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 교회의 몰락]

 

1991년 성탄절 다음날 12월 26일, 소련은 해체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서구사회의 시각이다. 동구권의 정교회에서 성탄절은 1월 6일이다. 동구권의 시각에서 보면, 성탄절이 임하기 전,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국, 즉 소련의 해체는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의 해체의 시발점이었다.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제도권 사회주의국자들은 줄이어 해체된다. 소비에트(소베트)라는 말은 원래 참 좋은 말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를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소비에트 연방국이란 외면적인 뜻으로 보자면,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들이 연합하여 이룬 국가라는 뜻이다. 우리가 요즘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는 외면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들의 연합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하여 장악된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의 권력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체제인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제도권 교회의 몰락은 제도권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 제도권 사회주의국가가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국가가 모든 것을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 폭력수단, 그리고 정치수단. 제도권 사회주의국가가 서구 부르주아국가들 보다 더 폭력적인 이유는 모든 수단을 국가가 독점하여 민중들(노동자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서구 부르주아국가(자본주의국가)들은 생산수단의 독점은 자본가, 폭력수단과 정치수단의 독점은 국가가 하고 있어, 독점의 구조가 이원화되어 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보다 좀 덜 폭력적이다. 물론 오십보 백보이지만 말이다.

 

제도권 교회의 몰락은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처럼 자명해 보인다. '제도권'이라는 말에는 이미 '독점'의 의미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회에서 교회 정치는 목회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 나라(하나님 국가)에서 파견된 일종의 에이전시로 활동하며 하나님 나라가 전해주는 모든 권세를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구원이 그들에 의해 독점된다.

 

사실, 이러한 독점체제를 뒤엎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외쳤던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구원을 '민중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요즘, 그러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온데 간데없어졌고, 오히려 중세시대의 제도권 교회보다도 더 혼란스럽고 유치한 방식으로 구원이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듯하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 이것은 그 당시 구원을 독점하고 있었던 제도권 종교세력들에 맞서 구원을 민중들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한 선포였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폭로하고 앗아가려는 예수의 구원행위에 맞서 그 당시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사도 바울이 "믿음에 의하여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구원론을 전개했을 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구원의 보편성, 즉 구원은 어떤 개인이 또는 어떤 세력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은 어느덧 제도권 교회 안에서 왜곡이 되었고, 믿음이라는 제도적 용어로 인하여, 구원이라는 제도적 용어로 인하여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되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이러한 배제의 원리가 지금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 지금 저 하늘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눈물 흘리고 계실 것이다.

 

구원을 누가 독점할 수 있는가. 누가 구원의 수단을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노동자 사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그리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 노동력만 남은 노동자는 먹고살기 위해 자본가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다. 일 자리를 달라고.

 

이처럼, 구원수단을 독점한 성직자 그룹과 구원수단을 빼앗긴 평신도 사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그리고 구원수단을 독점한 성직자는 구원수단을 빼앗긴 평신도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 구원수단이 없는 평신도는 구원받기 위하여 성직자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다. 구원해 달라고.

 

구원과 구원수단은 어느 한 개인이 또는 어떤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 그것이 그리스도 정신이고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이지, 구원을 독점한 이들의 집단이 아니다. 예배는 구원에 대한 감사이고 찬양이고 기쁨이지, 구원 받은 것에 대한 확인이 아니다.

 

목회자는 구원 받은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이지, 구원을 독점하여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회가 제도권 교회가 되어 구원을 독점하려 든다면, 목회자들이 제도권 교회 내에서 구원을 독점한 정치세력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 드는 한, 제도권 교회는 제도권 사회주의국가들처럼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구원과 구원수단을 민중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한 제도권 교회는 민주주의가 꽃피는 사회에서는 발을 붙일 수 없다.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제도권 교회 안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회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부활은 시 그 자체]

 

파리코민이 낳은 시인 랭보의 '견자의 미학'에 의하면, 자유로운 주체인 견자(Voyant)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되는 상태에 놓인다. 견자는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다"(눅 10:23). 이것이 '견자'의 의미 일 것이다.

 

랭보에 의하면 '견자(보는 자)'는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객관/대상)을 보는 자이다. 즉 견자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자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내 앞에 주어진 대상이 보라고 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견자가 아니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들은 이미 정해진 것들만 보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의 감각들이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대상'이기 때문에 현재 고착된 감각들에 대한 초월 또는 극복 없이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랭보는 견자가 되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감각들의 착란'이라고 말한다. 감각들의 착란.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이렇게 보라'고 우리 앞에 던져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고 지배하고 있는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작업 없이, 즉 이러한 감각들의 착란 없이 내 앞에 던져진 대상을 그대로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랭보에게 시란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기존의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시켜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옮긴, '미지(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의 세상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상징주의' 또는 '초현실주의'라고 부른다. 사실적이지 않아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가려져 있는 '전복적인 현실(미지)'을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 끔 펼쳐보여주기 때문에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기존의 규칙과 이성, 그리고 사유를 전복시킨 '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우리 앞에 던져진 대상인 부활을 착란된 감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백신 음모론보다 더 무서운 백신 폴리틱스(Vaccine Politics)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마스크를 써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제는 백신을 맞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시끄럽다. 정부와 다국적 제약회사 주도로 개발된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은 그동안 백신을 만드는데 사용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mRNA 방식이 그것이다. 새로운 백신의 효능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당국의 말과 새로운 백신에 대한 효능을 불신하는 측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아직까지 백신 효능에 대한 장기적이고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개발된 백신을 맞는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백신 음모론이 아니라, 백신 정치(Vaccine Politics)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하여 지난 1년여동안 전세계는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반사이익을 누린 집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던 것은 사실이다. 정부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백신 정책은 경제를 되살려 놓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펼쳐지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이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에 큰 우려를 보낸다. 그리고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백신접종에만 있는 것처럼 정책을 펼치는 것에 또한 큰 우려를 보낸다. 왜냐하면 정부 주도의 정책은 팬데믹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도 없고, 그에 대한 대책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팬데믹의 발생 원인을 중국에서 찾고자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는 정치적 공세일 뿐이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알려졌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인간과 짐승이 공통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 질병이라는 뜻이다. 인수공통감염병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은 짐승이 인간 세계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짐승이 왜 인간과 물리적으로 더 가까워졌을까? 인간들이 짐승들의 서식지를 파괴했기 때문에, 서식지가 줄어든 짐승들은 ‘살기 위해’ 인간들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짐승들은 자신들의 지니고 있는 바이러스를 우연하게 인간들에게 옮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대참사를 피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일은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활동을 줄여야 하고, 그동안 망가진 산림을 복구하는데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여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이것을 집행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예만 보더라도 막대한 구제금융지원은 현 상태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 인간들의 활동을 줄이고 망가진 살림을 복구하는 데 편성된 예산이 전혀 없다. 아예 그런 발상 자체가 없다.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무대의 배경인 테바이에 역병(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역병이 돌게 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외삼촌 크레온을 델포이에 파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크레온이 받은 신탁, 즉 역병이 돌게 된 이유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 왕 이전의 왕, 즉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누군인지 알고 있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었다.

 

요즘은 종교가 죽은 개 취급을 받고, 과학이 우대 받는 시대라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신탁을 받는 일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요즘은 이성과 과학이 신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과 과학이 신탁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근대의 인류문명이 이룬 성과 중의 하나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그 이성과 과학이 어떻게 쓰이느냐이다. 이성과 과학이 ‘합리성’을 가지고 공정하게 쓰인다면 문제 없겠지만, 이성과 과학은 그 옛날의 종교적 신탁처럼 정치에 쓰이는 게 문제이다.

 

현대사회에서 이성과 과학이 정말 올바른 신탁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성과 과학 가라사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은 바로 인간들에게 있나니, 생태계를 혼란시키고 파괴할 정도로 과도한 소비생활을 줄이고, 그동안의 과도한 욕망을 회개하고, 무너진 생태계를 복구하는데 그동안에 쌓은 경제적인 부와 기술을 쏟아부으라. 그렇지 않으면, 곧 영원한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라.”는 신탁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와 국가 정책은 오직 지금까지 누려오던 풍요를 지속시키고자, 팬데믹 속에서도 경제를 유지하고, 팬데믹 이후에 더 큰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정책들로만 가득하다. 그것을 위해서 ‘백신접종’만이 오직 구원의 길 인양 시민들을 호도하는 국가의 정책이 백신 음모론보다 더 무서운 것 아닌가. 우리 몸에 이미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국가적으로 홍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본을 경제살리기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팬데믹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생태계 복원에 투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 음모론에 의해서 백신을 맞지 않게 되면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 그리고 백신 음모론에 휘둘려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비난, 그리고 백신 음모론에 휘말리는 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합류하는 멍청한 짓이라는 정치적 조롱 등은 모두, 우리가 얼마나 자본주의와 그 체제를 유지하려는 국가 정책에 저항없이 따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사증거들일 수 있다.

 

나는 백신 음모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더 거북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경제논리에만 매몰돼 이 시대의 진정한 ‘신탁’에 눈과 귀를 닫고 있는 지배자들과 그들을 무조건 따르는 피지배자들의 사악함과 무기력함이다. 팬데믹 구제금융 정책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해오던 소비를 멈추지 않고 할 수 있어 안심이고 즐겁고 기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로 그 끊임없는 소비 때문에 생태계는 더 망가지고 서식지를 잃은 짐승들은 물리적으로 인간들과 더 가까워져 앞으로 어떠한 인수공통감염병이 또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더 두렵다. 누가 이 두려운 미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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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독교의 시간관]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시간관을 '일직선적 시간관'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에서 시작해서 종말에 이르는 시간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시간관에 대한 명백한 오류이다.

 

'일직선적 시간관'은 기독교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의 차이를 통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인데, 새로운 제품이 낡은 제품을 밀어낼 때 이윤이 발생한다. 낡은 제품은 과거이고, 새로운 제품은 현재이다. 과거가 물러나고 현재가 도래하고, 미래가 곧 올 거라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이 성립되어야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시간관을 '일직선적 시간관'으로 오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종교화시키는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일직선적 시간관을 갖지 않는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시간관을 갖는다.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인간의 시간(역사) 안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밀고 들어온 시간을 종말론적 시간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시간관에서 구원이란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는 것, 과거를 현재로 대체하고, 현재가 미래로 대체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그러한 방식으로 임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임한다. 즉, 기독교의 구원은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인간의 시간(역사)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또는 은혜로 밀고 들어오시는, 또는 이미 오신, 성육신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역사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생각이 아니다. 역사가 마냥 흐른다고 구원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역사 안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역사에서 희망을 보는 게 아니라, 역사를 뚫고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이다. 역사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역사에 매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자유롭다. 이미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신앙을 통해 자기의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인은 그 자유를 통하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다. 인간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목소리를 높이라 Raise your voice]

 

미국 뉴스는 연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용의자 전직 경찰관 데릭 쇼빈의 유죄 판결에 대한 논평으로 가득하다. 어제, 판결이 나오기전 미국사회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았다. 정부는 유죄 판결이 안 나올 만약의 경우에 발생할 폭동에 대비하여 경계를 삼엄히 했었다. 다행히 배심원 전원 찬성의 유죄 판결이 나왔고, 데릭 쇼빈은 2급 살인죄(살해 의도가 없는 살인죄)로 수감되었다.

 

정부가 폭동을 염려하여 경계를 삼엄히 한 것은 판결이 유죄로 나오지 않고 무죄로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연히 살인죄를 적용해야 할 판결이 무죄로 끝난 경우가 너무도 빈번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유죄 판결이 나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 아시안 혐오 범죄와 연관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배심원 전원의 유죄 판결이 나온 배경에는 전국적으로 발생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큰 힘이 된 것 같다. 법이라는 게 원래 이현령비현령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법적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만약 무죄 판결이 나왔다면, 정부에서 감당 못할 폭동이 일어날 게 뻔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불의한 일을 경험했을 때 그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다시 깨닫는다. 요즘 발생하고 있는 아시안 혐오 범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을 촉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들은 불의한 일, 부당한 일을 당해도 사회적 약자(마이너리티)로서 합당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 면도 있으나 불의에 저항해서 결국 피해를 더 보는 것은 저항한 당사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의 존재감은 매우 미미했다.

 

미국 사회 저변에는 엄청난 심리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백인들은 죄책감(guilty)에 시달리고, 흑인은 분노(anger)에 시달리고, 아시아인들은 두려움(fear)에 시달린다. 이러한 세 가지의 심리적 불안은 끊임없는 갈등을 미국 사회에 만들어 내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내면적인)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사회 자체가 언제나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런 심리적 불안은 총기사건을 통해 계속해서 분출되고 있다.

 

이번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나 아시안 혐오 범죄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불의한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불의한 것을 불의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불의는 내면화된다. 내면화된 차별과 혐오는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 어떤 곳에서 희생자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은 늘 불안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Black Lives Matter"라는 사회적 운동, 즉 목소리를 높이는 운동이 없었다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대한 용의자 판결이 어떻게 나왔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의 용의자 데릭 쇼빈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법이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가 정의롭기 때문에 나온 판결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의로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소리 높여 알려야 한다. 정의에 대한 그 간절함이 사람과 사람의 마음에 공명될 때, 법은 비로소 정의를 관철시키는 데 봉사하게 될 것이다.

 

불의한 일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과 그들의 유가족, 그리고 정의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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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앞으로 올 사랑]

 

교회 식구들과 지인들의 부활절 선물로 내가 택한 것은 정혜윤 CBS 피디의 저서 <앞으로 올 사랑>이다. 이 책의 시의적절함(relevance)은 두말할 필요 없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후변화와 팬데믹 상황 속에서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질문이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저자가 주목한 책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데카메론은 14세기 중반 유럽을 휠쓸었던 흑사병의 고통 가운데 나오는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나온 책 치고 그 내용이 매우 발칙하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 죽음이 난무하던 시대에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이야기를 진행한다. 10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열 가지의 주제에 대하여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나눈 이야기 형식을 담은 <데카메론>처럼, 정혜윤은 그 열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정혜윤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변화와 팬데믹 위기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방송사 피디로서 정혜윤은 수많은 이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그들과의 인터뷰는 이야기의 좋은 재료이다. 또한 그녀는 일상의 이야기와 더불어 본인이 읽은 소설의 이야기를 또다른 재료로 활용한다. 일상의 이야기와 소설의 이야기는 절적하게 버무려져, 우리 시대을 보듬는 '복음 같은 이야기'가 된다. 

 

최근 정혜윤 피디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인류세'가 무엇인지 모른단다. 인류세를 '세금'으로 안단다. 또한 도시가스랑 온실가스를 구분하지 못한단다. 이런 웃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기후위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지,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았다. 정 피디는 한국에 해양생물보호구역(Sanctuary)를 만들고 싶다 했다. 예전에 함께 갔던 몬트레이의 해양생물보호구역이 너무 부럽다 했다.

 

나는 한국이 하두 미국을 따라하는 터라, 한국에도 해양생물보호구역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아예 꿈도 못 꾼단다. 모두 고기를 잡아 먹을 줄만 알았지, 보호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산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해양생물보호구역을 한국에 설치하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앞으로 올 사랑>은 정말 따뜻한 책이다. 인간성이 파괴되고 있는 이 디스토피아시대에, 인간성의 파괴를 막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뭐니뭐니해도 '사랑'의 힘을 다시 회복하는 수밖에는 없다. 요즘은 '사랑'이라는 개념도 너무 사사화되고 개인화되어서 '공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원래 사랑의 개념은 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좀 더 사랑을 파고 들어가면, 사랑은 신적 개념이다. 모든 생명은 신의 사랑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근본적으로 공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고 나면,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돌아보며 마음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 때문에 쓰레기 하나를 버리더라도, 음식을 먹더라도, 일상 속에서 그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바로 그러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의 불편함은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아직도 삶을 선택하고자 하는 자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간절히(강력히 보다 강력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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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이 된 국가]

 

근대국가(Modern State)는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근대성은 자율의 영역을 확보하여 신 없이 인간이 스스로의 창조성을 통해 스스로 존재하는 '신 같은 존재'로의 고양을 추구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근대가 주조한 '주권'개념인데, 근대성이 인간에게 선사한 '주권'은 '절대주권'이다. 즉, 신(God)도 건들지 못하는 주권이다.

 

이 엄청난 파워(power)는 '사유재산(private property)'라는 개념으로 현실화된다. 눈에 보이는 사물(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대성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신적인 지위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근대국가이다. 근대국가는 하나님의 신적인 힘, 또는 신 자체로서 개인이 자율적인 이성을 사용하여 자율적인 삶을 향유해 나가는데 있어 일종의 보증으로 작용한다. 그야말로 인간은 국가의 은혜를 통해 삶을 향유한다.

 

이제 현실에서 '국가'를 능가하는 '힘/권세'는 없다. 민족국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한 민족이 동일하게 하나의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동일하게 섬기는 현상이 바로 민족국가이다. 근대성의 종교적 기능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애국'에서 드러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국가를 향한 종교적 순교이다. 신앙의 극단(마지막 끝)이 순교이듯이, 국가에 대한 신앙의 극단도 순교(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준 열사의 동상엔 이런 문구도 새겨지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목숨을 바친 애국자는 이제 국가에서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그의 인격과 행위는 신성화된다. 하나의 윤리가 된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국가적 성인을 욕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국가에 의해 또는 그 국민에 의해 처형당한다.

 

신이 된 국가는 자신의 은총을 국민에게 베풀기 위하여 각종 사회적인 제도(교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를 세운다.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경찰과 군대 제도를 만들고,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사법체제를 만든다. 교육시키기 위하여 학교제도를 만들고, 삶의 번영을 위하여 경제제도를 세운다. 특별히, 요즘 국가는 성례전적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복지제도'를 세운다. 공공복지 제도는 보이지 않는 국가(신)의 보이는 은총(복지혜택)이다. 공무원 또는 사회복지사를 통해 성례전을 받는 국민은 기뻐하고, 은총을 베푼 국가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국가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근대성이 만들어낸 국가라는 신, 이제 우리는 이 신(God)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며(국가가 내면화된 상태),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 세력과 기꺼이 맞서 싸운다. 우리의 생명은 그렇게 소모되어 간다. 그러나, 국가라는 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은 결국 통증 없이 죽게 만들어주는 '진통제'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2:20-26)

 

여기서 ‘명절’은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예배하고 감사하는 절기다. 인류에게 ‘기억’은 모든 문화의 근간이다. 기억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기억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사람이 아닐 정도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치매다. 그런 병리적 현상 말고, 인격적 현상으로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짐승’이 된다. 누군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짐승 만도 못한 놈!’이라 하며 욕한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치매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인류문화에서 ‘쉼(일하지 않음)’은 언제나 하나님(신)과 관련 있었다. 우리가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 하느라 힘든 육체를 쉬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육체의 피곤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쉰다. 그리고 쉼이 끝난 뒤 회복된 몸으로 다시 일하러 나간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쉼을 허락하는 이유는 우리의 육체를 최상의 조건으로 만들어 우리의 노동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쉴 때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쉬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육체를 쉬게 해서 다시 일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쉰다면,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일 또는 돈, 또는 나의 고용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주신 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쉰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에 유대인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이 예배하러 올라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빌립을 소개할 때, ‘갈릴리 뱃새다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들이 여러 사람 중에 빌립에게 찾아가 예수님 만나기를 청한 이유는 빌립이 갈릴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천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성경을 통해 ‘갈릴리’를 접하는 우리들은 ‘갈릴리’라는 말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갈릴리’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장면을 떠올리며 낭만적이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른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지순례 가서 갈릴리 바닷가에 들러 베드로 고기를 먹어봐야 지라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문제적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주류 유대이들은 갈릴리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천대했다.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면 아주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의 이야기가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팔도에서 모여든 애국자들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꾸리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길 원했다. 그 중에 도산 안창호도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에서 신임이 가장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를 맡지 않았다. 그는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를 (우남) 이승만에게 늘 양보했다. 그 이유는 안창호는 그 당시에 한국인들에게 천대받던 관서지방(평양) 출신이었고, 이승만은 왕족의 후손으로 주류세력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안창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으면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직을 이승만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방인들이 주류세력이 아닌 갈릴리 출신 빌립에게 예수님 만나기를 청한 사건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갈릴리 출신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 제자들과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이 찻잔의 폭풍을 벗어나 이스라엘 전역의 주류 운동으로 파급효과가 커졌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갈릴리 출신이 아닌 사람은 딱 한 사람, 가룟 유다 뿐이었다.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이 일러주고 있듯이, 가룟 출신인데, 가룟은 예루살렘 남단의 도시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분당쯤 되지 않을까 싶다. 즉, 가룟 유다는 다른 열 한 제자와는 달리 식자층에 중산층에 주류층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가 회계를 맡아보기도 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가룟 유다가 예루살렘의 주류 권력층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한 것이다. (서로 말이 통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헬라인들(이방인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또는 갈릴리 시골 촌뜨기들의 운동)에 관심을 가진 이 시점을 ‘하나님의 때’로 분별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는지에 대한 기사는 없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만남성사의 여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데, 헬라인들의 요청을 빌립에게 전해들은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도 ‘영광’이라는 맥락이랑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니리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4-26절).

 

멈춰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주옥 같이 심오한 말씀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씀을 하신 후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영광과 수난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영광과 고난은 이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영광을 받고 싶어하지 고난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광을 받으려고 일부러 고난 받는 사람은 없다. 영광 받으려고 일부러 고난 받는 사람이 받는 영광은 동생 흥부처럼 부자가 되기 원해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행위와 같이 야비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영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영광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질적인 영광과 고난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왜 영광과 고난은 이질적임에도 한 몸일수밖에 없는가?

 

영광과 고난의 그 신비로운 한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 중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은 군사박물관이다. 조지아의 Fort Benning에는 Infantry Museum(보병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의 입구에는 아주 멋진 조각이 세워져 있다. 한 군인이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전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각들을 보며 애국심을 키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면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군인을 떠올리기 보다 예수님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따라 나선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크리스천(Christians):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앙에 좀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들으면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저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영광과 고난의 관계를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라는 책의 독일어 원어는 <Nachfolge>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의 제자도를 한 마디로 일컬어 “Nachfolge”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어 ‘Nachfolge’는 영어로 ‘Succession’이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계승/승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Succession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the act or process of following and taking the place of someone or something else.

 

‘나를 따르라’는 말은 단순히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승계(succession)’의 의미를 지난다. ‘호가호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여우가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치 호랑이의 권세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남의 권세로 위세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아주 흔하게,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를 이 정도 선에서 이해하고 만다.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권세(이득, 또는 영광)를 누리려고 한다. 그런데, 본회퍼의 <Nachfolge>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나를 따르라”의 진정한 의미는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누리는 여우의 권세가 아니라, 호랑이의 권세를 계승하는 것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사람이다. 본회퍼는 ‘Nachfolge(나를 따르라)’가 어떤 삶인지를 직접 보여주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뒤에 숨어서 ‘주님, 저 나쁜 히틀러를 무찔러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것을 신앙의 육체성이라고 하는데, 구원은 가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행동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볼 줄 알아야지, 다른 방식으로 보면 그저 그의 행동을 또다른 폭력으로 보일 뿐이다.

 

“나를 따르라”는 승계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만다면,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영광은 모두 가짜가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처럼 고난당할 수밖에 없고, 또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것처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왕의 자리를 승계한 사람은 왕이 누리는 권세와 영광도 누리지만, 왕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난도 함께 겪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과 고난이 이절적인 것이지만 한 몸일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힘든 일, 어려운 일은 하기 싫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래. 이럴 수 없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호가호위의 여우처럼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succession. Nachfolge)한 사람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승계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생명을 기꺼이 예수님처럼 내어놓아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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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창과 방패의 존재론]

 

RO(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에 의하면, 존 스코투스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피조물도 존재한다는 주장. 이 주장에 의하여 피조물은 존재의 자율성을 얻는다. 즉, 피조물은 창조주에 기대지 않고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을 통하여 근대의 자율적 주체가 탄생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율적 주체(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무성(허무/nothingness)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무주의(nihilism)은 생명을 축소시키고 삶의 의미를 빼앗아 인간을 평면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계몽주의의 기획은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게서 발흥한 '존재의 일의성'을 밀어부쳐 인간 존재에게 신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간섭이나 신에 대한 의존 없이 '자율적으로' 삶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자율적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와 자율적 이성(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RO는 존재의 일의성에 근거한 근대(modernity)가 허무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판하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참여의 형이상학(participatory metaphysics)을 주장한다. 존재의 일의성과는 달리 참여의 존재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신에게 의존되어(suspended)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여(participation)'은 존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RO가 주장하는 참여의 존재론은 플라톤 철학으로의 귀환이다. 화이트헤드가 일찍이 말했듯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였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을 반대하고 극복하든지, 이 둘 중 하나의 작업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극렬하게 반대한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플라톤 철학이 서양 지성사, 또는 문화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표현했는데, 결국 니체가 하고 싶었던 작업은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의 대중화라고 생각되는 기독교를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서양철학의 존재론(ontology)를 보면서, '모순'이라는 말을 생성한 '창과 방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두 손에 들고 동시에 장사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서양철학사는 마치 그와 같이 보였다.

 

인간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 철학이 말하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인가.

 

니체는 인간이 가진 자율적 이성을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로 표현하며, 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또는 신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또는 신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말하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되었지만, 결국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존재론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존재론에 대한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다음 단추를 아무리 정교하게 끼워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RO가 귀환시키려 하는 플라톤 철학은 '참여의 존재론'을 통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신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의존성을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철학적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플라톤 철학이 주장했던 '존재의 동일성(모든 존재는 존재를 넘어서는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개념은 언제든지 폭력이나 억압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일의성과 참여의 존재론은 창과 방패 같은 싸움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살육을 저질렀는가. 그런 측면에서 신 없이, 인간들끼리 자율적인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기획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기획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들여다볼 때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다. 신을 배제한 자율적 이성, 자율적 주체가 만든 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과 배제가 발생하고 있고,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의 존재론에 바탕이 되는 플라톤 철학의 귀환과 평면적으로 생명을 축소시킨 근대의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적 귀환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해 나감에 있어, 근대 이전에 플라톤 철학과 그를 바탕으로 발전한 기독교 신학/체제가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식으로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공적 귀환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RO의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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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 존재의 언어 습득하기]

 

일상의 기능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읽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기능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는 그나마 읽기 어렵지 않으나, 시는 원래 기능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는 기능어로 읽힐 수 있다. 밥을 먹는 기능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존재어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는 말은 '밥을 먹는다'는 말보다 인간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내주고 보여준다.

 

'시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은 기능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어를 사용한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존재의 언어로 씌어진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언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기능어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의 일상은 온통 기능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적인 말을 하고, 기능적인 관계를 맺고, 기능적인 사랑을 나눌 뿐이다. 기능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허무에 이르게 되고, 의미없음에 이르게 된다. 그 허무와 의미없음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기능적인 일에 몰두하는가.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존재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와 같다. 낯설기만 한 존재의 언어, 시를 읽고 또 읽다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존재의 언어인 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존재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언어는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능어와 존재어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능어는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낯설지 않지만, 존재어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쉬면 안 된다. 존재는 늘 낯설다.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존재를 잃어버리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슬픈 이유는 우리가 너무도 자주 우리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어 만을 요구하는 이 세상, 기능어 만을 쓰도록 만들어 자기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하여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이 세상에 저항하려면,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존재의 언어인 시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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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나키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좀 더 급진적인 질문은 ‘국가는 필요한가?’이다. 근대(modernity)의 특징 중 하나는 ‘국가’의 실체가 또렷해지고, 국가가 모든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속 권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거스틴이 서로마제국의 몰락을 목격하며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나누고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사유한 이래로 국가는 지상의 도성을 대표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인간의 역사가 ‘근대’로 들어서기 전까지 인류의 역사는, 또는 기독교의 역사는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 간의 힘의 대결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의 도성’이 ‘하나님의 도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가 이제 공공영역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사태로부터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국가(세속적 힘)가 교회(영적인 힘)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 종교개혁 때부터였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간의 합의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년)에서 ‘Cuius regio, eius religio(whose realm, their religion, 각자 자신의 통치하는 영역에서 자신의 종교를 정한다/군주의 종교가 곧 그 지역의 종교이다)의 원칙에 따라 세속 권력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국가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교회(종교/가톨릭이냐, 아니면 개신교냐)를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교회의 권력은 계속 쇠퇴하였고, 국가의 권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급기야 ‘근대국가’가 들어서면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더 이상 국가 권력에 필적할 만한 권력을 지닌 집단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근대 국가는 압도적인 힘으로 ‘폭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 같은 경우는 국가를 전설적인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하기도 했고, 마키아벨리는 국가 권력의 무제약성을 논하기도 했다. 이제 국가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힘, 폭력이 된 듯하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은 국가를 긍정하며 국가가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이끄는 사유를 한다. 그러나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국가는 필요한가?’를 묻는 사람들은 국가를 부정하고, 국가는 없어져야 할 것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바로 이렇게 국가가 없는 세상을 사유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고, 그들의 생각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른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이다. 이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 당연히 배가 산으로 갈 위험이 있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국가의 필요성을 물었다.

 

아나키즘은 오래된 미래이다. 한국에 아나키즘이 서구로부터 수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지만, 동양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나키즘을 품고 있었다. 묵가나 도가 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사상가들은, 또는 일반 민중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질문했고,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국가’라는 것이 삶을 오히려 괴롭힐 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거부해 왔다. 물론, 국가를 거부하는 생각은 ‘불온한 생각’으로 여겨져 국가 권력으로부터 무수한 핍박을 받아왔지만 국가의 존재에 대한 거부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다.

 

서구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93년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저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보편적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에서부터 이다. 그 이후 ‘아나키즘, 또는 아나키스트’라는 용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삐에르 프루동(Pierre J. Proudhon)이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아나키스트 용어를 매우 긍정적인 용어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나키즘이 널리 사유되도록 기반을 놓았다. 아나키즘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꽃을 피웠는데, 그 중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은 프루동 이후에 등장한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이다. 바쿠닌은 <국가주의와 아나키>를 통해서,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와 <상호부조론>을 통해서 각자가 가진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펼쳤다. 또한 미국의 머레이 북친 (Murray Bookchin)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사회생태론’을 주창하며 아나키즘을 더욱 심화시켜 사유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일제의 침략과 맞물려 독립운동이 발생하면서 ‘아나키즘’이 꽃을 피웠는데, 일제감정기 당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신채호 선생이 있다. 그는 김원봉이 이끌던 아나키스트 단체 의열단의 부탁을 받고 1923년에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식민지의 처참한 현실을 알리며 거기에 맞서 어떠한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한다. (여담이지만, 초호화 캐스팅으로 성공을 거둔 영화 ‘암살’이 바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나키즘은 혼란한 한국의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하며 어떠한 나라를 세워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상가들이나 문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나키즘의 사상을 바탕으로 실제로 ‘이상촌’을 건설하려 했던 인물 중 김좌진 장군이 대표적이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서 벌어진 문학계의 ‘아나-볼 논쟁(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의 논쟁)’도 빼놓을 수 없는 아나키즘 논쟁이다.

 

‘국가 없는 삶은 가능할까?’ 현재 국가의 존재를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부모 없는 삶은 가능할까?’ 또는 기독교인이라면 ‘신 없는 삶은 가능할까?’처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엄청난 질문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사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국가’라는 개념은 생소한 개념이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반대이지만.) 구약성경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가서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을 때 사무엘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사무엘은 국가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폭력을 가져올 거라는 경고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열왕기상하의 이야기는 ‘국가’로 인하여 고통당하다 결국 멸망하고 마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그렇게 성경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국가(국가에서 확장된 제국)에 대한 거부이다. 국가에 대한 거부는 예수의 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리고 예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이 땅 위에서 ‘국가’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먹고 잘사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다음 세상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현세의 세상에서 ‘국가’ 없이, 국가의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죽은 후에나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생각하며 이 땅에서 고통만 당하고 그 고통의 근원에 저항하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실, 기독교는 생득적으로 ‘아나키즘’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생득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다.

 

잔인한 생존 경쟁으로 내몰리고,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서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나키즘이 전해주는 전복적인 생각들은 이 시대의 어려움을 넘어서는데 큰 지혜로 다가온다. 특별히 아나키즘이 말하는 ‘직접 행동의 습관’, 즉 ‘우리’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그들국가/권력자들, 자본가들)’로부터 되찾아오는 습관을 형성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또한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스스로 자급하는 사회구조를 통해 국가와 자본의 집중화가 망쳐 놓은 이 세상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급한대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국가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더 힘을 쏟도록 길을 제시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국가는 필요한가’라는 급진적 질문을 통해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는 생태적 지구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그노시스적 사유]

 

교부들의 신학을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는 마르키온의 그노시스적 사유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신정론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아직까지도 신정론 문제는 미궁이다. 이 문제를 납득할 만하게 대답한 신학자는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납득할 만하게 신정론 문제에 대답한 신학자는 마르키온 밖에 없다. 그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지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정론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고,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을 발전시키고 성경의 정경화를 꾀했던 마르키온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지만, 그 당시 마르키온은 '악의 문제'에 질문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신학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마르키온의 신학을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했다. 교부들에게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신약의 구원자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신학사상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이 말하고 싶은 일차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의 일치를 말함으로 마르키온 신학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위일체 신학이 신정론의 문제(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를 납득할 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우리는 '신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신정론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노시스(영지주의) 사유의 특징은 이 세상은 낮은 단계의 하나님(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악이 존재하는 세상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결국은 '파국'이다. 그 파국에서 구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자 하나님에 의해 기획된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는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이 악이 가득한 세상을 끝장낸다.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너무도 간단하게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만, 그러한 그노시스적 사유는 삼위일체 신학의 출현으로 인해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역사에서 절대악을 경험할 때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악이 판치는 세상은 메시아에 의해서 끝장나야 하고,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노시스적 사유가 가장 강하게 등장한 시대는 근대(Modernity)의 끝자락에 발생한 세계 1차대전 이후였다. (사실 근대의 끝자락에 1차 대전이 발발한 게 아니라, 1차 대전이 발발함으로 인해서 근대는 끝난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긍정하던 근대, 그래서 그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던 근대인들은 세계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 모든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다시 고개를 든 것이 그노시스적 사유였다.

 

그 당시 근대의 사상가들(철학자/신학자)은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신학 개념'을 만든 칼 슈미트를 비롯하여, 하르낙과 블로흐, 마틴 부버와 심지어 칼 바르트도 그노시스적 사유를 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시몬 베이유도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유는 그노시스적 사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사유였다.

 

칼 슈미트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안에 숨겨진 '내전'에 대하여 주목하는데,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창조주 아버지(성부)와 구원자 아들(성자) 간의 '내전상태(statiastion)'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마르키온이 일찍이 신정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설파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 간의 싸움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위와 같은 사유를 하는 까닭은 '정치신학'의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서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 악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정부'라고 말하는 것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다.

 

이러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려면, 그의 '카테콘(Katechon)' 이론을 비판한 야콥 타우베스와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지난한 과정임으로 생략한다. 대신,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발생한 근대의 '메시아 신학'을 다시 한 번 들여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1, 2차 대전 이후 우리는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진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유 자체가 그노시스적 사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파국'을 경험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그노시스적 사유 안에서 그들의 사상을 세워나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담이자만, 지금 사회적으로 한창 논의되고 있는 '젠더문제'도 그 밑바탕에는 그노시스적 사유가 깔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을 정하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정한다고 말해왔다.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남자이고, 여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여자였다. 그러나 그노시스적 사유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누스(nous/정신)'이다. 나의 누스가 나를 남자로 규정하면 내가 여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나는 남자인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노시스적 사유는 우리의 삶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듬으며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더 이상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면, 이 세상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기다려야 할 텐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구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어둡고, 구원은 묘연하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라는 신앙의 무대]

 

요즘은 개그맨들이 자신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공중파에서는 더이상 그들을 위한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성을 가지고 아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은 유튜브가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어 가고 있다. 개그를 표현하는 방식과 개그를 소비하는 방식이 변했다는 뜻이다.

 

개그맨들의 웃픈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오버랩 됐다. 예로부터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간은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점점 그 신앙의 '무대'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던 사람들마저 자리를 떠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약점으로 지목되어 온 것은 교회론의 부재였다. 모더니티에 기반을 둔 복음주의는 '너가 곧 성전'이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교회론을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것은 개인을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 교회를 개인에 의해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추락시키는 생각일 뿐이다.

 

'교회'라는 것이 참 신비스러운 게, 실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지워버리고 교회를 어떠한 '실체'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현재 우리가 '교회'를 떠올릴 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실체로서의 교회가 그렇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신성이다.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응집되면 교회라는 것이 발생한다. 거꾸로 말해,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사멸하면 교회는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지, 아니면 죽은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덧 '교회는 이런 것이야'라는 어떠한 실체에 사로잡혀 왔다.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교회라는 생각, 그래서 교회건물이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소위 성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활동(프로그램)들 등을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교회 현상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신성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개그맨들처럼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 교회를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 존재하는 '무대'에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기에는 그 무대와 정신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멋지고 아름답게 펼치기 원하는 신앙인은 그 정신성에 합당한 '무대'를 찾고 있거나,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례전 신학(sacramental theology)에 의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성을 펼쳐내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곳 하나, 그 어느 시간 하나 '성전'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이다. 즉,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교회'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쳐 보인다면, 그곳에 '교회'가 생길 것이고, 그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는, 기쁨의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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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메타 내러티브]

 

인간의 역사는 부단히 어딘가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이었다. 예수의 이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도 종교적 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이 있다. 그렇게 어디론가로부터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해방'되고 싶어하면서도 '해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들으면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게 한국인의 심리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자유를 갈망하되, 그 자유는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누리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어서 그런가? 자신만 자유롭고 남들은 자신의 자유 아래 속박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가?

 

해방을 말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겪은 어려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예수의 메시지는 해방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열광하면서도 결국 해방신학자들을 죽인 것은 남미인들이다. 해방을 말하면 죽는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인이요 잘 사는 것이라 말한다. 기독교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은 창조-타락-구원-종말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를 설명하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는 계속하여 공격을 받아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메타 내러티브가 인간들을 자유하게 하지 못하고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오히려 구속을 가져다 준다면 그 메타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원-종말'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방식은 매우 플라톤주의적이다. 오죽하면, 니체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의 대중화"라고 말하겠는가.

 

소위 복음주의적 메타 내러티브의 성경 해석을 보자. 우선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금을 받은 존재'이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에 따라 해석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형상'은 설계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는데 '설계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설계도(이데아)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설계도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데아'를 따라 창조된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럴까?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형상(이데아)대로 사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라고 한다.

 

그러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인간에게는 '이데아'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죄가 그것을 가로 막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시므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인간은 그분을 믿음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묻게 된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그 형상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되찾는 일은 현재의 이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저 천국에 가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완전한 구원, 완전한 형상의 회복이 있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된다.

 

메타 내러티브는 이렇게 인간의 인생을 방향 지어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인생을 구속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속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을 미리 규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데아)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로 인하여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구원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으며,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뒤,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천국을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존재를 속박하는 그 무엇이든지 거부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메타 내러티브' 자체를 거부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내러티브에 의해서 결정되고 목적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메타 내러티브에 의해서 그 내러티브와 동일하게 삶의 이야기를 복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만의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딜레마다. 메타 내러티브를 인정하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속박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를 부정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허무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허무에 처해질지언정 자유를 빼앗길 수는 없다는 결기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 여기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 눈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허무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메타 내러티브'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러한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재해석하는 일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그들과 함께 자유를 지켜내며 허무를 몰아내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계속하여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오래된 메타 내러티브를 고집하려 든다면, 기독교는 인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폐기처분 될 것이다. 죽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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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추운 겨울을 생각해 보죠. 그리고 집 한 채를 생각해 보고요. 칼바람이 부는 겨울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집 한 채. 그곳에 ''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라는 게 사방으로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습니다. 옛날 허름한 초가집이라서 그럴까요. 문풍지를 대서 겨우겨우 막아 놓은 구멍들이 막아도 막아도 소용없는 듯, 구멍은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추위를 막아보고자, 온 힘을 다해서 그 구멍을 막아봅니다. 그런데, 구멍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 구멍이 또 뚫려서, 새로 생긴 구멍을 막느라 정신이 없죠. 추운 겨울 밤을 이겨내고자 열심히 구멍을 막아 댑니다. 열심히 막다 보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이 올까요?

 

구멍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의 그림자들을 하나씩 지워 나갑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것이지요. 아무리 막아도 들어오는 칼바람처럼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스포츠를 하는 것도, 낚시를 하는 것도, 축구를 차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종교를 갖는 것도, 그리고 미쳐버리는 것도 모두 죽음에 맞선 행위들입니다.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를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죠. 우리가 마주한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모두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 사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끝은 '실패'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이지요.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죠.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실패가 끝이니까 실패를 받아들이며 절망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하여 물었던 수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묻고 있는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오롯이 존재하는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생산해 내고 있는 구멍들을 최선을 다해 메우는 것이 죽음의 허무를 이겨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춥다고 아우성입니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습니까?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 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버텨왔습니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입니다.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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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