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의 신앙과 게하시의 불신앙

ㅡ 게하시처럼 하면 안 되는 이유

 

신앙은 삶의 상태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저렇게’ 살았었는데, 신앙을 갖은 후에는 더 이상 ‘저렇게’ 살 수 없고, 이제는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이 그 사람의 성품(성격)까지도 변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고난 성품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후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에 걸려 어려움에 처했고, 그것을 긍휼히 여긴 ‘몸종(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이 나병을 고칠 방도를 일러줍니다. 그렇게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오게 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은 오롯이 나아만 장군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는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나아만 장군에게서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6가지 정도 됩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나병이 낫기 전,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을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 앞에 서서 자신을 알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침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앞에 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사람, 즉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아만 장군은 직접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왕하 5:15). 이전에 나아만 장군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였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간접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신앙을 갖게 된 후, ‘너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고백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이야기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하나님을 완전히 ‘삶’으로 경험하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의 실존으로 파고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셋째,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gift, blessing)을 드립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병 고침을 받고자 올 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병고침을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에게 드리는 선물은 새로운 선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입니다. 그러나 처음 가지고 올 때의 선물과 이제 신앙을 가진 후 엘리사 앞에 내어 놓는 선물의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 나아만 장군이 선물을 가져올 때 그 선물의 성격은 ‘포상품’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시혜’(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을 갖게 된 나아만 장군의 예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표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표현하는 성례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모두 그러한 뜻을 가집니다.

 

넷째, 나아만 장군은 자유를 얻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갑니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모시는 아람 왕과 함께 림몬 신전에 들어가서 절하게 될 때, 그것은 림몬 신을 섬기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모시는 신하 된 입장에서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밝힌 후,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의 용서 구함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고만 대답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매인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아람의 신 림몬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교환이 아닙니다. 구원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이 자체, 이 관계 자체가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예물을 받을 이유와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관계에는 어떤 가격이 매겨지거나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거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이 게하시를 저주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왕하 5:27). 게하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하시가 가혹한 저주를 받은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가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게하시가 거짓말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은 것 때문에 가혹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벌 같아 보입니다. 게하시의 거짓말을 보면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예물을 억지도 빼앗아 온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수준이 애교 수준이고, 나아만 장군은 게하시에게 예물을 기꺼이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게하시에게 가혹한 저주가 임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왕하 5:20). 여기에 보면,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이라고 부릅니다.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나아만 장군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아만 장군을 ‘타자화’시켜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자신이 뒤집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면서 나아만에게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 즉 구원하신 사람들을 우리가 임의대로 ‘이방인’ 취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배우고 이해해도, 신앙인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를 ‘이방인/타자’ 취급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나아만 장군을 자기 마음대로 이방인 취급하여 그에게 폭력(거짓말/물품강탈)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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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종려주일을 보내며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부활절 전 주일이기도 합니다. 부활절 전,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종려주일로 부른 것,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부활절로 부른 것은, 모두 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돌아보며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제국에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BC 587년), 그 이후에 나타난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의해 순차적으로 지배를 당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사분오열된 그리스 제국은 지역 안배를 통해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는데,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린 제국을 ‘셀레우코스 제국’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황제가 유대인의 성전에 우상을 배치하여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들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바로 BC 164년에 마카비가 일으킨,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때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누카’를 지키고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은 ‘성탄절’(Christmas)를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하누카’(Hanuka)를 지킵니다.

 

하지만 마카비 혁명을 통한 유대인의 독립도 오래 못 가고, 로마 제국에 의해서 또 지배 상태에 들어가게 되죠. 그래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 사상’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가 와서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는 사상이 유대인들 사이에는 팽배했고,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에 저항시인 이육사가 <광야>라는 시를 통해서 ‘초인’이 도래하여 조선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를 낳으면 ‘Jesus’라고 붙이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Jesus는 여호수아(Joshua)와 같은 뜻을 지닌 이름인데,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그러니까, Jesus에는 이미 ‘메시아’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떠한 구원을 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제국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고 마카비처럼 혁명을 이루어 나라를 되찾고, 이스라엘의 민족성과 종교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긴급한, 현실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의 소망대로 예수님의 구원이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던 것이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현실에서 제국을 몰아내고 주권을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려주일을 맞아 주님을 맞이하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아주 깊은 간절함이 담긴 말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장 구원받아야 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문제, 가족의 문제, 직장의 문제, 또는 사회적 문제 등,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일단 호산나를 외치며,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은 묵상을 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종려나무가 이스라엘에서는 흔한 나무라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던 것이겠죠. 만약 한국에서 이 일이 발생했다면, 한국 산천에 흔한 개나리나 진달래를 꺾어서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간절한 마음으로 ‘호산나’를 외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는 그 길에 우리는 무엇을 놓아드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교회 뜰에 핀 유채꽃 같은 것을 꺾어서 그 길에 놓아드리면 어떨까요? 아무튼, 우리의 일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면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주님께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호산나는 종려주일에만 외치는 특별한 구호가 아니라,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외치는 구호가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의 행위]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함’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신앙이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인간 존재와 하나님과의 연결성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인간다울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way)에 대해서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것을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라고 하는데, 감리교의 효시,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이 제시한 것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은혜의 방편은 경건과 선행으로 나누어지는데, 경건(practices of piety)에는 성경읽기, 기도, 금식, 정기적인 예배 참석, 성례전, 교제(fellowship), 성경공부 등이 있고, 선행(good works)에는 병자 방문, 감옥에 갇힌 자 방문, 배고픈 사람 먹이기, 기부, 정의 추구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찾아볼 수 있겠죠.

 

엘리사의 전성시대를 알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담은 열왕기하 4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신앙의 행위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은혜의 방편’과 좀 다릅니다. 은혜의 방편은 외적인 것이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깊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이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내적인 은혜의 방편’은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4장은 과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선지자 생도가 아내와 두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보지만 결국 삶의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더 이상 생활비도 없고, 두 아들이 노예로 팔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의 스승이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내적인 은혜의 방편 첫번째는 ‘간절함’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왕하 4:1).

 

과부의 부르짖음에 엘리사 선지자는 응답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랴?”(왕하 4:2). 사실 과부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란 이제 기름 한 그릇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서부터. 엘리사 선지자는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빌려온 기름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보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이웃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과부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한 번 더 어려운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시대로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붓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과부와 두 아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엘리사 전성시대의 다음 에피소드는 수넴 여인 이야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수넴 여인은 앞에 등장했던 과부와는 다른 신분을 가진 여인입니다. 부유했고 존경받던 집안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푸대접 받던 시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는 겉으로는 부강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아합 왕이나 아하시야 왕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푸대접했습니다. 엘리야는 심지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섬김’입니다. 섬김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뭔가 답례를 베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그러한 상태를 돌려서 말합니다. “나는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왕하 4:13).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왜 바라는 게 없겠습니까? 그 당시 여인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자식인데, 자식이 없는 수넴 여인의 처지를 알게 된 엘리사 선지자는 그녀의 태를 열어줍니다.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 4:16).

 

정말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대로 수넴 여인은 일 년 후에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어린 아들이 조금 성장하여 개구장이 아이가 되었을 때 추수하는 아버지를 보러 밭에 나갔다가 ‘머리야 머리야’ 하면서 쓰러집니다. 망연자실한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데려다가 엘리사 선지자가 묵는 방 침실에 눕혀 놓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 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수넴 여인을 멀리서 보고 엘리사 선지나는 몸종 게하시를 보내 맞이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사를 보자마자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자식 잃은 괴로움을 표출합니다.

 

섬김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아들이 변고를 당하자 수넴 여인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아픔을 표현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번째 내적 은혜의 방편을 봅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왕하 4:30). 엘리사는 수넴 여인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죽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살려냅니다. 수넴 여인의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수넴 여인은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간절함, 순종, 섬김, 신뢰,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친교를 나누고, 성경공부 하는 일,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정의를 구하는 일들, 이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좋은 방편(means)들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절함, 순종, 섬김, 그리고 신뢰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자리를 굳건하게 잡고 있어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빛을 발합니다.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연습하면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추구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좋은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가 '거대서사'에 대한 분석과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서 그렇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거대서사를 이해하고 나면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가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전공은 정치신학이다. 정치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철학 공부는 필수다. 정치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거대서사를 알 수 있다. 거대서사는 우리가 왜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 준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 고유의 것이라기 보다 대개 큰 세력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길들여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 우리는 무엇인가에 노예로 살아갈 때가 많다.

 

기독교인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 잘 분간을 못한다. 이는 마치, 회심 전 바울과 같다. 회심 전 바울, 즉 사울이 행한 일은 불의한 일이었으나 자기 자신은 신앙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 '열심'을 냈다.

 

열심은 좋은 것이나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은 오히려 독이 된다. 그래서 언제나 열심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헛된 것이요, 별로 열심이 없어도 방향이 올바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큰 힘을 발휘한다. 열심을 추구하기 보다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열심을 내는 일은 '선동'에 가깝다. 열심을 내는 일은 재밌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을 내는 것에 더 마음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낀다. 재미도 없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열심을 내는 일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방향을 찾는 일이다. 방향을 찾은 뒤에 열심을 내도 늦지 않다. 방향을 찾았으면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대개 방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소란한 법이다. 방향을 찾은 사람은 요란스럽지 않게 그냥 그 길을 간다.

 

하나님보다 더 큰 서사는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믿음이다. 구약의 십계명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러면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 하지만, 대개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만 않을 뿐, 하나님 아닌 서사에 지배당하면서 산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큰 서사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서사 안에 살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싼, 하찮고 보잘것없는 서사에 일희일비하면서 산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다른 서사에 지배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가장 큰 서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서사 안에서 살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작은 서사들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작은 서사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 인양, 두려움에 떨며, 그 작은 서사에 복종한다. 완전 우상숭배자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서사는 우리보다 크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거대서사라 부른다. 그러한 거대서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서사에 압도당하거나 희생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를 압도하거나 우리를 희생시키는 거대서사가 사실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거대서사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함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거대서사에 둘러싸여 산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서사를 알고 나면, 무엇보다 힘을 빼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얼마나 거대서사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내 삶의 어려움들, 또는 내 삶의 죄책감들이 내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나를 찾아오는 자유는 정말 달콤하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 큰 서사인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김누리 교수가 외쳤던 말이다. 그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불행한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꼽았다. 1) 분단상황, 2) 야수자본주의, 3) 68혁명의 부재

이 세 가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대서사들이다. 불행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러한 거대서사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공부란 우리의 삶을 억누르는 거대서사를 보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거대서사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한 지혜를 기르는 일이다. 또한 불의한 거대서사를 몰아내고 새시대를 여는 힘과 용기를 키우는 일이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불의한 거대서사에 희생당할 뿐만 아니라 그 불의의 협력자가 되어 불의한 거대서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열심'을 내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 힘을 냅시다. 우리 서로의 삶을 보듬으며, 우리를 억누르는 불의한 거대서사에 저항합시다. 불의한 거대서사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입니다. 열심을 내지 맙시다. 그냥 좋은 사람과 만나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서로를 더 사랑합시다.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실패합시다. 그렇게 세상을 비웃어줍시다. 우리 모두, 가장 큰 이야기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병리적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한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세 가지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이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온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온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즐비하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한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는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한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이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이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칠다. 미국에서 흑인은 같은 영어를 쓰지만 그 표현이 매우 거칠다. 제스처도 그렇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한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간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된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한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이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한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다. 우월감을 가지고 한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졸개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한다. 억압 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이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한다. 예배에서도 그들의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온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한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하다. 늘 축제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기복은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는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이다. 더이상 바라지 않는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이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한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재밌는 현상은 지배계층은 백인들이 전유하는 기독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지배계층은 백인들처럼 '죄책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점점 더 쇠락하는 이유는 역사와 몸에 맞지 않은 신앙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죄책감'에 쩔은 백인들에게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주의는 백인 남성 지배계급에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그래서 복음주의 신학은 '죄'를 강조한다. 일단 '인간은 죄인'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게 디폴트이다. 우월감에 젖어 있고, 그래서 자신은 지배계급에 속해야 하고, 그래서 '아래 사람들'(?)에게 저지른 나쁜 짓은 구원 행위이다. 이런 구조의 신학은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신학이며 신앙의 옷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허영심'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으로 사는 것보다 지배계층으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평범한 서민들도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이야기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재벌 이야기, 예쁘고 잘 생기고 잘 나고 성공하는 이야기에 더 흥미를 가진다. 그런 것처럼, 신앙도 이왕이면 지배계급인 백인들이 형성해 놓은 복음주의를 선호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고,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의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그러한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우라와 탈교회 현상]

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에 더이상 아우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더이상 아우리가 없게 되었는가? 교회가 잘못해서? 목회자들의 일탈 때문에? 이 말도 맞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교회는 급격히 쇠락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교회의 쇠락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교회의 쇠락을 이끌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교회의 아우라를 상실시켰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킨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예술작품에 있던 아우라가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1936년에 쓰인 책이니까, 그때의 기술이란 사진과 영상 정도다. 하지만 사진과 영상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상실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진과 영상은 원본의 아우라를 감소시켰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무한 복제될 수 있는 원본 작품은 원본만 존재하던 때와는 달리 더이상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모든 일상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모든 것의 일상(사생활)이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신비와 카리스마가 걷히니, 대상이 가진 아우라가 걷힌 것이다. 공영방송을 통해서만 접하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의 삶이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가감 없이 노출된다. 그들의 근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그들의 추잡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가톨릭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아동 성추행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까발려진 것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더불어 된 일이다.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시절, 불과 20년 전만 해도,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일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가톨릭에서 행해진 아동 성추문 문제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추문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를 일컬어 '개독교'라고 부르고, 목사를 일컬어 '먹사'라고 부른다.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은 굳이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종교적 욕구를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한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예배가 가능하게 된 것은 순전히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없던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대면예배', '비대면예배' 같은 것들이다. 예배는 그냥 예배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배를 구별한다. '대면'인지, 아니면 '비대면'인지.

거기다 인터넷, 특별히 유튜브의 발달로 인하여 담임목사의 설교가 갖는 아우라는 없어진 지 오래다. 손 안에서 내가 듣고 싶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설교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상품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아졌다. 설교가 상품처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것이 된 이상, 설교가 갖는 고유의 아우라는 상실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제대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중요하고, 목회자가 지성과 영성, 그리고 도덕성을 두루두루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것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탈교회 현상을 당분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고유의 아우라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더이상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아우라를 갖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품을 파는 회사에서는 상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톱스타를 내세워 광고하기도 하고, 상품의 가격을 범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리기도 하고, 한정판을 만들어 희귀성을 높여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간파된다.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상품을 파는 회사들처럼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요즘 교회들은 대개 그러한 방식을 취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해서든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교회 건물을 빚을 내서라도 블링블링하게 짓거나 리모델링을 하고, 팬시한 프로그램을 돌려서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좀 심한 곳은 목회자를 우상화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파괴된 아우라를 어떻게서든 다시 회복하여 교회 성장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의 아우라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 상자가 열린 시대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까발려진 '투명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에 둘려 있다.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거나 붙들리게 하지 않는다. 의심과 불신은 분열을 불러온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모두 '분열의 일' 뿐이다.

기술의 변화는 인간에게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기술은 인간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AI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미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가 될 지, ChatGPT의 론칭을 통해서 조금씩 맛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종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변화를 거부하며 비의 또는 컬트의 집단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 하게 만들고 있는 이단 교회들은 모두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종교집단일 뿐이다.

정통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기술의 변화에 발맞추어 신앙과 교회를 재구성하는 데 게으르다면, 즉, 활발한 대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단 교회들처럼 퇴행적 행동을 하는 곳으로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이단과 정통교회는 한 통속이 되고 말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나는 신이다'에서 보인 이단들의 퇴행적 행동은 그 강도만 다를 뿐이지 이미 정통교회 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술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통과 공부 밖에 없다. 무섭게 변하는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이는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격려의 말씀과 같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어떻게 해야 급격히 발전을 이루는 기술사회에서 교회가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지켜내거나 또는 창조해 나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공부' 하는 수밖에 없다.

탈교회 현상을 너무 교회 자체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책하거나 쉽게 비난하지 않으면 좋겠다. 물론 교회의 잘못과 목회자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무리 교회와 목회자가 잘 해도 탈교회 현상은 막을 수 없는 쓰나미와 같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나가며, 인간성(humanity)이 한없이 무너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아파하는 '인간'(human being)'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술사회를 올바로 이끌어 주는, 진리와 사랑의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바다의 가능성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하다. ...인류는 깊은 심연의 바다보다 우주를 훨씬 더 많이 방문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우리 자신도 함께."

(탄소로운 식탁, 232쪽)

 

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기후변화프로젝트]에서 읽는 책 <탄소로운 식탁>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크 아탈리의 글입니다. <탄소로운 식탁>에서 저자는 우리의 먹거리와 탄소배출의 상관관계를 살피고 있는데, 축산업과 농업, 그리고 어업 순으로 상관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기까지, 우리 식탁에 곡물이 올라오기까지, 그리고 우리 식탁에 해산물이 올라오기까지, 우리는 그냥 무심히 먹고 즐거워하지만, 우리의 먹거리가 생산되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먹으면서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대로 가다 가는 어느 시점, 우리는 더 이상 먹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아니면 그냥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먹을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지구가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먹는 것 때문이죠. 물론 이러한 일을 상상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망치기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위의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바다 뿐이겠습니까? 무엇이든,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 하니, 그 대상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지 않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니 존경도 없습니다. 존경이 없으니 마구 착취하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지만, 이것은 ‘앎’에 대한 왜곡을 낳았습니다. 왜 알려고 할까요? 우리는 그동안 앎에 대한 이유를 왜곡하며 살았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앎을 통해서 상대방을 통제하고 착취하고, 상대방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앎'을 내세워, 인간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우리가 지내온 전형적인 근대의 풍경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야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야다’는 아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마치 남녀가 깊이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요. 깊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을 '야다'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앎이란 경외를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앎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나님을 앎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은 '경외'로운 일입니다.

 

상대방을 인식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상대방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앎은 경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경외가 있어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생기는 법입니다. 존경의 마음의 있어야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폭력과 착취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기후위기를 겪고 있습니까? 앎에 대한 인식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곡과 무관심이 기후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야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에 대하여 안다면(야다), 그것은 경외이어야 마땅합니다. 앎을 통해서 경외 이외의 다른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라고 말 수 있습니다.

 

경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앎은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자는 경외를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앎'이 알량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에, 앎에 대한 구도적 자세를 회복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과도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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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널 사랑하지 않아: 탈교회 현상]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어반자카파'의 노래 '널 사랑하지 않아'가 있다. 이별 노래다. 슬픈 노래다. 긴 노래 가삿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사가 전하는 핵심 내용은 이거다. "널 사랑하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진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프지도 않고, 상대방이 눈물을 흘려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더군다나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려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랑할 수 있는 수많은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상대방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의 기준은 '사랑함'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이나 조건을 잘 만들어 놓으면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사랑의 조건이나 환경을 만들었는데도,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난다. 화도 난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사랑하지 않음'이 기준인 사람에게는 아무리 사랑의 환경이나 조건이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 마음이 없다. 그 사람의 기준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저서에서 '무(nothingness)'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은 존재를 기준으로 무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무는 존재의 반대, 존재의 부정, 존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무는 존재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존재를 기준으로 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 자체를 생각해 보려고 했다. 무 자체를 생각하면,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무를 생각할 때와 다른 생각이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이런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저출산 문제가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그렇다 보니, 정부는 이런 저런 정책을 통해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내놓은 정책들은 모두 '출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출산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잘 정비되면 출산율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기준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정책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가 삶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한테 아무리 사랑의 환경과 조건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삶의 기본 바탕인 사람한테 아무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왜 교회가 쇠퇴하는가? 왜 기독교가 쇠퇴하는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여러 군데서 찾는다.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교회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목회자들이 부도덕 하고, 교회가 사회보다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개선하면 다시 교회는 부흥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교회는 다시 부흥하거라 믿고,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전 미국의 켄터키주 소재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나타난 부흥 현상 같은 것에 고무된 반응을 보인다. 저런 현상이 릴레이처럼 발생하면 교회의 부흥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믿는다.

 

왜 교회가 쇠퇴하는가? 왜 기독교가 쇠퇴하는가? 사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한다. 널 사랑하지 않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이와 같이,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답이다. 기준이 바뀌었다. '교회를 가야지'가 기준이었다가, 이제는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기준이 되었다. '교회를 가야지'가 존재라면,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무이다. 존재에서 무로 그 기준이 바뀌었다. 예전에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것이 삶의 기준이었다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기준이 된 것처럼, 기준이 바뀌었다. 그냥, 사람들은 교회를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회를 가고 싶지 않은 게 기준인 사람들에게 아무리 교회 다니기 좋은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준다고 해도, 즉, 교회가 사명을 잘 수행하고, 목회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고, 사회보다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는다. 왜? 그냥, 교회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가고 싶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교회'라고 하는 사회의 한 부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를 들여다 보며, 사회 전체가 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도록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1997년 IMF 사태 이후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면서 사회 사체가 변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사회를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 시킨다는데 있다. 이것은 다양성을 말살하고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는 시스템이다. 개인이 총체적 시스템의 효율적 부품으로 기능할 뿐이지, 그 시스템 바깥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스템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자신의 인생을 효율적으로 조직화시키지 않으면 뒤처지고 먹고 살기 힘들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시스템 안에서 잘 작동하도록 다그친다. 누가 착취하지 않아도 스스로 착취한다.

 

살며, 생각하며, 사랑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일, 그리고 누군가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일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출산율도 낮을 수밖에 없고, 동시에 교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해도 교회는 계속해서 쇠퇴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시 사는 방법은 교회 안에서 '우리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아가 사회 자체를 변혁시키려는 '투쟁'을 해야 한다.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제국에 맞서는 하나님 나라 체제이다. 제국은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를 추구한다. 그래야 통치가 용이하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에 맞서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 즉 생명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번성을 이루려 노력했다.

 

나쁜 교회와 좋은 교회의 차이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에 협력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고, 제국에 저항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를 용이하게 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고, 거기에 저항하여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인생과 생명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그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은 교회이다.

 

교회 다니고 싶지 않아. 탈교회 현상.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은 없다. 그냥 그렇게 교회는 계속 문을 닫을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이것이 문제다.

 

(이 글은 충코의 철학 ‘저출산의 근본 이유 고찰’에서 영감을 얻어 쓴 글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의 유익

 

개미핥기

 

풀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답이 두렵기에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끓는 문제들

개미에 시달리지 않고

쫓기지 않고, 개미를 미워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나는 날름날름

개미를 삼킨다

위장(胃腸)의 일로 넘겨버린다

그래도 날이면 날마다 여전히 끊는 개미 떼

나는 또다시 날름날름

개미는 나의 양식

입속이고 뱃속이고 따끔따금 뜨끔뜨끔

 

(황인숙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에서)

 

삶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풀지 않고 넘겨버리니까 그렇게 속이 아픈 거겠죠. 그렇다고 삶을 괴롭히는 그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인생을 허비하기에도 아깝습니다. 인생은 짧은데, 문제들과 씨름하다가 언제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요.

 

“풀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 답은 두렵기에”라는 문장에서 마음이 머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많이 만납니다. 문제를 풀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죠. 그 문제를 풀고 나면 나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그 두려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문제를 묻어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보면서 기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는 문제를 묻어두는 행위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풀어가는 과정이 독특합니다. 기도는 문제를 풀되, 그 문제에 인생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는 소망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그 문제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기도의 유익은 뭐니뭐니 해도, ‘맡기는 것’에 있습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그 문제는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지 막아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의 삶은 ‘형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길 때’, 우리의 미래는 어떠한 방식으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는 믿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를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것을요.

Posted by 장준식

결핍은 하나의 철학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10권을 읽고 1000권의 효과를 얻는 책 읽기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자기계발 책 같은데,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은 단순히 실용서가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기도 하죠. “그렇기에 이 책이 그저 단순한 실용서로 읽힐 것이 아니라 읽기에 대한 생각을 묻는 아주 가벼운 철학서로서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희망한다”(9쪽).

 

이 책은 ‘다독’이 미덕이 된 우리 시대의 독서 풍경을 되돌아보며 교정해 주는 책입니다. 다독(책을 많이 읽는 것)만이 독서의 미덕이 아니라, 책을 적게 읽는 것도 얼마든지 삶에 큰 의미를 준다는 것이죠. 책의 제목처럼, 천 권의 독서보다 열 권의 독서가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천 권의 독서를 했지만 독서를 많이 했을 뿐 거기에서 남는 게 없다는 정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열 권의 독서를 했어도 그 독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면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독(少讀/적게 읽기)-심독(心讀)-탐독(探讀)-숙독(熟讀)’할 것을 권합니다.

 

요즘 ‘독서모임’이다 ‘인문학 공부’다 ‘뭐’다 해서 책 읽는 모임이 많습니다. 독서를 통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문학 열풍은 실제로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고, 그것이 좋은 직장을 얻는 데 도움이 되고, 수입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열풍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책을 ‘욕망’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에 있어, 책은 성숙의 대상이 아니라 성과의 수단인 것이다”(20쪽).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할까요? ‘나’는 왜 책을 읽고 있습니까? (물론 책을 잘 안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은 별 의미가 없겠습니다만) 독서는 성과의 수단인가요, 아니면 성숙의 대상인가요? 독서는 참 좋은 것이고, 원래 독서는 ‘영혼의 양식’이라고 불리며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인생의 동반자였는데, 어느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독서를 성과의 수단, 즉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이 책에서 읽은 문장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여유를 가지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이다. 느리게 걷는다 해서 도착이 늦어지는 것은 아니다”(106쪽).

 

정말 그렇죠.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잉의 시대입니다. 과잉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지구도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과잉을 좆아서 삽니다. 무엇이든지 비워내기 보다, 무엇이든지 채우고 넘쳐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불안은 끝없습니다. 과잉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신기루이기 때문입니다.

 

과잉의 시대에 결핍은 부족함이나 불안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철학입니다. 결핍되었다고, 부족하다고 덜 행복하거나 인생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과잉이 아니라 결핍을 지향하는 것,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기독교의 구원은 결핍을 통해서 왔습니다. 결코 과잉을 통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잉의 시대에 결핍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이자,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신앙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나를 열어주세요

 

나희덕 시인의 시 중에 <나를 열어주세요>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세요.

 

옆구리에 열쇠구멍이 있을 거에요.

찾아보세요. 예, 거기에

열쇠를 꽂아주세요.

아니면 태엽이라도 감아주세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열쇠를 찾을 수 없다고요?

당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잖아요.

손가락만큼 좋은 열쇠는 드물죠.

때로는 붓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는 손,

지문의 소용돌이를

열쇠구멍의 어둠에 가만히 대보세요.

예, 드디어 열렸군요.

이제 구멍 밖으로 걸어갈 수 있겠네요.

태엽을 넉넉히 감아주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

내 구두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어

통, 통, 튀어 올랐다가도 이내 가라앉고 말지요.

혹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눈먼 둘부리에 걸려 넘어진 줄 아세요.

당신의 인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일으켜줄 어떤 손을 기다리면서.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인형이 말을 하는 듯합니다. 누군가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는 인형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인형은 누군가 태엽을 감아주어 머물러 있던 자리에서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형처럼 상상합니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죠. 인생은 기본적으로 지루하고 답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기분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인형의 바람대로 누군가(물론 인형의 주인이겠지만요) 태엽을 감아줍니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된 인형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는 인형은 누군가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지루해 하고 답답해 하면서 일탈을 꿈꿉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우리의 삶을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좋습니다. 그런 순간이 바로, 내가 열리는 순간이겠죠. 일상에 나를 열 때, 그 일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맛보게 될 테니까요.

 

일상이 답답하고 지루하다면, 잠시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주님, 나를 열어주세요!”

Posted by 장준식

사순절에 들어서며

 

사순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꽃 피는 봄이 왔네요. 봄에 관한 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문정희 시인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시가 눈에 띕니다.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흰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나희덕 시인은 <어떤 나무의 말>에서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문정희 시인은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라고 말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거부하는 허무주의가 엿보이지만, 문정희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엿보입니다.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태도에서 어떤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허무주의나 생명에 대한 갈망이나 생명을 깊이 탐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겠죠. 생명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 생명이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하니까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생명에서 벗어나 빨리 좀 쉬고 싶다는 갈망이 담기는 것이겠죠. 또한 누구나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문정희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눈펄 같은 흰꽃들’을 보면 나도 그꽃들처럼 활짝 피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명이 활짝 필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듯 싶습니다.

 

봄과 사순절이 어깨동무 하고 우리 곁에 오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봄을 느끼며 사순절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은 겨울을 이겨낸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과 따스함과 용기로 다가오는 것처럼, 사순절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인 희망이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그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절기’입니다. 하누카가 오롯이 유대교의 절기인 것처럼, 사순절은 오롯이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유대교인이 아니면 하누카에 아무런 감흥이 없듯이, 기독교인이 아니면 사순절에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이란에서 온 외교관 한 명과 국문학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이란 외교관이 배가 고파서 힘들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라마단 기간이라 해가 떠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의 라마단 절기는 무함마드가 꾸란(코란)의 계시를 받은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라마단을 특별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지워진 의무를 열심히 지킵니다.

 

그런데 정혜윤의 어떤 책에서 재밌는 사실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무슬림들이 라마단에 금식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철저하게 지켜야 하지만, 라마단 기간이라도 그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비행기를 탔을 때랍니다. 그들의 두 발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라마단 기간이라 할지라도 금식하지 않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에 비행기를 탔을 때 미친듯이 먹는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또다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서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도 오랫동안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에 비추어 보면, 기독교인들은 이제 기독교만의 독특한 절기인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많이 세속화됐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라는 것은 신앙심이 많이 퇴색되고 옅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인 법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종교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사회는 종교법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종교의 법에 따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강한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종교법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철저히 개인의 양심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그 누구도 종교의 법으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즉, 사순절이 되었다고, 그 누구도 종교적 행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금식을 강요할 수 없고, 기도를 강요할 수 없고, 선행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좀 더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며 비난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선행을 한다면, 그것을 ‘진실한 금식, 기도, 선행’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경건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난 신앙의 행위일 때, 그것은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사순절을 향한 우리의 양심이 경건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인들만의 절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인이 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사순절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는 것은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세화 공동체’로서, 이번 사순절은 조금 특별하게 보내 보려고 합니다. 팬데믹 동안 조금은 흐트러진 경건의 모양을 다시 갖추어 보려고 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쳐 놓고 고요한 시간에 초를 켜 놓고 기도도 해보고, 사순절 묵상집을 통해서 사명을 다시 발견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년 간의 팬데믹 시간을 되돌아 보면서 소감을 담은 글도 한 번 써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모아 ‘세화사랑’을 발간해 보려고 합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마음으로 ‘Dear Tomorrow’ 편지도 써 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조그맣게 농사를 지어 장터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몸으로’ 신앙을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계절, 꽃이 활짝 피어 자기를 뽐내듯, 우리도 활짝 피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의미 있고 행복한 사순절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이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9. 기후위기와 희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미국 원주민 크로우 부족의 위대한 추장 플렌티 쿠즈(Plenty Coups)의 말입니다. 미국 정부의 강압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고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 산 지 30년이 지난 뒤, 추장 플렌티 쿠즈는 이처럼 슬픈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슬픈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팬데믹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렇게 산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그 당혹감, 이해 못하는 삶을 살 때, 인생은 무의미해집니다.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고, 최악의 인생입니다.

 

기후변화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짐 안탈 목사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기후교회, 287쪽). 사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압도하는 뭔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서는 법입니다. 가령 정치세계의 추잡함을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들려오는 정치판의 추잡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차기만 할 뿐, 어떤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냥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끄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관심을 가져봤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죠.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가 제시하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그는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분합니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낙관주의의 문제는 그저 그러한 기대를 할 뿐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낙관주의는 비용이나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그저 마음의 태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낙관주의를 넘어서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무엇일까요?

 

희망의 전제조건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짐 안탈은 말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성경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회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대개 회개하지 않는 자는 현실을 외면합니다.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니까 회개를 하지 못하는 것이죠.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두려운 감정과 우울한 감정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밀려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신앙은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전제조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표시하기’ 입니다. “슬픔의 연기와 사랑의 불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생명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에서의 기쁨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기후변화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픔을 가져올 것이다”(기후교회, 290쪽).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명의 파괴’입니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Science Advances)'에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00년까지 생물다양성이 25% 감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슈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얻어낸 결과인데, 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아이들은 잠자리나 코끼리, 코알라 같은 곤충이나 동물들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희망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슬픔을 표현하기’ 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지혜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현실, 슬픔, 희망: 세 가지 긴급한 예언자적 과제들』에서 성경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서를 읽어보면, 거기에 흐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 같은 경우, 거기에는 망국의 슬픔이 깊이 베어 있습니다. 왜 예언자들은 그렇게 ‘슬픔’을 표현했을까요? 이에 대해서 월터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멍해져서 말로 표현 못하는 정당한 슬픔의 상태에선, 내가 제안하기로는, 예언자적인 과제는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공공의 슬픔을 장려하고 허락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보여주었듯이, 이것이 장차 다가올 파괴를 기대하면서 예언자들이 한 것이다… 건강하고 새로운 대안적인 삶은 슬픔을 공유하고, 밖으로 드러내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 표현된 슬픔은 폭력에 대한 대안이다. 더군다나 그런 슬픔은 잃어버린 것을 새로운 것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한다… 지름길은 없다. 그런 과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뢰와 못 본 체하지 않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끌어안고, 정직한 말들의 포용 속에서 편히 쉬도록,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진혼곡(requiem)을 드리는 것과 같다”(기후교회, 292쪽).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공공의 슬픔을 장려했다’는 것과 그러한 슬픔의 표현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변화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 현실이 가져올 슬픔에 대하여 공적으로 슬퍼하는 일을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슬픔의 공공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슬픔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는데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공유될 때,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한 마음으로 기후변화를 위한 행동을 모두 함께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전제조건입니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달리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직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존재(하나님)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 11:1,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한 기독교 신앙의 희망은, 지금껏 그랬던 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로 인한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희망이시니 기후변화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은 전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기후변화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유산은 사도행전 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이러한 풍경을 일시적이거나 광기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현대의 예레미야’로 불리는 환경운동가 빌 맥키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다”(기후교회, 307쪽). 상품을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을 최선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는 개인주의를 부추깁니다. 우리는 여기에 너무 길들여 있어서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잘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생명이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좀 더 많은 자비와 관대, 돌봄과 웃음과 기쁨을 누리며, 그리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구원(꿈)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 희망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함께,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생명의 파괴에 대해서 공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이야기 하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8. 함께 증언하기

 

"우리는 토지를 공공의 재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We must make land common property."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것을 ‘토지공개념’이라고 부릅니다. 19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을 이끌었던 정치경제학적인 용어입니다. 사유 재산 제도가 극에 달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자본주의가 뿌리는 내려가고 있는 시점에 이러한 ‘토지공개념’이 사회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사실 ‘토지공개념’은 레위기에서 좀 더 강력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것은 헨리 조지가 제시한 ‘토지공개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개념입니다. 헨리 조지가 말한 토지공개념은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 균등한 이익의 분배를 위한 조치이지만, 레위기에서 말하는 ‘토지공개념’은 땅에 대한 개념을 신학화 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땅은 피조물의 소유가 아니라 창조물의 소유입니다. 땅과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은 땅을 소유할 권리와 능력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닥뜨린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땅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선포가 인간의 역사를 이끌었다면 인간은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의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넘어서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니, 기후변화는 근본적으로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착취한 죄의 문제입니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기후변화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는 이처럼 필히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공동체 행동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라고 말합니다. 사유 재산 제도가 극에 달한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유 재산 제도에 대하여 회개하고 부정하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은 결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행동’이 중요한 것이죠. 함께 증언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시대에 횡행하는 불의한 일들에 대항하여 시민불복종 운동을 통해서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소로, 간디, 도로시 데이, 랍비 헤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행한 공적인 행동을 예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도덕적 용기를 칭송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예외적인 행동을 우리의 삶에서 저만큼 멀리 두려고 합니다. 짐 안탈은 도덕적 행동이 대세를 이루려면 시민불복종 운동 같은 예외적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일에 그리스도인이 앞장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큰 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파괴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행동을 위한 강력하 촉매다”라고 말합니다(기후교회, 269쪽). 1960, 70년대 미국에서 환경운동의 촉매가 된 것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레이첼은 우리가 잃게 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환경운동의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기후위기는 레이첼이 유발한 두려움보다 훨씬 큰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때보다 덜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그동안 사랑하는 것들을 많이 잃어버린 탓도 있고, 요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경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메마른 세상입니다.

 

『기후교회』에 짐 안탈이 제시하는 사고의 전환은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빌 맥키븐이 이룬 환경운동의 변화를 소개하며, 예전에는 기후변화가 소비자 편에 끼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기후변화의 공급자에게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다. 소비자 편에서 아무리 환경보호를 위해서 노력을 해도 기후변화의 공급자가 지구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면 기후위기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급자에게 초점을 두는 방향은 우선 개인과 기관들에게 화석연료 회사에 투하자는 것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주식을 소유하는 것은 단지 돈을 벌려는 것만 아니라 그 회사의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그 회사의 활동을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후교회, 270쪽)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회사의 주식을 팔아치우거나 사지 않는 행동은 그 회사가 행하는 활동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짐 안탈은 수탁자(fiduciary)의 책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수탁자란 다른 이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는 개인 또는 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증권 회사 같은 수탁자는 고객들의 투자금을 맡아 고객 대신 주식에 투자하여 이익을 극대화하여 다시 나누어 주는 일을 한다. 그러나 짐 안탈은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를 생각할 때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수탁자들의 도덕은 화폐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환경을 헤치는 기업들에게 투자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연환경은 ‘외부효과’이다. 이익 창출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석유회사들은 석유를 땅에서 추출하면서 망치는 자연환경에 대한 비용을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고 있는 ‘외부효과’ 문제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보수)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외부효과’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외부적인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큰 집, 큰 자동차, 안락한 삶, 이런 것들이 구원의 증거라면, 이러한 삶을 위해서 희생되는 ‘외부효과들(자연이 망가지는 일)’은 완전 무시될 수밖에 없다. 시장자본주의 체에서 우리가 누리는 부의 혜택은 대개 외부효과들을 무시한 것에서 오는 열매들이다.

 

“오직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토지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한다”(기후교회, 278쪽). 정말 그렇다. 성경은 말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을 중요시하면서도 정작 토지(땅)에 대한 우리의 지배와 통제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토지를 사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강력한 첫 걸음은 땅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성경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땅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교회의 땅을 공동의 것으로 바꾸는 일을 할 때 교회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진정성을 얻을 것이다. 교회 재산의 사유화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최악의 길일 뿐만 아니라, “땅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이고, 공공선을 헤치는 부도덕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함께 이것을 증언할 수 있는가.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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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문제: 전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하는 삶

 

지난 2019년부터 우리는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며 고민해왔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창조론과 기후변화의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왜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함께 공부했죠.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작년부터 우리는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관련된 책을 함께 열심히 읽으며 발제하고 토론하고 기도합니다.

 

기후변화의 문제를 파보면 결국 그 뒤에는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정치와 경제 체제가 기후변화 위기를 유발시킨 원인이죠. 특별히 자본주의 체제는 기후변화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근대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아래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제가 결국 인류의 멸망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후변화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정치와 경제의 영역 속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 생명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기후변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불평등한지를요. 그리고 우리처럼 선진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를요. 하지만 그 사실을 얼마나 모르고 사는지를요. 현재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추악함을 '전가(다른 곳으로 떠넘기기)'하면서 사는지를요.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가(impartation)'의 교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주님께 전가하고,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칭의 교리가 결국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행되고 있는 전가의 논리(외부화/부정적인 것을 안 보이는 곳으로 떠 넘기기)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자본주의는 내부의 모순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보이지 않게 한다. 그 전가로 인해 모순이 더욱 심각해지는 참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1쪽).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전가 행태가 만들어낸 참상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교회의 위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의 전가'가 결국 교회의 참상을 만들어 낸 것 아니겠는가 말이죠. 자신의 모순을 자꾸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자신의 모순을 결국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보이지도 않아서 결국 무너지게 되는 참상.

 

아무튼, 우리는 모든 것을 뒤집어 보아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멸망'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를 공부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많이 떠올리게 됩니다. 그 당시 남유다가 그냥 가면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뿐이라는 사실(미래)을 안 예레미야는 온 힘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결국 남유다의 권세자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 갔고, 수많은 고관들과 백성들이 결박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도 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행동을 촉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입니다. 삶의 자리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던 일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멸망한 자에게 무슨 예배가 필요하며, 사랑이 필요합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전가'하는 체제와 신앙은 참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전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남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바로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