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꼭 잡는 신앙]

 

히스기야 왕은 요시야 왕과 더불어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히스기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은 늘 어려운 듯합니다. 하루라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간의 운명인 듯하고요. 그리고 신앙이란 영의 일이라 오롯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신앙인에게 자기 반성이란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겸손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산당들 제거, 주상(돌기둥, 신 임재 표식) 깨뜨림, 아세라 목상 찍어 버림, 모세가 만든 놋뱀 철거 등의 외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산당신앙에서 벗어나 성전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산당신앙은 오늘날에도 신앙을 괴롭히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 신앙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산당신앙은 개별신앙, 사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신앙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죠. 신앙의 방향이 ‘자기self’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분열을 조장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조장됩니다.

 

반면에, 성전신앙은 공동체 신앙, 공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성전신앙의 방향성은 나의 바깥입니다.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전신앙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보다 현재 우리의 삶이 더 산당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시대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 하듯,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전신앙을 세워 나가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히스가야를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6).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이게 바로 산당신앙과 성전신앙의 차이입니다. 산당신앙은 신앙을 사사로이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내가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사회를 분열시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성전신앙의 모범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타흐’이고, 다른 하나는 ‘다바크’입니다. ‘바타흐’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신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뢰하니까 안정감을 갖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타흐’(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안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하다면 나의 신앙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바크’는 연합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있는 형상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신앙은 산당신앙과 달리 하나님의 손을 꼭 잡는 신앙입니다. 손을 꼭 잡은 모습에서 ‘애정’을 봅니다. 성전신앙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고 더불어 힘든 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동행하는 신앙이 성전신앙입니다.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성전신앙을 통해서 공동체(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삶의 형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신앙, 공동체 신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공동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히스기야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형통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정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이렇게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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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