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학의 위치]

 

서구(유럽)신학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신학이다. 그래서 때로는 안쓰럽고 애처롭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사회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중세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 기세와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개무시 당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서구신학은 옛영광을 그리워하며, 또는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또는 그나마 존재하는 조그마한 영광이라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온갖 사회적 이슈와 연결을 지어 자기의 존재성을 호소하고, 세상을 향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사회 발전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애처롭다. 마치 사랑 받지 못하는 자가 사랑 받고 싶어서 내는 기죽은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에는 현실을 향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담겨 있다. 빈곤과 사회적 억압,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통해 고통 받는 민중을 향한 애닮은 마음이 담겨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서구사회처럼 무시 당하지 않는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지 않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인정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무력하다. 사회 정의를 외쳐도 좀처럼 변혁을 일구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 공허하다. 깊은 정말이 베어 있다.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 신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신학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일까? 민중이 자취를 감추고, 이제 부르주아와 부르주아가 되고 싶은 사람들만 가득한 한국에서 신학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 달리 다종교 사회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려 든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처럼 한 번도 크리스텐덤을 이룬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리스텐덤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사회에는 다른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회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서구화된 사회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속에 가깝게 묶여 있다. 한국인은 서구 문물을 소비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통시키고 소비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는 서구로부터의 "온갖 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이 뿌리 내린 사회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무한경쟁 체제이다. 말이 좋아 무한경쟁이지, 결국 힘 있는 자(경쟁력 있는 자)가 힘 없는 자(경쟁력 없는 자)를 무한히 착취하는 구조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력을 갖추려고 영혼을 갈아넣고, 경쟁력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경쟁에서 이기려고 종교를 이용한다.

 

그래도 한국은 아직까지 지정학적으로 극동 아시아에 위치해 있고, 인종적으로 아시아인이며,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서서히 서구화되긴 했지만, 문득문득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심과 울분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한국신학은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과는 다른, 어디쯤에 놓여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한 현실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신학은 다종교 사회 상황에서, 서구화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억눌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한국인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과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돕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스펙타클을 걷어내 사람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 인식을 가지고 '이건 아닌데...'라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음성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이라면, 성경은 믿을 게 못되고 공허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인 것은, 다행히도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오히려 밝다. 그리고 해야할 일이 너무도 명징하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고, 성경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일, 그것이 우리들의 주어진 과제이고 사명이다.

 

다행히, 이런 자각과 노력이 곳곳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성경을 오용하고 남용하는(abuse) 무리들이 많지만, 그리고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이 아직도 교회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전복성을 제대로 알리려고 하는 '빛과 소금'같은 사람들이 많다.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교단과 상관없이 연대하여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도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더 많아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좋은 설교란?]

 

정현종은 릴케의 시를 읽을 때마다, 릴케는 시를 통해 말을 한다기보다 깊이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릴케의 시 읽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현종은 좋은 시란 어떤 시인지 이렇게 말한다. "말로써 말이 많은 얄팍한 시가 있는가 하면, 말은 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시가 있는데"(두터운 삶을 향하여, 44쪽).

 

나는 유튜브 설교를 잘 듣지 않는다. 우리 교회도 내 설교를 유튜브에 올리지만, 일차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우리 교회 교우들을 위해 올리는 것이지, 다른 누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 게 아니다. 유튜브는 1인 방송 시대를 열어 방송권력을 민주화시키는 데 공헌했지만, 반대로 거대한 미디어 홍수의 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홍수가 나면 먹을 물도 없어지는 법이다.

 

나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면서, 인격적인 눈맞춤이 있는 설교를 좋아한다. 미디어를 통해 듣는 설교보다, 그냥 설교자와 대면하여 듣는 설교를 좋아한다. 그래서 유튜브 설교는 듣지 않는다. 이런 나의 습성 때문에 나는 이번에 산타클라라교회 집회를 통해 김기석 목사님 설교를 처음 들었다. 책을 통해서 만나고, 그리고 책 출간 때문에 몇 번 만나 뵙기는 했지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현종 시인이 위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릴케의 시와 같았다. 말은 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였다. 나는 지금 김기석 목사님을 '찬양'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한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얼마나 깊은지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늘 나의 설교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 같기를 바랬다. 이것은 정현종 시인이 릴케의 시를 통해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나의 설교가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게 바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설교를 마치면 청자의 입장에서 내 설교를 들으며 모니터링을 한다. 부끄럽기만 하다.

 

좋은 설교란 말하는 설교가 아니라 듣는 설교이다. 좋은 설교란 설교로써 말이 많은 설교가 아니라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를 하려면 평소에 경청을 잘 하는 연습을 하고, 실제의 삶 또한 경청이 몸에 밴 삶을 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하려면, 말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을 멈추고 경청하는 것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영혼의 깊이와 넓이를 기약하는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며 따라서 삶과 세계를 두텁게 하는 능력이다"(두터운 삶을 향하여, 45쪽).

 

설교이되 경청하고 있는 듯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것은 참 축복이다. 그런 면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큰 바위 얼굴이다. 물론, 여전히, 내가 앞으로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유튜브를 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격적인 눈맞춤이 없는 설교를 나는 듣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큰 바위 얼굴'이 되기 위하여 더욱더 유튜브를 끄고(전자기기를 끄고), 경청하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사람에, 책에, 시대에, 아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고, 그렇게 경청하여 얻는 선물을 설교에 녹여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설교이되 깊이 경청하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라는 고백을 받고 싶다.

 

이 시간, 가장 떠오르는 사람들은, 나의 부족한 설교를 매주일 들어주는 우리 교회 교우들이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길, 그리고 이 부족한 사람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목회와 인내: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의 쓸쓸함]

 

1. 목회는 불가능하다.

 

2. 목회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설교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바르트는 설교를 말했지만, 동시에 목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교는 목회의 가장 큰 부분이니까.

 

3. 이제 와서 보니, 나는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목회자가 된 것 같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회를 생득적으로 경험했지만, 목회자가 될 즈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목회가 무엇인지 정말 몰랐던 것이다.

 

4. 목회를 시작하며, 나는 외숙부이신 무불달 오세종 목사님께 참을 '인'자를 선물로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5. 나는 삼대째 목사다. 우리 집안에 목사가 엄청 많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목회자를 배출한 집안 일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에게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득적으로 안다.

 

6. 아버지의 목회를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다. 무엇보다 부당한 일을 겪을 때마다 인내의 덕목은 큰 힘을 발휘했다. 인내는 교회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7. 우리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간암은 집안 내력이긴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너무 참아서 간에 암이 생겨, 결국 참다참다 못해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어떤 원망 같은 것은 결코 없다. 그냥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다.)

 

8. 나는 민수기를 좋아한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힘들고 어려운 일, 무엇보다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마다 지혜롭게 대처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민수기만큼 좋은 텍스트는 없다.

 

9. 목회자 집안에서 자란 생득적 경험과 민수기가 주는 지혜 때문에 나는 목회를 시작하며 '참을 인'을 선택했고,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

 

10. 그런데, 담임 목회를 20년쯤 해 본 결과, 왜 목회에 인내가 필요한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11. 목회는 불가능하다. 목회를 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목회는 불가능하다.

 

12. 그럼에도, 목회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는 마치 버나드 쇼의 "The Show Must Go On"과 같다.

 

13. 목회는 삶을 닮았다. 그렇지 않은가? 삶은 불가능하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 목회와 삶을 닮았다.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래도 계속 진행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굴레와 같다.

 

14. 나는 이제 왜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인내'인지 알 것 같다.

 

15. 인내는 내가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 무엇보다 부당한 일을 참아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코.

 

16. 인내는 당장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17. 목회.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돕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성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에게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목회. 사람이 사람의 죄성을 온몸으로 껴안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18. 목회를 하면할수록 깨닫는 것은 단 하나이다. 목회는 불가능하다는 것!

 

19.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의 고뇌는 불가능한 일을 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일까?

 

20. 목회는 쓸쓸하다. 불가능한 일을 해야 하는 운명 때문이다.

 

21.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목회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목회는 세상 최고의 아이러니, 십자가를 닮았다.

 

22. 목회를 시작하며, 철없이, 참을 '인'자를 요청하고, 선물로 받았으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것은 참으로 절묘한 요청이고 선물이었다.

 

23. 지금도 나는 부당한 일을 경험하더라도 잘 참는다. 하지만  무작정 참지는 않는다. 내 목표 중 하나는 아버지처럼 참고 또 참다 간암에 걸려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간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다. 죽더라도 다른 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24. 하지만, 나는 인내한다.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인내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인내 없이는 목회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다.

 

25. 나의 목회가 당장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바로 지금,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오늘 밭을 갈지 않으면, 오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오늘 물을 주지 않으면, 열매는 결코 거두지 못할 것이다.

 

26. 하지만, 오늘 밭을 갈면, 오늘 씨를 뿌리면, 오늘 물을 주면, 당장 열매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열매가 있을 것을 믿는다.

 

27.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28. 인생은 가뜩이나 쓸쓸한데, 목회를 하는 인생이니 그 쓸쓸함이 두 배다.

 

29. 쓸쓸함은 나의 무기다. 얼마나 큰 폭발력을 지녔는지 모른다.

 

30. 시방 나는 위험한 짐승이다.

 

31. 주님께서 이 무기를 선하게 쓰시기를!

Posted by 장준식

[스펙타클의 사회와 트럼피즘]

 

1. 나의 서재에 늘 펼쳐져 있는 책 하나가 있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나는 이 책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이보다 더 잘 분석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사회는 스펙타클 사회이다.

 

2.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피격 사건이 있은 후, 모든 매체는 트럼프를 조명하는 보도만 내보내고 있다. 바이든 이름은 쏙 들어갔다. 대선 국면을 맞아, 트럼프 피격 사건은 트럼프에게는 호재, 바이든에게는 악재가 되었다.

 

3. 트럼프 피격 사건과 트럼피즘은 기 드보르가 우리 사회를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명명한 것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다음 테제로 시작한다.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매개 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4. 두 문장 밖에 안되는 진술이지만, 그 깊이는 대단하다.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여기서 진술하고 있듯이, 스펙타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삶은 '매개 없이 직접 경험하는 삶'이다. 몸소 체험하는 삶과 스펙타클의 삶은 다르다. 스펙타클의 삶은 모든 것을 표상 속으로 밀어 넣는다. 표상은 representation을 옮긴 말로, 머리속에 맺히는 상을 말한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용어이다.

 

5. 스펙타클의 삶은 사물과 직접 관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조적 삶 또는 관망적 삶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무슨 삶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KPop 걸그룹을 떠올리면 좋다. 팬들은 그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조한다. 관망한다. 그들과 분리된 상태에서 그냥 그들에게 열광할 뿐이다.

 

6.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 사람도 예외없다. 상품이기 때문에 스펙타클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고 주목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성공한 상품은 잘 팔려 큰 이익을 가져다 주고, 여기에 실패한 상품은 그냥 폐기처분 된다. 스펙타클 사회에서 이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스펙'을 쌓는데 영혼을 갈아넣는다.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으면 죽음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7. 기 드보르의 테제를 몇 개 더 보자면 이렇다. "사회의 부분으로서 스펙타클은 특별히 모든 시선과 의식을 집중시키는 영역이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스펙타클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표현된 하나의 실질적 세계관이고, 또한 대상화된 하나의 세계관이다." "스펙타클은 정보나 선전, 또는 광고물이나 곧바로 소비되는 오락물이라는 특정한 형태 아래 사회를 지배하면서 오늘날 삶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

 

8. 스펙타클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스펙타클이 시선과 의식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펙타클을 바라보느라,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이번 트럼프 피격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9.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전부는 아니겠지만)은 이번 트럼프 피격 사건에서 트럼프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뜻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트럼프를 하나님이 미국을 위해 세운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래서 공화당 전당대회는 축제의 시간이었고, 주가는 오르고, 트럼프 피격 직후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스펙타클 사건이다.

 

10. 트럼프의 스펙타클 사건에 모든 시선과 의식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트럼프 피격 사건 때문에 유세 현장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피해자 가족에 대한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의 스펙타클을 가리는 그 어떠한 것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타클이 일어나고 있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묻혀야 한다.

 

11.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2장의 이야기이다. 헤롯 대왕은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야기를 전해준 시점을 기준으로 두 살부터 그 아래 아기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은 예수가 애굽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한 이야기를 기록한 뒤, 헤롯 대왕의 이 명령 때문에 죽어나간 아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한 마디로, 베들레헴 경지에서 죽어나간 2세 이하의 모든 아이들, 이 죄없는 아이들은 예수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예수는 자신 때문에 죽은 이 아이들의 죽음을 알고 기억했을까? 예수는 이 아이들과 이 아이들의 가족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12. 마태복음이 좋은 이유는 예수의 이야기를 스펙타클하게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태가 예수의 이야기를 스펙타클하게 기록했다면 예수 때문에 죽은 무고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만 드러나야 하니까. 그러나, 마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와 베들레헴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같이 기록된다. 예수는 이들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마음의 부채가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 내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13. 트럼프 피격 사건은 전형적인 스펙타클 사건이다. 그리고 트럼피즘은 스펙타클 사회의 전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정점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스펙타클을 일으켜 사람들의 시선과 의식을 끄는데 귀재이다. 피격 사건을 당했으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고 'fight'을 외치며 보수세력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4. 스펙타클을 발생시키며 사회를 더욱더 스펙타클하게 만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은 스펙타클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 스펙타클에 매개된 표상화된 현실만 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결단코 현실 왜곡과 현실 도피와 현실 파괴를 불러온다. 현실 속에서 고통 당하는 가난한 자들은 스펙타클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된다.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자는 더 잘 살게 되고,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부역하는 자들도 큰 이익을 취하게 되지만, 스펙타클에 가려진 현실 속의 가난한 자들은 무관심 속에서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15. 나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우려스러워 밤잠을 설친다. 이 시대의 예수 정신은 단연코 스펙타클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스펙타클의 바람이 너무 거세고, 여기에 아무 생각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말조차 꺼내기 힘들다. 그랬다간,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모른다.

 

16. 교회는 스펙타클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교회론이다.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는 위험한 교회이다. 예수 정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스펙타클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17.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스펙타클의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리고 내 삶의 자리에서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고 그것을 막아 사람들이 표상의 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몸소 체험하는 현실에서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18. 우리 주님은 스펙타클하게 죽은 게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스펙타클한 죽음으로 만드는 신학은 모두 가짜 신학이다. 그것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제국에 부역하는 신학일 뿐이다.

 

19. 우리 주님은 스펙타클을 허물며 죽었다. 표상 속에서 죽은 게 아니라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가짜로 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의 현실을 몸소 경험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자기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베들레헴 지경의 아이들을 구원하는 죽음이고, 가난한 자들의 죽음을 신원하는 죽음이며, 모든 죄악을 죽이는 죽음이다.

 

20. 많은 이들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험을 깊이 알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매한 일을 벌이지 말고, 신앙의 이름으로 스펙타클을 물리치며 스펙타클로 인하여 망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유쾌한 진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신앙에 반하는 과학적 가설로 이해하고 반대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진화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이상 중세(medieval era)가 아니라 근대(modern era)라는 것을 말해주는 역사적 지표와 같다.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고정된 세계관이었다. 다른 말로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계층적 세계관이었다. 세상은 위계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존재하는 하이어라키는 그러한 질서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교황이 존재했고, 주교가 존재했고, 사제가 존재했고, 평신도가 존재했다. 교회의 구조는 위계적이었다.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중세 한국의 풍경도 위계적이었다. 왕과 귀족과 중인과 천민이 존재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그 위계를 지키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았다.

 

진화론은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가 더이상 중세가 아닌 이유는 세상을 더이상 위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이 세상이 위계적이지 않다는 근대적 시각의 반영이다. 진화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존재는 한 위계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그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근대/현대 신학을 진술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이상 중세를 사는 중세인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사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를 들 수 있다. 그의 기독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그리스도론'이라 불린다. 라너에게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위에서 인류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초월을 향한 내적 원동력의 실현"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신학과 신학자들, 128쪽)

 

그리스도인 중에 진화론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진화론의 표면적 의미에만 갇혀 있으면 진화론은 그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불경한 과학적 가설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내면적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더이상 중세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살아가는 역동적 자유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화론이냐 창조과학이냐의 논쟁과 그것과 결부된 일련의 해프닝들은  정말 창피한 일이다. 공부가 짧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 자신은 중세를 살고 있다고 선포하는 미련한 고백이다.

 

칼 라너의 말처럼,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진화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그 태생부터 진화론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통찰처럼 모든 만물은 'becoming'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갇혀 있는 세계, 위계적인 세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그런 자가 있다면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뿐일 것이다. 그런 세계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자는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며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세를 누리고 싶은 자들일 것이다.

 

존재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답답해서 모두 멸망당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통해 이 세상은 갇혀 있거나, 고정되어 있거나, 위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진화론은 해방과 자유이다.

Posted by 장준식

[공허함/Nothingness]

 

우리 인간의 공허함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창조 공간이다. 그 공허함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럴 때 비로소 공허함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사탄은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라고, 채울 수 있다고 꼬드긴다. 현대 소비주의 사회가 사탄의 체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주의 사회는 인간의 공허함을 소비를 통한 상품으로 채우라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선전한다.

 

사람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공허함을 채운다. 그러면서 만족하고 구원 받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그 소비 구조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하고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비를 통해 공허함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지칠 대로 지치고 물질 세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다.

 

현대 소비사회의 사탄은 강력하여 인간을 꼼짝 못하게 결박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공허함은 무저갱이 되어가고 자연은 피폐해져 지옥이 되어 가고 있다.

 

오호라 곤고한 현대인이여, 누가 우리를 이 사망의 체제에서 건져내랴.

공허함을 직면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공허함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누가 가서 이 진리를 전파할꼬.

누가 이 진리를 듣고 사탄의 결박을 끊어낼꼬.

 

밤은 깊고 해 뜨는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저를 지켜주소서.

주님, 저를 보내소서.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경계한 두 가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를 짚어보면 교회는 두 가지를 경계해 온 것이 보인다.

1) 반지성/반이성

2) 엘리트주의(엘리티시즘)

 

1) 교회는 언제나 합리적 신앙을 추구했다

안셀무스의 명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성과 신앙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서로를 보완해준다. 이성 없이 신앙이 존재하지 않고, 신앙 없이 이성이 존재하기 힘들다. 이성은 합리성을 확보한다. 합리성의 확보는 인간이 가진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대자적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분리가 가능하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교회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성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바라보고자 한 이유는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래야만 건전한 신앙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리성, 즉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신앙은 그냥 자기 만족이나 자기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양이 되기 쉽다. 합리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반지성/반이성을 경계해 왔다. 지성을 무시하거 이성을 거부하는 류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뿐 아니라 어느 신앙 체계라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성과 이성을 거부하는 신앙체계는 사람들을 우매화시켜 통치하기 편하게 만들어 맹목적인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신앙) 지도자는 그들을 착취하려는 악한 자이다.

 

맹목적인 신앙,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쁜 신앙이다. 믿음은 합리성을 발판삼아 하나님께 도약하는 행위이지 합리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은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성찰은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를 대자적 존재로 머물게 하여 신앙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최고의 합리적 행위이다. 기도는 지성과 이성의 향연이다.

 

2)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

교회의 역사는 엘리트주의와의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두개파, 젤롯파, 에세네파, 그리고 바리새파는 모두 엘리트주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두개파는 기득권자들로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젤롯파는 혁명을 꿈꾸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에세네파는 더러운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바리새파는 아주 사소한 율법까지 지킬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한 첫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요한복음과 일반서신들에는 영지주의와 싸운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중요시했다. 영지는 감추어진 지식을 말한다. 감추어진 천상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췄거나 아니면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지, 즉 감추어진 지식을 깨달았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꼈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차별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이단 종파, 사이비 주교는 영지주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전형적인 레토릭이 있다. '비밀'이라는 말이다. 비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 종파나 종교 지도자는 대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례로,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경우도 자신이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의 비밀을 들은 신도들은 자신들도 특별한 존재가 된 것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전혀 엘리트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단 종파는 더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는 언제나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영지적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경계 대상이었다.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영지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다. 죄인이란 뭔가 특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그냥 수많은 제약과 연약함 속에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존재론적 차별성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삶이 전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그래서 뭔가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을 지성과 이성에 비추어 보며 합리성을 확보하여 평범해지려는 것이 좋은 신앙의 자세이다. 반지성/반이성은 믿음이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Posted by 장준식

[하나님 나라]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확장. 화끈한 용어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확장’이라는 용어는 부침이 많은 용어입니다. 호전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던 땅따먹기 놀이가 생각납니다. 땅을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땅따먹기를 통해 점점 영토를 늘려가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이 이러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보니, 어찌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처럼 들리는 듯합니다. 실제 그랬기도 했고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하나님 나라에 붙은 ‘확장’이라는 용어는 신학적 반성이 필요한 용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확장’이라는 용어가 붙어 있으면 이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의 영토가 없는데 전쟁 또는 투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보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백한 오해와 잘못에서 비롯된 진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드러내는 것이지 확장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 않은 영역은 온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의 영역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지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장’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그동안 얼마나 호전적인 종교였는지 모릅니다. 용어 하나가 이렇게 신앙의 형태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 용어가 또 있습니다. ‘성시화 운동’이라는 말입니다. 성시화 운동은 하나의 도시를 성스럽게 바꾸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2세대 종교개혁자였던 칼뱅이 제네바 시를 성시화 하려 했던 역사적 시도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요.

 

성시화 운동 뒤에 있는 생각은 도시가 타락했다는 인식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세속화를 정죄하는 마음이 놓여 있습니다. 맞는 말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성시화 운동의 주체인 그리스도인들과 성시화 운동의 객체인 도시의 주민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게 됩니다. 나는 거룩하고, 너는 타락했다는 차별의식이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는 순간 성시화 운동은 시혜가 됩니다. 거룩한 우리가 타락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인을 교만하게 만드는 상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확장’이라는 말과 ‘성시화’라는 말은 상대방을 정복해야 하는 정죄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러한 출발점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은혜가 아니라 폭력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가장 경계했던 일인데, 오히려 그 일이 발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추락합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거나 ‘성시화’ 운동을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타락한 도시를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거나 투쟁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그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헌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되기를!

Posted by 장준식

[우리 교회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톰 레이너. ‘처지앤서즈’(Church Answers)라는 교회 컨설팅 회사의 CEO입니다.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컨설팅하는 일을 하는 회사입니다. 이 분이 쓴 책 중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톰 레이너는 “왜 그 교회는 문을 닫았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본인이 컨설팅 했던 교회 중, 죽어가는 교회, 죽은 교회를 부검해서, 교회가 왜 문을 닫게 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톰 레이너의 분석이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행해진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해서, 교회가 놓여 있는 정치, 사회, 문화적 컨텍스트를 분석하고, 교회의 쇠퇴 원인을 찾아낸 것은 아닙니다. 그의 분석은 다분히 교회 내적인 원인들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함의를 가집니다. 하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와 똑 같은 이유로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은 그냥 주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교회가 죽어가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톰 레이너도 책에서 밝히고 있지만, 사실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미치는 곳이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의 몸이기 때문에 죽음과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보통 명사는 죽지 않겠지만, 교회라는 고유 명사는 죽을 수 있습니다. 보통 명사는 보편 교회를 가리키고, 고유 명사는 역사적인 지역교회를 가리킵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죽지 않지만, 시간 안에 있는 교회는 소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교회들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교회는 죽었거나, 죽어갈까요?

 

톰 레이너는 10가지의 사인(죽은 이유)을 제시합니다. 그 10가지 사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점진적인 쇠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쇠퇴했다.

2. 과거의 영광: 어떤 변화도 한사코 거부했다.

3. 지역 사회를 외면: 그들만의 교회였다.

4. 탐욕: 내부 지향적으로만 예산을 사용했다.

5. 지상대명령 망각: 어느 순간 지상대명령에 대한 순종이 사라졌다.

6. 취향이 이끄는 교회: 언제나 나, 나 자신을 위한 성도들로 가득 찼다.

7. 목사의 잦은 교체: 목사들은 성도들과 갈등을 최소화하는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8. 기도생활 부재: 그 교회는 좀처럼 함께 기도하지 않았다.

9. 사라진 비전: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렸다.

10. 교회 시설을 둘러싼 갈등: 선한 청지기가 아니라 교회 시설에 집착했다.

 

죽은 교회들의 공통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과거가 그들의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좋았던 옛날의 향수에 젖어 그들의 전성기를 과거에 두고 그 옛날을 그리워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변화도 싫어하고, 과거에 집착하다 서서히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경계해야 할 첫 번째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좋은 날은 과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좋은 날은 미래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고 있습니다.

 

톰 레이너가 제시한 사인들 중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상대명령 망각’입니다. 지상대명령은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지상대명령은 ‘가라’(Go)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면서 세 가지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제사 삼는 것, 세례를 베푸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것. 톰 레이너에 의하면, 죽은 교회는 어느 시점에서 지상대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고 합니다. 죽은 교회는 무엇보다 ‘가는 것’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왜 죽은 교회는 어느 순간 가는 것을 멈추었을까요? 톰 레이너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가는 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65쪽) 결과는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지만, 순종은 우리의 노력입니다. 신앙은 ‘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앙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신앙은 노동입니다. 먹고 사는 것만 노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먹고 사는데 필요한 노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힘을 쓰지만, 신앙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힘든 노동이라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노동이 없는 신앙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노동이 없는 교회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톰 레이너의 열 가지 사인 중, 가장 날카로운 분석은 여덟 번째 사인인 ‘기도생활 부재’입니다. 죽어가는, 또는 죽은 교회의 교인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톰 레이너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교인들이 함께 기도했나요?” 그들은 기도했다고 대답합니다. 톰 레이너가 컨설팅한 죽은/죽어가는 교회들 중 기도를 안 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교회는 죽은/죽어가는 교회가 되었을까요? 바로 그들은 ‘기도’라는 행위는 했지만, ‘의미 있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역동적인 교회의 탄생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에서 중요한 것은 ‘힘쓰니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숨 쉬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기도는 가장 중요한 행위였다. 기도는 초대 교회 생명의 원천이었다.”(99쪽)

 

죽은/죽어가는 교회에는 ‘의미 있는 기도’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기도란 서로가 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사랑과 섬김의 기도이고,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놓는 헌신과 순종의 기도입니다. 그냥 우리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만 해도 ‘의미 있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하루, 또는 자신의 일주일을 들여다보십시오. 형식적인 기도 말고, ‘의미 있는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 중 가장 공허한 말은 ‘기도하겠습니다’, 또는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버릇처럼 내뱉는 사람 치고 실제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의미 있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릎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살아 있을 때, 우리의 삶과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우리 세화교회는 이 책을 교훈 삼아 세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우리 교회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둘째, 주님의 지상대명령에 따라 열심히 ‘가는 교회’가 되자. 셋째, 의미 있는 기도를 하는 교회가 되자.

 

우리 교회는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우리 교회에 부어주실 은총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인생을 바꾸는 기도]

 

사도행전 9장은 사도 바울의 회심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중요한 이유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는 1세기를 채 지나지 못해 유야무야 사라졌을 지 모릅니다. 바울의 조직적이고 적의에 찬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죽였을 겁니다. 바울은 회심 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온 세상(유대 땅과 외국 땅)을 돌아다니며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살기는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바울은 단순한 그리스도교 안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을 잡아 죽일만큼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인생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국이었습니다. 변변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 먼 곳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갔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잡히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공적인 살인면허를 교부받아 바울은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중 바울은 그 옛날 신앙이 선조들이 들었을 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놀란 바울을 그 음성에 대답합니까?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 장면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선조들의 삶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장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부르는 이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실, 바울은 예수를 직접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박해한 것은 그저 예수를 따르는 무리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행동은 지극히 옳고 합리적이라 여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국가 반란죄로 사형당한 죄를 메시아로 잘못 믿는 광신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신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박멸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정말로 옳은 일을 행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가 예수님 자신을 박해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주 중요한 신학적 토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계속하여 ‘몸 교회론’을 펼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신학을 당당하게 펼친 것은 그의 그리스도 경험 때문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핍박했다’고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 교회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초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만 생각할 줄 알고 실천할 줄 안다면 교회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역을 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신앙이 옅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나는 나고, 교회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폭발력 있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깊은 묵상을 통해 회복해야 할 신앙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눈도 보지 못하게 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위치에서 이제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보이지 않고 먹을 수 없게 된 바울은 흑암에 싸여 외부로부터 차단된 채 계시와 씨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나니아를 보내 바울의 눈을 뜨게 하시려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주님은 바울의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그는 기도 중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기도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흑암에 싸여 외부로부터 차단된 채 계시와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가벼워진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렇다 보니, 위에서 말한, 몸 교회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기도에 대해서도 매우 가벼운 생각과 실천을 하고 맙니다.

 

몸 교회론을 깊이 묵상하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하니 존재가 가벼워집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버립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는 기도가 가벼워진 시대입니다. 그렇다 보니, 기도를 하면서도 계시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부르심을 발견하지 못하니,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얼마나 특별한 인생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기도하면서 계시의 깊이로 들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사람의 인생은 특별합니다. 소중합니다. 아름답습니다. 귀합니다. 행복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인생이 바뀌고, 세상을 바꿉니다.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네스 팰트로(Gwyneth Paltrow)의 소신발언과 교회]

 

기네스 팰트로가 마블 히어로물에서 떠난 뒤, 미국의 토크쇼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소신 발언을 했다.

 

"요즘 영화계는 질보다는 양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독창적으로 느껴지는 좋은 영화들도 많다. 슈퍼히어로 영화 전반적으로 본다면 큰 압박이 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때로 영화의 작품성이나 독창성 등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표현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들이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상품'을 만들어 팔아 매출을 올려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모든 생태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인식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지, 교회도 복음도 '상품'이 된 지 오래됐다. 교회도 복음도 하나의 '상품'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구매'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돌아보면, 기네스 팰트로가 영화계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도 질보다 양에 더 중점을 둔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더 좋은 교회이고 더 부흥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서려 하다보니 교회는 '작품성이나 독창성'을 잃어버린다. 일부러 작품성과 독창성을 포기한다.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고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복음의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다.

 

기네스 팰트로의 다음 발언은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에 대한 제언과 일치한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블록버스터 대작은 요즘 우리가 '대형교회'라 부르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아주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데,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사이즈가 작으면, '작은 교회'라고 부른다. 어떤 교회는 자신들은 형편없는 대형교회와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건강한 작은 교회'.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작은 교회라니. 작다는 것은 '크다'라는 다른 기준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인데,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이다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교회'라는 용어가 남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긴 것이다. '교회는 두 종류의 교회만 존재한다.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목사는 두 종류의 목사만 존재한다.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 모두, 교회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는 뜻이다. 

 

독립영화가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커진다는 기네스 팰트로의 말은 영화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현실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말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다양성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일례로 유행은 개성의 표현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여 매출을 극대화시키는 상술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콜린 건턴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인 <하나 셋 여럿>에서 밝힌 바 있다.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이유는 다양성이 형편없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모두 자본주의의 기획에 당한 것이다.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어처구니없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복음은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양념이 버무려지고 팔린다. 그래야 상품화된 교회와 복음이 일반 대중들의 구매력을 자극하여 선택 받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위기에서 탈출하여 교회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방법은 자본주의의 기획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획은 다양성의 말살이다. 교회가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작품성과 독창성이 살아있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생태계에 다양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해관계를 최소화하여 다양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작은 교회'라는 용어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그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성격/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만 있으면 된다. 교회 앞에 '작은'이라는 것이 붙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라는 뜻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어떻게 교회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너무 천박한 생각이다.

 

작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지 말라. 건강으로 따지면 대형교회를 따라갈 수 있나? 가난한 자가 부자들의 건강을 따라갈 수 있나? 작품성과 독창성이 있는 교회를 세우라. 이해관계가 적은 교회를 세우라. 그래야 복음이 '상품'으로 팔리지 않고,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러시아의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 P. Mussorgsky, 1839-81).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강력한 음악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사조가 예술계를 휩쓸던 시기입니다. 이성에 경도되어 모든 것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했던 시대에 사실, 또는 현실을 초월한 공간을 창조함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에 숨쉴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 낭만주의입니다. 그런 낭만주의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은 음악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실주의에서 가장 먼 것도 음악이었습니다. 음표로 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물론 그림도 사진이나 동영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요.) 그러나 음악의 음표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죠.

 

무소르그스키는 그림(회화)에 비해 음악의 표현력은 제한된다는 생각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음악을 그림처럼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무소르크스키의 지위는 독특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던 것,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절친 빅토르 하르트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무소르크스키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죽은 친구의 유작을 모아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의 작품 중 깊은 인상을 받은 10개의 작품을 골라,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전람회의 그림>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동시에 음악적 제약을 뛰어넘은 혁신-창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이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된 <전람회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합니다.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죠. 그 중에서 모리스 라벨(J. M. Ravel)의 관현악 편곡 연주가 가장 유명합니다.

 

<전람회의 그림> 열 개의 작품 중 여덟 번째 작품의 표제가 ‘카타콤’(Catacombae)입니다. 이 곡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들고 파리의 카타콤을 조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은 로마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우리는 카타콤교회라 부릅니다. 카타콤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포용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리며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주 현실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그들의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신앙의 핍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고,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알았던 카타콤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세속적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00세 시대를 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삶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욕망, 그리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영성을 잃은 시대에 살다 보니,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약자들을 향한 우리들의 무관심 등이 우리의 신앙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을 반성하며, 오늘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한 번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신학과 전망]

ㅡ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려워 하는 이유와 해결방안

 

삼위일체 신학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낯설어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스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이 발전해서 생긴 신플라톤주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현대 한국인이 조선 시대 성리학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고대 시대의 그리스 철학을 잘 알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왜 삼위일체 신학이 그러한 언어로, 그러한 형태로, 그러한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깊이 파악할 수 없다. 기독론(Christology)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sus) 논쟁을 만나게 된다. 동일하게, 플라톤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에 대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또한 역사적 플라톤과 철학적 플라톤의 주제도 만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 예수’에 대한 논의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고 실제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예수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를 접하게 되는 자료는 ‘신학화된’ 예수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신학화된 예수다. 소크라테스도 그렇다.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자신의 저서에서 ‘등장인물’로 전해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이지만 실제로는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플라톤 철학을 모르면 서양 철학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사건이 헬라 지역에 전파되고,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서 서양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 이상,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플라톤 철학은 일종의 신학 문법으로의 역할을 감당한다.

 

역사적 플라톤은 당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적 플라톤은 정치적 관심과 열정으로 당대 사회를 개혁하고자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플라톤은 그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소피스트들과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괴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플라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펼쳐 나갔다.

 

그런데, 후대에 플라톤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관심은 좀 달랐다. 특별히 신플라톤주의를 꽃피운 플로티노스에 이르러서 플라톤 철학은 플로티노스의 신비적 형이상학을 펼치는데 활용된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 사상을 주조해 가지만, 역사적 플라톤의 관심사였던 현실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발전했는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특징은 ‘범신론적 일원론’과 ‘철학의 종교화’였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의 구조를 지닌다. 이데아를 상정하고,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여, 사상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형상계(이데아)와 현상계(현실계)에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해서 플라톤의 이원론을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재설정한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현실 정치적 색채를 현실을 초월한 신비주의적 색채로 탈바꿈시킨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저서 『엔네아데스』를 통해 '일자'(The One) 또는 '성선'(The Good) 사상을 펼친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이러한 사상을 전개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영지주의 신학의 만연 때문이었다. 영혼의 구원과 신에 대한 추구라는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는 플로티누스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다시 말해,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시기에 발전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례로, 일자에 대한 생각, 누스(지성)의 개념, 그리고 관상의 개념 등은 삼위일체 신학과 기독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와 더불어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던 프로클로스(Proclus)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이다. 프로클로스의 일자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로클로스의 ‘삼위일체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 개념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삼위일체 신학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던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 신학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시킨 철학들과 용어들을 통해서 정립한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느 신학자가 발명한 개념이 전혀 아니다. 삼위일체론을 인간이 발명했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은 발명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신학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고유의 존재 방식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학이란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인간이 임의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예수 사건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헬라 문명에서 꽃피고 있었다. 그때 그리스 문명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고 있을 당시 헬라 문명은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고, 그들의 용어는 어떠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철학/신학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과 신학을 발판삼아 그들의 사고구조와 용어를 통해 정립되었다.

 

그렇다고, 헬라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전부이거나 가장 정확한 계시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사회, 또는 한 역사적 시대가 독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서 한국인이 삼위일체론을 어렵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헬라 철학으로 표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표준이고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표현해야만 한다. 이미 표현된 계시만이 계시가 아니다. 우리의 언어, 나의 삶의 자리에서 표현된 계시가 우리에게는 더 쉽게, 편안하게, 그리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처음에 정립되어 있다보니,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전혀 익숙하지 않고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을 경험을 풀어내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해놓은 것을 가져다 하나님 경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내 삶의 일상언어로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는데 서툴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 사대주의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신학을 쉽게,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좀 어렵지만 힘을 내서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성경을 통해 계시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용어를 어떻게 활용하여 표현하고 있는지를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두 번째 과제도 수행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그들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했던 방식을 모범삼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이, 어떠한 사상이, 어떠한 시대가 독점적으로 표현하고 가둬놓을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니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진정 내것이 될 때,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남이 표현해 놓은 하나님을 내가 따라 표현하려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로소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어른 모세

 

한국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대개 한국의 무속신앙인들이 그들을 추앙합니다. 대표적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입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고, 강감찬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 한산, 노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요즘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주목 받고 있는 강감찬만 보더라도 수많은 신화적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부릅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또다른 ‘대학교’로 오해합니다. 낙성대는 강감찬의 탄생 설화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강감찬이 태어나는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별은 문곡성인데,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이랍니다.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을 일컬어 낙성대, 즉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부릅니다.

 

강감찬의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여우라는 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강감찬이라는 겁니다. 영웅설화의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강감찬에 대한 신화 중 벼락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이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죽는 병사가 많고, 걸핏하면 일반 백성들이 벼락에 맞아 죽자 강감찬은 벼락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 강감찬을 치려고 했답니다. 그때 강감찬은 벼락을 얼른 잡아서 분질렀다고 합니다. 그후부터 벼락 치는 횟수도 줄어들고 부러진 벼락은 얼른 나왔다 다시 자취를 감추게 되어 사람들이 벼락에 맞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인물은 이렇게 신화적으로 승화되어 칭송을 받는 법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던 인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모세가 돋보입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오경은 ‘모세 이야기’로 바꾸어 불러도 됩니다. 모세오경의 중심 사건은 ‘출애굽 사건’인데, 그 출애굽 사건의 중심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표현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오경에 그려진 모세의 모습을 보면 모세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사람이고, 온유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또한 후계자를 세워 공동체를 든든하게 하고 후일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자기가 우상화 되는 것, 즉 자기가 신적인 인물로 높임 받는 것을 방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끝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모세의 인생 마지막을 보여주는 신명기 34장은 모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한 마디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한국 역사의 영웅적 인물이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들리는 탄식 소리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탄식합니다. “어른이 없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절입니다. 강감찬이나 모세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작게라도 어른이 된다면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평안해지고 따스해질까, 상상해 봅니다. 어른이 없다는 탄식 소리가 들리는 이 때, 우리 함께 조금씩만 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말 대신 '통치'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가 주조한 '통치성'이라는 용어는 '통치와 관련된 것'을 말한다. 푸코는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권력은 빼앗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통치성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었다.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의 개념이 바뀐다. 권력을 실체로 보면 자유란 자기실현을 위해 타자들의 저항이나 비판이 없는 '평온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란 사람들 간의 경쟁이나 대항,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연대 등의 역동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유란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서로의 배려이다.

 

푸코에게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유연성을 잃고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고착되어 버릴 때, 이것을 지배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 균형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의 권력론(통치론)의 핵심은 '비판'과 '저항'의 문제이다. 통치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비판적인 직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다. 통치는 상호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정부가 통치권을 가졌다고 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수행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정부의 통치에 대응하는 '통치'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저항은 통치 행위이다. 권력은 관계적이기 때문에 정부도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고, 국민도 정부를 향하여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지배 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배려'이다. 자기배려는 권력관계(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의 힘을 조절하는 실천이며, 자기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의 지속적인 비판과 문제화이다. 즉,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여는 행위.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대통령)의 통치를 보면서 답답해 하는 이유는 권력이란 관계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권력자의 모습 때문이다. 자신의 통치만 중요하고, 자신의 통치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 국민 쪽에서 정부(대통령)을 향해서 하는 통치에 대해서는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인데, 일방적인 통치만 실행되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후퇴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마음에는 분노만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싫어할 것이다. 푸코 공부는 피통치자들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피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겠지만, 더불어 권력자들도 '이런 식으로 통치하지 않기'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 한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통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는 양방향에서 서로 주고 받아야 바른 통치이다. 이것을 알고 국민의 통치를 수용할 줄 아는 정부(대통령)가 바른 통치자이다.

 

대통령의 KBS 대담을 들은 국민들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은 불행하다. 권력의 자리에 좋은 통치자가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을 물같이, 저항을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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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