 알리고자 정부와 언론사를 접촉하지만 그들은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혜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 이슈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 만을 채우려 할 뿐이다.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려는 자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간의 전쟁은 'Look Up' 운동과 'Don't Look Up'운동으로 번져, 진영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이성의 꽃이라고 불리는 과학에 대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이성과 과학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현실을 왜곡하는 이성, 현실을 왜곡하는 과학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탓에 현실을, 아니 진실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진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하나의 가치를 위해 도구화 되어버린 이 시대에, 진실이란 이익을 포장해 주는 포장지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이성과 과학이 '탐욕'이라는, '돈'이라는 가치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이성과 과학의 힘은 진실을 감쪽같이 속이는 거대한 악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치 흩어진 진실의 조각들이 진실의 힘으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 같았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지구가 진실을 외면한 대가로 멸망이라는 끝에 다다르는 여정은 감추어져 있는 추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진실의 현미경 같았다.

 

지구로 돌진하고 있는 혜성을, 그 현실을, 그 진실을 쳐다볼 필요 없다고 외치는 'Don't Look Up' 진영과 그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Look Up' 진영의 끝은 결국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전자의 사람들을 그들의 마지막 삶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과 후자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살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준비하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만찬, 그 밥 한 끼, 그 마지막 웃음, 그 마지막 터치, 그 마지막 눈길, 그 마지막 숨소리, 그 마지막 말.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는 인간의 삶을 종말로 몰아넣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위기, 즉 인간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고, 기후 위기, 즉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지금 겉과 안이 동시에 타 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 진실이 다가오는 혜성처럼 눈에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잘 보이지 않을 게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진실을 말하려는 자는 힘이 약하고,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는 힘이 강하다. 'Look Up'의 외침보다 'Don't Look Up'의 외침 소리가 더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더 큰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아의 방주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세상은 그대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실과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땅만 쳐다보며 눈 앞의 일만 생각하고 말 것인가. 우리의 삶은 이렇게 매 순간 진실을 앞에 두고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다. 이 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그러한 자기의 종교적 정체성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땅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간인가? 인간으로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만찬, 그 밥 한 끼, 그 마지막 웃음, 그 마지막 터치, 그 마지막 눈길, 그 마지막 숨소리, 그 마지막 말을 원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성찰적으로 허무에 대하여 말한다. 결국 지구는 혜성과 충돌하고 멸망하고 만다. 바로 그때 힘 있는 'Don't Look Up' 진영의 몇몇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멸망하는 지구를 탈출한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목숨을 구하고 우주를 떠돌다 22,740년 후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 착륙해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영화는 생존자들이 그곳에 있던 타조처럼 생긴 동물들에게 잡아 먹히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의 최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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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베토벤 위기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현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기는 19세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19세기는 '전환의 시대'였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현대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19세기를 연구해야 한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음악은 19세기에 드라마틱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베토벤이라는 인물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토벤은 19세기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위기'를 안겨주었다.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넘어서지 않으면 음악 자체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베토벤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 때문에 브람스는 마흔 살이 넘도록 교향곡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베토벤 위기는 어김없이 슈베르트에게도 닥쳤다.

 

베토벤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을 당시 슈베르트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베토벤은 우리의 독일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고 그의 음악은 비극성과 희극성,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 장렬함과 비통함, 신성함과 익살이 결합된 기괴한 것이다."(프란츠 슈베르트, 68쪽)

 

19세기의 쟁쟁한 음악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아가는 것도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데 큰 즐거움을 준다. 대개는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또는 베토벤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발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해결 방식은 꽤나 매력적이다. 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그렇게 근본적인 탐구 후에 탄생한 교향곡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브람스가 베토벤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다른 말로해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은 베토벤 교향곡의 철저한 영향 아래에 있다.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 클래식 평론가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마치 베토벤이 지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내 느낌이다.) 그러나 브람스 교향곡 2번부터는 브람스의 숨결만 느껴진다. 더이상 그곳에 베토벤의 숨결은 없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는 전혀 베토벤의 숨결이 없다. 매우 독창적이다. 낭만주의 음악 답게 선율도 너무 곱고 아름답다. 호른과 바이올린의 음향이 일품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곡 자체의 아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악장 밖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네 개의 악장을 모두 완성했다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메시아적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음악가 최초로 '작곡으로만 먹고 사는 시대'를 연 사람이다. 그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국가에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슈베르트는 괴테의 시에 곡을 붙여 독일어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가곡'의 대명사이다. 가곡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지만 기악곡에서는 베토벤이라는 거성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과제를 풀기 위해 이 '전업 작곡가'가 시행한 일은 많은 영감을 준다. 위기를 주고 있는 바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 그것이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위기 속에 던져지게 되었을까. 이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위기는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19세기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19세기에 대한 깊은 탐구가 많이 필요하다. 그 탐구의 첫걸음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는 일을 하는 것을 어떨지. 슈베르트 교향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평등과 악]

 

평등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의 3대 가치 중 하나인 평등(egality)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법 앞에서의 평등은 무엇일까? 법은 가치 중립적일까? 법 자체가 평등하지 못하면 법 앞 에서의 평등이라는 평등(egality)는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Venom>을 봤다. 형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외계 생명체 Venom과 한 몸을 쓰는 주인공은 악의 무리와 맞선다. 아이들은 이 영화가 재밌다는데, 솔직히 나는 무엇이 재밌는지 모르겠다. 정신 사납기만 했다. 나는 마동석 나오는 이터널스가 더 재밌다고 생각해서 물어봤는데, 아이들은 이터널스보다 Venom이 재밌다 한다.

 

Venom에서 악당은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악당은 주인공의 방문 중 그와 다투다 우연히 Venom의 성분을 맛보게 되고, 그 안에서 Venom은 악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갇혀 있던 자신의 연인을 구하여 둘은 큰 힘을 발휘하며 세상을 휘저어 놓는다.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으로 구성된 악의 세력. 둘은 사랑의 키스를 나누고,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평등과 악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평등이란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특징이 있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언제나 백인이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백인이다. 그리고 흑인이나 동양인들은 모두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의 조력자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을 망치는 악한 인물 또한 백인이다. 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늘 백인이 주인공이다. 또는 백인을 닮은 외계인이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백인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악을 저지르는 악당은 늘 백인이라는 것이다.

 

착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일은 힘 있는 자만 저지를 수 있다. 역사에서 백인은 늘 힘 있는 자였다. 역사에서 백인이 저지른 악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에서 여자 흑인 악당이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평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마음 불편해한다. 우리는 은연 중에 마이너리티는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평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차별이고,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평등'하지 않은 지 알 수 있다.

 

백인이 저지르는 악한 일은 참아내면서, 왜 흑인이나 아시아인 또는 장애인, 아니면 성적 소수자가 저지르는 악한 일은 왜 참아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백인들의 스토리텔링 안에서 왜곡된 평등의 개념을 내면화시킨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히어로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악당이 누구인가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백인이 히어로로 등장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재미없다는 심리적 불만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악당은 늘 백인인데, 악한 일은 마치 백인만 저지를 수 있는 권리인 것처럼, 악에 대한 평등의식 자체가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된 평등은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백인 또는 힘 있는 자만 악한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