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하나의 철학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10권을 읽고 1000권의 효과를 얻는 책 읽기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자기계발 책 같은데,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은 단순히 실용서가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기도 하죠. “그렇기에 이 책이 그저 단순한 실용서로 읽힐 것이 아니라 읽기에 대한 생각을 묻는 아주 가벼운 철학서로서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희망한다”(9쪽).

 

이 책은 ‘다독’이 미덕이 된 우리 시대의 독서 풍경을 되돌아보며 교정해 주는 책입니다. 다독(책을 많이 읽는 것)만이 독서의 미덕이 아니라, 책을 적게 읽는 것도 얼마든지 삶에 큰 의미를 준다는 것이죠. 책의 제목처럼, 천 권의 독서보다 열 권의 독서가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천 권의 독서를 했지만 독서를 많이 했을 뿐 거기에서 남는 게 없다는 정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열 권의 독서를 했어도 그 독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면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독(少讀/적게 읽기)-심독(心讀)-탐독(探讀)-숙독(熟讀)’할 것을 권합니다.

 

요즘 ‘독서모임’이다 ‘인문학 공부’다 ‘뭐’다 해서 책 읽는 모임이 많습니다. 독서를 통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문학 열풍은 실제로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고, 그것이 좋은 직장을 얻는 데 도움이 되고, 수입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열풍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책을 ‘욕망’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에 있어, 책은 성숙의 대상이 아니라 성과의 수단인 것이다”(20쪽).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할까요? ‘나’는 왜 책을 읽고 있습니까? (물론 책을 잘 안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은 별 의미가 없겠습니다만) 독서는 성과의 수단인가요, 아니면 성숙의 대상인가요? 독서는 참 좋은 것이고, 원래 독서는 ‘영혼의 양식’이라고 불리며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인생의 동반자였는데, 어느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독서를 성과의 수단, 즉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이 책에서 읽은 문장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여유를 가지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이다. 느리게 걷는다 해서 도착이 늦어지는 것은 아니다”(106쪽).

 

정말 그렇죠.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잉의 시대입니다. 과잉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지구도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과잉을 좆아서 삽니다. 무엇이든지 비워내기 보다, 무엇이든지 채우고 넘쳐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불안은 끝없습니다. 과잉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신기루이기 때문입니다.

 

과잉의 시대에 결핍은 부족함이나 불안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철학입니다. 결핍되었다고, 부족하다고 덜 행복하거나 인생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과잉이 아니라 결핍을 지향하는 것,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기독교의 구원은 결핍을 통해서 왔습니다. 결코 과잉을 통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잉의 시대에 결핍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이자,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신앙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나를 열어주세요

 

나희덕 시인의 시 중에 <나를 열어주세요>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세요.

 

옆구리에 열쇠구멍이 있을 거에요.

찾아보세요. 예, 거기에

열쇠를 꽂아주세요.

아니면 태엽이라도 감아주세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열쇠를 찾을 수 없다고요?

당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잖아요.

손가락만큼 좋은 열쇠는 드물죠.

때로는 붓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는 손,

지문의 소용돌이를

열쇠구멍의 어둠에 가만히 대보세요.

예, 드디어 열렸군요.

이제 구멍 밖으로 걸어갈 수 있겠네요.

태엽을 넉넉히 감아주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

내 구두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어

통, 통, 튀어 올랐다가도 이내 가라앉고 말지요.

혹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눈먼 둘부리에 걸려 넘어진 줄 아세요.

당신의 인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일으켜줄 어떤 손을 기다리면서.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인형이 말을 하는 듯합니다. 누군가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는 인형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인형은 누군가 태엽을 감아주어 머물러 있던 자리에서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형처럼 상상합니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죠. 인생은 기본적으로 지루하고 답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기분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인형의 바람대로 누군가(물론 인형의 주인이겠지만요) 태엽을 감아줍니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된 인형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는 인형은 누군가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지루해 하고 답답해 하면서 일탈을 꿈꿉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우리의 삶을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좋습니다. 그런 순간이 바로, 내가 열리는 순간이겠죠. 일상에 나를 열 때, 그 일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맛보게 될 테니까요.

 

일상이 답답하고 지루하다면, 잠시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주님, 나를 열어주세요!”

Posted by 장준식

사순절에 들어서며

 

사순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꽃 피는 봄이 왔네요. 봄에 관한 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문정희 시인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시가 눈에 띕니다.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흰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나희덕 시인은 <어떤 나무의 말>에서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문정희 시인은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라고 말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거부하는 허무주의가 엿보이지만, 문정희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엿보입니다.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태도에서 어떤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허무주의나 생명에 대한 갈망이나 생명을 깊이 탐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겠죠. 생명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 생명이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하니까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생명에서 벗어나 빨리 좀 쉬고 싶다는 갈망이 담기는 것이겠죠. 또한 누구나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문정희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눈펄 같은 흰꽃들’을 보면 나도 그꽃들처럼 활짝 피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명이 활짝 필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듯 싶습니다.

 

봄과 사순절이 어깨동무 하고 우리 곁에 오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봄을 느끼며 사순절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은 겨울을 이겨낸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과 따스함과 용기로 다가오는 것처럼, 사순절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인 희망이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그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절기’입니다. 하누카가 오롯이 유대교의 절기인 것처럼, 사순절은 오롯이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유대교인이 아니면 하누카에 아무런 감흥이 없듯이, 기독교인이 아니면 사순절에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이란에서 온 외교관 한 명과 국문학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이란 외교관이 배가 고파서 힘들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라마단 기간이라 해가 떠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의 라마단 절기는 무함마드가 꾸란(코란)의 계시를 받은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라마단을 특별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지워진 의무를 열심히 지킵니다.

 

그런데 정혜윤의 어떤 책에서 재밌는 사실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무슬림들이 라마단에 금식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철저하게 지켜야 하지만, 라마단 기간이라도 그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비행기를 탔을 때랍니다. 그들의 두 발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라마단 기간이라 할지라도 금식하지 않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에 비행기를 탔을 때 미친듯이 먹는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또다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서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도 오랫동안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에 비추어 보면, 기독교인들은 이제 기독교만의 독특한 절기인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많이 세속화됐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라는 것은 신앙심이 많이 퇴색되고 옅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인 법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종교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사회는 종교법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종교의 법에 따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강한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종교법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철저히 개인의 양심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그 누구도 종교의 법으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즉, 사순절이 되었다고, 그 누구도 종교적 행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금식을 강요할 수 없고, 기도를 강요할 수 없고, 선행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좀 더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며 비난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선행을 한다면, 그것을 ‘진실한 금식, 기도, 선행’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경건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난 신앙의 행위일 때, 그것은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사순절을 향한 우리의 양심이 경건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인들만의 절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인이 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사순절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는 것은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세화 공동체’로서, 이번 사순절은 조금 특별하게 보내 보려고 합니다. 팬데믹 동안 조금은 흐트러진 경건의 모양을 다시 갖추어 보려고 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쳐 놓고 고요한 시간에 초를 켜 놓고 기도도 해보고, 사순절 묵상집을 통해서 사명을 다시 발견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년 간의 팬데믹 시간을 되돌아 보면서 소감을 담은 글도 한 번 써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모아 ‘세화사랑’을 발간해 보려고 합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마음으로 ‘Dear Tomorrow’ 편지도 써 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조그맣게 농사를 지어 장터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몸으로’ 신앙을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계절, 꽃이 활짝 피어 자기를 뽐내듯, 우리도 활짝 피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의미 있고 행복한 사순절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이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9. 기후위기와 희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미국 원주민 크로우 부족의 위대한 추장 플렌티 쿠즈(Plenty Coups)의 말입니다. 미국 정부의 강압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고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 산 지 30년이 지난 뒤, 추장 플렌티 쿠즈는 이처럼 슬픈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슬픈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팬데믹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렇게 산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그 당혹감, 이해 못하는 삶을 살 때, 인생은 무의미해집니다.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고, 최악의 인생입니다.

 

기후변화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짐 안탈 목사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기후교회, 287쪽). 사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압도하는 뭔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서는 법입니다. 가령 정치세계의 추잡함을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들려오는 정치판의 추잡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차기만 할 뿐, 어떤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냥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끄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관심을 가져봤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죠.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가 제시하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그는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분합니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낙관주의의 문제는 그저 그러한 기대를 할 뿐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낙관주의는 비용이나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그저 마음의 태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낙관주의를 넘어서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무엇일까요?

 

희망의 전제조건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짐 안탈은 말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성경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회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대개 회개하지 않는 자는 현실을 외면합니다.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니까 회개를 하지 못하는 것이죠.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두려운 감정과 우울한 감정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밀려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신앙은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전제조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표시하기’ 입니다. “슬픔의 연기와 사랑의 불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생명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에서의 기쁨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기후변화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픔을 가져올 것이다”(기후교회, 290쪽).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명의 파괴’입니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Science Advances)'에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00년까지 생물다양성이 25% 감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슈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얻어낸 결과인데, 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아이들은 잠자리나 코끼리, 코알라 같은 곤충이나 동물들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희망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슬픔을 표현하기’ 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지혜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현실, 슬픔, 희망: 세 가지 긴급한 예언자적 과제들』에서 성경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서를 읽어보면, 거기에 흐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 같은 경우, 거기에는 망국의 슬픔이 깊이 베어 있습니다. 왜 예언자들은 그렇게 ‘슬픔’을 표현했을까요? 이에 대해서 월터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멍해져서 말로 표현 못하는 정당한 슬픔의 상태에선, 내가 제안하기로는, 예언자적인 과제는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공공의 슬픔을 장려하고 허락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보여주었듯이, 이것이 장차 다가올 파괴를 기대하면서 예언자들이 한 것이다… 건강하고 새로운 대안적인 삶은 슬픔을 공유하고, 밖으로 드러내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 표현된 슬픔은 폭력에 대한 대안이다. 더군다나 그런 슬픔은 잃어버린 것을 새로운 것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한다… 지름길은 없다. 그런 과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뢰와 못 본 체하지 않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끌어안고, 정직한 말들의 포용 속에서 편히 쉬도록,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진혼곡(requiem)을 드리는 것과 같다”(기후교회, 292쪽).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공공의 슬픔을 장려했다’는 것과 그러한 슬픔의 표현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변화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 현실이 가져올 슬픔에 대하여 공적으로 슬퍼하는 일을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슬픔의 공공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슬픔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는데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공유될 때,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한 마음으로 기후변화를 위한 행동을 모두 함께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전제조건입니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달리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직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존재(하나님)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 11:1,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한 기독교 신앙의 희망은, 지금껏 그랬던 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로 인한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희망이시니 기후변화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은 전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기후변화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유산은 사도행전 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이러한 풍경을 일시적이거나 광기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현대의 예레미야’로 불리는 환경운동가 빌 맥키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다”(기후교회, 307쪽). 상품을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을 최선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는 개인주의를 부추깁니다. 우리는 여기에 너무 길들여 있어서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잘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생명이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좀 더 많은 자비와 관대, 돌봄과 웃음과 기쁨을 누리며, 그리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구원(꿈)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 희망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함께,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생명의 파괴에 대해서 공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이야기 하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8. 함께 증언하기

 

"우리는 토지를 공공의 재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We must make land common property."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것을 ‘토지공개념’이라고 부릅니다. 19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을 이끌었던 정치경제학적인 용어입니다. 사유 재산 제도가 극에 달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자본주의가 뿌리는 내려가고 있는 시점에 이러한 ‘토지공개념’이 사회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사실 ‘토지공개념’은 레위기에서 좀 더 강력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것은 헨리 조지가 제시한 ‘토지공개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개념입니다. 헨리 조지가 말한 토지공개념은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 균등한 이익의 분배를 위한 조치이지만, 레위기에서 말하는 ‘토지공개념’은 땅에 대한 개념을 신학화 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땅은 피조물의 소유가 아니라 창조물의 소유입니다. 땅과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은 땅을 소유할 권리와 능력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닥뜨린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땅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선포가 인간의 역사를 이끌었다면 인간은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의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넘어서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니, 기후변화는 근본적으로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착취한 죄의 문제입니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기후변화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는 이처럼 필히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공동체 행동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라고 말합니다. 사유 재산 제도가 극에 달한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유 재산 제도에 대하여 회개하고 부정하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은 결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행동’이 중요한 것이죠. 함께 증언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시대에 횡행하는 불의한 일들에 대항하여 시민불복종 운동을 통해서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소로, 간디, 도로시 데이, 랍비 헤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행한 공적인 행동을 예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도덕적 용기를 칭송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예외적인 행동을 우리의 삶에서 저만큼 멀리 두려고 합니다. 짐 안탈은 도덕적 행동이 대세를 이루려면 시민불복종 운동 같은 예외적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일에 그리스도인이 앞장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큰 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파괴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행동을 위한 강력하 촉매다”라고 말합니다(기후교회, 269쪽). 1960, 70년대 미국에서 환경운동의 촉매가 된 것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레이첼은 우리가 잃게 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환경운동의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기후위기는 레이첼이 유발한 두려움보다 훨씬 큰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때보다 덜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그동안 사랑하는 것들을 많이 잃어버린 탓도 있고, 요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경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메마른 세상입니다.

 

『기후교회』에 짐 안탈이 제시하는 사고의 전환은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빌 맥키븐이 이룬 환경운동의 변화를 소개하며, 예전에는 기후변화가 소비자 편에 끼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기후변화의 공급자에게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다. 소비자 편에서 아무리 환경보호를 위해서 노력을 해도 기후변화의 공급자가 지구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면 기후위기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급자에게 초점을 두는 방향은 우선 개인과 기관들에게 화석연료 회사에 투하자는 것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주식을 소유하는 것은 단지 돈을 벌려는 것만 아니라 그 회사의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그 회사의 활동을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후교회, 270쪽)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회사의 주식을 팔아치우거나 사지 않는 행동은 그 회사가 행하는 활동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짐 안탈은 수탁자(fiduciary)의 책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수탁자란 다른 이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는 개인 또는 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증권 회사 같은 수탁자는 고객들의 투자금을 맡아 고객 대신 주식에 투자하여 이익을 극대화하여 다시 나누어 주는 일을 한다. 그러나 짐 안탈은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를 생각할 때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수탁자들의 도덕은 화폐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환경을 헤치는 기업들에게 투자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연환경은 ‘외부효과’이다. 이익 창출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석유회사들은 석유를 땅에서 추출하면서 망치는 자연환경에 대한 비용을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고 있는 ‘외부효과’ 문제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보수)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외부효과’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외부적인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큰 집, 큰 자동차, 안락한 삶, 이런 것들이 구원의 증거라면, 이러한 삶을 위해서 희생되는 ‘외부효과들(자연이 망가지는 일)’은 완전 무시될 수밖에 없다. 시장자본주의 체에서 우리가 누리는 부의 혜택은 대개 외부효과들을 무시한 것에서 오는 열매들이다.

 

“오직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토지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한다”(기후교회, 278쪽). 정말 그렇다. 성경은 말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을 중요시하면서도 정작 토지(땅)에 대한 우리의 지배와 통제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토지를 사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강력한 첫 걸음은 땅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성경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땅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교회의 땅을 공동의 것으로 바꾸는 일을 할 때 교회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진정성을 얻을 것이다. 교회 재산의 사유화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최악의 길일 뿐만 아니라, “땅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이고, 공공선을 헤치는 부도덕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함께 이것을 증언할 수 있는가.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변화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문제: 전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하는 삶

 

지난 2019년부터 우리는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며 고민해왔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창조론과 기후변화의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왜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함께 공부했죠.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작년부터 우리는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관련된 책을 함께 열심히 읽으며 발제하고 토론하고 기도합니다.

 

기후변화의 문제를 파보면 결국 그 뒤에는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정치와 경제 체제가 기후변화 위기를 유발시킨 원인이죠. 특별히 자본주의 체제는 기후변화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근대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아래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제가 결국 인류의 멸망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후변화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정치와 경제의 영역 속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 생명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기후변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불평등한지를요. 그리고 우리처럼 선진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를요. 하지만 그 사실을 얼마나 모르고 사는지를요. 현재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추악함을 '전가(다른 곳으로 떠넘기기)'하면서 사는지를요.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가(impartation)'의 교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주님께 전가하고,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칭의 교리가 결국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행되고 있는 전가의 논리(외부화/부정적인 것을 안 보이는 곳으로 떠 넘기기)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자본주의는 내부의 모순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보이지 않게 한다. 그 전가로 인해 모순이 더욱 심각해지는 참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1쪽).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전가 행태가 만들어낸 참상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교회의 위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의 전가'가 결국 교회의 참상을 만들어 낸 것 아니겠는가 말이죠. 자신의 모순을 자꾸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자신의 모순을 결국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보이지도 않아서 결국 무너지게 되는 참상.

 

아무튼, 우리는 모든 것을 뒤집어 보아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멸망'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를 공부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많이 떠올리게 됩니다. 그 당시 남유다가 그냥 가면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뿐이라는 사실(미래)을 안 예레미야는 온 힘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결국 남유다의 권세자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 갔고, 수많은 고관들과 백성들이 결박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도 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행동을 촉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입니다. 삶의 자리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던 일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멸망한 자에게 무슨 예배가 필요하며, 사랑이 필요합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전가'하는 체제와 신앙은 참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전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남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바로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란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

 

ㅡ 언어는 어수룩한 은총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홉스)인 아수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때로 그 언어는 너무도 무력해서 우리 안의 늑대가 무시로 눈 뜨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 무력하기 때문에, 그것은 안간힘으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존엄이다. 민주주의의 운명이 그와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문제는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윈스턴 처칠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를 포기하고 힘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늑대가 되고 민주주의는 물 건너간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240쪽)

 

민주주의와 언어의 관계를 명확하게 풀어낸 문장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신적 능력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좀 어수룩하다. 하이데거가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 안에서만 살 수 있다. 언어가 입혀지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하다. 그래서 김춘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인간 존재는 언어만큼 불안하고 어수룩하다. 인간 존재는 언어만큼만 평안을 누리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란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라는 말은 언어를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것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관계를 맺으려는 사악한 무리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복음 같은 말이다.

 

"말(언어)로 합시다!" 언어를 포기하고 총칼을 들려 하는 자는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일은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마저 내팽개치는 것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언어)'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성경이 선포하겠는가.

 

언어를 거두고, 자꾸 '힘'을 사용하려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위험해지는 것 같다. 우리는 시방,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

[한병철의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이유]

 

한병철만큼 간결한 필치로 '신자유주의'를 상세히 파헤치는 철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루고,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중국이 경제를 개방하면서 세계 질서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체제'로 굳어졌다. 그게 1990년도 들어서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제 30살이 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동안 인류가 개발한 그 어떤 '착취'의 메커니즘 중 단연 으뜸이다. 완벽하게 '자기 착취'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키워드는 '자기 착취'(self-exploitation)이다. 이것은 그 어떤 착취 메커니즘보다 교묘하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신이 자기를 착취하고 있으면서도 착취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한병철은 이 '자기 착취'의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자기 착취'가 매우 은밀하게, 그리고 구조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온 인류가 현재 '신자유주의'에 포획되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평안이 있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예레미야가 바벨론 침공을 경고할 때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는 하나냐 같은 짓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하나냐의 예언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 메커니즘을 모르면, 설교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자기번영을 위하여 모든 사회적 요소를 자기 편으로 포획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는 다른 사회적 요소보다 더 신실한 신자유주의의 호위무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보다 더 무섭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 메커니즘에 대항하여 지옥 같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종교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복잡한 '자기 착취' 메커니즘을 깊이 파악할 줄 아는 지성과 그것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좋은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에 편승하여 자기 착취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착취'를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일에 종교의 힘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한병철의 책이 '적'(enemy)이겠지만,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며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종말론적 비전을 가진 이들에게 한병철의 책은 아주 좋은 '아군'(friend)'가 될 것이다.

 

간결한 필치의 책이지만,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현대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한병철의 책을 읽으며 거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헌들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간다면,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게 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실로 예언자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남기신 선지자 7천명의 반열에 오르려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한병철의 책을 읽어야 한다. 2023년도, 많은 이들이 한병철의 책을 통해서 '자기 착취'의 지옥에서 벗어나고, 아직도 '자기 착취'의 지옥에서 생명을 소진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많이 구원해 내는, 매트릭스(The Matrix)의 '니오'(Neo)'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은 좋은 것이다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해는 계묘년입니다. 검은 토끼의 해라네요. 사실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2020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2020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2021년이나 202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그저 아득하기만 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교양영어 시간에 첫번째 수업에 배웠던 영어 텍스트의 제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The show must go on”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어도 인생(the show)은 멈추지 않고, 일상은 그대로 흘러간다는 교훈을 담은 텍스트였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팬데믹이 닥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인생이 멈추어 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서 벌써 3년이 지나 2023년을 맞았습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 『몸짓의 철학』이라는 책에 ‘앉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의 모든 몸짓에 대한 철학적 묵상을 담은 책인데, 그 중에서 ‘앉기’라는 몸짓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앉아서 듣지 못하는 자는 진리와 진실을 경청하는 바른 몸가짐이 되어 있지 않다”(56쪽). ‘앉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앉으라. 그리고 성찰하라!”

 

정말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우리는 앉아서 합니다. 대개 중요한 일은 거의 모두 앉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 중에서 뭔가를 배우고, 가르칠 때, 앉는 행위는 정말 중요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앉아서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워서 읽거나 서서 읽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우리는 앉아서 듣습니다. 다른 자세로 들으면 집중이 잘 안 될 뿐더러, 좋은 자세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합니다. “앉음에서 오는 성찰이 없는 삶은 무엇을 이루었다고 한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삶일 수 있다”(59쪽).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앉음에서 오는 성찰’입니다. 그냥 ‘성찰’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워서도 성찰할 수 있고, 걸으면서도 성찰할 수 있고, 일하면서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성찰이든, ‘앉음에서 오는 성찰’만큼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무화과나무 아래는 성경공부를 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경건한 사람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메시아 예수를 소개했고, 그 예수가 나사렛에서 온 분이라는 것을 듣고서 나다나엘은 “나사랏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며 빌립의 전도를 뿌리쳤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나다나엘을 길을 가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본 것을 신기하게 여겨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듣자마자, 나다나엘은 빌립이 증거했을 때는 부인하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마음을 바꾸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바로 ‘무화과나무’ 때문에 발생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그 영이 통하여 말씀이 증거하는 메시아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분을 비로소 알아보게 된 것이죠. 이는 모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을 성찰한 덕분입니다.

 

앉아서, 성찰해 보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어떠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팬데믹 동안 이전에 비해 많이 느슨해진 교회 공동체를 보면서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건강하고 활동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2023년도부터 ‘적극신앙 프로젝트’를 통해서 ‘신앙은 좋은 것이다’ 운동을 펼쳐나가려고 합니다.

 

신앙은 정말로 좋은 것인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 가치를 너무도 잘 모르고, 신앙 이외의 다른 것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들을 많이 하면서 삽니다.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더 깊이 깨닫는 것은 기후변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나약한 인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보다 강하신 하나님에 기대어 연약한 나를 넘어서는 일을 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3년도를 ‘적극신앙의 해’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좋은 것이다’ 운동을 펼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를 외치며, 변화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저부터 더 열심을 내고, 변하고,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해 2023년도를 다음 말씀에 힘입어 ‘적극신앙’을 실천합시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Posted by 장준식

[창과 방패의 사회]

 

누가 창이고 누가 방패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는 '창과 방패'의 사회이다. 미국 차기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플로리다주의 주지사 디샌티스는 플로리다주 교육위원회를 보수 성향의 위원들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은 '낙태, 동성애, 총기 규제, 불법 이민' 등의 사회적 이슈로 인하여 보수와 진보가 극명하게 나뉘어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 보수층은 낙태를 반대하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총기규제를 반대하고, 불법 이민을 반대한다. 진보층은 낙태를 찬성하고, 동성애를 찬성하고, 총기규제를 찬성하고, 불법 이민자들에 대하여 관대하다. 모두 '인권(human right)'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지만, 양쪽의 주장은 '창과 방패'의 수준이다.

 

미국의 연합감리교회(UMC) 교단도 오랜 세월 '동성애 이슈'로 인해 내홍을 겪다 이제 더 이상 그 문제로 교단을 '하나(one church)'로 유지하는 게 어렵게 되어 결국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교회와 교인들이 UMC를 탈퇴하여 GMC(Global Methodist Church) 교단을 새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극명하게 대립되는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두 개의 진영이 마치 창과 방패처럼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는 점점 숨막히는 사회가 되어가는 듯하다. 한쪽에서는 ‘이 창은 어떤 방패든 뚫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방패는 어떤 창이든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두 가지 심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승리를 거머쥐려고 독해지거나, 너무 긴장감이 심하니까 아예 무감각 또는 무기력해지거나. 어느 쪽이든 건강하지 못한 병리적 현상들이다.

 

교회가 창과 방패 사이에 서서 중재를 서고 평화를 일구면 좋겠으나, 교회도 창과 방패의 사회에 편승하여 갈라지고 깨지고 있다. 보수 진영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과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 또한 창과 방패처럼 한치의 양보도 없다. 그래서 결국 서로를 정죄하고,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꼴저꼴 다 보기 싫은 교회는 유체이탈 화법을 통한 설교와 목회를 통해, 마치 교회는 우리 사회의 창과 방패의 싸움에 끼면 안 되는 것처럼 무관심한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날 신앙이 영지주의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각자 개별적 가치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며 보편적 신앙을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도달했다. 각 교회에서 부흥을 이루겠다고 내세우는 각종 구호들이나 프로그램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저 몇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을 뿐,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교회의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창과 방패의 사회, 모든 것이 일촉즉발인 사회, 진퇴양난인 사회, 그래서 숨막히는 사회. 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이 가진 어떤 지식이나 실천이 이 긴장감과 양극화와 불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저 전쟁을 할 수 있을 뿐, 평화적으로 창과 방패를 손에서 내려놓고 두 손을 모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답답함 때문에 발터 벤야민 같은 정치 철학자는 ‘메시아적 종말론’을 바탕에 깔고 철학하기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스스로 성취하는 구원은 불가능하므로,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또는 희망)에 휩싸여서 말이다.

 

창과 방패의 사회. 아무튼, 이 용어가 바로 우리 사회를 읽어낸 나의 통찰이다. 바라기는, 창을 쥔 자나 방패를 쥔 자나, 조금만 더 휴머니스트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고 보호하겠는가. 전쟁보다 평화가 더 좋은 것이다. 비난보다 칭찬이 좋은 것이다. 미움보다 사랑이 더 좋은 것이다. 평화를 선택하고 칭찬을 선택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휴머니스트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물론 창과 방패를 굳건하게 쥐고 있는 자들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순진해보이겠지만.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6. 기후변화와 예배의 변화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입니다. 합리적 근대 사상을 열었던 데카르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인간 종(species)을 생각할 때, 다른 생물 종에 비해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 중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이성(reason)’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성의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덕분에 인간은 다른 생물 종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생각의 능력(이성의 능력)’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능력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은 그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에 다른 생물 종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바로 그 능력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종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 오늘날 회복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은 ‘호모 리투르기쿠스’(Homo Liturgicus)입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합리적 인간(homo rationale)이나 도구적 인간(homo faber), 경제적 인간(home economicus)이 아니다. 심지어 흔히 말하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도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homo liturgicus)이다”(제임스 스미스, 57쪽). 제임스 스미스가 ‘예배하는 인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성의 독주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우리 시대에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열망이 가득한 세상을 꿈꿨던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부입니다. 자신의 책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감없이 고백합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선한용, 45쪽). 이 구절을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뜻이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마음껏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류를 ‘예배하는 인간(homo litrugicus)’로 명명하는 것이죠. 사랑은 상대방을 숭배하는 일, 곧 예배하는 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랑 빠지면 인간은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사랑의 대상을 향한 숭배의 말과 행동이 넘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언어와 행동이 숭배로 넘친다면, 그것은 사랑에 빠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곧 예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곧 예배하는 일과 동일합니다. 신앙인이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랑의 행위,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기후위기를 맞아 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도전을 주고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그의 도전 중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현재 우리의 예배가 너무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온통 ‘인간’의 구원에만 집중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존재는 마치 ‘인간’ 외에는 없는 양, 우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이 제외된, 오직 인간만이 참여하는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짐 안탈은 윤리학자 윌리스 젠킨스(Willis Jenkins)를 인용합니다. “생물학적인 것들이 사라지는 가운데서, 다른 피조물들이 없는 예배드리기는 예배 회중들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소멸시키는 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짐 안탈, 207쪽).

 

인간중심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 예배는 오직 인간만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인간과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예배 드리기’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예배하는 인간’에게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배 시간에 인간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등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인간에게만 분여할 것이 아니라, 반려동물에게도 분여하는 일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고,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이 기후변화에 끼치고 있는 해악들을 반성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에 대한 반영입니다. 예배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일입니다. 일례로, 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 일 때, 미국 남부에 있는 흑인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를 흑인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구상했습니다. 그 결과 흑인 인권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데 이바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힘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슨 경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예배를 구성하게 될 때, 현재 우리의 예배는 기후위기의 경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기후위기를 맞아 『기후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혁신적인 예배 중 우리가 어렵지 않게 실천해 볼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기후 부흥집회(Climate Revival)’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령 부흥집회’나 ‘말씀 부흥집회’에 익숙하지만, 성령이나 말씀이 기후위기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후위기를 겪는 우리 시대에 성령과 말씀은 기후위기에 대하여 우리에게 하실 이야기가 더 많으실 겁니다. 기후위기에 맞서는 것이 우리 시대에 긴급히 요청되는 사명인만큼, 교회들이 연합하여 ‘기후 부흥집회’를 열어 기후위기를 초래한 우리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생명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를 간구하는 일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인 듯합니다.

 

『기후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혁신적인 예배의 다른 하나는 ‘길 위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간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익숙합니다. 다른 말로 ‘시민불복종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예배는 예배 의식을 현장으로 끌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길 위에서 드리는 예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건설현장이나, 사회정의를 해치는 일이 진행되는 곳,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는 곳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겨, 바로 그곳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토요일이나 공휴일에 자연이나 인간에 대하여 불의가 행해지는 현장에 가서 예배 드리는 일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면, 지금처럼 교회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풍경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에 선포된 이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겠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homo liturgicus)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인간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예배는 너무 인간중심적인 예배에만 머물렀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인간만 창조하시고 나머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듯,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만 몰두하고 나머지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착취하고 파괴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기후위기’입니다. 이는 사랑의 실패요 예배의 실패입니다. 예배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다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상상하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랑’에 있는 듯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복지사회와 교회의 역할]

 

미국에서 산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미국 와서 살다보니 한국에서 살 때와 다른 점이 정말 많았다. 그중, 목회자로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한국에서 목회자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미국은 목회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 

 

미국은 복지국가다. 사회보장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한국도 복지국가로 가는 중이다. 나라가 부강해지면 가야 할 길이다.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조세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하고, 걷은 세금을 공평하게 써야 한다.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잘 살아도 복지국가를 이룰 수 없다.

 

옛날, 모두 못 먹고 못살았을 때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복지국가로 가면 갈수록 교회가 가난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든다.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가 직접 돌보는 시스템을 갖추기 때문이다. 교회가 할 일이 줄어든다고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착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이다.

 

복지국가에서, 그리고 사회보장제도가 공평하게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목회자를 비롯해서 모든 교인들이 세금을 잘 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금이 온전히 정의롭고 공평하게 잘 쓰여지는지 사회보장제도를 잘 감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사회보장제도에 교회가 참여하여 돕는 것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가 직접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복지국가에서는 잘 작동(workin하지 않는다. 복지국가에서 가난한 자들은 이미 나라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도와주는 것은 별로 실제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경험한 일이다.

 

복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세금을 정직하게 잘 내는 일이다. 목회자부터 솔선수범하여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교인들에게 세금을 정직하게 낼 것을 권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운영되도록 잘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자로서 국가로부터 받는 혜택이 매우 크다. 이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금을 성실하게 내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가 튼실하게 운영되는 덕분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이 이미 복지국가를 이루고 튼실한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선진 국가들로부터 잘 배웠으면 좋겠다. 세금을 잘 내서 사회보장제도가 잘 운영되면 생활이 어려운 한국의 목회자들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라는 제도를 지혜롭게 잘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지혜로운 한국교회가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5. 기후변화와 제자도

 

“차이를 만들어 낼 유일한 변화는 인간의 가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피터 셍지, Peter Senge). 일생 동안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덧붙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동안 해야 할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제자도’라는 말이 그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제자도란 제자가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의 길이란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기후교회』는 제자도를 묻습니다.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기후교회, 161쪽). 제자도는 매우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개념을 빌려 제자도를 표현한다면, 제자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liquid)’입니다. 제자도는 한 시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따라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문제를 못 본 척하지 않고 끌어 안고 씨름했습니다. 멀리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지켜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나치의 포학에 맞서 제자도를 고민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들, 특히 바르트나 본회퍼가 그러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김교신이나 다석 유영모 같은 분들이 일제시대와 영적위기에 맞서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자도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면한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제자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물었던 질문을 동일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회퍼가 그 질문을 한 문장으로 아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er ist Christus für uns heute?” 우리는 ‘오늘’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기후교회』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일들에 맞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발생한 화석연료의 추출과 그것을 이용한 물질적 성장입니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물질적 성장의 추구가 가져온 결과는 풍요만이 아니고 기후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 풍요를 가져오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멸망시킨다면, 이것만큼 모순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스무센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에 나온 진술을 이용해 짐 안탈 목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인들로서 우리도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곁에서 가만히 서서 지켜볼 수는 없다”(기후교회, 164쪽). 지난 2백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인류가 행한 일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간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총기사고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일 같이 총기사고가 나서 무고한 생명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총기규제를 하지 않습니다. 모두 돈 때문입니다. 총기 사고로 인하여 일 년에 수만 명씩 죽어 나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생태학적 비용(새명이 죽어 나가는 일)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총기구매와 사용이 허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모든 생태학적 비용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병리적 현상입니다. 병입니다. 병(disease).

 

지난 2백 년간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근대화(modernity)는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는 근대화의 시대였습니다. 경제가 블랙홀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운 사회는 ‘물질적 소비’위에 세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가치 있고 도덕적이고 미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장. 소비. 발전. 중독, 과잉, 편리, 무시, 자기중심.” 인류는 오로지 이것들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비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으면, 중독되지 않으면, 과잉되지 않으면, 편리하지 않으면, 무시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이 문제인 이유는 ‘삶’을, ‘생명’을, ‘생태’를 지속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삶은 지치고, 생명은 끊어지고, 생태는 망가지고 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인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살아가신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셨을까요?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장과 소비, 발전과 중독, 과잉과 편리, 무시와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삶을 지치게 만들고, 생명을 끊어지게 하며, 생태를 망가뜨리는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그럴리 만무합니다(It’s absolutely not!).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2백년 동안의 제자도라는 것이 경제성장과 맞물려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이라는 용어에 매몰되어 ‘제자도란 성장을 일구는 것’인 양, 우리도 모르게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제자도를 실행해 온 듯합니다. 『기후교회』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제자도를 재설정하기를 촉구합니다. 성장 대신에 탄력성을, 소비 대신에 협력을, 발전 대신에 지혜를, 중독 대신에 균형을, 과잉 대신에 적당함을, 편리 대신에 비전을, 무시 대신에 책임성을, 그리고 자기 중심적 두려움 대신에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제자도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제시된 제자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다시 설명하면, 오늘 우리에게 제자도란 체제 변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난 2백 년간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과 경제성장 추구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부호 탑 10 가운데 3개가 에너지 사업과 관련 있습니다. 미국의 코흐 인더스트리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 인도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가 그것입니다. 쓰고 나면 다시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대신에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경제를 구성하는 체제를 우리는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대지의 선물』에서 웬델 베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모순이다”(기후교회, 191쪽).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제자도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웃을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이나 제자도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기입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의 제자도는 기존의 제자도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는 여전히 개인구원, 영혼구원만 외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예배, 설교, 기도, 선교, 친교, 봉사의 측면에서 기존의 제자도와 어우러진 새로운 제자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로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가슴은, 우리의 발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울의 해체, 우리의 해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해체(deconstruction)한다. 그에게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해체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나드는 보편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바울의 신학이 담고 있는 정치신학은 인간(유대인)과 인간(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었다.

 

바울 신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생태 위기를 맞아 더 진행시켜야 할 해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신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을 넘어서(이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정치신학이다.

 

바울의 정치신학이 유대인 중심의 세계관을 이방인도 포함시킨 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었듯이,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신학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비인간도 포함시킨 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할 때 그것이 곧 구원이었듯이, 인간이 비인간에 대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할 때, 구원이 임할 것이다.

 

비구원은 가치의 불균형에서 온다. 구원은 가치의 균형이다. 마르틴 부버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비구원은 '나와 그것'의 가치이다. 나 중심에서 사로잡혀 상대방의 가치를 '그것(it)'으로 상대화시키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들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행위로 둔갑한다. 구원은 상대화된 '그것'의 가치는 '너(당신)'의 가치로 대등화되는 것이다. 구원은 '나와 너(당신)'의 가치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상대방의 가치를 '그것'으로 전락시키는가. 자신이 무슨 성취를 이룬 것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에게 특히 이러한 가치 전락이 발생한다. 동양철학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이(理)'가 상대방의 '이(理)'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그것'으로 취급하며 하대하게 된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에게 이를 높이는 수단으로 전통적으로 나이, 성별, 가문, 학식 등이 쓰였고, 요즘들어서는 재산, 학벌, 외모가 자신의  '이(理)'를 높이는 수단으로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바울이 하려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해체도 그 완성이 묘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인간과 비인간의 해체는 이제 걸음마 단계인 듯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수도없이 존재를 '나와 그것'으로 설정지어 차별하고 혐오하고 폭력을 저지르며 산다. 우리는 언제쯤 '나와 너(당신)'의 관계 속에서 평화를 이루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아주 묘연할 뿐이다. 이렇게 구원이 묘연한데,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기의 구원을 자랑하는 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삶 속에서 성취하려는 구원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상대방(당신)을 '그것'으로 상대화시키지 않고 '너(당신)'로 대등화시키는 것이다. 나보다 '이(理)'가 낮다고 생각되는 존재도, 나보다 '이(理)'가 높다고 생각되는 존재도, 그저 나에게는 '너(당신)'일 뿐이다. 나는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누군가에게 굽실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굽실대는 존재를 거부한다. 나는 나를 하대하는 존재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와 너(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구원받은 존재이지, 상대방은 '그것'의 가치로 상대화시키는 비구원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비구원의 존재가 아니라 구원의 존재가 되기를! 무엇보다, 요즘 더 긴급하게 요청되고 있듯이, 비인간을 '너'로 받아들이기를!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여 생명이 지속적으로 번성하기를!

Posted by 장준식

[불황과 호황: 카지노와 교회]

 

미국의 카지노 산업은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Despite high gas and food prices, there doesn't seem to be many inflation worries when it comes to gambling."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개스값과 식료품 가격이 엄청 올라서 먹고 살기 힘들어졌는데, 도박장은 역대 최고의 호황을 맞았다는 기사다. 올해 3분기 실적이 무려 150억 달러란다. 이에 대하여 네바다 대학교의 도박 역사를 전공한 교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바탕 기회를 잡으려는 인간의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호황을 누리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도박 산업이 되었다. 사람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불확실한 시대에 신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는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각자 도생의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공동체는 없고 '개인'만 남은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그동안 너무 '개인구원'만 힘써 외쳤던 복음주의 신앙이 이러한 현상을 한몫 거들은 것도 사실이다. '개인구원'이 각자도생과 무엇이 다른가.  종교가 각자도생을 endorsement(지지) 했으니,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이웃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자기의 소유를 더 늘리려는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하다.

 

미국 투자 자본의 40%가 몰려 있다는 실리콘밸리, 내가 사는 동네도 불황을 맞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의 layoff 사태가 줄을 잇고 있다. 우리 동네는 올 가을, 나무만 잎을 떨구어내는 게 아니라, 기업들도 나무가 이파리를 떨구어내듯 노동자들을 떨구어내고 있다. 그래서 올 가을,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이 별로 낭만적이지 않다.

 

어려운 시절, 모두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나누어서, 잘 버텨내면 좋겠다. 모두 살아남아 꽃을 피우고 다시 이파리가 무성해지길!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