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된 구원]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며, 그래서 관계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관계 안에 있는 존재(being-in-relation)이다. 그러므로 존재란 타자를 위한 존재(being-for-another), 타자로부터의 존재(being-from-another), 혹은 사랑의 존재(being of love)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말 같지만,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나 혼자서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사랑할 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싶을 때는 외로울 때이다. 혼자인 것이 싫을 때, 우리는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는 타자를 갈망한다.

 

관계적 존재에게 구원이란 고립된 개념일 수 없다. 나 혼자만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더라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구원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늘 유보되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이 있다면, 타자가 구원의 상태로 들어오지 못했다면 우리의 구원도 묘연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다른 이들의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구원은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는 관계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존재라도 구원에서 멀어진 존재가 있다면, 모든 존재의 구원은 유보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99마리의 양이 구원받았어도 1마리의 양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 한 마리를 포기하고 구원받은 99명의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집중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이 구원받지 못한 것 때문에 구원은 완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마리의 구원받지 못한 양이 존재하는 한, 구원은 유보되고 잠정적인 것이 된다.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살았으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풍요로우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안전하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건강하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에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안 된다.

 

구원은 차별이 아니라 포괄이다. 구원은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다. 구원은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구원은 나 자신의 신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신앙에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이웃의 신앙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다. 나의 구원이 상대방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내 존재가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가 귀한 법이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