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들어서며

 

사순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꽃 피는 봄이 왔네요. 봄에 관한 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문정희 시인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시가 눈에 띕니다.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흰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나희덕 시인은 <어떤 나무의 말>에서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문정희 시인은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라고 말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거부하는 허무주의가 엿보이지만, 문정희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엿보입니다.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태도에서 어떤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허무주의나 생명에 대한 갈망이나 생명을 깊이 탐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겠죠. 생명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 생명이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하니까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생명에서 벗어나 빨리 좀 쉬고 싶다는 갈망이 담기는 것이겠죠. 또한 누구나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문정희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눈펄 같은 흰꽃들’을 보면 나도 그꽃들처럼 활짝 피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명이 활짝 필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듯 싶습니다.

 

봄과 사순절이 어깨동무 하고 우리 곁에 오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봄을 느끼며 사순절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은 겨울을 이겨낸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과 따스함과 용기로 다가오는 것처럼, 사순절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인 희망이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그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절기’입니다. 하누카가 오롯이 유대교의 절기인 것처럼, 사순절은 오롯이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유대교인이 아니면 하누카에 아무런 감흥이 없듯이, 기독교인이 아니면 사순절에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이란에서 온 외교관 한 명과 국문학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이란 외교관이 배가 고파서 힘들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라마단 기간이라 해가 떠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의 라마단 절기는 무함마드가 꾸란(코란)의 계시를 받은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라마단을 특별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지워진 의무를 열심히 지킵니다.

 

그런데 정혜윤의 어떤 책에서 재밌는 사실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무슬림들이 라마단에 금식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철저하게 지켜야 하지만, 라마단 기간이라도 그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비행기를 탔을 때랍니다. 그들의 두 발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라마단 기간이라 할지라도 금식하지 않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에 비행기를 탔을 때 미친듯이 먹는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또다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서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도 오랫동안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에 비추어 보면, 기독교인들은 이제 기독교만의 독특한 절기인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많이 세속화됐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라는 것은 신앙심이 많이 퇴색되고 옅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인 법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종교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사회는 종교법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종교의 법에 따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강한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종교법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철저히 개인의 양심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그 누구도 종교의 법으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즉, 사순절이 되었다고, 그 누구도 종교적 행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금식을 강요할 수 없고, 기도를 강요할 수 없고, 선행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좀 더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며 비난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선행을 한다면, 그것을 ‘진실한 금식, 기도, 선행’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경건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난 신앙의 행위일 때, 그것은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사순절을 향한 우리의 양심이 경건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인들만의 절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인이 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사순절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는 것은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세화 공동체’로서, 이번 사순절은 조금 특별하게 보내 보려고 합니다. 팬데믹 동안 조금은 흐트러진 경건의 모양을 다시 갖추어 보려고 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쳐 놓고 고요한 시간에 초를 켜 놓고 기도도 해보고, 사순절 묵상집을 통해서 사명을 다시 발견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년 간의 팬데믹 시간을 되돌아 보면서 소감을 담은 글도 한 번 써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모아 ‘세화사랑’을 발간해 보려고 합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마음으로 ‘Dear Tomorrow’ 편지도 써 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조그맣게 농사를 지어 장터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몸으로’ 신앙을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계절, 꽃이 활짝 피어 자기를 뽐내듯, 우리도 활짝 피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의미 있고 행복한 사순절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이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