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과 동물신학과 리추얼]

 

우리 교회 집사님네는 키우던 반려견을 안락사로 떠나 보냈다. 17년 간 한 가족처럼 지내던 반려견을 안락사로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안락사 예약을 몇 번이나 취소하고, 또 취소했다. 그러다 사고와 노화로 인해 이제는 몸을 가누는 게 힘들고, 밤마다 아파서 울어대는 반려견을 살게 놓아두는 것은 집사님네나 반려견에게 더이상 좋은 일이 아니어서 결심을 했다.

 

반려견 해리(Harry)를 안락사 시키기로 한 날 아침, 우리는 집에 모여 함께 리추얼을 했다. 나는 예식서와 오일과 십자가를 준비했다. 우리는 헐떡이며 누워 있는 해리 곁으로 갔다. 눈을 뜨지 못하고 숨만 헐떡이는 해리 곁에서 해리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의식을 시작했다. 나는 예식사를 낭독했다.

 

"우리는 해리를 떠나 보내면서 해리를 주님 손에 맡기기 위하여 이 예식을 행합니다. 해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이제 해리는 하나님 품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제 해리를 떠나 보내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해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 큰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찬송가를 부른 후, 나는 주님께 기도하며 반려견을 떠나 보내는 가족들을 위로했다.

 

말씀은 이사야 11장 1-9절을 봉독했다. "하나님의 새창조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해리를 기억하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말씀의 요지는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 안에서 우리가 갖을 수 있는 소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별히, 그동안 해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해리가 가족들로부터 받은 은총과 해리를 통해서 가족들이 받은 은총을 기억해 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총을 주고 받은 사이이기 때문에, 해리와 가족들은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고, 결국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이 완성되는 날,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말씀을 전하고, 나는 마지막 떠나는 해리에게 오일을 바르며 축복해 주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해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또한 해리를 떠나 보내면서 마음 아프지만 해리와 소중한 추억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새창조의 때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부와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자와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령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해리를 주님 품에 맡기노라."

 

해리를 주님 품에 맡기고 우리는 기도문을 함께 낭독했다. 이 기도문은 동물신학자 앤드류 린지가 쓴 것이다. 그 기도문에 해리의 이름을 넣어서, 모두 함께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순례자 하나님

우리와 함께 여행하시는 분

이 세계의 기쁨과 그림자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슬픔 안에서

우리의 고통을 어루만지소서.

비통함 없이

희망을 가지고

죽음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도우소서.

이 세계의 그림자들 가운데서

삶의 혼란과 죽음의 공포의 한복판에서

당신은 우리 곁에 서 계시며

항상 축복하시고, 늘 두 팔 벌려 안아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이 신비를 깊이 생각할 때

당신께서 해리에게 생명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해리를 당신의 사랑의 손에 맡깁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당신의 세계는 깨지기 쉽고,

당신의 피조물은 섬세하며,

우리 모두를 낳으시고 구원하시는 당신의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아멘."

 

우리는 기도문을 함께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해리를 사랑의 손길로 쓰다듬어 주라고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 거리는 해리의 머리와 배와 등과 다리 등을 가족들은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모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마지막으로 축도를 했다. 이렇게 해리는 주님 품에 맡겨졌다.

 

해리는 그날, 오후 5시 가족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안락사했다. 그리고 화장터로 보내져 2주 후면 한 줌의 재로 가족들 품에 안긴다.

 

한국보다 미국은 반려견 문화가 오래됐다. 지난 20년 간 미국에서 살면서, 그리고 목회하면서 적응하기 힘든 문화 중 하나가 반려견 문화였다. 어릴 때 개를 키우긴 했지만 그때는 반려견 개념이 었었다. 옛날에 개는 집 밖에서만 키우던, 그야말로 그냥 '동물'이었지, 애완견 또는 반려견의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했다. 미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한국도 이제는 반려견(동물) 문화가 아주 깊어졌다.

 

반려견(동물) 문화가 오랜된 서구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물신학이 발전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개념이지만, 서구사회는 동물신학을 바탕으로 동물의 권리가 많이 발전되어 있다. 동물신학의 관점에서 동물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려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아주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냥 동물 한 마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 중 한 존재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이 닥치기 때문이다.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예식을 준비하면서 아직까지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 리추얼이 많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본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반려견을 위한 리추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 나름대로 동물신학을 바탕으로 리추얼을 구성해 보았다. 리추얼이 제대로 구성되려면 의식과 언어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려견(동물)에 대한 사랑과 감사, 또는 존중에 대한 언어가 매우 빈약한 것을 본다. 함께 지내던 반려견의 죽음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개죽음?" 이처럼, 마땅한 말이 없다.

 

문화는 하루 아침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담겨 있어야 한다. 반려견(동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숙제는 단순히 반려견을 심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을 담은 리추얼과 언어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리추얼과 언어가 대중적으로 유통되도록 힘쓰는 일에도 반드시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죽으면 마음이 찢기듯 아픈 나의 반려견(동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이 우습지 않아지는 것이다.

 

나는 반려견(동물)을 키우지 않지만, 목회자로서 반려견을 잃은 교우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려 노력한다. 동물신학이 주장하는 바, 나는 모든 동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축복권을 지닌 존재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은 목사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 10월 22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에 있었던 해리를 떠나 보내며 가졌던 리추얼과 그날 세상을 떠난 해리를 기억하며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