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학의 위치]

 

서구(유럽)신학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신학이다. 그래서 때로는 안쓰럽고 애처롭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사회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중세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 기세와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개무시 당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서구신학은 옛영광을 그리워하며, 또는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또는 그나마 존재하는 조그마한 영광이라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온갖 사회적 이슈와 연결을 지어 자기의 존재성을 호소하고, 세상을 향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사회 발전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애처롭다. 마치 사랑 받지 못하는 자가 사랑 받고 싶어서 내는 기죽은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에는 현실을 향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담겨 있다. 빈곤과 사회적 억압,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통해 고통 받는 민중을 향한 애닮은 마음이 담겨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서구사회처럼 무시 당하지 않는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지 않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인정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무력하다. 사회 정의를 외쳐도 좀처럼 변혁을 일구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 공허하다. 깊은 정말이 베어 있다.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 신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신학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일까? 민중이 자취를 감추고, 이제 부르주아와 부르주아가 되고 싶은 사람들만 가득한 한국에서 신학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 달리 다종교 사회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려 든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처럼 한 번도 크리스텐덤을 이룬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리스텐덤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사회에는 다른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회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서구화된 사회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속에 가깝게 묶여 있다. 한국인은 서구 문물을 소비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통시키고 소비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는 서구로부터의 "온갖 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이 뿌리 내린 사회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무한경쟁 체제이다. 말이 좋아 무한경쟁이지, 결국 힘 있는 자(경쟁력 있는 자)가 힘 없는 자(경쟁력 없는 자)를 무한히 착취하는 구조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력을 갖추려고 영혼을 갈아넣고, 경쟁력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경쟁에서 이기려고 종교를 이용한다.

 

그래도 한국은 아직까지 지정학적으로 극동 아시아에 위치해 있고, 인종적으로 아시아인이며,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서서히 서구화되긴 했지만, 문득문득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심과 울분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한국신학은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과는 다른, 어디쯤에 놓여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한 현실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신학은 다종교 사회 상황에서, 서구화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억눌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한국인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과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돕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스펙타클을 걷어내 사람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 인식을 가지고 '이건 아닌데...'라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음성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이라면, 성경은 믿을 게 못되고 공허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인 것은, 다행히도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오히려 밝다. 그리고 해야할 일이 너무도 명징하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고, 성경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일, 그것이 우리들의 주어진 과제이고 사명이다.

 

다행히, 이런 자각과 노력이 곳곳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성경을 오용하고 남용하는(abuse) 무리들이 많지만, 그리고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이 아직도 교회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전복성을 제대로 알리려고 하는 '빛과 소금'같은 사람들이 많다.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교단과 상관없이 연대하여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도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더 많아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