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칸트를 통해서 근대국가 건설을 하지 못한 것

 

유럽과 미국, 심지어 일본도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칸트 철학을 근간으로 삼았다. 근대 국가의 특징 중 하나는 '공화주의'이다. 공화주의는 입법권과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는 정치 체제다. 근대 국가는 칸트가 제시한 공화제가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정치의 건강 상태가 달라진다.

 

유럽은 일찍이 칸트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 설립에 힘을 쏟았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칸트주의자들에 의해서 공화제를 수립했다. 일본조차도 칸트에게서 정치철학을 배워 근대 국가를 수립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칸트 철학 용어는 모두 일본어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한국인들이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칸트 책은 일본용어로 된 한국어이다. 그래서 칸트가 어렵다. 칸트의 한국어 용어 번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냥 일반 사람들도 칸트를 더 쉽게 공부할 수 있다. 철학책을 보면 더 확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한국은 아직 일제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는 겨우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공화제로 아직 발돋음 하지 못했다. 삼권분립이 약하다. 행정권에 입법권과 사법권이 끌려다니는 형국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는 아수라장이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칸트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칸트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서구 사회와 대등한 관계에서 국제 관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정치에서도의 도덕의 부재, 그리고 종교에서의 도덕의 부재는 모두 칸트 정치철학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부작용들이다. 칸트의 도덕(정치)철학은 정치와 종교의 부패를 막고 비판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서구 사회의 거대한 두 권력, 즉 정치(정부)와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다. 비판 받지 않는 정치와 종교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철학의 임무, 그리고 신학의 임무는 정치와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가 인간성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2.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한국 사회의 불행 중 두 번째 것은 한국 사회가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 역사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개의 혁명이 있다. 하나는 184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소위 '국민국가들의 봄'(Spring of Nations)이고, 다른 하나는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돼 온 유럽을 휩쓸고 미국, 그리고 일본을 휩쓸었던 68혁명이다.

 

1848년 혁명은 그렇다 치고, 1968년에 있었던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한국 사회의 큰 불행이다. 68혁명은 베트남 전쟁 반대를 기치로 일어난 혁명이었는데,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베트콩의 요청으로 김일성은 1969년 김신조 일당을 남파했고, 그것 때문에 남한은 공안정국에 휩싸여 그당시 전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이 일본을 거쳐 현해탄을 건너오려다 막혀버렸다.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 즉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책임을 통회하는 학자들, 일제 강점기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고 한국 정부나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학자들은 모두 68혁명 세대의 일본 학자들이다. 그만큼 68혁명은 세계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독일이 2차 세계 대전과 아우슈비츠 사건(나치 사건)에 대해서 통감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이유도 68혁명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뒤처진 이유는 68혁명의 물결에 휩쓸림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칸트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를 세웠고, 68혁명을 거치면서 정치적, 사상적 진보를 이루었다. 칸트와 68혁명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으면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면면히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보면, 칸트와 68혁명을 거친 선진국들에 비해서 부족한 것이 많다. 무엇보다 사상의 토대가 약하다.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을 뿐, 사회, 문화적 깊이와 진보성에 대해서는 아직 전근대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많다. 성(gender, homosexuality)의 문제만 봐도 그렇다.

 

3. 결론: 칸트와 68혁명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한국보다 앞선 서구의 선진국(일본 포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칸트와 68혁명을 열심히 공부하여 근대 국가의 기틀과 사상을 재점검하고, 사회 속속들이 깊게 칸트와 68혁명의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단순히 그것들을 내면화시키는 것을 넘어, 칸트와 68혁명을 재해석하고, 그것이 가져다 준 부작용들을 최소화시키고, 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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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감사절 풍경

 

감사절, 잘 보내셨는지요?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셨을 줄 믿습니다. 명절이 오면 혹시 쓸쓸한 분이 계시지나 않을까, 마음이 쓰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지내시는 분이 없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저희 가정은 오랜만에 선/후배 목사님들 가정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알래스카에서 목회 중인 목사님 가정이 감사절 연휴를 맞아 배이지역을 방문하는 덕에, 겸사겸사 모였습니다. 막상 모임 장소에 가보니, 오기로 한 목사님들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습니다. 처음 모임에 나오는 후배 목사님 가정도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후배 목사님 가정도 있었습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목회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저희들이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팬데믹 이후 교회의 변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상황이 공통적인 것은 팬데믹 이후에 교인의 3분 1은 교회로 돌아오고, 3분의 1은 하이브리드 참석(현장과 온라인)을 하고, 3분의 1은 증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데믹은 신체(body)에 끼친 영향보다 정신(soul)에 끼친 영향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바이러스는 백신을 통해서 퇴치했는데, 정신의 바이러스는 아직 퇴치를 못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미래 목회로 흘렀습니다. 미래 목회에 가장 영향을 끼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제는 기후변화와 AI로 모아졌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잘 못 느끼지만, 당장 알래스카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 가정은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몸으로 체험한다고 합니다. 예년에 비해 눈이 두배 왔고, 빙하가 녹아 하천의 물이 너무 불어나 주변의 집들이 쓸려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연어가 돌아오질 않고, 고래 사냥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지난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극지방의 눈이 녹으면서 그동안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출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바이러스 팬데믹을 또 겪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죠. 게다가 기후변화는 바다와 땅을 황폐화시켜, 어느 시점에 달하면, 식량폭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큽니다. 조금 춥거나, 조금 더워지는 것은 인간이 견뎌낼 수 있으나, 식량 제배가 되지 않아 식량폭동이 일어나면 인간의 삶은 야만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우스갯말로, 비옥한 내륙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총을 구비해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농담이면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큰 농담입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일은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지난한 노력이 따라는 것이라,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기후변화 대화는 그만 두고, AI로 대화의 주제를 옮겼습니다.

 

실리콘밸리는 AI의 메카죠. 가장 강력한 AI는 실리콘밸리에서 개발되고 있는 중입니다. Open AI라는 회사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그들이 내놓은 ChatGPT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 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개발로 인하여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AGI는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수학문제 같은 것을 풀 수 있는 단계의 AI를 말합니다.

 

앞으로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AI가 목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대화를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저희들이 내린 결론은 AI를 적극 배워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ChatGPT를 활용하여 필요한 교회 사역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주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습니다. 영어로 사역을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미 ChatGPT가 상당히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영어 설교도 교정해 주고, 기도문도 만들어 주고, 영상작업하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단축해주고 있답니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통용됐지만, 이제 이 말은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로 바뀐 것 같습니다. 점점 변하는 속도가 빨라,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불안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이 시대에 응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좋은 것은 내가 현재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걱정’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걱정 보따리를 서로가 서로의 앞에 풀어 놓으면, 모두 비슷비슷한 걱정이기에 불안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걱정을 해소할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걱정 보따리를 풀어놓고, 우리가 얼마나 비슷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확인하면서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함께 그 걱정을 풀어나갈 지혜를 배우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함께 위로하며 기도하며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어,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히스기야 왕은 다윗 왕과 요시야 왕과 더불어 유다 왕국 최고의 성군(聖君) 중 한 명입니다. 히스기야 왕을 뒤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12살이었습니다. 므낫세 왕은 55년간 남유다 왕국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므낫세에 대한 평가는 역대 왕들 중 최악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쌍벽을 이루며, 누가 더 악한 왕인가 배틀(battle)을 벌일 정도입니다.

 

자식 농사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성군 히스기야의 아들이라면 아버지를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최고의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 어리둥절해집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인지, 미궁에 빠지는 듯합니다. 정말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잠언 1장 7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우리 시대는 이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학교 교육은 온통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지식의 ‘시작’(beginning)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이런 저런 비상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큰 지식을 가지고 이런 저런 훌륭한 일을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찬란했던 계몽주의의 끝이 처참한 전쟁(1,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교훈 앞에서 사람들은 경악했고,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인간의 조건’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없는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지, 인류는 역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악한 일들은 모두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지식의 시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므낫세에게는 이러한 지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므낫세 왕의 행위를 서술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 왕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립니다. 이런 므낫세 왕의 행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므낫세가 왕에 즉위할 때 나이가 12세였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므낫세 왕은 히스기야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았을 때 낳은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15년 생명 연장을 받지 않았다면 므낫세는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므낫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판 가룟 유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으니라”(마 26:24).

 

인류 역사에 보면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 세계사에서는 ‘이디 아민’ 우간다 독재가가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 사람은 집권 8년간 5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경제를 심하게 망쳐 우간다를 파탄으로 몰고 갔습니다. 7-80년대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이 독재자는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뻔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집권하는 동안 13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국민을 학살했습니다. 킬링필드라고 불립니다. 폴 포트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학살을 시행합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입니다.

 

므낫세는 자그마치 55년 동안 통치를 합니다. 남,북 왕조 통틀어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왕입니다. 오래 통치한 것 때문에 나라가 더 망가집니다. 므낫세 왕은 아버지 왕과는 달리 친앗수르 정책을 폅니다. 남쪽 네게브 지역을 개간해 농지를 확장하고, 앗수르의 비호 아래 주변국들과 무역량을 증대시켜 경제적 안정을 추구합니다. 이는 장기간 통치의 기반이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을 걸까? 므낫세 왕을 보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15년 더 생명연장을 받지 못했다면 므낫세 왕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므낫세가 55년간 장기 통치를 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더라면 남유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사는 일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를 묻게 만드는 인생을 사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오래 사는 것은 슬픈 질문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므낫세처럼 말이죠.

 

므낫세 이야기는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잘 살아야 겠구나, 다짐하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인생을 보람차고 의미있고 복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히스기야에게 배우는 기도의 지평

 

히스기야(Hezekiah)는 고대 남유다 왕국의 13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왕에 즉위하여 29년간 통치하였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국제정세가 순탄치 못했습니다.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이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의 재위 얼마 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위세는 꺾이지 않았고, 제국 주변의 약소국들은 힘을 합해 어떻게든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각자 나라를 보호해 보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다음의 세 가지는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쟁, 기근, 전염병. 인류의 문명은 이 세 가지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용어로 바꾸면, 안보, 경제, 그리고 보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안보 문제는 오늘날보다 매우 노골적이었습니다. 제국은 약소국들에게 노골적으로 조공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는 나라가 있으면 제국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위협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처음에 친앗수르 정책을 펴며 앗수르 제국에 조공을 바쳤으나 앗수르의 횡포가 나날히 늘어나면서 반앗수르 봉기에 가담을 합니다. 그 일 때문에 결국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습니다.

 

제국의 침략 전쟁. 국가적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기도행위는 단순히 무릎 꿇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위기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신앙의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히스기야 왕 때 이사야라고 하는 걸출한 선지자가 있어 히스기야를 도왔습니다. 앗수르에게 대항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힘이 없는 남유다를 향해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온 힘을 다해 기도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전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실 것이다!”(왕하 19:31).

 

히스기야는 골방에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반앗수르 봉기에 동참하여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대비하며 예루살렘 성을 정비합니다.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 바깥에 있었던 기혼샘에서 물을 끌어옵니다. 수로를 만들고 그 물을 저장할 연못을 만듭니다. 그것이 실로암 연못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성벽을 중수하고, 식량을 비축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킵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권력들을 모아 중앙집권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면서 연안국들과의 동맹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실제적인 방어 계획을 세웁니다. 이러한 준비는 앗수르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히스기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정말 많은 일을 합니다. 이 일을 행하는데 있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일을 한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제국의 압박으로 인하여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히스기야의 죽음 예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매우 특이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회개를 하면서 기도하는 데 반해, 히스기야의 기도는 회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 20:3).

 

하나님은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도 해주십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기도의 지평을 넓혀 줍니다. 회개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지난 날, 살아오면서 나의 삶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수고한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잘못했던 것만 기억하지 마세요. 살면서 수고했던 것들을 기억해 보세요. 돌아보면,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때로는 그 수고에 기대어 기도해 보세요. 수고의 흔적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구원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수고한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면서, 수고하면서 사는 일을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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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성경은 트러블 메이커인가?]

보편성과 역사성이라는 두 기둥을 잡고 신학을 했던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 예수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하나님일 때, 바로 그때라야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하나님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길 것입니다."
(조직신학 서론, 10쪽)

구약성경 설교를 많이 하는 저로서는 요즘 여간 괴로운 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성경, 유대인의 하나님이 믿음의 보편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현재 유대교 또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성경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진 것도 성경에 근거한 시오니스트의 활동 때문이니까요.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의 전쟁과 그들이 빚어내는 참상을 보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온갖 '탄원'들이 팝콘처럼 떠오릅니다. 주변 나라들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당하며 실존적 탄원을 그치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그 탄원이 고스란히 담긴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참상은 어떤 탄원으로 치유될 수 있을 지, 도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이 보편성을 역사 속에서 확보하려면 현재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 전쟁의 참상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가나안)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십자가 고난의 현재적 역사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 발현되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탄원의 자리입니다. 둘(유대인과 이방인/의인과 죄인)이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신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평화와 자유가 입맞출 때까지 우리는 쉴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께서 그만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죄악과 폭력에 굴하지 말고, 희망 안에서 잘 버텨야 할 것입니다. 함께.

Posted by 장준식

[책 속에만 존재하는 기독교]

 

고급 기독교 서적들이 줄지어 출판되고 있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목사/영성가들의 저작이 대부분이다. 기술의 발달로 출판 시장 접근이 용이해져, 경쟁적으로 기독교 서적이 출간되어 팔리기 위해 매력을 발산 중이다. 좋은 서적이 많이 발간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더 많은 서적이 발간되면 좋겠다.

 

그런데, 우려되는 현실은 기독교가 자꾸 책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간되는 기독교 서적은 꽤 수준 높은 것들이 많다. 특별히 영국 신학자들의 저서들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현상은 신앙 '공동체'의 축소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공동체를 일구는 현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담긴 서적은 날로 수준이 높아져 간다.

 

나는 예전에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시민 종교화나 독일의 국교화 보다는 영국의 기독교 신앙의 매니아화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공동체는 축소되지만 몇몇의 기독교 매니아들이 아주 고급진 기독교 지식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갈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미 기독교 서적 출간의 경향을 보면서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앙은 공동체로 구현되어야 하는데, 공동체는 줄어들고 그 대신 기독교 신앙이 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다. 요즘 출간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어 보면, 모두 기독교의 진리를 깊고 수려하게 잘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공동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너지고 축소되고 있으니, 기독교의 진리가 아무리 깊고 수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독서를 통해 기독교의 수려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은들, 그것이 현실 세계의 공동체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그치거나, 엘리트화 되거나, '그들 만의 리그'에 그친다면,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묘연해질 뿐이다.

 

요즘 출간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으면 기독교 진리를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신앙 상식을 교정할 수 있게 되어 좋다. 그만큼 기독교 신학도 많이 발전하고 분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수려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현실 교회를 자꾸 부정하게 되거나 비판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나안 성도'만 배출하게 되는 것 같다. 현실 교회에 또는 현실에 참여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마치 참된 진리를 깨달아서 성화된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은 분명 영지주의 신앙과 닮았다.

 

사실, 기독교 진리, 기독교 신앙만큼 단순한 것도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슨 도를 깨우치거나 무슨 위대한 일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기독교가 꿈 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사는 대동세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어떤가. '선교'라는 이름 하에, '전도'라는 이름 하에, 심하게는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 온갖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저질러지고, 사회(세상)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두 손에, 우리의 두 발에, 우리의 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수려하고 깊게 책 속에 기록해 두는 것도 좋으나, 자신의 손과 발에, 그리고 깊은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 진짜 신앙일 것이다. '공동체'는 없어지고 '개인'만 남아 도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책 속이 아니라 사람 속으로 스며드는 신앙을 꿈꾼다.

Posted by 장준식

[거룩]

 

다르게 살 용기.

 

체제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소외 될까봐 불안에 빠져 전전긍긍하게 만들어 스스로 노예의지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이 시대에,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나의 삶/구원을 주님께 맡기고, 다르게 살아갈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거룩을 도덕으로 이해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니체가 간파하고 있듯이 도덕은 체제가 부과한 노예의지이다. 도덕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고, 배제와 소외를 불러와, 서로 미워하게 만들어 사회를 분열시킨다. 거룩을 도덕적 요청으로 받아들여 자기를 다른 이와 구별하려드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거룩(카도쉬)은 다르게 살 용기다. 거룩은 오히려 차별을 만드는 체제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발산하며 '너와 나'의 화해를 이끌어 평화를 일구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신 분인 이유는 다르게 살 용기를 가지는 게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은 온 세상을 화해로 이끌었다/이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다르게 살 용기를 요청한다. 거룩은 도덕이 아니다. 거룩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거룩하다.

 

다르게 살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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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손 꼭 잡는 신앙]

 

히스기야 왕은 요시야 왕과 더불어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히스기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은 늘 어려운 듯합니다. 하루라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간의 운명인 듯하고요. 그리고 신앙이란 영의 일이라 오롯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신앙인에게 자기 반성이란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겸손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산당들 제거, 주상(돌기둥, 신 임재 표식) 깨뜨림, 아세라 목상 찍어 버림, 모세가 만든 놋뱀 철거 등의 외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산당신앙에서 벗어나 성전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산당신앙은 오늘날에도 신앙을 괴롭히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 신앙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산당신앙은 개별신앙, 사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신앙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죠. 신앙의 방향이 ‘자기self’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분열을 조장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조장됩니다.

 

반면에, 성전신앙은 공동체 신앙, 공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성전신앙의 방향성은 나의 바깥입니다.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전신앙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보다 현재 우리의 삶이 더 산당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시대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 하듯,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전신앙을 세워 나가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히스가야를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6).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이게 바로 산당신앙과 성전신앙의 차이입니다. 산당신앙은 신앙을 사사로이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내가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사회를 분열시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성전신앙의 모범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타흐’이고, 다른 하나는 ‘다바크’입니다. ‘바타흐’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신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뢰하니까 안정감을 갖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타흐’(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안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하다면 나의 신앙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바크’는 연합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있는 형상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신앙은 산당신앙과 달리 하나님의 손을 꼭 잡는 신앙입니다. 손을 꼭 잡은 모습에서 ‘애정’을 봅니다. 성전신앙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고 더불어 힘든 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동행하는 신앙이 성전신앙입니다.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성전신앙을 통해서 공동체(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삶의 형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신앙, 공동체 신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공동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히스기야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형통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정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이렇게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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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근대의 의미: 보수 사회]

 

근대(modernity)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

(자연보다 인간의 힘이 더 강력해진 시대)

2) 국민국가의 탄생

(국가는 개인의 또다른 자아가 되었다. 애국심의 탄생)

3) 사유재산의 허용

(내 재산은 아무도 못 건드려! 이건 하나님도 못 건드려!)

 

이 외에도 근대를 규정하는 여러가지의 현상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세 가지가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상을 볼 때 근대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 인간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 자유(사유재산)중심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문제는 결국 보수 사회가 가져온 파국이다. 보수적 사고와 보수 사회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간의 성공, 국가의 성공, 자기의 성공은 찬란한 것 같으나, 그 성공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두 마리 물고기가 어느날 싸워서 한 물 고기가 죽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물고기는 자신이 연못을 모두 차지한 것 같고, 더이상 싸울 일도 없어서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가 썩어들어가고 그 썩은 물고기가 연못을 오염시켜 결국 혼자 남은 물고기마저 죽게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공, 다른 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성공,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성공은 모두 '수탈'과 '외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수탈과 외부 전가는 끝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분명, 근대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짧을수록 좋다.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 '평등'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보수적인 사회로 가야 한다. 가치가 올바르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꼴통 소리를 들을 뿐이다. 지금 근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존재는 그저 꼴통일 뿐이다.

 

좋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좋은 보수 사회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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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픈 철학]

 

좋은 문학은 '비극'이다. 좋은 철학은 '아픈 철학'이다. 좋은 문학은 비극을 보듬어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철학은 아픈 마음을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문학을 하고 좋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대개 개인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비극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파국 또는 비극으로 몰고온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보며, 왜 이러한 파국과 비극이 닥쳤는지를 파헤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한다.

 

일례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는 아픔이 담긴 철학이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노동의 경험이 그를 '놀이하는 인간'으로의 사유로 이끌었다. 나치 포로수용소의 모토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노동하느라 죽다 살아난 하위징아는 노동과 대비되는 '놀이'에 주목하여,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하여 노동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아픈 철학이다. 그의 철학에는 아픔이 배어있다. 

 

아픔을 일부러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살면서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아픔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픔이 낳은 창조물이다.

 

아픈 철학이 좋다. 그가 왜 그런 철학을 하는 지, 인생의 뒤안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어떻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면 좋다. 그렇게 우리는 아픔을 이겨내기도 하고, 아픈 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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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조찬기도회를 폐지하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인격을 생산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격을 비인간화한다. " (라쿠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398쪽>

 

우리 사회를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 한다. 그 바탕에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깔려 있다. 이 체제의 악마성은 '인격을 생산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인격이 생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인격으로서의 대우는 증발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인격이 외롭고 지치고 탈진하는 이유는 인격이 '생산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 인격으로 존귀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고 '생산 수단'으로 전락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통해서 표현하면, 우리 사회의 인간 인격은 '정치적 삶'이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서 '정치적 삶'을 박탈한 뒤 저지른 참사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러한 상황을 더 심화시켰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말도 못하게 약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현대판 노예'라 부를 만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발언은 예수님을 해방자(liberator)가 아니라 억압자(oppressor)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아무데나 '기도회'를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거룩한 시간이 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아무데나 '예수님'을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거룩한 개념이 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아무데나 '기도회' 그리고 '예수님'을 갖다 붙이는 행위는 자신의 무지와 몽매를 드러낼 뿐이다. (내가 무지몽매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시라.)

 

국가는 인간 인격의 '정치적 삶'을 보장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국가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삶'을 빼앗고 있고, 교회가 그것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조력하고 있다면, 국가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는 국가조찬기도회의 존재 이유는 묘연할 뿐이다. 이럴거면, 국가조찬기도회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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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인생은 없다 (No life is late)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의 영성이 담긴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재물이 많은 청년은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킨 것이 그에게는 선한 일입니다. 어디 흠잡을 데 없이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행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 21). 이 말씀을 들은 재물이 많은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그렇다면, 부자가 된 사람이나, 부자 나라의 국민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이 시대에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절대로 부자되기를 갈망하면 안 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이 시대에 이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놀랐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기에는 탄식이 묻어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인 사람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상황이 이럴진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이 말씀은 정말 맞는 말씀 같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꿈꾸는 것은 언감생심인 듯합니다. 말씀을 듣고 당황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이 맥락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쉬운 비유입니다. 포도 수확철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오전 6시)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일꾼을 데려다 씁니다.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구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인력시장에 나가봅니다. 오후 6시에 하루 일과가 끝나기 때문에 오후 5시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을 구해오는 일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인력시장에 나가서 아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해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노동자를 발견합니다. 집 주인은 ‘아무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는 일꾼을 데려다 포도원에서 일을 시킵니다.

 

이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할 시간입니다. 집 주인은 회계 담당자를 시켜 일당을 지불합니다. 일당 지불은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부터 지급됩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일찍 와서 일한 노동자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그들보다 더 많은 일당을 받게 될 것 같아 기대감에 부풉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집 주인은 그들에게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지급합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아든 일꾼들은 불평합니다. “아니 어떻게 1시간 일 한 사람하고 하루 종일 일 한 사람하고 일당이 같을 수 있어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긴 노동자들과 자신을 별로 가치 없다고 여긴 노동자들을 봅니다. 일찍 와서 오랜 시간 동안 일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 일찍 선택되어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오후 5시에 겨우 선택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별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겨우 1시간 남겨 놓고 일에 투입된 사람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한 데나리온 받은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 주인에게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본 부자 청년과 같습니다. 자신은 이미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이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어 엎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문자적으로 ‘너의 눈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집 주인은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잣대로 자기를 평가합니다. 집 주인의 평가를 불신합니다. 자기의 잣대로, 자신들을 선하게 평가하고, 자신들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그래서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집 주인은 이들을 일컬어 악하다고 꾸짖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정말 통쾌한 비유이고, 정말 안심되는 비유이고,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천국은 정말 유쾌한 곳입니다. 집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은 자기보다 가치 없는 인간이 자기와 동일하게 대우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룬 만큼,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집 주인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데 중점을 둡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자신이 가치 없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이어가는데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겁니다. 남보다 더 가치 있고 남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생명의 깊이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사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런 이들은 부자되는 것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생의 깊이에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도 너무 힘들어 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이 조금 일찍 온 자 같거든, 겸손하세요. 늦은 인생은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삶을 맡겨드리세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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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희생제사와 사랑]

 

이름이 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이름은 원래 각 책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자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히브리어 ‘베미드마’로 시작합니다. 한국말로 ‘광야에서’라는 뜻입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인상을 주지만, ‘광야에서’는 뭔가 기대를 갖게 합니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실제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광야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만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레위기는 ‘레위지파의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온갖 지루한 법으로 채워진 것 같지만, 실은,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레위기는 제사를 둘러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방법,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칙들, 그리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레위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 처음으로 막히는 곳이 레위기입니다. 너무 낯선 풍경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사의 종류나 방법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사실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사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선지자들은 모두 제사를 비판적으로 기술합니다. 아모스,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제사 비판은 신랄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 비춰진 제사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희생제사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놓은 것일까요? 희생제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새크라멘트. 성례전.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게 끔 하는 거룩한 장치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숨은 사랑이 아니라 ‘보이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세요!”(요일 3:18). 희생제사는 사랑의 새크라멘트입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이 드러나는 장치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희생제사에 쓰이는 제물들은 그 당시 농부와 유목민들의 생계였습니다. 가축이나 곡식, 열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들은 자신이 바치는 제물을 사랑했습니다.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곧,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제물을 빼고 다시 진술하면, 희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은 주는 것, 헌신, 내어줌, 나눔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희생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희생제사는 히브리어 ‘코르반’과 ‘레하크리브’가 합쳐 생긴 말인데, ‘가까이 다가오다’,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희생은 관계를 굳세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접착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시대는 희생이 희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것을 챙기느라 남을 희생시키지, 자기를 내어주어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희생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입니다. 희생이 없다 보니,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에 레위기의 희생제사를 묵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합니다. 희생(헌신, 내어줌, 나눔)을 통해, 사랑받고 사랑하는, 따뜻함에 삶이 스며들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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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지배질서와 사건]

 

수학, 시, 정치, 사랑.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혁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지배질서'를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권력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지 않고 작동한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게 되면, 그때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된다.

 

지배질서는 법을 통해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바깥에 나가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죄의식과 죄책감을 심으며 작동한다. 법 바깥의 일들은 모두 '불가', '불허'로 규정한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은 금지되고 배제된다.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사건은 불가능한 것, 불허된 것을 파고든다. 지배질서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르트는 말씀을 '사건'으로 보았다. 바디우의 사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은 인공세계(지배질서)의 바깥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 그래서 금지되고 배제된 것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이 '말씀이다. 말씀은 사건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는 소크라테스를 규정하기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했지만, 이것은 지배질서의 언어에 불과하다. 지배질서에 의문을 품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혼'을 불어넣는 것, 지배질서의 입장에서는 '타락'이지만, 이러한 '타락' 없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는가.

 

지배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경건하고 온건한 것이고, 지배질서에 맞서는 것은 타락하고 불온한 것이라는 '이념'이 이미 우리 안에는 권력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배질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 질서를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심어주면서.

바디우는 철학자이므로, 혁명적인 것의 범주를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으로 제한했다. 신학자는 여기에 혁명적인 것을 하나 덧불일 수 있다. 신앙. 혁명적인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수학, 시, 정치, 사랑, 그리고 신앙.

 

좋은 신앙과 그렇지 못한 신앙의 차이는 혁명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다른 말로, 지배질서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지배질서에 봉사하느냐에 있다. 신앙이 수학보다, 시보다, 정치보다, 사랑보다 못하면 부끄러운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지배질서에 봉사하지만, 신앙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면서 지배질서에 도전한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시대의 바로미터이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봉사하지 않는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저항한다. 지배질서가 신앙을 우숩게 아는 사회는 질서를 가장한 악이 판을 치고, 지배질서가 신앙을 무섭게 생각하는 사회는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들더라도 눈치를 본다.

 

신앙인이여. 지배질서를 견뎌내는 데만 신앙을 쓰지 말고, 지배질서에 '사건'을 일으키는데 신앙을 쓰십시오. 사건이 없으면 지배질서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생명을 마구마구 착취할 것입니다. 사건이 많으면 지배질서는 그것에 대응하느라 바빠서 정신을 못차릴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 사건이 바로 메시아가 우리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배질서의 전복은 그렇게 발생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신앙을 버리지 말고, 신앙을 더 굳건히 가지십시오. 신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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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산당신앙과 성전신앙

 

구약 성경에는 각각 신명기사관(신명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과 역대기사관(역대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이 있습니다.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입니다. 역대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 두 사관이 어떻게 다른지는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으나 왕들에 대한 기술 방식이나 평가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일례로, 열왕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어떻게 아버지 히스기야의 산당 폐쇄 정책을 뒤집어 산당을 통해 악을 꿰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를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역대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의 기록은 그가 악을 저지른 후에 앗수르를 잡혀 간 뒤 회개 기도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열왕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한 왕이지만, 역대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했지만 회개하여 구원 받은 착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사관은 ‘범죄-징계-회개-구원’의 도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구조가 명백히 드러나는 곳은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징계하고, 그 징계가 너무 고달파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인데, 그 이유는 사사기가 신명기사관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사관의 역사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사관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그 역사가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되고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명기사관은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예언자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역대기사관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한 후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재건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둡니다. 70여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지내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정체성이 많이 모호해지고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다시 복귀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정체성을 다시 살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나라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렇다 보니, 역대기사관은 다윗 왕과 그 왕조를 이상적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신명기사관에서 밝히 드러낸) 다윗이 밧세바를 불의하게 취한 사건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대기사관은 성전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다윗 왕조와 성전신앙의 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대기사관은 제사장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제사장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 사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산당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할 때, 그 이유 중 하나가 ‘산당 제거 실패’입니다. 산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것 때문에 한 나라가 망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산당이라는 것을 그냥 가볍게 보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산당은 히브리어로 ‘바마’(단수), ‘바모트’(복수)라 불립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의 높은 곳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산당은 영어로 ‘high place’로 불립니다. 높은 곳은 신과 가까운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 지어진 산당은 신과 소통하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산당은 신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토착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입성 이후 그 토착세력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당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산당신앙에 물든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왜 악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일까요? 산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게 무엇이 잘못일까요?

 

산당은 단순히 제사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산당은 기득세력의 본거지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도시국가들은 지방의 산당들과 연합하여 통치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당은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신앙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에게 굉장히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겼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이후에 분열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남유다가 형성되고, 다윗 왕조에 반기를 든 지파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 형성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워 그곳에 금송아지를 둡니다. 산당은 이렇게 정치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산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있습니다. 산당은 가나안 농민들의 신전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가까운 가족에게만 쏟게 만들었습니다. 권력을 추앙하게 하고, 성공과 물질 축복 기원만 바라게 했습니다. 공공성, 정의, 윤리와 같은 보편적 인류애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이러한 산당신앙의 가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평화, 정의를 추구하여 보편적 인류애를 완성하는 우주적 샬롬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 일에 부름 받은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산당신앙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로 막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신앙이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산당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하신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편적 신앙의 가치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 그룹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수탈들에 대해서 눈감고 있었죠. 삭개오 같은 무리가 백성들에게 큰 세금을 징수하여 수탈해도 못 본채 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가 보존되고 자신들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전신앙을 산당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선포하신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산당신앙으로 전락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거꾸로 돌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전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평화 정의를 통해 공공성을 추구하며 보편적 인류애를 구현하는 우주적 샬롬의 신앙을 갈망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집중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고 자기를 내어놓는 보편적 인류애의 공공신앙을 추구합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렵습니다. 이럴 때 고개를 드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이웃을 살필 겨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남들 돌볼 겨를이 어딨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때 자기를 내어놓는 신앙입니다. 자기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큰 존재에 연결되어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꿉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성전에 나와 자기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부지런히 주변을 돌보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지키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버리는 산당신앙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내어놓는 성전신앙을 지켜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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