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또는 역사학]

 

삼위일체론은 심리학보다는 역사학이 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기울게 된 탓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 내면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흐르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심리학보다는 역사학이 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삼위일체론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입장은 역사학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가를 논리적(또는 합리적)으로 전개시킨 것,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래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본성(ousia)보다 위격(hypotasis)에 집중한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이 사변, 또는 심리로 흐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실체(substance)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흐르면,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게 되고,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신앙은 영지주의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내면을 살펴, 즉 내면을 탐구하여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하나님을 믿고 갈망함으로 자기 구원(개인 구원)만 이루면 그만이기에, 자기 외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자기 구원에만 집중하고 역사를 외면하는 신앙은 영지주의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에서 지켜내야 할 것은 역사학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셨는지에 집중하기 보다, 역사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셨는지, 그리고 남기고 계신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의 참여자로서 역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어거스틴과 그 이후의 신학자들보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과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발달한 요즘,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더 개인주의적으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차단하고 '역사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심리학 공부는 조금 덜 하고, 역사 공부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역사에 대한 영성(spirituality/정신성)이 생기고, 그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구원 역사에 부름 받고 동참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좀 그만하고, 역사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의 정신을 적용하여) 성경공부 반, 역사 공부 반, 이렇게 반 반씩 만이라도 하면 좋겠다. 성경이 역사의 기록인데, 우리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 아닌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