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말]

 

사도 바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15장 24절)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권세, 권력, 권능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최후의 심판 이후에는 인간적이든 천사적이든 모든 권력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직접적으로 신 아래 있게 된다. 결국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신이 직접 군림하기 때문에 더 이상 천사들의 매개에 의한 통치와 행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천사들을 파멸시킨다. 다시 말해서 신은 모든 권력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위'로 돌리고, '비활성화'시키며, '실업의 상태'로 남겨둔다.

(양창렬 , "조르조 아감벤",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244-245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종말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서 온다. 우리는 '아직'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했다. 우리는 이 역설 속에서 산다.  최후의 심판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천사들'의 통치 아래 산다. 여기서 천사들이란 권세, 권력, 권능을 말한다. 현실 정치 용어로 말하면,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시장, 구청장 등이다.

 

모든 권력은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치하는 '천사들'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어차피,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사라질 권력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사라지게 할 능력을 가진 메시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미 그들은 자신을 메시아 반열에 올려놓은 메시아 병에 걸린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매개된 통치와 행정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렵고 혼란스럽다. '천사들'이 잘 해주면 좋은데, 보통 천사들은 잘 하지 못한다. 여기서 교회의 기능은 확연해진다. 천사들이 잘 하도록 채찍질하거나, 천사들이 매개되지 않은 통치와 행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기능을 상실하면, 천사들과 한통속이 되어, 세상의 고통을 더 가중시킨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전한다.

 

하시딤(경건한 유대인들)은 도래할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이곳과 꼭 같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방은 도래할 세계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아이는 다음 세상에서도 지금 자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생에서 걸치고 있는 옷들을 저 생애에서도 입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약간 다르게.

 

위 우화를 전하며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약간을 실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우며, 이 세상에서 인간이 그 방도를 찾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메시아의 도래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은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서 통치가 이뤄지고 있다. '약간 다르게'만 해도 살만할 텐데, 인간에게는 그 약간 다르게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 그 신음은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닮았다.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도래를 막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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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생명정치]

 

1.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한덕수 총리가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관련하여 브리핑을 하면서 "국가와 과학을 믿어달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정부가 막아서지 못하고 오히려 변호하고 있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국민인가 정권인가?

 

2. 예외상태

칼 슈미트는 예외상태에서 누가 주권을 갖는가에 대한 논의를 했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주권을 가진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말에 의하면, 예외상태에서 주권을 갖는 것은 정부와 과학인 것 같다. 그러므로, 국민들에게는 주권이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가 아니거나, 무정부 상태이거나, 아니면 정권이 국민의 주권을 빼앗아간 나라처럼 보인다.

 

3.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은 예외상태에서 발생하는 생명정치를 말하며,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계속해서 예외상태를 만들어 생명정치를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사건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외상태가 발생하면 예외상태에서 뭔가를 결정한 주권자가 필요하게 되고, 그러한 상태에서 정권은 국민을 제쳐놓고 주권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예외상태에서 모든 국민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생명정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4.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를 직역하면 '신성한 생명'(인간)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면서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자들을 말한다(아감벤, <호모 사케르>, 156쪽). 호모 사케르는 배제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정치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놓고 있다. 생명과 직결되는 방사능 오염수 방류 사건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배제하고, 예외상태를 만들어 정부가 주권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국민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몰아넣고 있다.

 

5.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

지금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와 그것에 동조하는 한국 정부의 문제는 단순히 국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일개 5년짜리 정권이 주권자 노릇을 하며 예외상태를 만들어 국민들을 호모 사케르로 전락시키고 국민들의 생명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드는 행위는 헌법에 대한 가장 큰 위법/반역 행위이다.

 

6.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들고 일어나라!

호모 사케르의 생명 정치가 발생하면, 누군가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그 사람은(그 주체는) 처벌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었고, 방사능 오염수 방류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후에 방사능 물질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들은 처벌 받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 안다. 즉, 늘 그랬듯이, 사건은 발생하고 희생자는 넘쳐나는 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처벌 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호모 사케르의 생명 정치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죽음으로 몰아 세우고 있는 정권을 향하여 들고 일어나라. 주권을 빼앗기지 말라.

 

7. 에스겔의 외침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이 땅 주민아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겔 7:5-9).

 

8. 한국교회여, 유체이탈 집회는 그만하고, 거리를 예배당 삼아 길거리에서 외치라

모 교단에서는 지금 00 영적 각성 대회가 한창이다. 기사를 보니, 대회에서 낭독된 선포문은  이렇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덕적 기초가 흔들리고 대립과 갈등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미래 세대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떠나고 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철저한 회개 밖에는 없다."

미래 세대가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유체이탈 화법을 교회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국에 잘 지어진 교회 건물안에서 '도덕, 양극화, 영적 각성, 회개, 부흥'을 외칠 것이 아니라, 길거로 나가서 '방사능 오염수 방류 반대'를 외치길 바란다. 그러면, 그렇게 걱정하는, 미래 세대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고, 교회로 밀려들 것이다. 

 

9. 믿음에 대하여

한덕수 총리가 말했다. "국가와 과학을 믿어달라." 국가는 믿을 만하고, 과학은 믿을 만한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믿음은 무엇인가? 한덕수 총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이 국가적, 지구적 대재난을 앞에 두고, 국민의 신복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본인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을 내세워 면피하고 있는가?

 

10. 인류세의 재앙을 끝내야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작전(맨하튼 프로젝트)을 수행한 날(1945년 7월 26일 새벽 5시 29분)을 인류세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핵폭탄을 만든 날이다. 그 핵폭탄의 실질적 피해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지금 핵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있다. 피폭에 대한 보복인가? 이제 핵물질은 공기, 땅, 그리고 바다까지 모두 오염시켜 인류의 생명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는 스스로의 생명을 빼앗고 있다. 인류세의 재앙은 멈춰야 한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후, 멈춤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그리고 미국 정부에게 고한다. 야합을 끝내고, 당장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멈추라. 정부와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정부와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될 능력이 없다. 겸허히 인정하고, 당장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멈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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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거와 마병이여!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내 머리속을 맴돌던 문장인데, 이 문장이 맴돌던 시간, 또다른 문장을 만났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의 문장입니다. 거기에는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는 문장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지칭합니다. 한 존재에 대한, 실로 엄청난 존경입니다. 병거와 마병.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국방력입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존재감, 이러한 존경을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성경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에 비추어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최정례의 시집을 읽으며 떠올랐던 문장이 스쳐갔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엘리사의 죽음에 비춘 나의 삶은 참 가난합니다. 부끄럽고 보잘것없습니다. 누가 나의 존재를, 나의 삶을 이렇게 애도하며 평가해 줄까,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은 그저 가난하기만 합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그래서 구세주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 지향해야 할 존재의 목적을 가리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 엘리사처럼 누군가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병거와 마병’으로 인식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지막지한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서 약간의 부요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요함을 약간이라도 맛보는 일, 이것이 구원이겠죠.

 

마침, 미국에 온 지 만 20년 되는 날(2023년 8월 11일)을 맞았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날, 마침 최정례 시집을 읽으며 떠오른 문장과 성경을 읽으며 맞닥뜨린 엘리사의 죽음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나그네로서의 지난 20년 간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래도 늘 존재의 가난함 만을 맛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도 일구었고, 바울처럼 교회도 개척해 보았고, 교회 건축도 해 보았고, 새로운 곳에 와서 또다른 교회를 섬겨보았고, 어려운 교회였지만 헌신하면서 신앙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나를 그리워하는 친구들, 고향 교회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며 존재의 가난을 느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렇게 가난하게만 산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20년의 나그네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20년의 나그네 삶을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 (교회)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나의 교훈으로 삼아 봅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누군가에게, 특별히 교회에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해봅니다.

 

이것은 나만의 고백, 다짐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이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좁게는 우리교회의 모든 교우들의 고백과 다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교회, 서로가 서로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어 주는 교회, 그래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교회. 이런 교회를 꿈꾸고 소망합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묵상하다 보면, 결국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로 성장해 가도록, 나의 존재를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에게 내어줄 때, 우리는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한 교회를 세우고,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겠습니다. 당신도 나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어 주세요. 이렇게 병거들과 마병들이 모인 교회를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이게 부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병거와 마병 같은’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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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바깥에서 온다

 

절망(絶望)

ㅡ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악했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 왕조는 또다른 사악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합 왕으로 대표되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는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예후 왕조인데, 그들도 결국 오므리 왕조와 다를 바 없이 ‘여로보암의 길’로 갔습니다. 다윗의 길로 가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길로 간 것 때문에 예후 왕조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특별한 공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웃 나라인 아람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학대를 당한 예후 왕조의 여호아하스(예후 왕의 아들) 왕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학대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구원자를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학대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이 여호아하스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구원은 바깥에서 옵니다.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것을 동일하게 말합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수많은 고통을 받았던 발터 벤야민도 구원을 바깥에서 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메시아 사상’를 펼칩니다. 우리 나라의 어두운 독재 정권 시절을 살았던 김수영 시인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기도는 구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구원이 바깥에서 온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바깥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기도하는 일은 우리의 삶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의 소망처럼 구원이 실제로 바깥에서 오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큰 기도, 시간이 많이 드는 기도, 정성이 많이 들어간 기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작은 기도, 찰나에 드리는 화살기도, 정성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기도여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는 것, 그리고 구원은 마침내 온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며 믿음입니다. 이 마음만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이든지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매순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 안에 있고, 기도로 마치십시오. 기도는 메시아가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구원의 통로이고 열쇠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인류세 신학]

 

인류세. 영어로는 Anthropocene(안트로포씬). 2000년,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과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가 기후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한 개념입니다. 지난 7월 27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습니다!” 대개 우리는 더 좋은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하지만, 그와는 달리, 유엔 사무총장의 선언은 비극적입니다. 지난 1만년 동안 기후는 인간에게 따뜻했습니다. 기후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1만년 동안 인류는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지난 1만년 동안의 지질시대를 일컬어 ‘홀로세’(Holocen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기후가 안정적이었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epoch), 인류세가 도래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세’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또다른 세금(tax)이 생겨난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기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류세’가 기후에 대한 용어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류세’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용어는 ‘인류세’와 더불어 ‘전례없는’(unprecedented)이라는 용어입니다. 인류세를 맞아 인류는 전례없는 경험을 합니다. 모두 기후 변화 때문에 겪게 되는 경험입니다.

 

왜 ‘인류세’라는 용어가 중요하고, 왜 인류는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동안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들은 모두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는, 자연적인 활동에 근거한 용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빙하기’(Ice Age)’가 끝나고 홀로세로 들어서게 된 것은 그냥 자연의 원리였지, 거기에 인류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가 바뀌는 데 1도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인류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생명체였던 공룡조차도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류(인간)만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는 정말 대단해!’라고 칭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금 자신들의 활동 때문에 스스로 죽을 위기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활동을 했길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는가?’ 이렇게 우리는 아주 깊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늘 품고 있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입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이 말 때문에 저는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인간은 머리속에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속에서 올바른 개념이 확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의지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생각(사고)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하는 행동이나 또는 무심코 하는 행동 모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반영입니다. 이것을 기후 변화 문제에 적용해 보면, 우리의 행동이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생각을 바꾸는 일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바뀌면 ‘다시 태어났다’라는 말로 묘사할 정도로, 어떤 이의 생각이 바뀐 것을 보면서, ‘저 사람 다시 태어난 것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을 일컬어서 ‘거듭났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류세를 맞아 이 ‘거듭남’이라는 용어를 조금 다르게 사용할 필요가 생긴 듯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는데, 그 거듭난 신앙인의 행동이 기후 변화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진정 거듭난 것일까요?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풍성해졌다, 생명이 온전해졌다는 뜻인데, 실상, 인류세를 맞은 인류는 생명이 쪼그라들어,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요?

 

1990년을 전후로 서구권 나라에서는 ‘지구’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일컬어 ‘지구인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인문학의 주제는 인간이나 국가(정치)였는데, 인문학 주제에 ‘지구’가 대두된 것이죠. 그동안 인문학의 주어는 인간 또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일면서, 인문학의 주어가 인간 또는 국가에서 지구로 바뀐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인문학에서, 이제는 지구가 주어로 등장하여, 모든 논의에서 지구를 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규정하는 ‘신학’도 마찬가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의 주어는 하나님과 인간이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신적인 삶(신에게 잇대어 있는 삶)’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를 주어에서 뺀 신학이 결국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우리는 인류세를 맞아, 아주 깊은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저는 ‘인류세 신학’이라고 명명합니다. 인류세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만 주어로 삼아 생각을 전개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도 주어를 삼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 지난 2천년 동안 전개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르게 재구성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총제적 문제: 기독교만 문제가 아니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는 이러한 의학의 효율적인 통제를 "모더니즘적 의료"가 지닌 하나의 특질로 설명한다. 모더니즘적인 의료는 환자의 몸을 통제하는 대신 환자에게 완치 가능성을 약속했다. 환자는 '낫기' 위해서 의료에 몸을 맡긴 채 "환자 역할 sick role"을 할 뿐, 그 외의 몸짓이나 목소리는 축소되거나 소거되었다...... 완치의 개념이 질병이 '끝나는 것' 아니라 '조절 가능한 질병과 함께 무난히 살아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문제는 '완치 불가'라는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현대 의학이 효율적인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기병, <연결된 고통>, 42-23쪽)

 

한국이 서구의 모더니티 사회 속으로 편입되면서 여러가지 진통을 겪어왔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빨려들어가면서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문제점을 교회를 통해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들을 한탄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여러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를 갱신할 수 있을까?

 

기독교 내부에 있는 기득권자들도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인들의 권력과 밥그릇이 달린 문제라 사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교회의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람쥐 쳇 바퀴 도는 꼴이다. 그렇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우스운 꼴이 된다.

가령, 교단의 지도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내세우는 단골 메뉴는 '영적 대각성'이라는 워딩 아래 벌이는 '스펙터클'이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로잔대회'를 준비하고 있고, 감리교에서는 '하디 영적대각성운동' 같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빌리 그래함 방한 50주년 행사를 거하게 치르기도 했다. 이들은 정말 이런 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열심을 낸다.

 

그러나, 열심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방향이 틀렸는데, 열심을 낸다면 틀린 방향으로 더 깊이, 더 멀리 가, 돌이킬 수 없을 뿐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열심보다 방향이다. 방향을 바꾸느라 좀 느리고 더디더라도, 열심을 내려놓고, 방향을 제대로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소위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안목이 전혀 없는 듯하다.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기독교가 경험하는 위기는 사실 기독교만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의학계에서도 동일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의사를 성직자로, 환자를 교인으로 바꾸어서 진술하면, 이것은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문제,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가 기독교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의료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더니티'라는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다보니 동일한 질병을 앓게 된다.

 

지금은 모더니티 식으로 스펙터클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되는 때이다. 프랑스 68혁명의 기수 중 한 명이었던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드러내주고 있듯이, 스텍터클은 현대 사회의 통치 기술이다. 스텍터클을 일으키는 것은 통지 욕망에 대한 표출일 뿐,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스펙터클을 일으켜 '영적대각성'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그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모더니티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치하겠다는 권력의지만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이것부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그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통제하고 통치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다.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담긴,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한 문제를 통해 고통 받으며 사는 내 삶의 이웃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것이다. 그냥, 손잡아 주는 것이다.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매체 중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주고 바꾸어 주는 것은 단연 '책'이다. 책 이외의 다른 매체들은 끊거나 줄이는 게 좋다. 그리고 시간을 할애하여 '책 읽기'에 전념하는 게 좋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스펙터클을 일으킬 시간과 에너지를 책 읽는데 진지하게 쓴다면, 한국교회는 갱신을 이룰 토양을 일굴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면 망하듯이, 책읽기를 도구로 사용하면 망한다.

 

사실, 이런 글도 쓰지 말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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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해방신학과 언어문제]

 

해방신학에서 기본 원칙은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을 배운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당파성'(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계시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존재한다.

(도로테 죌레,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34-35쪽)

 

독일의 저명한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위와 같이 해방신학이 가진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에 대한 한국어 번역입니다. the poor를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것은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한 이들을 떠올리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the poor)'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이 단순히 경제의 개념 안에서만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해방신학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념을 담고 있는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하고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언어가 사물, 또는 대상 자체를 잘 표현해 내지 못하거나, 잘 드러내지 못하면, 인간은 사물 또는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삶 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해방신학이 말하는 기본 원칙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우리의 선생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이다." "사건의 인식과 해석의 기준은 가난한 자들이어야 한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너무 중요한 것이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를 '가난한 자들'로 번역한 한국말에 있습니다. 이 용어는 명백하게 경제적 가난을 연상시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난하게 살면 삶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청빈은 경제적 부담이 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성가 중 청빈한 삶을 산 사람들은 본인의 청빈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짐을 지웠는지 모릅니다. 이는 유기농 식단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을 한국어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the poor를 '가난한 자들' 이외의 다른 용어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땅한 용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죌레가 위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풀어서 말한 다음 문장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다."

 

이것은 경제적 가난의 유무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해진 사람들 대다수가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 이외에도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일 수도 있고, 한 가정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나 또는 한 나라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현실에서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들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부단히 가난한 자들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서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삶의 파괴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삶의 파괴를 경험하고, 삶의 파괴를 경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방 위험’합니다.

 

역사의 피해자가 되는 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는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 한국의 수해 피해자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곡물 수출이 안 돼 굶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 이 땅의 모든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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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삭처럼 사랑하기

 

이삭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은 부모를 본받기도 하지만, 부모를 반면교사 삼기도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 삼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이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살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사건, 즉 이삭이 다른 족장들(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다른 삶을 살게 한 그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마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모리아산 제물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이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쫓아낸 이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모두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언약이 뭐길래?!” 그런데,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고 보니, 이들 가운데도 ‘언약’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아버지처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에서를 광야로 내쳐야 했을까요? 이삭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언약 때문에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큰 아들 에서를 지킬 거야. 사랑할 거야.” 이삭은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저명한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쓴 책에서 이삭에 대한 삶을 해석하는 부분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매주 오경 읽기, 64쪽). 그러면서 이삭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이삭이 경험한 아버지와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즉, 이삭이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가장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무난한 삶을 산 것 같은 이삭이 사실은 가장 힘든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형 이스마엘, 즉 아브라함의 큰 아들을 죽음에 내몰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이삭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도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아니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죠.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제사 드리러 갔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아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삭의 경험은 아주 원초적입니다. 이삭의 경험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부모)와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 단절의 경험이 이삭을 평생 괴롭혔습니다. 이삭은 야곱과 요셉처럼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경험, 아버지(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누구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덮어놓고 사랑한 것은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건이 초래했던 부자간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일이었다”(조너선 색스)는 진술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이삭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삭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에서의 상처도 치유합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에서는 동생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이삭은 평화롭게 죽었고, 에서는 나중에 동생 야곱이 하란 땅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죽이고 싶었던 동생’ 야곱과 화해합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 대하여 마음을 푼 것은 아버지 이삭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처를 치유합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이삭처럼 사랑하면, 우리들의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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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성서는 변혁이다]

 

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지의 폐기가 아니다. 앎이 늘어난다고 해서 미지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의 지적 탐구는 실존에 대한 불안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앎은 무한으로 뻗어 나간다. 앎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더 경이로워하고, 미지의 영역은 한층 더 넓어진다. 본문, 전통, 공동체, '나'는 기술을 좀 더 능숙하게 익히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본문도, 전통도, 공동체도, '나'도 베일에 가려진, 통찰과 계시를 필요로 하는 신비다. 이들에 대한 앎은 숙달된 기술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선물로 받게 된다.

ㅡ 월터 윙크, <성서는 변혁이다>, 130-131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충격적이다.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Historical biblical criticism is bankrupt.)

이 책은 역사 비평이 왜 파산했는지, 그리고 파산한 역사 비평에 어떠한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한지를 밝히고 있다.

 

역사 비평이 '파산'했다는 말은 역사 비평이 죽었다는 말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파산했다는 것은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역사 비평을 전혀 필요 없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비평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이 책은 성서학자들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모더니티의 유산인 성서 비평을 통해서 성서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서 학문과 공동체가 어떻게 분열시켰으며, 분열된 결과 어떠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학문과 공동체가 분열되어 있는 비극적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책은 성서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이다. 이 책은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서술이다. 이 변증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자와 성서본문 사이에 있는 주체-대상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잘 보여준다. 변증법적 해석학을 설명해 나가면서 쓰이는 두 가지 도구는 1) 지식 사회학적 분석과 2) 정신 분석학적 비평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성서해석의 중요성은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리처드 팔머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참된 해석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며 존재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해석은 현재와 분명한 관계가 있는 활동이다. 해석자는 해석을 통해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한다"(115쪽).

우리는 왜 성서를 읽는가? 왜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는가? 왜 우리는 성서와 교제를 나누는가? 답은 변혁(transformation)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한 일의 대부분은 '자기 중심성/자기집중'이라는 교만의 죄 때문이다(판넨베르크). 이러한 죄는 성서본문 해석의 왜곡에도 관여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를 왜곡한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세계는 파괴된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변증법적 해석학'은 그것을 치유할 힘을 제공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감명 받은 문장 중 하나이다.

 

"위대한 신화와 종교 문헌들 가운데 그 무언가는 우리와 만나며 특별히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를 만나고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이때 '나'는 나에 관한 앎을 얻기 전에 먼저 내가 알려짐을 안다. 무언가는 대상을 통해 '나'의 계산을 뛰어넘는 깊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깊이를 통해 나는 '나'를 중심으로 짠 전략에서 벗어나 모든 피조물과 다시 연합하기 시작한다.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 주체-대상의 이분법이 주체-대상의 관계로 대체되면, 그리하여 지평들의 친교가 이루어지면, 본문과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변혁될 수 있다"(116쪽).

 

이 문장은 모더니티가 망쳐 놓은 '주체-대상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고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이고,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악도 '주체-대상의 이분법'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았고, 급기야 기후변화 문제를 야기하여 집단 자살 상태에 들어섰다. 모더니티가 낳은 그렌델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 해결책이 담겨 있다. '주체-대상의 관계'가 그것이다. 지평들의 친교. 결국 친교가 중요하다.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 대상이되 대상이지 않은 주체들의 친교.

 

월터 윙크의 책은 솔직하고 담백해서 좋다. 허세가 없다. 아는 것을 친절하게 말해주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이는 존 도미닉 크로산 책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책을 읽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T.S 엘리엇의 시를 옮겨 적는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해석의 깊이를 잘 전하고 있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려면

그대는 무지의 길로 가야 한다.

그대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그대는 무소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대가 그대 아닌 것에 이르려면

그대는 그대가 아닌 길을 거쳐 가야 한다.

그대가 모르는 것만이 그대가 아는 것이다.

(<사중주 네 편>에 실린 East Coker라는 시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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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쁨의 편지]

 

218쪽. 나가며. "사랑해서 행복합니다."

책의 마지막을 읽어내려가며, '나가며', 눈물이 흘렀다.

떠나보낸 남편을 '프레드릭'에 비유하며, 남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그냥 흘렀다.

 

이 책은 '기쁨의 편지'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전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이 되었다. '로슈 이신근'. 누구라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것이다. 무명이다. 로슈라는 이름은 예수원에서 얻는 신명이다. '뿌리'라는 뜻이다. 로슈라는 신명도, 이신근이라는 이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로슈라는 신명과 이신근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a is the message)"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서 매우 보수적인 말이다. 미디어, 즉 전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메시지의 경중이 갈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만하고, 무명한 자가 전하면 사람들이 메시지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하는 자, 즉 미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 수사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아젠다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치적 수사다. 사실, 미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메시지 자체보다 그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메신저)'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거 아닌 메시지를 뭔가 있는 메시지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스펙터클'을 조성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내용 없는 메시지에 영혼을 털털 털린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공허한 이유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중요하다. 로슈 이신근. 무명이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무게를 맛보게 해준다. 그는 '비운동성 섬모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 때문에 생명은 그에게 늘 '문제'(matter)'였다. 그래서 그에게 '생명'은 '살라는 명령'이었다. 생명이 '살라는 명령'이 아니면, 그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테마여행'처럼 꾸며져 있다. 들어가며 뭉클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고, 나올 때 그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맺힌 채로 나오게 된다. '희년함께'에서 간사로 일하며 경험한 것들 뿐만 아니라, 공부하며 배우고 깨달은 신앙과 세계의 이야기가 담담한 일상의 언어로 잘 풀어져 있다. 신학자들의 언어처럼 현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장의 언어처럼 정제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삶 자체가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답게 그의 언어는 '종말론'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오늘은 영원이고, 사랑은 구원이고, 신앙은 종말 그 자체다.

 

그가 감당했던 육체와 삶의 고통은 개인적으로 남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자기를 넘어 타인에게로, 그리고 사회에로 확대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에게 신앙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다. 그에게 신앙은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안아줌이다. 생명은 원래 그런 것이다. 살라는 명령이다. 살고자 하는 자를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만큼 악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생명을 향한 따뜻한 '살림'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의 정신을 체현한 신앙인 답게 그의 시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인류에게 확장된다. 신앙이 이것을 말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다. 교회를 향한 그의 비판은 날카롭고 정직하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교회 밖과 다르거나 덜하지 않다. 대다수 교인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살기보다 한국이 선택한 자본주의 세상을 산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122쪽). 그래서 그에게 '기쁨'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의 유체이탈이 아니다. 그에게 기쁨은 오늘 여기에서 '차별과 가난'이 없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위해 싸우다 영원한 하늘 나라로 갔다.

 

그에게 결혼은 현실 바깥에 있는 상상이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 때문에 결혼을 꿈꾸지 못했다. 그런데 '희년함께' 운동을 하면서 뜻밖의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두 아이까지 하나님께 선물로 받게 된다. 그 두 아이의 이름은 '희서'(기쁨의 편지)와 '예서'(사랑(예수님)의 편지)이다. 아직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눈을 감는 게 고통스러웠겠지만,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은 두 딸을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편지로 키우기에 충분하다. 두 딸이 성장하여 아빠의 유작을 읽게 되면, 두 아이의 마음을 그 어느 누구보다 밝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믿는 이유는 '나가며'에서 고백한 이신근의 아내 이소영의 사랑 때문이다. 아내 이소영은 이렇게 고백한다. "프레드릭을 닮은 당신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시인처럼 따뜻한 말로 나를 녹이는 사람이었어요. 손으로 핸드폰을 쥐는 것조차 힘들었던 당신이 힘겹게 꾹꾹 늘러 쓴 마지막 메시지를 기억해요. '당신을 만난 건... 꿈같은 선물이었어.' 당신의 메시지에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답장을 했어요. '당신도 나에게 꿈같은 선물이었어요'"(221쪽).

 

눈물 고인 눈으로,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가족 사진을 보았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희서와 예서가 아빠가 남겨준 신앙과 사랑의 유산 가운데서, 엄마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잘 크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깊은 슬픔을 안고 살아갈 아내 이소영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그 무엇에도 꺾이질 않을 사랑으로 두 아이를 잘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면한다.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이것은 분명 '기쁨의 편지'이다.

 

*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어울릴 책은 단연 <슬픔의 노래>이다. 기쁨의 노래와 슬픔의 노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위로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위로 받고 힘을 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 로슈 이신근 형제, 평안히 잠드소서.

Posted by 장준식

[기독교 신앙과 미래]

 

존 쉘비 스퐁. 미국 성공회의 감독입니다. 지난 팬데믹 기간(202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신념 아래서 계몽주의 이래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한 명의 기독교 사제(목회자)입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아주 도발적인 책입니다. 보수적인 전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8년도에 출간되었습니다. 벌써 25년 된 책입니다. 25년 전에 기독교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걱정하고,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작동하려면 기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기독교 신앙을 지속 가능한 종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선각자들이 한 두 명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어느 때부터인가 기독교의 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이 감지한 기독교의 위기는 일반 대중들에게(일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그리고 정치적 격변과 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의 위기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수면 위에 떠올랐습니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 문제’가 몇몇 과학자들에게만 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기우가 된 경우랑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제 세상은 기독교를 걱정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내에서는 두 가지의 극명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 극보수화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신자(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극보수화 시키는 사람들은 결집을 위해서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전략을 씁니다. 타종교에 대한 혐오,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 이러한 전략을 통해 내부결집을 다집니다. 가나안 신자들은 기독교 내부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방관자’로 남기 쉽습니다. 그냥 교회를 안 나갑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의 약 30퍼센트 정도가 교회 출석을 안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교회를 안 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신앙의 극보수화든, 가나안 신자의 증가든, 모두 마음 아픈 일입니다. 두 방향은 모두 바람직지 않습니다. 신앙을 지키겠다고 신앙을 보수화시키는 문제나,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를 그냥 떠나버리는 것도 교회를 위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를 지키며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세워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참 귀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많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두 가지 정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입니다. 무엇이든지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교부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고,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좀 더 신실하게 구성하고자 노력을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학 가운데는 현재 21세기와 양립하기 어려운 신학, 다시 말해, 현재의 세상과 어울리기 힘들게 만든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박사, 사랑의 박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교부입니다. 은총, 사랑, 이것은 정말 중요한 기독교 신앙이죠.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총)이 주어졌으므로 생각할 필요 없고 그 말씀에 그저 순종만 하면 된다는 신학을 펼칩니다. 생각의 자리에 순종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인들은 ‘사고(생각함)’보다는 ‘순종’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각’ 보다 ‘순종’을 강조하게 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고력’을 지닌 존재인데 그것을 작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순종적인 인간 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순종 논리는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부대끼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사고력이 결여된 인간, 이것은 맹목적인 순종을 낳게 하는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또는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을 좀 더 신실하게 만들고자 한 노력이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한 가지 합니다. 과학을 등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세의 기독교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을 발전시키고 확립한 철학자입니다. 옛날에는 과학을 철학자들이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방법론을 따라 신학방법론을 발전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자연신학이라 불립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학의 언어로 신학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를 새롭게 한다는 명목으로 ‘르네상스 운동’에 동참합니다. 르네상스는 과거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새로움’이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돌아간 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때, 종교개혁자들은 자연철학/자연신학을 버립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였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연철학/자연신학, 즉 과학을 버리는 바람에 과학을 등지는 ‘반지성주의 신앙’이 기독교 내에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답답해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사고력의 부재’와 ‘과학을 등진 반지성주의’를 답답해 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기독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체계로 세상에 기여를 하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적어도 두 가지는 자명합니다. 교회에서 순종의 가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가치도 동시에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생각의 끝에 가서 필요한 것이지, 사고력을 눌러버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합리적 의심과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인간 사회는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역사 공부를 하는 겁니다. 성경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역사 공부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교회에서는 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과학의 언어와 사고를 익히고, 신앙을 과학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과학의 발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배타적이 아니고 진리를 위한 친구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성경공부와 더불어 역사공부와 과학공부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또한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 탐구하고 나누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말이 통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이렇게,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자기를 넘어서는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합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입니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입니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옵니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옵니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습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합니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습니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합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입니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죠.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습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입니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칩니다. 흑인 영어는 매우 거칩니다. 제스처도 그렇습니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삽니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입니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합니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갑니다. 아시아인이 미국에서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됩니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합니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죠. 우월감을 가지고 저지른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됩니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성이 어렵습니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합니다. 억압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합니다. 예배에서도 그들은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옵니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합니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늘 축제입니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입니다. 더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은 정치 참여를 잘 하지 않습니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합니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 너무도 큰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겠죠.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바로 그 원인을 없애는데 쓰여야겠죠. 원인을 없앨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과를 치료하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까운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좀 더 폭넓게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고 치유하는 데 쓰이면 좋겠습니다. 신앙을 너무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달래는 데만 쓰지 말고, 신앙의 지평을 넓혀 나가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좋은 신앙인이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 공부를 위한 안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간략히 안내를 드립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기후가 변화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덥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춥던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고, 또는 비가 안 오던 지역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내리지 않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내리면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눈 구경해서 좋다, 이런 식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기후변화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식량폭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후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하면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가장 비극적인 일은 '식량폭동'입니다. 농사가 되지 않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해양생물이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날씨 변화로 추운 것과 더운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식량이 없으면 인류는 곧바로 야만의 상태에 빠집니다.

 

최근에 미국 UC Davis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퀘터네리 리서치'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남미 안데스 산맥 중남부 지역에서 470~1540년 사이에 나타난 사람 간 폭력 행위를 유골을 통해 분석했는데, 두개골 조사를 통해서 폭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그 지역에 폭력이 난무했는지를 분석한 결과, 그 당시 그들이 겪은 기후변화가 그러한 폭력을 이끌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고산 지대로 갈 수록 폭력이 심해졌는데, 기후변화가 닥치자 식량 부족으로 인해서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폭력 난무했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이것은 끔찍한 진실입니다.

 

기후변화 특강을 할 때, 처음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게 중요한 지 아세요?" 대부분 이 질문에 답을 못합니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탄소가 한 번 배출되고 나면 배출된 탄소는 지구 대기권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탄소는 배출되고 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탄소는 배출되면 배출될수록 지구에 온실효과를 높여 기온을 상승시키는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탄소는 무조건 배출을 줄여야 하고, 결국 탄소 배출을 zero 수준까지 낮춰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인류의 삶의 방식/문명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있고요. 그래서 기후변화 문제는 자본주의를 되돌아보는 철학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 마음을 열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왜 교회에서 기후변화 공부를 해? 기후변화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지 않으실까? 그냥 우리는 주어진 것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 되는 거 아니야?" 기독교인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평소 교회에서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우지 못하고 오직 구원론에만 매달린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는 처음으로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다시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생태영성을 말하는 책들을 먼저 읽는 것이죠. 생태문명연구소에서 나온 '생태문명 시리즈' 책들을 읽으면 됩니다.

 

그런 후에, 짐 안탈이 쓴 <기후교회> 읽기를 권합니다. 짐 안탈은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운동을 펼치는 활동가입니다. 목회자이기도 하고요. 이 책을 읽으면, 아주 실제적인 운동 방향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독교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단체와의 활동 영역과 네트워킹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 단체들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는 뭐 하고 있었나, 반성하게 됩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자연의 파괴의 배후에는 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이죠.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한국 사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빨갱이'로 잘못 알려져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이제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미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21세기에 마르크스 사상이 점차 중요해지리라 생각한다... 마르크스 사상은 우리의 현실을 읽는 새로운 눈이 될 것이다"(탈성장, 115쪽).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서 그동안 가졌던 잘못된 시선을 거두어내고 그의 사상의 진가를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책들은 여러가지 있으나,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대중서로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사이토 고헤이라고 일본의 신진 학자인데(무려 1987년생), 독일에서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인 'MEGA'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마르크스 전공자입니다. 어렵지 않은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어떤 사회를 제시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 빼놓지 말고 공부해야 하는 것은 실제 우리의 현실 사회에서 탄소 배출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배출되는 지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온통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냥 누리는 '행복한 일상'이 얼마나 탄소를 무자비하게 배출하고 있는 지,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속속들이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탄소 배출의 메커니즘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탄소 배출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무자비하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은 <탄소로운 식탁>입니다. 세계일보 환경전문 기자가 쓴 책인데, 알기 쉽게, 탄소 배출의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쏙쏙 머리 속에 들어올 수 있게, 톡톡 튀는 문장으로 잘 정리한 책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책상에서 쓴 책이 아니라 발로 뛰며 쓴 책입니다. 기자 답게 현장 답사를 하고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아낸, 탄소 배출에 관한 수작입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의 종착지는 '탈성장'(degrowth)입니다. 탈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의 생각과 생활방식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탈성장 논의는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신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탈성장 논의는 필연적으로 '고해성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인류가 살아온 역사의 궤적을 돌아보며, 인류의 살아온 길이 실은 성장과 진보가 아니라 죽음으로 치닫는 길이었다는 처절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탈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합의된 논의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리고 탈성장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합니다. 종교적인 메타노이아 수준의 '돌이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탈성장'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이루고, 도달해야만 하는 고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마음을 열고 서로 협력하면서 '탈성장'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해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모든 제 분야에서 최고의 의제는 '탈성장'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철학도, 과학도, 그리고 신학도 '탈성장'의 주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각 분야마다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문제의식만은 동일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진에 나온 책들 중 제가 위에서 언급한 책들부터 읽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진에 나온 책들을 한 권씩 구매하여 읽어나가면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에 대하여 '컨셉'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컨셉'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컨셉을 가지고 나면 불안하거나 두려움 없이, 방향을 설정하고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두려움만 쌓여가고 절망만 늘어갑니다. 공부(하는 행동)가 중요한 이유는 막연하던 것에 길을 놓아주고 지도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길을 찾고 지도를 갖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절망 대신 희망을 마음에 품을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 숨만 쉬고 있지 말고, '공부하는 행동'을 취해 보세요. 뭐라도 할 수 있는 지혜와 뭐라도 하고 싶다는 용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이 기후 변화 앞에서 멸망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인류의 희망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상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는 마치 화폐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상상을 하며 화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화폐를 손에 넣기 위해서 생명을 소진하는 일과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할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인권이 너무도 많이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결코 인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인간에게 인권이 있는가.

 

우리는 그저 상상 세계에서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상상'할 뿐이다. 그 상상력을 깨는 무수한 요인들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쉽게 상상세계에서 이탈한다. 그래서 어떠한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너는 나의 세상에서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인간대접(인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말이 설정되고 나면, 인권은 없고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이라는 글에서 국민국가의 쇠퇴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위축을 함축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몰락(민주주의의 몰락)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다. 국가가 몰락하고 있으니, 인권이 묘연하다. 인권이 위축되고 있으니, 탄식소리만 들려온다.

 

우리는 시리아 난민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마음 아파한다.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파산되어 목숨을 잃은 수많은 난민들에 관한 소식. 선택할 여지도 없이 희생되는 아이들의 모습. 그러나, 그 난민에 대한 소식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 건너 불구경'인지 모른다.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워 하지만,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마음을 떠받치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민국은 난민의 위험성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전쟁에 휩싸이거나 경제적 몰락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인은 난민이 되어 황해를 건너다, 현해탄을 건너다, 태평양을 건너다, 지중해를 건너다 희생당한 시리아 난민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국민국가의 몰락(민주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몰락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민주주의의 몰락의 위험성을 전혀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이 삶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몰락하고 있어 인권(생명)이 위협 받고 있는데도, 엔터테인먼트만 즐기고 있다.  거리는 한산하고 공연장은 붐빈다.

 

위기를 감지 못하면, 곧 닥칠 재앙의 비참한 희생자가 되고 만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비상경보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듯하다.

Posted by 장준식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

 

이것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지구 역사에 나타난 가장 강력한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걱정'을 보편화한다. 걱정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병리현상이다. 이 종교(자본주의)는 신학도 없고 은총도 없는 무자비한 종교로서 종국에는 신까지도 죄(부채)에 끌어들인다. 

 

자본주의는 독자적으로 탄생한 종교가 아니다. 막스 베버처럼 벤야민도 자본주의는 기독교에서 기생적으로 발전된, 기독교 신앙의 환속화(세속화)된 종교라고 말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지만, 벤야민은 더 날카롭게 말한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 속에 편입되었다."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함께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 모더니티, 현대 시대는 지옥이다. 왜 지옥인가? 벤야민은 이렇게 진단한다. "문제는 세계의 모습은 가장 새로운 것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 가장 새로운 것이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옥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티. 종교와 지옥. 이러한 체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모든 종교는 자본주의라는 종교 안으로 포획될 수밖에 없고, 뭔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하고 꿈꾼다고 해도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무는, 시지프스 같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해도, 아무리 새로운 것을 행하여도 금방 진부하고 지루해지고 만다. 존재가 종교(자본)과 지옥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기독교적인 자본주의일 뿐이다. 복음주의가 가진 신학의 부재, 그리고 모든 것을 죄(부채)로 빨아들여 죄의식/부채의식을 갖게 만들어, 열심을 조장해 부채(죄)를 갚게 만드는 메커니즘, 그리고 대속의 희망(부채를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복음주의가 기독교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신학적 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어떻게 자본주의와 지옥에 포획된 기독교가 그 결박을 풀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는 어떠한 미래를 제시할 것인가.

 

벤야민을 인용한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속죄가 아니라 죄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는 세계의 변혁이 아니라 세계의 파괴를 목표로 한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계속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자본주의와 지옥이 이 세상의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우리의 운명은 필경 파멸이 될 수밖에 없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을 예견하시며 슬피 우시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19세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20세기에 푸코는 인간의 사라짐(이성의 죽음/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신이 사라지고 인간이 사라진 이 세상에 들어와 왕 노릇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지옥(모더니티). 그 어느때보다 신의 귀환과 인간의 귀환이 절실한 시대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맞잡으시고 함께 귀환하는 시대를 꿈꿔본다. 신과 인간의 귀환. 그것은 온전한 신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신, 메시아의 귀환이기도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