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지닌 문제점]

어거스틴은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일한 교부 신학자이다. 어거스틴이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의 신학이 라틴신학의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터를 거쳐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앙 세계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개신교 신학은 라틴 신학에 뿌리는 두고 있다. 1세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출신 수도사였다. 그의 사상에는 어거스틴의 신학이 스며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카파도키아 교부들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학 전통과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신학은 혁명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지고의 원리를 본질(ousia)이 아니라 본체(hypostasis)이며,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위격(person)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위일체의 위격을 중요시하며 삼위일체의 경륜을 삼위일체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경륜을 중시하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역사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삼위일체의 역사는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관계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역사적 구원의 사역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장이다. 이는 정치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위격이나 실체보다 본질이나 본체에 더 관심을 둔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관심을 덜 두게 만들 뿐만 아니라 위격의 역동성이나 위격의 구분을 필요없게 만든다. 게다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심리학에 관심을 둔다. 어거스틴은 인간 영혼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 영혼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영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외부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자연스럽게 역사적 구원의 경륜을 소홀히 하게 되며 정치신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그냥 자신의 영혼 안에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라쿠나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을 비판한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대한 심리학적 유비가 부적절한 이유는 그것이 심리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심리학과 인간학이 개인의 영혼에 초점을 두는 경향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다. 위로 향하는 여정인 내면을 향한 여정을 통해 영혼은 영혼 자신을 추구하면서 영혼의 하나님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혼은 영혼이 갖는 사회적 관계들과 상관없는 영혼 자신을 인식하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인식한다." (LaCugna, <God For US>, 103)

이것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정말 큰 문제가 된다. 심리학의 발달과 그것과 신앙을 접목하는 일이 잦아지고 견고해지면서 신앙인들은 개인의 내면으로 빠져들어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그냥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생산해 낼 뿐, 역사에 동참하는 공동체적인 신앙, 즉 정치신학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인은 무력하고, 기독교 교회는 비역사적이다.

어거스틴이 지금까지, 아니 지금 더 중요하게 유통되는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유통해야만 부흥할 수 있는 '기업형/자본주의형 교회'가 택한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다. 개인의 내면에 대한 집중은 거대한 자기를 만들어낸다. 이 거대한 자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신앙은 곧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현대인의 교회는 '신들의 만찬'이 된다.

물론 어거스틴이 자신의 사상이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유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신학사상을 전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도취되었던 것과 자신의 회심의 과정 속에서 겪은 심리적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신학을 전개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인간 영혼에 놓인 삼위일체의 흔적을 추적하며 삼위일체론을 진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히 라틴신학의 역사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의 신학은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잘못 사용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현대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없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의미하는 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위험성을 알리는 것 밖에는 없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나쁜 게 아니라, 그의 신학을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시키는 데 활용하는 이들이 나쁜 것이다. 특별히 개인의 극대화를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개인의 극대화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인간 영혼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어거스틴의 심리학적 유비는 인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려는 진지한 신앙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라쿠나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해석으로 흐르면 안된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의 경륜과 상관없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흐르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새겨진 흔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구원의 경륜 없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집중하는 일보다 타자에게 집중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고, 역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 정치신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역사는 하나님 나라와 거꾸로 가고 있는데, 자기 자신의 영혼구원, 만족에만 갇혀 있어 역사의 불의에 저항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기 기만이고 직무 유기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맹정음  (0) 2022.11.05
반려견과 동물신학과 리추얼  (0) 2022.10.27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0) 2022.10.19
종말론 사무소  (0) 2022.10.14
두 가지 공부법  (0) 2022.10.07
Posted by 장준식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우리에게는 기도에 대한 통념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필요하고 무엇인가 부족하고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서 얻어내는 것.” 이러한 것도 기도에 포함되기는 합니다만, 기도를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가볍고 이기적이게 만들어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도 있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이 세상 나라의 일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마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또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만들고, 이 땅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 그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듭니다. 모두 ‘나, 나, 나’ 밖에 없는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툼과 미움과 폭력과 범죄는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자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자들이 벌이는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세상에 저항하는 법은 어떤 것일까요? 기도를 바꾸면 됩니다.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기도, 즉 내가 원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으로만 기도를 드리는 게 낫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한 번 들여다보세요.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주기도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partakers)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되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관심사를 바꾸면 우리 삶의 가치와 방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헤치거나 나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것을 내가 가지게 됐을 때, 그것이 나의 삶을 좋은 삶(good life)으로 만들지, 나쁜 삶(bad life)으로 만들지 알 수 없습니다. 돈이 100만불 필요해서 그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100만불을 나에게 주셨는데, 그 100만불이 나의 삶을 좋은 삶으로 만들어줄지, 나쁜 삶으로 만들어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 가지지 못한 것을 탐내거나 아쉬워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기도를 먼저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인생을 살면, 그 자체가 좋은 삶(good life)입니다. 좋은 삶, 선한 삶(good life)이란 공동체를 섬기는 것이지, 이런저런 개인의 자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삶만큼 좋은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기본적으로 구원이니까요.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무엇보다 주기도문을 ‘의식적으로’ 외워보세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그러하듯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기도를 반드시 먼저 드려보세요. 그런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주님께 간구해 보세요.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간구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 그렇지 않았을 때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주님 100만불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난 뒤, 나의 기도는 “주님, 어제 뉴스에서 본 그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세요.”라고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범삼아 기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냥 그리스도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는 법까지 따라서 할 정도로 총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될 수 없겠죠. 그리스도를 따라서 기도하는 자의 기도만이 기도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삶이 좋은 삶(good life)일까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또한 저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그 손짓이 너무 많아서 어느 손짓을 따라 가야할 지 막막한 세상입니다. 그렇다 보니, 좋은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냥 ‘될 대로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히브리서의 기자가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힘써 바라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삶(good life)은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partaker)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바꾸면 삶이 바뀝니다. 그러니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Posted by 장준식

[종말론 사무소]

 

김항은 그의 책에서 ‘종말론 사무소’를 연다. 그것을 열며 김항이 주목한 것은 김소진의 소설들이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은 여러 단편소설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아래 감추어진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룬다. 내 눈을 끈 것은 그의 소설 <개흘레꾼>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 오늘도 밤늦도록 개들이 짖었다.” 이것은 분명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따라한 것이다. “아비는 종이었다.”

 

김항의 분석에 따르면, 김소진의 개흘레꾼과 서정주의 종은 그 결이 다르다. 종은 주인과 대립관계에 있는 존재이지만, 개흘레꾼은 주인과 종이라는 이항대립적 관계 안에도 들지 못하는, 사회의 이물질에 불과하다. 역사는 언제나 착취와 피착취, 체제 대 반체제의 변증법적 대립 속에서 발전해왔다. 착취자가 되든, 피착취자가 되든,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든,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역사적 변증법적 대립 관계 속의 구성원으로 삶을 산다.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주인이 되든 노예가 되든 투쟁한다. 그리고 그 투쟁에는 반드시 승자나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소진은 <개흘레꾼>에서 승자에도 패자에도 낄 수 없는 한 인간의 쓸쓸한 삶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쓸쓸한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 개흘레꾼인 셈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예외상태’라는 용어를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나 아렌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적인 삶’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정치적인 삶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개흘레꾼이 발생하고 있으며, 예외상태를 만드는 자들과 사람들에게서 정치적인 삶을 빼앗으려는 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에 대해서 아주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언서도 그렇고, 복음서도 그렇고, 모두 역사적 변증법적 대립 관계의 구성원 바깥으로 밀려난 ‘개흘레꾼’ 같은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정신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누군가를 정죄하고 벌하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니라, 법 바깥으로 밀려나는 이들이 없도록, 법 바깥으로 밀려나 ‘개흘레꾼’ 같은 신세에 처해져서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아무도 예외상태에 처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본인이 예외상태에 처해져서 그 예외상태에 있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신다. 그래서 그의 구원은 모든 이들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그대로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종말론 사무소’이다. 요즘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혼란과 위험에 처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면, 종말론 사무소로서 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개흘레꾼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개흘레꾼이 존재하지 않도록, 예외상태에 처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예상상태에 놓인 이들이 없도록, 정치적인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그리고 정치적인 삶을 빼앗긴 이들을 다시 정치적인 삶으로 회복하도록, 교회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두 가지 공부법]

 

1. 체제 순응적 공부법

2. 체제 변혁적 공부법

 

자기계발서는 대개 체제 순응적 공부법이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붙어서 뭔가 자신을 진일보시키는 공부 같지만, 실상 자기계발은 존재의 진보 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지향한다. 체제에 자기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한다. 그래야 체제 안에서 성공할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계발을 위해 에너지를 쓴다. 그런데, 체제 순응적 공부를 하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문제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번아웃'이다. 자기계발은 체제가 자신을 착취하기 좋은 상태로 자기의 존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소위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문학을 잘못 유용하는 일이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계발과는 달리 체제 변혁적 공부법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인문학 공부가 별로 쓸모없다는 인식을 한다. 그건 정말 오해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손해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존재의 진보를 가져온다. 존재의 진보는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문학 공부는 필연적으로 체제 변혁을 요구한다. 체제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나에게 맞추어 재구성한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의 도구로만 쓰라고 강요할 뿐이다. 인문학 공부를 체제 변혁적 공부로 하면 체제는 공격당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제가 교묘히 퍼뜨리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속지 말아야 한다. 체제는 언제나 보수적이다. 존재의 복종을 요구하지 존재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체제는 인문학 공부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프로파간다에 속아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가 당장 먹고사는 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체제가 심어주는 거짓말이다.

 

체제 순응적 공부법과 체제 변혁적 공부법은 둘 다 필요하다. 체제에 대해서 반대만 할 수는 없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 순응적 공부와 체제 변혁적 공부는 4대 6 정도로 하면 좋다. 먹고 사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니 체제 순응적 공부를 4정도 하고, 체제가 존재에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고 체제를 변혁하여 존재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번아웃에 도달하게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체제 변혁적 공부를 6정도 해야한다.

 

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견고하고 힘이 세다. 그래서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체제 변혁적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로 하는 사람은 체제에 더 큰 희생양이 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무지의 안개가 되어 체제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다. 배운 사람의 무지는 못 배운 사람의 무지보다 더 큰 혼란과 파괴를 가져온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체제 변혁의 힘이 솟구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존재가 체제 순응적 존재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신호이다. 물론, 체제 순응적 존재로 깊이 빠져든 사람은 이것을 아예 모르겠지만 말이다.

 

체제 변혁적 공부법에 대해서 자각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 존재를 고상하게 만들기 위한 지적 장식품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두 발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결단하게 이끌어주는 실천의 문제이다. 인문학 무용론을 은근슬쩍 퍼뜨려 체제의 안정을 꿰하려드는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속지 말기를!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또 그만큼 타자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그래서 체제 순응적 공부보다 체제 변혁적 공부에 마음을 더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Posted by 장준식

[갈증이며 선물인]

 

정현종 시인의 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갈증이며 샘물인'이다. 물론 그것도 내가 말하려는 것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성경의 언어를 쓰자면, 샘물보다 선물이 좋은 은유 같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교를 알아가면 갈수록, 부족한 나의 존재만 드러난다. 존재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내 존재가 너무 부족해서 목마르다.

 

공부도 하고, 실제 목회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해 보기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목회를 하면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나의 부족함', 갈증뿐이다.

 

이 갈증을 내가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갈증을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뿐인 듯싶다. 그래서 갈증 안에 있는 존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삶은 선물이다.

 

로완 윌리엄의 이 말은 사실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야 할 것은 교회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바울을 읽다. 130).

 

정말 그런 것같다. 교회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가능하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저 참여할 뿐이다. 우리가 무슨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뿐이다.

 

갈증의 존재,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선물로만 우리는 갈증을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냥 선물이다. 나는 시방, 우물가의 그 사람이다.

Posted by 장준식

[복음주의, 개혁주의 유감]

 

공부를 하다 보면 여러 책을 읽게 되고 그 책들의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복음주의나 개혁주의에 속한 학자들 또는 작가들, 목사들의 책을 읽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들에게는 '침대'라고 하는 자신들의 스탠다드, 또는 교리가 있다. 그 교리에 맞춰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머물며 '그것으로부터의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형성된 시선을 통해서 그것을 재단한다. 그래서 그들의 해석은 '해석'(hermeneutics)이라기 보다 '판단'(judgement)일 때가 많다.

 

시를 읽다 보면 좋은 시와 별루인 시를 구분하게 되는데, 좋은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이고, 별루인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실패하는 시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참 어렵다. 이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이 얼마나 복되지 못한 지, 우리는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왜곡한다. 좋은 시는 왜곡해서 보고 있는 그것을 바로잡아 있는 그대로 다시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좋은 학자들의 책은 언제나 한 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렇게 한 편의 시와 같은 책들을 읽어야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 또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 그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에 익숙한 것에 머물려는 습성 때문에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재구성하여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여주려고 하는 시 한 편과 같은 책 읽는 것을 두려워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책과 개혁주의자들의 책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의 성서해석은 정직하지 못하고 그들의 세상해석은 판단(judgement)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죄가 심하다. 그들은 사물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들이 말해주는 것에 귀 기울이기 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때가 많다. 소통이나 교감, 또는 관계 맺음이 없고, 일방적인 강요와 종속, 또는 복종이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 즉 미국의 백인 남성 중산층의 시선이 기독교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개혁주의, 즉 칼뱅의 신학적 견해가 기독교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딱 맞는 신체를 갖고자 하는 것은 그 신화적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 침대에 누웠던 모든 이들이 잘려 죽거나 늘어나 죽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을 멈추게 한 것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였다.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발전을 이루려면 스스로 테세우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학적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부수고, 좀 솔직하고 정직하게 성경 텍스트나 이 세상을 들여다보며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주류 신학자들(사상가들)과 활발한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다행이 기독교 신학자들/목회자들 중에는 테세우스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만들지 않고, 그것을 깨부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과 건강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책을 만나면 하나님께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읽은 것처럼 영혼이 맑아진다. 그리고 영웅 테세우스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우쭐하다.

 

우리 모두,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질 때까지 분발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 연한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김민기 작사/작곡: 작은 연못)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정치적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정치적 평화만 잘 해결되면 아주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잘 해결되면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다루는 분야를 ‘정치학(politics)’라고 한다면,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를 다루는 분야를 ‘생태학(ecology)’라고 합니다. 정치의 역사는 매우 깊습니다. 동서양 고전은 모두 정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의 고전인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그리고 동양사회의 고전인 공자나 맹자 등은 모두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루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생태학의 역사는 짧습니다. 그동안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매우 수동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연을 존재 바깥에 있는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자연에 어떤 인격을 부여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돌봐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고, 인간은 자연을 필요한 대로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뿐더러, 인간은 자연을 이용해서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자, 자연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습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는 책은 생태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입니다.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이 생태계를 얼마나 망가뜨리는 지, 레이첼은 4년 간의 직접 조사와 연구를 통해 과학에 기초한 기술이 초래한 재앙을 온 세상에 고발합니다. 1962년에 발생한 일입니다. 레이첼 카슨의 책이 기폭제가 되어 그 이후 인류(특별히 미국 정부)는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정책을 세울 때 경제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생태 문제를 함께 돌보기 시작합니다.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는 더 이상 인간과 인간에 대한 노래로만 여겨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자연이라는 존재의 두 붕어가 살고 있다는 상상력이 꼭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지구라는 연못 속에는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입니다. 둘이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 붕어는 자연 붕어를 두들겨 패고 있는 중입니다. 다행히 자연 붕어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반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 붕어의 폭력은 멈출 기색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자연 붕어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연못의 이야기가 치닫는 결론으로 인간의 운명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붕어의 연한 살이 썩어 들어갈 것이고, 지구 연못도 썩어 들어갈 것이고, 결국 인간 붕어는 더 이상 지구 연못에서 존재를 감추게 될 것이다.

 

상상력은 창작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상상력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현재 인류가 멸망의 길을 벗어나 생존과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 미래를 끔찍하게 여길 수 있는 상상력, 또한 그 끔찍한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러한 실천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생존과 번영의 상상력, 이런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은 단순한 교회의 프로그램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루는 구원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이 스토리는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는 스토리를 넘어선 변화(transformation)를 이끌어 내는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하고, 변하지 않으면 멸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상상력이 추동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것들은 우선, 기후변화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지닌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60여년 전부터 끊임없이 생태 문제를 거론해 왔습니다. 특별히 지난 몇 년간 급박해진 기후변화 앞에서 절망의 목소리를 내는 예언자들(과학자, 인문학자, 신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갖을 것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Breaking Boundary> 같은 다큐멘터리는 기후변화 이해를 도와줄 것입니다.

 

둘째,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 영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예수 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인데, 우리가 왜 이 땅의 일을 돌봐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명백한 오해가 불러온 참사입니다.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 영성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이 기독교 신앙과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그 누구보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도록 이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생태 영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태 영성이란 어떤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마인드 셋입니다. 생태 영성의 지혜와 마인드 셋을 갖추는 일은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셋째,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백미는 실천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실천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손과 발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와 가슴에 변화가 있어야 하고, 손과 발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을 언제나 뜨겁게 유지해야 하기에 생태 영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실천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후변화를 촉발시키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떠한 생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배우고 실천하고 구성하는 작업이 이 프로젝트의 백미입니다. 이 실천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도 상상력입니다. 실천은 매우 창조적인 작업입니다. 배우고 구상하는 것을 실현해 낸다는 것은 상상력 없이 불가능합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을 시작하면서, 확실한 목표를 하나 더 설정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여 1년 후에 책을 출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 우리가 나눈 것, 우리가 실천한 것들을 꼼꼼히 기록해서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고 결단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일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이 의미 있는 여정에 도반(道伴/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

 

지난 100년 동안 세계사에서 있었던 일 중 모든 인류에게 동시에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2차 세계대전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번 바이러스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 인구의 3분의 1을 거둔 흑사병 같은 경우도 유럽에서만 발생한 국지적인 바이러스 피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명실공히 전세계를 휩쓴, 말 그대로 ‘팬데믹’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 유행 감염병입니다.

 

근대에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의학이 발전되고, 의학의 발전은 인간 신체에 대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셸 푸코나 조르조 아감벤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생명정치(biopolitics)’라 부릅니다. 인간의 신체가 지배의 영역에 놓이게 된 것이죠. 즉, 우리의 신체는 지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그 사실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났죠. 팬데믹 동안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정부의 통제에 따라 일정 기간 꼼짝없이 감금당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두 공중보건이나 사회적 안전의 이름 하에 시행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인들은 전염을 피하려고 평범한 일상, 사회관계와 직장, 심지어 우정과 사랑, 혹은 종교적∙정치적 신념까지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삶, 그리고 삶을 잃는 두려움은 인류를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눈을 멀게 하고 분리하게 한다”(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46쪽).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아감벤이 팬데믹 사태를 고찰한 이 책을 세 번 정도 정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성육신, 또는 성만찬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육신은 현장성, 그리고 현재성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이 성육신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서 서로 나누어 먹고, 한 주전자의 포도주를 서로 나누어 마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안겨준 가장 큰 시련은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멈추어 세웠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은 교회로부터 현장성을 빼앗아 갔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을 제거했습니다. 예배는 결코 ‘설교를 듣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데, 가뜩이나 예배가 ‘설교 듣는 일’로 축소된 한국 개신교 상황에서 예배가 더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현장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교회의 예배는 인터넷을 통한 일방적인 소통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서로 접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장성과 현재성의 부재가 길어지면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는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현장성이 결여된 인터넷 예배는 편리성과 안도감을 제공해 주지만, 이는 초대교회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배격했던 영지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세워가려 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신학을 가현설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정말로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육신을 입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도 육신의 죽임이 아니라 육신이 죽은 척했을 뿐 예수의 영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의 토대 위에 기독교 신앙을 끼워 맞추려 했을 뿐, 기독교가 가진 성육신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물질에 갇힌 영을 원래 있던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기에, 악한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악한 물질세계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악한 일들은 사악한 물질세계에 대한 심판일 뿐, 그것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던 것이죠. 그들에게 구원은 영지(어떤 깨달음)를 통해 영이 육신을 탈출하는 것이니까요.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책 <얼굴 없는 인간>에서 정말 중요한 말을 합니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인간은 단순히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은 가장 개방성이 있는 장소다.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눈다. 이것이 얼굴이 정치적 장소인 이유다. 지금의 비정치적 시대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더는 얼굴이 없어야 하고, 숫자와 수치만 있어야 한다. 독재자도 얼굴이 없다”(138쪽).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최고의 도전은 ‘얼굴 없는 인간’의 도래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현장성과 현재성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때만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얼굴이 정치적 장소라는 뜻은 얼굴을 맞댄 인간들의 사귐만이 세상을 바꿀 힘을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의 만남은 정치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감벤에게 정치는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얼굴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가해진 공포심,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심입니다. 그 공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는 듯합니다. 그 공포로 인해 우리는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 볼 수 없는 틈을 타서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 떠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팬데믹이 가져다 준 풍경, 얼굴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니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도 서로를 간섭하지 못합니다(또는 사랑으로 보듬지 못합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남긴 숙제는 단순히 ‘어떻게 교회 성장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그 교회가 ‘얼굴 없는 사람’의 모임일 뿐이라면, 결국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 구성원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간과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주님은 그곳에 계시고, 두 세 사람이라도 얼굴과 얼굴을 진실하게 맞대어 세상을 바꾸는 힘을 모을 때,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움을 내려놓고, 얼굴을 보여주세요. 얼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얼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우리 함께 세상을 바꾸어 갑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미식’이란 말을 아세요?

 

3년 전, 팬데믹이 오기 전, 우리는 ‘창조론과 기후위기’라는 특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창조론)이 어떻게 기후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었죠. 기억 나시죠? 그때 우리 ‘인류세’라는 용어가 무엇인지도 배웠잖아요. 인류세가 무슨 용어인지 모르는 사람은 세금의 한 종류인 줄 알지만, 이것은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지구과학(지질학) 용어입니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이고요. 2000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홀로세(Holocene)가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에 살고 있습니다.”

 

홀로세는 약 11,650년 전 시작된 지질대를 말합니다. 홀로세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완전(Holo’)이라는 말과 ‘새로운(cene)’이라는 말이 합쳐진 용어로, ‘완전 새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빙하기(the last Ice Age)가 끝나고 시작된 홀로세는 지구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기후를 유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고,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번성하고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죠. 그런데 지구 역사에서 지질대에 인류가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힘에 압도되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자연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지질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는데,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인류는 자연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지구과학적 현상을 일컬어서 ‘인류세(Anthropocen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지질대가 지구과학에서 공식적인 지질대 용어가 되었지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홀로세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세에 삽니다.

 

지구 역사에서 기후의 변화는 매우 자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의 변화가 더 이상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때문에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기후위기라고 부르는데, 자연적으로 온 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온 위기면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을 텐데, 스스로 위기를 불러온 것이라면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지금 인류는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나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것만 자살이 아닙니다. 인류는 집단적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있는 중입니다. 집단적인 행동이다 보니 경각심이 덜 하고, 윤리적 부담이 적을 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는 본질은 같습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죠.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도서 중 <기후미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직업환경의학·생활습관의학 전문의 이의철 작가의 책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미식’이라고 하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미식가’라고 하고요. 이러한 뜻을 가진 ‘미식’ 앞에 ‘기후’ 자가 붙어서 ‘기후미식’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작가는 그 뜻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기후미식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염두에 둔 음식을 준비하고 접대하는 행동을 말해요. 2019년 여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단어죠. 행사 홍보 깃발에 ‘기후미식 주간’이라고 써 있었어요. 프랑크푸르트는 2014년부터 매년 기후미식 주간 행사를 열어왔더라고요. 규모가 커져 지난해부터는 ‘기후미식 축제’로 이름을 바꿨고요. 음식을 기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그 이후 기후미식에 대해 알리고 있죠.” (한겨례 신문 인터뷰 중)

 

기후위기에 대한 의사 이의철 작가의 말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 완전 다른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으로 생각하죠. 그래서 우리는 석탄 연료를 덜 쓰기 위한 방안들을 구체적으로 내놓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의철 작가의 말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일깨워 줍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이 먹는 정도로 인류가 음식 섭취를 하려면 지구가 2.3개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동물성 식품 소비와 식용유 소비가 늘어서라고 합니다. 육류와 식용유 섭취가 늘면서 산림 파괴가 더 심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내놓은 2019년 8월 ‘기후변화와 토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인류가 식습관을 바꾸어 고기·생선·달걀·우유 등 동물성 식품을 순식물성(완전 채식) 상태로 바꾸면 온실 가스 배출량의 17.4%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화석연료 소비를 줄여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16.2%보다 높은 수치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류의 식습관을 바꾸는 일이 화석연료 안 쓰는 일 보다 지구를 살리는데 더 효과적이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 이의철 각자의 주장이 매우 눈에 띕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 탄소 배출에만 집중하기엔 기후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방위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은 물론, 식습관을 바꾸는 것에 더해서 해양생물 보호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합니다. 해양생물은 육상생물과는 달리 죽어서도 몸속에 저장된 탄소를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양생물은 탄소 배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빠서가 아니라 바빠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시간 내어 함께 배우고 깨우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먹고사니즘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다 보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삽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지금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그동안 잠시 멈췄던 ‘기후위기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창조론에 대하여 공부할 뿐 아니라, 실제로 탄소배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우리의 식습관을 바꾸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며 어떤 먹거리들이 필요한지, 그리고 해양생물 보호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합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기후미식 행사를 세화교회에서 열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하면서 기후미식 행사를 차츰 키워 나간다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기후미식 축제처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이 시대를 선도하는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합시다.

Posted by 장준식

['로마서에 가면'을 읽고]

 

저자(비벌리 가벤타)는 '로마서에 가면' 다음 네 가지를 하라고 알려준다. 1) 지평을 살펴보세요, 2)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세요,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4) 서로를 받아들이세요.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자신의 수업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로마서 과제를 못하겠다고 포기해 버린 한 학생처럼 로마서를 읽으며 로마서가 가진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저자의 바람은 충분히 성공적인 것 같다. 로마서에 가면 위의 네 가지 요점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라는 저자의 말과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로마서에 가서 길을 잃지 않게 끔 충분히 이끌어 주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무엇보다, 내용이 논쟁적이지 않아서 좋다. 물론 저자의 입장과 해석이 깊이 들어간 책이지만 로마서에 대한 논쟁을 이끌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해석을 담담한 필체로 설명해 나가는 것이 꽤 설득력 있다. 저자는 겸손하게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가 저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겸손한 주장에 대하여 귀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내가 평소에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또는 로마서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잘 해소해 주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가진 구원의 개인주의화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기독교의 '죄'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라든지, 반대유대주의라든지, 행위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 등, 현재 교회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어색하고 잘못된 신학적 논의들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한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백미는 3장과 4장이다. 3장에서는 윤리와 예배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예배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환기시킬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예배를 그만 두는 것은 왜곡된 수많은 행동들의 원인"(163쪽)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신학적 분석은 이 땅의 교회들이 예배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도전을 안겨준다.

 

4장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은 그대로 옮겨적는 게 좋을 듯싶다.

 

[바울은 12장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를 토대로 몇 가지 작업을 수행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우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개념을 추론해냅니다. 서로 지체가 된다는 것은 곧 빠져나갈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데 모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개념은 주요 서구 세계가 가진 개인에 대한 숭배 ㅡ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듭니다 ㅡ 와 공공연히 출동합니다.

긍정의 측면에서 보면,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키는 도중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영적 선물들(은사들)을 통해 전체에 기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95-196쪽)

 

개인주의 사회, 세속사회,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로마서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위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개인에 대한 숭배', 즉 개인의 우상화가 이루어진 사회이다. 개인에 대한 숭배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모든 가치의 최종 결정자이고, 자유는 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개념이고, 세속사회는 신조차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건들 수 없다는, 즉 사적인 영역에서 신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본(돈)이 가능하게 만든다.

 

흔히 교회를 공동체(community)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교회를 담임해 보면 교회는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교회는 '믿기로 결단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이해되고 운영될 때가 많다. 위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 책임지지 않는다. 지체라는 개념이 없다. 자신의 취향에 안 맞거나 기분이 상하면 교회(공동체/지체)를 빠져나간다. 그러한 행위를 막을 수 없다. 교회는 이미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 사회, 세속사회,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자발적 모임(은혜로 부름을 받은 모임이 아니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그것을 래디컬하게 적용하는 일은 언제나 큰 도전이다.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그토록 많이 하지만, 정작 성경을 정직하게, 합리적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는 일에는 늘 실패하는 한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지 않으니, 교회가 바르게 세워질 수 없을 뿐더러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게토화되어 간다.

 

저자는 로마서에 가서 충분히 머물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로마서에 가서 충분히 머물 수 있을까? 충분히 머문다는 것은 구석구석 들여다 보며 그것이 구성하고 있는 전체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로마서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모습에 비춰본 우리의 교회, 그리고 나 자신,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충격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로마서에 가면, 우주적 지평을 생각해 보고, 바울이 아브라함을 복음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고, 윤리와 예배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될 때, 우리는 충격을 넘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전문가, 저자의 조언대로, 로마서에 가면,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다.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기 원하시는 것처럼, "나의 몸을 헌금함에 던지는" 신앙의 전회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로마서에 가면

 

올해 상반기, 1월부터 5월 마지막 주일까지 우리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출애굽기>를 살펴봤습니다. 출애굽기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출애굽 사건의 우주적 확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들과 거기에서 전개되는 신학적 진술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주적 구원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출애굽기 없이 신약의 복음서를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신약에서 아주 정교하게 재현(representation)되고 있습니다. 구약을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약의 이해 정도가 갈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히브리 바이블)을 내버리지 않고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깊지 않았던 옛날 초기 기독교 때는 구약성경을 기독교의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마르키온이라는 영지주의자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는 구약성경을 배제한 신약성경만을 근거로 기독교 성경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열정적으로 진행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마르키온의 복음 이해가 얼마나 일천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행히 정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마르키온 같은 무지한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지금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어우러진 66권을 기독교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토라(Torah)는 율법의 근간이 됩니다. 토라에 대한 이해 없이 유대교 신앙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좀 다르게 모세오경을 해석하고 이해하지만, 모세오경을 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모세오경은 신앙에 절대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는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에 해당합니다. 신약성경의 절반 정도가 바울서신입니다. (물론 13개의 바울서신 중 7개만이 실제로 바울이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다른 6개의 바울서신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 썼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입니다.) 바울서신, 다르게 말하면, 바울을 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바울(서신)만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는 바울서신뿐 아니라 복음서,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 다양한 복음의 기록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난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바울서신만큼 기독교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성경도 없습니다. 바울서신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져 왔습니다. 일례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마르틴 루터 같은 경우도 로마서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정도입니다. 그 이후에 특별히 개신교 신학은 바울신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이 갈려 왔습니다. 그만큼 개신교는 바울서신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올해 하반기는 로마서와 함께 하려 합니다. 9월 첫째 주일부터 로마서 설교를 하려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한창 준비 중입니다. 제가 그동안 목회하면서 로마서 설교를 세 번 했는데, 이번이 네 번째 로마서 설교가 됩니다. 이번 로마서 설교는 저에게도 매우 도전이고 뜻 깊을 것 같습니다. 목회와 학문의 경륜이 어느 정도 쌓인 지금, 예전과는 분명 다르게 로마서가 제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로마서 설교에서는 기존의 로마서 해석이 지닌 한계점을 넘어서 최신 로마서 연구가 반영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가지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요즘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열어가고 미래를 계획하고 미래를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중점을 두면서 로마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작업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화교회 공동체가 올 해 하반기에는 로마서에 집중해서 함께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같은 뜻,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로마서를 제대로 묵상하며 배워보겠다는 의지와 은총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지길 기도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성경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정비례합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숨어 계십니다. 우리에게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숨어 계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 발견되시기 위하여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만나 주십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가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로마서에 가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은 자기 혐오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8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한 책이다. 그 중에 ‘끝없이 죄책감을 주는 교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교회를 떠난 이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신앙심이 크게 고양된 시기나 경험 같은 것이 있나요?” 이에 대하여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삶이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신앙도 강해졌던 것 같아요. 첫사랑이랑 헤어졌을 때, 국가고시 앞두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시험에 붙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거든요. 그때 교회에서 한 3시간을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아이 낳기 전에도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느낌보다는 내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죄책감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했던 것 같아요. 결혼생활 중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그 이후로는 더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56쪽).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접하고 이해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감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기 객관화 개념이지 자기 혐오를 조장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존재를 구성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인 통찰이다. 우리는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인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파묻혀 있으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죄는 바로 메타인지에 대한 신학적 용어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혐오를 불러오면 안 되고 자기 객관화, 상대방에 대한 객관화를 불러와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신학적 메타인지를 통해서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욕망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바로 ‘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죄’의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자기 혐오를 이루고 타인에 대한 혐오를 이루는데 쓰여왔다. 건전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를 구분하는 방법은 ‘죄’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건전하지 못한 교회, 특별히 이단교회는 ‘죄’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혐오를 심어준다. 이는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불안을 유발하게 되고,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메카니즘은 한 인간을 착취하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위의 인터뷰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책감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해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기도할 뿐이다. 죄책감은 결국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 이렇게 죄의 개념을 자기 혐오를 이루는 죄책감의 측면에서 유용하는 교회는 떠나는 게 좋다. 신앙은 자기 혐오를 불러오지 않는다. 신앙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자기 혐오/타인 혐오를 불러오는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는 빨리 떠나는 게 좋다.

Posted by 장준식

[연방 타이틀 42 / Federal Title 42]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고 나서 미국 연방정부는 타이틀 42라는 법령을 제정해서 미국 남부 국경을 통해서 망명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그들의 망명신청을 거부해 왔다.

 

AP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법 때문에 이민자들은 2020년 3월 이후에 190만 회 이상 추방되었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사람들은 보수적인 자세(자기 생명을 먼저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 존재'로 불린다.

 

법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법은 자기의 테두리 안에 있는 존재를 보호하지만, 자기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19세기 이후로 민주주의 체제가 각 국가의 운영 방식으로 들어서고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법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었다.

 

법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현대사회는 법 문제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고, 법 바깥으로 밀려나면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법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깊어졌고, 법의 테두리 바깥에 머무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한 철학자도 생겨났다.

 

연방 타이틀 42에 의해서 코로나19 확산 방지의 목적으로 망명 신청 거부를 당한 이민자들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이다. 그들은 법 바깥으로 밀려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들이 경험했을 이중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자주 법조문과 성령의 법을 대조시킨다. 문자로 기록된 법령에 의해서 사는 자와 영혼에 새겨진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는 자를 대조시킨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은 법조문에 의해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자로 인식된다.

 

법조문과 성령의 법은 무엇이 다를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조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법은 자기 테두리 안에 들어온 존재를 보호하지만(물론 이것도 모호하다) 자기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법조문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성령의 법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안과 바깥이 없다. 포괄적이다. 그래서 성령의 법은 모든 존재를 구원한다.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법조문은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있는 존재만 보호하고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러한 법조문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산다면 법조문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호모 사케르'를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다. 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법,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 보존 욕구가 강한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법 체계를 넘어선 성령의 법 안에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 중요하다. 국가(집단)은 자꾸 존재를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려 들겠지만, 그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를 성령의 법으로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땅에 성령의 법에 의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법이 법조문을 넘어서는 아주 강력한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법 바깥에서 죽으신 분이고, 호모 사케르로서 이 땅의 모든 호모 사케르를 구원하신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성령의 법으로 산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연방 타이틀 42가 어서 빨리 폐지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의 위기]

 

"자유와 민주주의 원리상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을 통제할 수 있다. 경제권력은 정치권력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협하는 힘이다. 피지배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배자를 통제할 수 있고, 그 통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경제권력도 통제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76쪽)

 

한국의 국가체제를 고려해 볼 때 여기서 피지배자는 '국민'을 말하고, 지배자는 '선출직 공무원'을 말한다.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용어를 많이 접한다. 왜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일까?

 

위의 문장을 통해서 파악해 보자면,

첫째,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일수도 있고, 경제생활(먹고사니즘)에 매여 있는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여력없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먹고사니즘의 지옥에 처박아 놓고 절대로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가진 결정적인 아킬리스건인데,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국가-재벌 주도의 경제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정치권력은 곧 경제권력과 그 뜻을 같이 한다. 정경유착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한국의 상황에서는 정경유착보다 정경애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길은 시민사회가 깨어서 민주주의의 원리가 잘 작동되도록 견제하고 요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생각해 본다. 교회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축복을 빌어주며 그들을 성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고 말면, 결국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민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견제하고, 그들에게 민주적 통제 안에 머물러 있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주도해 나간다면, 교회는 민주주의의 견인차가 될 뿐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goodness)의 실험 현장이다. 인간이 선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현장이 민주주의이다. 종말(선의 실현)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현장에서 선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어디까지 선을 실현할 수 있는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선의 실현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최선봉에 설 수밖에 없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민주주의는 이것의 실천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근대(또는 현대/modernity)는 경제의 자본주의화, 그리고 정치의 민주주의화 시대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곧 '근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근대를 공부한다는 것, 근대를 직시한다는 것, 근대를 논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직시하고 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토대를 이룬 근대의 시민들은 그것들에 의해서 삶이 주조되어 왔다. 즉, 근대인(현대인)은 소비자로, 그리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소비자가 아니면, 그리고 민주시민이 아니면 근대를 사는 모던 보이(boy), 또는 모던 걸(girl)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근대인이다. 더 이상 19세기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 산 사람도 모두 20세기 사람이다).

 

근대(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모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토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벗어나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비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민주시민은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가치나 민주주의의 가치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부합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극명하게 대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무엇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소비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민주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소비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소비하고, 민주시민의 상태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갈등이 심화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상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국가의 절대적 '폭력' 또는 '권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인데, 세속적 신(god)인 국가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늘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 '꼴통'이 되거나, 아니면 '배교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고 있는 대다수 기독교 신앙인들은 '꼴통'이 된 듯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건전한 경제와 정치 체제를 세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악의 기독교인은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이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신앙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과 같다. 거룩이란 구별된 삶인데,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는 삶의 태도만큼 구별된 삶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기 위해서, 현재 우리 삶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수적이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방 타이틀 42 / Federal Title 42  (0) 2022.06.01
민주주의의 위기  (0) 2022.05.20
민주주의를 부탁해  (0) 2022.03.20
강의의 한 구절  (0) 2022.03.13
무위의 공동체  (0) 2022.03.13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