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개 넘치는 기독교 인간론]

 

'기개(氣槪)'란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기개를 담고 있다. 정말 그렇다.

 

삼위일체론의 완성(?)에 발판을 놓았던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저서 <성육신에 관하여 On the Incarn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을 '신화(神化/,theosis)'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어 간다.

 

이러한 진술을 단순히 교리적 진술로만 보면 곤란하다. 그러면 '신화' 교리는 참 우스운 교리가 된다. 우습기 전에 이해가 되지 않는, 우리의 일상과는 참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교리는 존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이지 박제된 생각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의 인간론을 참으로 대담하게 진술한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라니, 감히 누가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하면 가히 웃음이 나오는 진술이다. '에이, 무슨 소리하는거야. 우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어! 장난 치지 마!'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오는 진술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인간론만큼 기개 넘치는 인간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화(theosis)에 대한 인간론을 펼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이 타락한 세상에, 이 비참한 세상에, 이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화만큼 정치적인 진술이 없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는 이러한 기개를 지닌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인간을 '개 돼지'로 보면서 피지배자들을 비웃으며 권세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의에 기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성육신의 교리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아무리 비참하고 불의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거나 기죽지 말아야 한다. 누가 감히 우리의 인간성을 훼손할 수 있으랴. 누가 감히 우리를 '개 돼지' 취급할 수 있으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처럼 되어가는 존재이다. 신적인 존재, 그 고귀한 존재의 품위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으랴.

 

신화(神化)적인 존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그 어떠한 행위도, 그 어떠한 정치세력도, 그 어떠한 불의도, 우리는 거부한다. 그리고 저항한다. 기개를 저버리면 지는 것이다.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품고,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기 위하여 무쏘의 뿔처럼 가자.

Posted by 장준식

[해석의 중요성]

 

텍스트가 중요한 것을 두말할 필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너무도 자주 간과한다. 이것은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두 손에 쥐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발생하는 가장 빈번한 실수이다.

 

텍스트를 제대로 독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전일수록 더 그렇다. 고전 중의 고전인 성경에 대한 독법은 정말 쉽지 않다. 해석은 텍스트 자체가 지닌 무게와 의미를 가늠해 보는 일 뿐 아니라 그 무게와 의미를 우리 시대에서 다시 재어 보는 일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어떻게 읽어냈으냐는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독법에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십중팔구 다음과 같이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세상 나 혼자 사는 거야! 즉, 이것을 인생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니 누군가를 의지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독법 아래서 인생은 원래 외로운 거라고 자위하면서 누구도 나를 도와줄 이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마음 먹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형편 없는 독법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인생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장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고정된 도(道)가 없으니 우리가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게 좋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 한다. 그들이 정해준 길,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기 보다, 자기 자신이 길을 개척해서 걸어가는 삶,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정신을 보여준다.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거야'와는 다른 결을 가진 말이라는 뜻이다. 인생은 외로운 게 아니라 자유로운 거다. 인생이 외로운 이유는 자유롭지 못해서이다.

 

이와 같이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그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법, 해석이 더 중요한 법이다. 해석의 잘못은 삶의 잘못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경 독법은 QT로 대표되는 수준에서 맴돌 뿐이다. QT 수준의 독법은 아전인수의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 읽기, 기복적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욕망의 표현 밖에는 안 된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경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형태,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성경을 잘 해석하기 위하여 수많은 학자들이 성경 해석에 달려들었고, 그 해석의 역사는 고스란히 기독교 역사로 남아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성경을 해석해온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해석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역사성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성경 해석의 역사, 즉 기독교 역사를 무시하고 그냥 성경으로 들어가 성경을 읽어내는 일은 복음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무모한 신앙인일 뿐이다. 이는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바다에 뛰어드는 일과 같다. 바닷물만 마시다 나올 수 있고,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일은 언제나 준비와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역사와 소통하며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입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시대 가장 무용한 무당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그냥 믿음으로 받으라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라고 말하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다. 은혜로운 말 같으나 사람들을 인간으로 만들지 못하고 짐승으로 만들고 노예로 만드는 것과 같다. 주체적이지 못한 것은 순종이 아니라 광신일 뿐이다.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역사와 진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소통하며 해석의 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입을 다물든지 해야 할 텐데, 입을 여는 일은 쉽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으니,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들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야말로 말씀의 공중부양 시대이다.

Posted by 장준식

[케노시스 - 겸손 - 그리스도의 마음]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려는 것입니다"(담론, 72쪽).

 

신영복은 <담론>에서 주역의 궤를 설명하며 겸손이 무엇인지를 위와 같이 말한다. 주역의 '지산겸괘'는 땅 속에 산이 있는 형상인데, 덕목 중 겸손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쾌이다. 그리하여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라 불린다.

 

기독교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로 시작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케노시스라고 부른다. 주역의 괘를 통해 표현하면, 예수의 케노시스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겸손과 같다. 그러므로 동양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적 사고로 예수는 '성인군자'로 불려왔다.

물론 기독교 일각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인군자'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 신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유교적 사고 틀 안에서 '성인군자'라는 표현은 신적인 경지에 이른 인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고의 칭호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케노시스의 마음, 즉 겸손의 마음이다. 그래서 겸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겸손은 관계성의 문제이다. 겸손은 그냥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구원은 결국 겸손의 열매였던 것이다.

 

케노시스, 겸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는 누구라도 구원을 창조할 수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라면 누구나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독점하지 않으신다.

 

우리 시대에 구원과 기쁨은 없고 폭력과 슬픔만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생각은 안 하고, 다시 말해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하여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려는 마음은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여 다른 존재를 자기 앞에 무릎 꿇리거나 줄세우려는 욕망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Posted by 장준식

[Don't Look Up, 돈 룩 업,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의 최후]

 

이 세상에는 진실을 말하는 자와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다.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말한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아서가 아니라, 대개 진실은 고통을 수반하는데, 진실을 말한 사람은 고통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며 7년 가뭄과 7년 풍년에 대하여 진실을 말한다. 요셉이 다가올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요셉이 7년 가뭄으로부터 그 자신만 살짝 비켜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고스란히 온몸으로 가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가뭄의 시기, 고통의 시기를 '함께' 경험하고 가로질러 간다.

 

최근 넷플릭스에 [Don't Look Up / 돈 룩 업]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천문학자와 그의 제자는 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중 거대한 혜성(comet)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 진실을 알리고자 정부와 언론사를 접촉하지만 그들은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혜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 이슈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 만을 채우려 할 뿐이다.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려는 자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간의 전쟁은 'Look Up' 운동과 'Don't Look Up'운동으로 번져, 진영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이성의 꽃이라고 불리는 과학에 대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이성과 과학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현실을 왜곡하는 이성, 현실을 왜곡하는 과학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탓에 현실을, 아니 진실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진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하나의 가치를 위해 도구화 되어버린 이 시대에, 진실이란 이익을 포장해 주는 포장지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이성과 과학이 '탐욕'이라는, '돈'이라는 가치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이성과 과학의 힘은 진실을 감쪽같이 속이는 거대한 악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치 흩어진 진실의 조각들이 진실의 힘으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 같았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지구가 진실을 외면한 대가로 멸망이라는 끝에 다다르는 여정은 감추어져 있는 추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진실의 현미경 같았다.

 

지구로 돌진하고 있는 혜성을, 그 현실을, 그 진실을 쳐다볼 필요 없다고 외치는 'Don't Look Up' 진영과 그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Look Up' 진영의 끝은 결국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전자의 사람들을 그들의 마지막 삶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과 후자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살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준비하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만찬, 그 밥 한 끼, 그 마지막 웃음, 그 마지막 터치, 그 마지막 눈길, 그 마지막 숨소리, 그 마지막 말.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는 인간의 삶을 종말로 몰아넣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위기, 즉 인간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고, 기후 위기, 즉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지금 겉과 안이 동시에 타 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 진실이 다가오는 혜성처럼 눈에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잘 보이지 않을 게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진실을 말하려는 자는 힘이 약하고,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는 힘이 강하다. 'Look Up'의 외침보다 'Don't Look Up'의 외침 소리가 더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더 큰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아의 방주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세상은 그대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실과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땅만 쳐다보며 눈 앞의 일만 생각하고 말 것인가. 우리의 삶은 이렇게 매 순간 진실을 앞에 두고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다. 이 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그러한 자기의 종교적 정체성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땅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간인가? 인간으로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만찬, 그 밥 한 끼, 그 마지막 웃음, 그 마지막 터치, 그 마지막 눈길, 그 마지막 숨소리, 그 마지막 말을 원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성찰적으로 허무에 대하여 말한다. 결국 지구는 혜성과 충돌하고 멸망하고 만다. 바로 그때 힘 있는 'Don't Look Up' 진영의 몇몇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멸망하는 지구를 탈출한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목숨을 구하고 우주를 떠돌다 22,740년 후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 착륙해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영화는 생존자들이 그곳에 있던 타조처럼 생긴 동물들에게 잡아 먹히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의 최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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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베토벤 위기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현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기는 19세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19세기는 '전환의 시대'였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현대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19세기를 연구해야 한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음악은 19세기에 드라마틱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베토벤이라는 인물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토벤은 19세기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위기'를 안겨주었다.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넘어서지 않으면 음악 자체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베토벤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 때문에 브람스는 마흔 살이 넘도록 교향곡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베토벤 위기는 어김없이 슈베르트에게도 닥쳤다.

 

베토벤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을 당시 슈베르트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베토벤은 우리의 독일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고 그의 음악은 비극성과 희극성,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 장렬함과 비통함, 신성함과 익살이 결합된 기괴한 것이다."(프란츠 슈베르트, 68쪽)

 

19세기의 쟁쟁한 음악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아가는 것도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데 큰 즐거움을 준다. 대개는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또는 베토벤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발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해결 방식은 꽤나 매력적이다. 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그렇게 근본적인 탐구 후에 탄생한 교향곡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브람스가 베토벤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다른 말로해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은 베토벤 교향곡의 철저한 영향 아래에 있다.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 클래식 평론가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마치 베토벤이 지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내 느낌이다.) 그러나 브람스 교향곡 2번부터는 브람스의 숨결만 느껴진다. 더이상 그곳에 베토벤의 숨결은 없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는 전혀 베토벤의 숨결이 없다. 매우 독창적이다. 낭만주의 음악 답게 선율도 너무 곱고 아름답다. 호른과 바이올린의 음향이 일품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곡 자체의 아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악장 밖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네 개의 악장을 모두 완성했다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메시아적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음악가 최초로 '작곡으로만 먹고 사는 시대'를 연 사람이다. 그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국가에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슈베르트는 괴테의 시에 곡을 붙여 독일어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가곡'의 대명사이다. 가곡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지만 기악곡에서는 베토벤이라는 거성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과제를 풀기 위해 이 '전업 작곡가'가 시행한 일은 많은 영감을 준다. 위기를 주고 있는 바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 그것이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위기 속에 던져지게 되었을까. 이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위기는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19세기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19세기에 대한 깊은 탐구가 많이 필요하다. 그 탐구의 첫걸음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는 일을 하는 것을 어떨지. 슈베르트 교향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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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악]

 

평등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의 3대 가치 중 하나인 평등(egality)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법 앞에서의 평등은 무엇일까? 법은 가치 중립적일까? 법 자체가 평등하지 못하면 법 앞 에서의 평등이라는 평등(egality)는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Venom>을 봤다. 형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외계 생명체 Venom과 한 몸을 쓰는 주인공은 악의 무리와 맞선다. 아이들은 이 영화가 재밌다는데, 솔직히 나는 무엇이 재밌는지 모르겠다. 정신 사납기만 했다. 나는 마동석 나오는 이터널스가 더 재밌다고 생각해서 물어봤는데, 아이들은 이터널스보다 Venom이 재밌다 한다.

 

Venom에서 악당은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악당은 주인공의 방문 중 그와 다투다 우연히 Venom의 성분을 맛보게 되고, 그 안에서 Venom은 악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갇혀 있던 자신의 연인을 구하여 둘은 큰 힘을 발휘하며 세상을 휘저어 놓는다.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으로 구성된 악의 세력. 둘은 사랑의 키스를 나누고,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평등과 악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평등이란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특징이 있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언제나 백인이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백인이다. 그리고 흑인이나 동양인들은 모두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의 조력자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을 망치는 악한 인물 또한 백인이다. 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늘 백인이 주인공이다. 또는 백인을 닮은 외계인이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백인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악을 저지르는 악당은 늘 백인이라는 것이다.

 

착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일은 힘 있는 자만 저지를 수 있다. 역사에서 백인은 늘 힘 있는 자였다. 역사에서 백인이 저지른 악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에서 여자 흑인 악당이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평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마음 불편해한다. 우리는 은연 중에 마이너리티는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평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차별이고,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평등'하지 않은 지 알 수 있다.

 

백인이 저지르는 악한 일은 참아내면서, 왜 흑인이나 아시아인 또는 장애인, 아니면 성적 소수자가 저지르는 악한 일은 왜 참아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백인들의 스토리텔링 안에서 왜곡된 평등의 개념을 내면화시킨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히어로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악당이 누구인가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백인이 히어로로 등장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재미없다는 심리적 불만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악당은 늘 백인인데, 악한 일은 마치 백인만 저지를 수 있는 권리인 것처럼, 악에 대한 평등의식 자체가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된 평등은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백인 또는 힘 있는 자만 악한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

오징어 게임

ㅡ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켜 놓은 라디오(KQED/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의 대표 시사 라디오 방송)에서 ‘오징어 게임(Squid Game)’ 열풍에 대한 대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라디오 진행자가 질문한다. “왜 한국의 드라마 컨텐츠가 이렇게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킬까요?” 대담의 패널 한 명이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한국 드라마 컨텐츠가 미국화(Americanized)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성공과 BTS의 선풍, 그리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연이은 흥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오징어 게임. 우리 동네(서울시 서초구 우면동/개발 전 강남)에서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렇게 불렀으나 지역마다 게임에 해당하는 ‘가이상’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 같다. 아무튼 그 모든 명칭을 통일해서 정리한 것이 ‘게임’이니, ‘오징어 게임’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미국화(Americanized)의 흔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징어 가이상’이라 타이틀을 정했으면 아마도 세계적 열풍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오징어는 알겠는데, 가이상은 뭐야?’ 직관적 이해가 없으면 요즘 사람들은 흥미를 잃으니까.

 

오징어 게임에는 여러 가지의 서사가 얽혀 있다. 우선 전면적으로 내세운 서사는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서사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체제를 고스란히, 눈으로 보듯, 아주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오징어 게임 장에 들어온 참가자들 중 그 누구도 강제로 그곳에 참가한 사람은 없다. 모두 자발적 의지를 통해서 들어왔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데,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착취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성과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 자신만이 질 수 있다. 게임에서 진 참가자가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서사는 리트로(retro/추억)서사이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은 한국의 7,80년대에 유행하던 게임들이다. 오징어 게임 자체가 그렇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줄다리기가 그렇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잔인한 게임 룰에서 등장하는 ‘깐부’라는 용어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정말 좋은 장치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술래를 맡은 거대한 인형은 옛날 교과서에 철수와 함께 등장했던 영희이다. 리트로, 즉 지난 날을 추억하는 서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 일으켜 따스한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도 ‘시간’이라는 매직을 거치면 그리운 향수를 불러오는 법이다. 리트로 서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 서사는 현대성(또는 근대성/modernity)이다. 천재 시인 이상이 쓴 <날개>에는 현대인(modern people)의 지루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현대성의 대표적 발명품인 백화점에서 “날자, 한 번 날아보자꾸나”를 외치는 것이다. 현대(또는 근대/modernity)라는 말 자체가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현대인은 새로움을 갈망한다. 현대인은 ‘신상품’을 갈망한다. 금방 싫증을 느낀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되고,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이 온갖 탐욕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기획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다. 그들은 삶의 지루함을 ‘새로움’을 통해서 달래고자 하는데, 그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 냈다.

 

오징어 게임을 직관적으로 보면 분명 그것은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고통 당하는 자신들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를 가진 오징어 게임을 본다.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 게임 자체가 자본주의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심화된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하도록 내버려 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체제를 더욱더 공고히 한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권위 있는 영화제나 예술대상에서 상을 받는 작품들은 대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Parasite>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라는 것이 원래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선전물로 생겨난 것이기에, 대중매체는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결국 자본주의에 이용당하고 말 뿐이다.

 

우리는 오징어 게임의 돌풍 이후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넷플릭스 CEO가 오징어 게임의 돌풍을 축하하며 본인이 직접 467번째 참가자의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고, 오징어 게임 체험관을 만들어 드라마를 홍보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게임들은 다시 선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특별히 달고나 세트는 없어서 못 팔릴 정도이다. 오징어 게임 컨셉은 돌풍을 타고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파고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감각적으로 보는 바, 자본주의(신자유주의)는 무지막지하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에는 ‘야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람을 잡어 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서사에 열광한다. 이쯤 되면 이것은 종교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 시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종교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통제하고 착취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래서 종교적이다.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하다. 눈에 보이는 상(부/정규직/안정적 고용)과 벌(가난/비정규직/불안정적 고용)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지옥(불평등)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발버둥 치게 하는 것, 그 불안의 조장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악이 따로 없다. 우리는 지금 악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현대/근대(modernity)의 산물인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분명히 간파했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오징어 게임에서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에 열광한다. 지금 전세계에서 부는 오징어 게임 열풍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원망을 퍼붓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열광하게 만들어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마법과 같은 능력이다. 우리는 모두 이 마법에 걸려 산다.

 

현대(modernity)는 사랑의 개념도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락시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인 능력을 축소시키고 빼앗아 갔지만,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그러한 사사로운 감정 놀이가 아니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인간성을 훼손하고 생명을 빼앗는 그 어떤 악한 세력들에게라도 저항하게 하여 그들의 악마적 게임 법칙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전복적인 힘이다.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악을 이기고 전복시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은 오징어 게임 같은 자본주의적 서사가 아니라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우리를 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에 있다.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 세상이 정해 놓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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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것이냐, 저것이냐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삶의 방식을 돌이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에 빠지게 되는데, 불안한 존재는 자기 존재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사이비 신앙을 갖기 십상이다.

 

사이비 신앙을 갈구하는 소비자와 사이비 신앙을 공급하는 업자가 만나면, 거기에는 진리가 상실되고 수치를 모르는 탐욕만이 유통될 뿐이다.

 

이런 일은 대개 부자나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서 일어나기 쉽다. 물론 평범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들은 당대 종교 중 가장 보편적이고 힘이 있고 공신력 있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그들은 사이비 신앙으로부터 위로와 보호를 받으며 그 대가로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나누어 준다.

 

이제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삼위일체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부, 권력, 도덕적 정당성은 아무도 못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대단한 힘을 갖는다.

 

그렇게 형성된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의 세상은 난공불락이다. 그것을 무너뜨릴 힘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 일이 그리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이 못 박아 죽인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으며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사이비 신앙의 소비자도 공급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삶을 돌이켜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자기의 삶 안에 구현하면서 살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시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고, 새로운 윤리적 세상을 꿈꾸며 세워 나갈 것이고, 그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다짐한다. 사이비 신앙을 유통시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불안을 감춰줄 사이비 신앙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 답게 살든지, 아니면 자기의 욕심에 따라 영원히 죽든지,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

 

크리스틴 헬머는 자신의 저서 <교리의 종말> 1장에서 북미에서의 신학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교단 신학교는 전례 없는 재정 압박을 겪으며, 교회를 섬길 다음 세대 종교 지도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킬지 고심하고 있다. 전임 사역자라는 전통적인 모델은 갈수록 불가능해 보인다. 이로 인해 급격히 변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일하며 살 목사를 교육하는 창조적이지만 또한 벅찬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게 된다. 신학교 건물과 떨어져서 열리는 온라인 과정, 집중 강좌, 주말반이 미래의 추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미래는 언제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들로 흐르리라고 보는 확신에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정당하지만 말이다). 성직자들이 사역으로 얻은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때를 예견하며, 전문적인 훈련과 대안적인 직업 준비 모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교육 모델이 개발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문제는 아니지만 ㅡ 사례비를 두고 교구회(vestry)와 계속 싸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투쟁만 생각해 보더라도 ㅡ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영구적 위기의 맥락에서는 특별히 절실한 문제이다"(29-30쪽).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심화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삶을 위기로 몰고갔다. 1997년 한국이 겪은 외환위기(IMF 사태) 이후 한국의 경제체제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바뀐 뒤, 한국사회는 '헬조선'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삶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종교 분야도 예외일 수 없다.

 

경제적 불평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기후위기, 그리고 영적 빈곤 상태 등 현재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당연히, 현재 교회 내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 문제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인간의 삶(공동체)을 무너뜨렸는지를 알려면,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를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만약 이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거나 이러한 목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단이나 교회, 또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와 소통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 환경도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따라 부익부빈익빈, 즉 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반영되고 있다. 대형교회는 계속 부흥할 것이고, 나머지 교회는 점점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는 마치 대형백화점이나 대형마트만 살아남고 동네상점들이 문을 닫는 것과 같다. 아마존 공룡 때문에 지역상권이 죽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인데, 무엇보다 지역상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지역의 특수한 문화가 파괴된다는 뜻이고, 그만큼 생명의 다양성이 축소된다는 뜻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한 대형교회가 획일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상품이 아니다. 신앙은 생명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성을 띌 수밖에 없고,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합창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이 획일화될 때, 그것은 정치가 획일화 되어 전체주의를 낳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신앙 생태계는 다양하고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이 끊임없이 재탄생하며 세대와 세대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는 다양한 지역과 현장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맞선 목회적 전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목회 형태이다. 위에서 크리스틴 헬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을 위해서 "전문적인 훈련과 대안적인 직업 준비 모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교육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현재의 신학생, 또는 목회자가 다른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거나 또는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을 넘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전자가 우세하다. 현재 신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이나 또는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경제적인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카페를 운영하거나 여타 다른 스몰비즈니스를 겸하여 하는 형태의 목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발전하면, 완전히 다른 개념의 목회가 형성될 것인데, 신학교를 간 사람들이 신학 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어 스몰 비즈니스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이 후에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내가 공부한 에모리대학교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내가 그곳에서 공부한 2000년대 초반부터, 전문대학원들(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비즈니스스쿨, 신학전문대학원)끼리 교차 지원과 학점공유를 실행했다. 일례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이 신학전문대학원(Candler School of Theology)의 과목을 들으며 일정과목을 이수하면,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장과 신학전문대학원 졸업장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신학교가 이제 '신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자신들만의 영역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서 '신학 또는 교회'는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전통적인 '전임사역자(담임목사)' 모델로는 목회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자립교회'는 아직 '자립교회'가 되지 못했고, 언젠가는 '자립교회'가 될 거라는 소망 안에서 그들을 '비전교회'라고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립교회'와 '미자립교회'의 구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종교 자체가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감행해야 한다. 이 구조조정은 커리큘럼의 변화를 넘어서 신학생을 키워내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신학교는 신학교 담을 넘어 일반대학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신학생을 일반대학교에 보내 교육 받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일반대학교 학생들을 적극 유치해 신학교육을 받아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 바탕 위에 목회를 구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신학교는 더욱더 대학원 중심의 교육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감리교회는 그런 면에서 다른 교단에 비해 뒤처져 있다. 감리교회는 아직까지 대학원 중심의 신학교육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중심의 신학교육을 펼쳐 가되, 다른 일반대학교의 전문대학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그들과 학사교류, 학점교류 등의 공유를 통해서 신학생이 다른 학문을 공부하여 경제적인 문제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넘어 다른 학문을 하는 학생들이 신학교육을 받게 함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기반 위에 목회를 구상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는 전통적 목회에 대한 일탈이 전혀 아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신학교나 교회 또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이중직 또는 사회적 목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듬고 해결하려고 하는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목회적 전략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서도 아직도 복음의 능력을 믿으며 그 복음으로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부름 받아 나선 이들'의 목회가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를 통해 활짝 피어나길 기대한다.

Posted by 장준식

[공정이라 쓰고 경쟁이라 읽는다]

 

경쟁 -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설법.

공정 - '나는 너를 미워해'의 간접화법.

 

공정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을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정당화한다. 아주 부드럽게. 설득력 있게. 합리적으로. 경쟁, 또는 공정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숭고한 삶을 짓밟는 행위에 불과하다. 경쟁은 잔인하지만, 공정은 교묘하다. 그러나 마찬가지 결과다. 경쟁과 공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결말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를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 이것만큼 불경한 죄가 어디에 있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경쟁, 또는 공정은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갈 뿐이다. 임계점에 이르면, 경쟁과 공정의 논리는 생명을 찌르는 칼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또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아야 할 인간 존재가 경쟁과 공정 속에서 모든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존재를 무겁게 만든다. 무거운 존재는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모든 술수들은 단호히 구분하고 구별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쟁과 공정의 논리이다. 가벼운 존재는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고 착취하고 자신의 무모하고 잔악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법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적'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죽음'의 그림자가 길고 짙고 깊게 드리운 이유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내면을 지배하는 경쟁과 공정의 논리 때문이다. 경쟁은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설법이고, 공정은 '나는 너를 미워해'의 간접화법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경쟁의 논리에서 공정의 논리로 그 이슈가 바뀌었지만, 공정을 '공정하다' 즉 'just'하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배자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것에 불과하다. 경쟁의 논리를 감춘 것이 공정의 논리다. '나는 너를 미워해'를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저항하고 적대적으로 나오니까, '나는 너를 싫어해'를 간접화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상처를 덜 받으니까. 자신이 나이스해 보이니까.

 

그러나, 그러한 화법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는 공정을 통해서 '나는 너를 미워해'의 관계를 내면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보다 '나는 너를 미워해'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고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더 많은 욕심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공정의 덫에 빠져 있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한국 보수당의 새로운 젊은 총수가 '공정'이라는 가치를 들고 나왔다는 말은 사회가 '공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공정의 덫'이 더 강력해졌다는 뜻일 뿐이다. 공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덫'이라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고, 그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접화법인 경쟁과 그것의 간접화법인 공정의 말에 귀를 닫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여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직접 보여주신 '나는 너를 사랑해'의 새로운 말과 세상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이 더 많은 세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먼저 '공정의 덫'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할 것!

Posted by 장준식

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를 다시 읽다

ㅡ 신학은 종말론적 지성이다.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그때까지 인간을 잠정적인 존재로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적인 작업은 가설이며 언제나 상대화될 수밖에 없음을 신학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역사도, 현실도 끝나지 않은 이때, 죄인인, 불완전한 인간은 진리의 일부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적 지성'이며 달리 말하면 '종말론적 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194쪽)

 

3년 여 전, 일본학자가 쓴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의 학문도 성장한 바, 다시 읽어본 이 책은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다.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묻는 책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 신학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기독교의 사회사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실전에서 목회하는 이들에게는 제7장 '실용주의로서의 신학'이 매우 도움될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기독교 신학이 청교도 DNA에 따라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실용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쓸모'에 방점을 두는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 안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실제적' 도움이 될지, 상당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러나 '미국적 기독교'가 가져다준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은 미국적 기독교를 마냥 환영하고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 또한 떠맡게 된다. "즉 시장화된 신학계에서 그 신학의 좋음과 나쁨,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교파의 지도자, 대학교의 신학자들,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비자들, '대중(교인/나의 첨가)'이다."(174쪽). 이 말은, 곧 시장화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장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적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성공은 '시장화된 교회'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다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의 성공 신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먹히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자본가적 스펙/교회 운영을 잘 할 것 같은 스펙)을 쌓으면 시장화된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청빙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 원리를 아는 목회자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을 쌓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고, 목회 성공의 기회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스펙 쌓기 때문에, 그렇게 스펙을 쌓은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바람에 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교회와 목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시장의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할 것인가. 목회란 시장의 개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하는 것인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시장이 보장해 주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시장의 권력은 강력하고, 우리는 벌거벗었고.

Posted by 장준식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

 

'주권-국민국가'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주권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국민을 이루고, 그 국민이 자신들의 주권을 국가에 (계약에 의해) 위탁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개념이 바로 근대에 생겨난 '국가'의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산다. 그래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세금도 내고 징집도 되고 열심히 일한다. 현대 정치철학은 국가에 대한 그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출현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들의 비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주권-국민국가'의 신념을 산산이 부서뜨린다. 대신, 국가를 '주권-국민'에서 분리시킨다. 이것은 더 이상 국가 주권을 가진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국가는 시장과 대립관계에 있으며, 국가는 시장에 대하여 간섭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더이상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는 기구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는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 잔인한 경쟁 원리를 내장한 시장 질서를 국민들에게 관철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 즉 무한경쟁 원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주권-국민'을 통제하며 법을 무기 삼아 시장원리에 국민들이 지배되도록 강제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주권-국민'은 국가의 변절로 인하여 당황스럽고 황당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질서에 의하여 자신이 시장의 하위 주체로 전락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국가는 각종 복지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현대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백신 접종 문제를 통해서 이것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접종을 권고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즉 복지혜택으로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이유는 시장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이다. 즉 자본가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노동자가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추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국가의 임무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주권-국민'을 자본이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시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팬데믹 상황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의 유연화에 불가피한 타격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은 '주권-국민'을 다시 자본이 원하는대로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백신 개발을 위한 국가의 저돌적인 투자, 그리고 개발된 백신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투여시키는 정책은 '주권-국민'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즉 시장을 위한 충성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국가의 통치술을 '벌거벗은 생명'의 통치(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주권-국민'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를 위하여 국민들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가 행한 백신개발과 백신공급을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그것은 가장 큰 착각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더이상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국민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배신에 저항하려고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벌거벗겨져 있으며, 백신을 맞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이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구원하리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인간의 위약함(weakness)]

 

인간의 위약함이란 인간 이하로, 즉 존재의 무의미로 추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의 이러한 위약함을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규정해 주는 신학 용어가 바로 '죄(sin)'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위약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나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조에ζωή'라는 신학적 개념은 인간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제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존재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은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인류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체계나 과학기술의 발전도 모두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지배 통치술로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로 그것에 자신의 생명을 맡겨버림으로 인하여 그것에 의해 자유를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조에'라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배 통치술에 대한 반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조에'를 주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약함, 즉 존재의 무의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의 영 이외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에(하나님의 생명)'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하기 보다, 다른 것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한다. 가령, 건강, 경제적 풍요, 세련된 정치체계 등,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으며, 우리는 점점 더 '조에'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 끝간 데 없는 불안,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원래 유약한 것인데, 그 유약한 존재의 구원을 구원하지 못할 것들(우상)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불안은 이유모를 불안이 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정치신학]

 

정치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류 역사가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치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낸 행위를 뒤집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밀려 공공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종교'는 더 이상 공공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힘들어졌다.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더이상 종교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더 이상 종교의 지혜를 듣지 않게 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특별히 허무주의의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는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파국' 앞에서 다시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의 지혜를 발현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졌다.

 

정치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두 왕국 이론'은 이 세상에 마치 두 왕국(교회와 정부)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두 영역 간의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유되어 왔으나, 그것은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참한 오해이다. 이러한 조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적대적으로 싸우고 있다.

 

정치신학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어떻게 견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정치 비전이다. '주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긍정이며,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다.

 

정치신학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저주나 멸망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랑의 보듬음이다. 공공영역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복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끔 공공영역을 이끄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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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